2007년 11월 5일 월요일

기고_지역과 예술활동

기고_지역과 예술활동

#1. 평택 대추리에서 이뤄진 현장예술 활동


최윤정 ● 미학, 미술프로젝트

현재 나는 지난 몇 년 간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로 발표되었던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벌어진 현장 예술에 대한 기록들을 점검하고 이를 자료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평택은 안성에서 그리 멀지 않다. 안성에서 출발하여 평택 대추리까지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 그러나 이 익숙한 사실은 실상 나에게는 대단히 낯선 느낌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평상시 나는 그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시골 동네에서 어느 순간 투쟁의 격전지이자, 대한민국의 섬이 되어버린 동네... 그저 평화롭게만 조용히만 살아오던 순박한 농부들이 외부적 압력에 의해 그야말로 투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 현장이 내 고향 근처, 것도 바로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이슈에 대해 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세상이 이 동네에 주목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적으로 한반도의 상황을 비유하는 미군기지 확장과 인권탄압, 그곳은 현대사에 기록되어야 할 투쟁과 반목의 현장으로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 동네가 주목받는 중요한 요소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술인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으며, 예술의 사회적 참여와 치유적 역할에 대한 담론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산실이 되어 왔다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특히 평화를 위한 이 모든 싸움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 활동이었다. 이는 가수 정태춘에 의해 힘입은 바가 컸다. 그곳은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자, 그의 서정을 키워 온 공간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하여,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과 류연복 외 미술작가들이 모여 지속적으로 ‘들이 운다’ 문화제를 개최하고, 작품 활동을 진행하면서 이 ‘섬’은 외부로 알려질 수 있는 든든한 길을 얻게 되었다. 당시 언론보도는 마치 80년대 무고한 시민이 ‘간첩’으로 둔갑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론 및 진보 단체 언론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옳은, 정당한 보도를 내지 않았다. 활발한 현장예술 활동을 통해서 외부로의 끈을 잡고자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곳에서 이루어진 예술활동은 주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무려 3년 여 간의 대추초등학교 촛불시위 자리에는 늘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또한 곧 폐허가 될지도 모르는 동네는 언제서부턴가 벽시와 벽화들로 채워져 화려하고 아름다운, 희망의 염원을 담은 색채들을 두르게 되었다. 또한 각종 설치 미술 작품들은 마을 곳곳에서 주민들에게 무언의 희망을 보내주었다. 여기서 미술은 80년대 도구화된 사례들처럼 주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다가간 것이 아니었으며,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에게 그 힘든 순간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야말로 그들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투쟁의 현장, 그 와중에 ‘평화예술동산’도 조성되었다. 그곳에 설치된 작품들 몇몇은 지역 문화재로 지정받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공권력의 예술 활동에 대한 몰이해와 몰상식한 파괴행위들로 인해 무참히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외부에 대추리 도두리의 참상을 더욱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현장예술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문화예술계는 한 목소리로 이를 규탄하고 각종 토론회를 통해서 현장예술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논의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지역의 예술활동에 대한 중요성과 그에 대한 이해를 일반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굳이 안성이나 평택에 살지 않더라도 수많은 예술인들은 현대 사회의 모순적 장면을 밝혀줄 그 ‘문맥’을 쫓아 대추리로 속속 모여들었으며, 개인의 작업으로 공동의 작업으로 대추리는 어느 순간 예술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자기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대추리 주민의 대부분은 카톨릭 신자였고 그들의 아픈 삶에서 문정현 신부(평화유랑단 ‘평화바람’ 단장)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늘 그들의 곁을 지켜왔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추리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던 작가들은 안성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은 안성의 여느 시골풍경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들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삶들이 외부로 노출되기 전까지 그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이에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두에 밝힌 나의 ‘묘한 심리적 거리감의 근거’는 바로 이에 준한다.

2007년 8월 4일 토요일


'복음과 상황' 문화섹션 기고글


초국적 ‘블록버스터’展 _한국의 미술계 현안 속에서 바라보다

최윤정(미학_미술비평_문화기획집단 ‘오다’ 시각예술분과 책임연구원)
대가의 향취는 여하간 좋다.
많은 이들이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그 관심을 부여하는 동기가 되어주는 첫 경험은 서양 대가들의 회화작품을 마주하는 경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한정된 평면 속에서 어우러지는 미묘한 색채들의 연회, 화면의 구성은 감상자들로 하여금 산악의 능선을 향유하듯 숙연한 감정까지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가들의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삶은 세인의 로맨티시즘을 자극하기도 한다.
최근 외국의 유수 미술관을 방문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러한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많은 대가들의 작품이 일정한 기획으로 구성되어 국내 미술관 곳곳에 전시되는 사례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먹고 사는 데에만 급급했던 시기를 넘어 문화와 여가를 향유하는 것이 삶의 한 지표가 된 사회적 분위기를 일정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그것이 현대인들의 건조한 일상을 촉촉이 적실 수만 있다면 혹은 이로써 예술에 대해 보다 많은 이들이 연정을 품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비록 동시대는 아닐지언정, 과거를 담은 그 화려한 색채들 속에서 느껴볼 수 있을 숭고함과 애틋함이란 결코 전시장 안에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언해보면서...
근대적 감성, 현대 속에서 ‘블록버스터’로 살아남다
최근 한국 미술계의 주요 화두는 바로 ‘블록버스터 전시’이다. 블록버스터라 하면 자연히 막대한 자본과 스타를 내세운 미국 헐리우드 영화를 떠올리게 되는 법인데, 미술 전시에 '블록버스터'가 수식어로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빛의 화가 모네전’, 덕수궁 미술관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전’, 그리고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전’ 등은 2000년대 들면서부터 국내에서 진행되어 온 대형전시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들로서 이들이 부담해야 할 작품의 보험료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이다. 이러한 비용들을 모두 감수하고 들여와야 한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 전시는 분명 위험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미술사 속에서 명망 있는 예술가의 작품들을 들여온다는 점을 홍보에 충분히 활용하여 나름 만족스런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와 같은 전시는 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만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이며, 그렇기에 지속적으로 호응이 늘어나는 추세는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요소에서 우리는 보다 대중성을 향해가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갖는 유의미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갈수록 급증하는 이 같은 전시들에 대한 관심이 지금 현재 동시대적 문맥 속에서 펼쳐지는 국내 작품과 전시에 대한 관심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오히려 이로 인해 국내 미술계 발전에 있어 저해가 된다는 우려도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우리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국내 미술계에 끼친 혹은 끼칠 공과에 대해 살피지 아니할 수 없다.

‘장’의 문제_ 미술관이 지니는 공공성의 의미와 큐레이터의 역할
작품의 규모와 대가들의 작품에 적합한 실내 환경을 고려했을 때, 이 같은 전시는 시설이 잘 갖추어진 미술관을 요구한다. 이는 주로 국공립 미술관이나 이에 못잖은 몇몇 사립미술관 등이다. 이 장소들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면, 본래 미술관은 공공의 예술향유와 문화적 교양을 교육하는 산실로서 자리한다. 즉 그 기본 토대에는 늘 ‘공공성’이라는 테제가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임무에 있어서 미술관은 작가를 등용하는 산실로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고 이를 보존 혹은 전시를 함으로써 이에 대한 미술사적 의의를 구축해내야 한다. 우리가 큐레이터를 미술관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같은 미술관의 임무를 주체적으로 수행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보자. 실제 ‘블록버스터’전시는 적당히 포장되고 위엄이 있어 보이는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 이뤄지지만, 그 속에서 미술관 큐레이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보통 관련 기획사 측에서 이미 하나의 전시형태로 갖춰진 외국의 대형전시를 수입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술관이 담당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장소 대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블록버스터’ 전시는 이를 수입한 자만 있을 뿐, 정확히 말해서 이를 발군의 큐레이터쉽으로 기획한 자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국내에서 모범적 사례가 될 만한 전시를 기획하고 이를 해외에 소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약한다는 것은 점점 더 요원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많은 지적들에서 살필 수 있듯이 ‘블록버스터’ 전시가 과연 질적으로 높은가에 대해 명확히 발언할 필요를 느낀다. 몇 년 전 서양미술 몇 백년의 역사를 훑는다는 한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큐비즘을 소개하는 구간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를 시각적으로 여실히 비춰줄 만한 모범이 전무했던, 그야말로 해프닝이 아닐 수 없었다. 큐비즘의 대가인 피카소가 와 있는데, 어찌하여 큐비즘을 상기시키는 작품은 달랑 한 가지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그가 무명시절 그린 몇 점의 습작 스케치가 전부였을 뿐이었다. 미술사적 맥락이 전시의 가장 중요한 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 텍스트와 작품은 따로 노는 사태를 빚은 것이다. 그 속에 과연 큐레이터쉽이란 것이 있었는가 말이다.
계속해서 미술관이 이러한 ‘블록버스터’ 대관업무에 치중하게 된다면, 국내 작가들이 전시할 공간은 그만큼 줄 수밖에 없고,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당연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과 상업화랑의 역할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에 종사하는 전문직종의 명칭이 모두 ‘큐레이터’로 뭉뚱그려 언급되는 것은 늘 이상하다. 전문성을 담아내는 그 명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이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미술관이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확고히 해내지 못한 탓도 크리라고 본다. 그 나름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여기에는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 유치에만 급급해 보이는 미술관에 대한 일종의 애석한 심정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최근 국내 국공립미술관들은 재정적으로 독립할 것을 재촉당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점차 법인화로 그 형태가 전환되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그 같은 방향으로 변모해가는 것은 물론 장점도 분명 있겠지만, ‘돈이 되는 전시’에 편승하지 않았던 미술관들조차도 ‘블록버스터’ 위주로 프로그램을 재편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미술관의 현실을 꼬집고 비판하는 장소로서 ‘대안공간’의 필요성이 더욱 배가되거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피어린 노력들로 인해 새로운 대안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본다. 뭐든 어려운 현실에서 이를 악물던 때를 무/책/임/하/게 곱씹어 보자면 말이다.■ cHOiyoONC

2007년 7월 25일 수요일

월간미술 기고문

'아트북' 섹션

[미학], 김진엽 하선규 엮음, 책세상


길을 지나다 보면 ‘xx에스테틱’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는 언제서부턴가 피부과나 성형외과 혹은 미용 관련 상호를 대표하는 전형이 되었다. ‘에스테틱(aesthetic)’, ‘미적인’이나 ‘심미적인’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로 인해 얻게 되는 무수한 오해들, 아마도 미학전공자들의 대부분은 ‘미학’이라는 학명에 대해 한번쯤은 의구심을 품어봤을 것이라 예상한다. 말하자면 ‘미술사학’처럼 전공 교과가 확연히 그 이름 속에서 드러나는 학명과는 달리, ‘미학’은 상당히 모호하고 어떤 환상까지도 조장할 수 있는 미묘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를 반영하는 종류의 질문을 받기도 하여 이로 인해 당혹스러울 때도 생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진정 곤혹스러운 경험이라 한다면 ‘미학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이 질문에 대해 오해의 소지 없이 제대로 된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순간 잔뜩 긴장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 일상 속에서 ‘미학’은 아주 빈번하게 어떤 개념이나 사건의 극적임을 강조하는 수식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같은 사용이 일반화된 이래로 어디든지 갖다 붙여도 꽤 폼나는 문구를 형성하는 탓에, 많은 이들이 이 학명을 다소 낭만적이고 신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미학을 일종의 취미로서 대하고자 하는 경우와 학문으로서 대하고자 할 때 그 사이의 괴리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미학은 독일어 'Ästhetik', 영어‘aesthetics'에 대한 우리 말 번역이다. 원래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인 aisthanesthai(지각하다)와 aisthētica(지각적인 대상)에 기초하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에 대비해 ‘감각적 지각, 감성의 영역’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 명명이 필요했던 때는 바로 18세기 낭만주의 무렵으로, 이 시기는 이성의 대립 쌍으로 여겨졌던 감성과 상상, 예술적인 영감들이 이성이 보증할 수 없는 주관성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학문적 연구과제로도 중요하게 다뤄지게 되고 이후 근대철학의 중심 교과로서 자리 잡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미학은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의 의미로서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래로 이는 ‘예술철학’, ‘미와 예술에 관한 이론’을 지칭하는 교과로 쓰여 왔다. 물론 그 기원을 살피는 것만으로 ‘미학’에 대한 물음을 해소할 수는 없다. 생각해보면 감성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넘어서야만 했던 데카르트적 이성은 다시금 그 수식어인 “명석하고 판명한”을 통해서 “명석하지만 혼연한”의 대구를 형성하고 이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이것만 놓고 보았을 때는 ‘미학’을 스스로 규정해보고 다가서기란 쉽지 않다. 물론 ‘감성’적인 주제와 논리적인 방법론의 결합이라는 형식은 그것이 그나마 누구에게나 설득력 있는 ‘학’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단연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된 상태가 ‘감성’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모든 주관적인 체험들은 미학의 목적 속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미학이 지닌 문제의식은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적 요소를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학’에 대한 관심은 주관적인 선호에 그치지 않고 그 방법론과 더불어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 기초가 되어줄 수 있는 ‘미학사’와 ‘미학 개론’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미학이 서구에 기초해 있고 국내 미학의 역사가 짧다보니, 참고할 수 있는 대부분의 서적들은 원서나 혹은 몇 권의 번역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출간된『미학』(김진엽·하선규 엮음, 책세상)은 대단히 고무적인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1970년대 이후 국내 미학계 학술지에 실린 연구논문들 중 ‘미학의 역사와 구조’를 통찰할 수 있도록, 편집자적인 관점에서 국내 미학자들의 논문을 선별하여 구성한 보기 드문 ‘미학 논문선집’이다. 재밌는 것은,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제목을 그리 엄하게 지었는지에 대해 충분히 간파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앞서 ‘미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 학문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극명하고 친절한 이해를 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러 오해적 소지를 낳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모든 오해들에 대해 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총 4부로 이뤄진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국내에서 연구되는 서양 미학의 범주를 확연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고중세미학, ‘미학’이 학으로 규정되는 시기의 근대미학, 근대사회에 대한 반성과 이를 통한 이론적 관점으로서 새롭게 미학을 해석하고자 했던 현대유럽미학, 마지막으로 다양한 학문적 범주와 결합하여 미학의 다원주의를 꾀하는 현대영미미학 등 이상 네 범주는 국내 서양 미학 연구 분과들로 상정된다. 각 부는 각자의 범주에서 이해의 방향을 일러주는 서문을 포함한다. 그리고 보충자료 및 면밀한 연구에 필요할 수 있는 관련서들을 각 부 마지막 부분에 소개하면서 주제에 대한 독서의 방향을 지시해준다. 이 같은 요소는 이 책이 개론서로서도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갖게 하며, 그럼으로써 독자가 좀 더 효율적으로 세부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게끔 하고 있다.
이 책을 구성하는 논문들은 각 시기별 중요한 세부 논의들을 반영한다. 말하자면 2부는 미적경험과 예술 등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고유한 가치로 인정되면서, 이것이 또한 동시에 보편성을 띤다고 보았던 근대미학의 주요논의들을 끌어낸다.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서 ‘미학’을 명명한 바움가르텐에서부터, 개별 주관의 경험으로서 ‘취미’를 강조하고 개별성과 보편성이 합일되는 지점 즉 “상상력과 오성의 유희”로 표현되었던 ‘반성적 판단력’을 강조했던 칸트나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인 현현’으로 추켜세웠던 헤겔, 그리고 주관의 경험으로서 ‘무관심적인 관조’로 ‘미적인 태도’를 이끈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은 근대 미학의 중심적인 테제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각 논문의 주제를 보면, 그 시기 주요한 미학적 주제들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어렵지 않게 시기별 주요 개념들과 역사적 문맥을 동시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이 책에서 미학의 연구 범주와 개별 주제들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를 꾀할 수 있으며, 각각이 부담 없는 분량의 소논문 형식이기에, 이에 따라 관심 있는 주제들 위주로 발췌하며 읽을 수 있다. 또한 기존의 미학관련서적에 비해 다양하고 새로운 주제들이 소개되고 있어 최근의 연구 경향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미학’이라는 거대 이름 속에서 서양 미학에만 한정하여 논문집을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편집자도 분명 그 한계로 밝히고 있는데, 어떤 경우이든 동양미학의 연구범주와 내용들은 서양미학에 비해 숙고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앞으로 이 같은 논문선집이 그 초석이 되어 이를 통해 미학연구에 대한 다양한 소개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최윤정(미학, 미술비평)

2007년 7월 19일 목요일

U-MiRRor's HUmoUroUs 展 손승화 작가_Critic

손승화의 작업은 개인적인 모티브가 강하게 배어있으면서 동시에 대단히 관계적이다. 우리가 세상에 많은 작품들을 문학적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의 작품은 분명 ‘수필’이다. 주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거기에서 특히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몸소 실천해보이기 힘든 것들' 혹은 늘상 누구고 귀찮아했을 수 있었던 부분들을 과장하지 않고 자신의 숨에 맞추어 한 장면 한 장면 이어 나간다. 그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자기 일상 속에서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기 진정성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본 전시에 소개될 미디어 퍼포먼스인 <부모님께>와 <효도 프로젝트>는 이러한 맥락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졸업에 임박한 작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님, 작가는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혹은 설득하기 위해서 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가 생존의 문턱에서 스스로 작가로서의 삶을 택한 이상, 부모님께 이를 표명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란색, 그 색의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자기의지를 확인하고 부르짖는 일뿐이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저.. 계속 작/업/하/고 싶어요”
애잔하면서도 익살스런 감정을 이끌어낸 이 작품은 이제 본격적으로 ‘효도프로젝트’로 발전한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직업 즉 작가라는 본업에 충실하여 부모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실천을 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부모님께는 세상에서 더 없는 기쁨을 선사하는 순간이자, 작가에게는 부모님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아로새기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기록은 소소하나 마음이 충만해지는 행복이며, 부모님이 사시는 바로 그 곳, 그들의 일상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 그 장소 벽에 예쁜 ‘바다’를 그려 넣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작가는 이윽고 자신의 드로잉을 스스로가 재현한 바다에 투영한다. 한 마리의 복어를 연상케 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뿌듯해 마지않아 주고 받을 지도 모를 몇 마디의 말들을 상상하게 한다.
이 벽화작업의 관전 포인트라 한다면, 마침 그 길을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들과 꼬마 아이들이 보이는 관심이며 그들이 우연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는 모습에 있다. 그야말로 뜬금 없지만 낯설지 않은 그리고 유쾌하면서 동시에 잔잔하기까지 한, 언젠가 해 보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늘 서먹했던 우리들의 일상. 손승화는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의 실천으로 치러낸다. 것도 대단히 능청스럽게 한편 아주 사랑스럽게... ■ cHOiYOonC

2007년 4월 13일 부터 29일까지 아르코 미술관에서 진행된 '유미러스유머러스전' 도록에 실린 비평글

U-MiRRor's HUmoUroUs 展 오수형 작가_Critic

오수형은 단순한 이미지들을 복잡하게 배열하는 형식으로 결코 가볍지 않은 우리네 삶을 풀어낸다. 삶은 혼돈과 고통을 껴안은 끊임없는 투쟁이며,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매우 고역스런 일이기도 하다. 섬세하고 빽빽하게 채워진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이같은 작품 제작 과정이 그의 작품 주제와 더불어 작가에게도 분명 고되고 힘든 작업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면류관>은 비슷한 생김새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듯, 혹은 서로를 부여잡거나 껴안은 듯이 작은 육신들 사이의 응집을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거대한 ‘면류관’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경쟁의 테두리 속에서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연작으로 <하늘 위 천장>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또한 이를 위해 남을 짓누르고 끌어내리는 그러나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천장’이라는 한계를 만날 수 밖에 없는 허무한 상황을 묘사한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 그러한 한계가 있다면 과연 어디까지 오르는 것이 옳은지 혹은 오른다는 것 자체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지 작가는 작품을 통해 되묻고 우리는 이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극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 자기 개성과 능력 없이 타인을 모략하고 온갖 권모술수로 자기 자리를 지켜나가는 종류의 인간 군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의 묘사는 대단히 원초적인 동작들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강하게 보여진다. 인간의 집착이란 결국 그 끝이 있고 그 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 군상의 형상 속에 담는 것이다.
작가는 위의 두 연작과 더불어 그보다는 좀더 유연하게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끌어간다. 5,200장의 핸드 드로잉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은 수많은 상징과 메타포들로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장면들은 대단히 빠르고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은 삶의 이유가 순식간에 죽음의 원인으로 이어지는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인생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고민하게끔 한다. 인간이 일생 동안 끊임없이 추구하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똥’에 불과할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아이디어에서 우리는 ‘인생무상’이라는 삶의 허망함을 목도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다지 우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게끔 만드는 이유는 이 작품의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귀엽고 재미있는 캐릭터적 소재들, 그것들을 통해 과중한 문제를 유화시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 chOiYOoNC

2007년 4월13일에서 29일 아르코미술관 CTP연계전'유미러스유머러스展' 의 도록에 실린 글

2007년 7월 18일 수요일

대추리 활동, 애착 작가 fiRSt_ 김지혜


대추리 작가 내가 궁금한 그녀1_김지혜



최근 아카이브 작업을 진행하면서 대단히 애착이 가는 작가가 한 명 생겼다.


김/지/혜


작가가 견지하는 의미와 의기야 대단히 칭송할만한 것이고 함부로 말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조악함이라 할 것이 표현형식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현대미술의 문맥 속에서 이는 대단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녀의 작품은 분명 이와는 다르다고 보여진다.


필자가 특히 감동을 받았던 '구대추리 심리지도'는 몇 차례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터전을 옮겨야 했던 대추리 주민들의 역사에 기반한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추리와 그 투쟁현장, 이에 잘 매치되는 미술이미지들을 떠올렸을때, 아마 대부분은 붉은 혈이 낭자하고 미군을 상징하는 별이 혹은 폭탄이 박힌, 아니면 미국 지도를 형상화하고 그 속에서 시름하는 민중을 담은 이미지들을 주로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가 필자가 아카이브 작업을 진행해오면서 갖게 된 갈등의 일부였으며, 그것은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빚는 미술실천은 왜 늘 이같은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지 여러 시도들도 해봄직한데 왜 우리 미술계에서는 아직도 이렇게만 드러알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일종의 회의였다.
김지혜의 작업은 필자에게 비로 이같은 면모에서 그간 민중미술의 형식에 대해 가져왔던 혼란함을 일축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자리잡았다. '구 대추리 심리지도'는 지금은 미군기지가 되어버린 옛 삶의 터전에 대한 개별의 공간적 경험과 추억, 기억들을 더듬고 이를 토대로 지도를 구축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작가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자연스레 주민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우선될 때만이 결과를 안을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한 기획자로서 조율자로서 역할한다.
주민들의 기억이 펼쳐지는 공간은 그저 평면 종이일 따름이지만, 단축된 이미지와 이를 설명하는 텍스트 기입은 분명 대추리 주민 하나하나의 정서와 추억들을 총체화한다. 그외 현재 대추리 할아버지들의 유년시기 불려졌던 '대추소년단의 노래'를 악보로 복원하고, 대추리에서 소속없는 활동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등 그녀의 작업은 현장과 사람에 대한 이해까지도 보듬어 낸다. 즉 그녀의 작업은 공간적 문맥을 놓지 않으면서 이를 문화적으로 개인들의 일상 속에서 재해석 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현대사회에서 이같은 실천은 미술의 일상화가 갖는 의미와 미술의 역할을 지시할 수 있는 모범을 갖추고 있다.
덧붙여 인간이기에 가장 감동적인 한 일화는 그녀의 다큐멘터리 필름이 서울독립영화제에 상영되었을때, 대추리 주민들이 '인간적 의리'로 김지예 작가를 응원하기 위해 그 힘든시기 용산까지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김지혜에 대해 주민들이 갖는 신뢰와 감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작가의 눈에서 그들의 마음 한켠을 선동하기보다 따뜻하게 보듬어낸 작업을 통해 맺어진 결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 chOiYOoNC

인간과 형상, 소조각 20년

이 글은 '소조각회 20주년 기념 비평집(2007년 5월 16일 발행)'에 수록된 기념좌담_필자편집 내용입니다.

'소조각회'의 결성이유_대단히 재미있다는_에 대해 논의되면서, 동시에 조각계의 문제점과 방향성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작가 선생님들과 비평가들의 열띤 토론을 들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장소_인사동 다울
일시_2007년 4월 5일
참가자_김석, 김종길, 김준기, 민성래, 오상일, 이병희, 이원석, 황혜신
녹취록 구성 및 편집_cHoiYoONC


(좌부터) 민성래 선생님과 오상일 선생님_소조각회 원년멤버



김준기 : 20주년을 맞은 소조각회의 역사에 대해, 형상성, 인체라는 부분, 소조각회의 이념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신입회원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이야기 나눠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창립초기부터 얘기해 볼까요?
민성래: 초기에 대해 말하자면 다른 건 아무 것도 그저 사람 사는 동네에서 사람들끼리 교류를 하는 것, 또 하나는 홍대에서 인체를 자기 매체로 삼는 이들에게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작품 전시할 공간이라던가 매체 연구를 위한 풍토를 조성할 취지라던가 더 나아가 정치 세력화하지 않기라는 것으로 입장을 취했었던 것 같습니다.
김석: 아무래도 당시 미술계에는 ‘박서보 파’, ‘무슨 파’ 등등 60년대 미술판에서 이뤄진 미술의 구조적인 세력화라던가 권력화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요청이었겠지요.
민성래: 네, 그래서 회장도 매년 바뀌는 구조에, 40세를 전후로 해서 자동 탈퇴되는 구조를 취했죠.
오상일 : 원래는 오상욱 선생이 기철학에 심취해서 ‘기(氣)조각회’를 만들자 했었어요.(웃음) 에너지를 품는 집합체니까, 대전에 있는 이창수씨, 그리고 오상일, 오상욱, 류인 이렇게 연대 독수리 다방에서 만났어요. 거기가 아직 있나? 그때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고, 마침 민성래 선생님이 오셔서 “내가 구상조각회를 만들고 싶은데 동참할래”해서 ‘기(氣)조각회’ 때려치고 그렇게 만났죠. 인사동에서 창립모임을 가지고 현재 ‘소조각회’ 명칭을 뭐로 할까 하니까, 민성래 선생님이 “소라고 하면 어때?” 하신거죠. ‘소’의 의미는 한자로 뜻을 달지 말고 순한글로 하면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뭐 영어도 아니고, 선생님이 ‘소띠’니까(웃음) 홍대 토템도 ‘소’이고.. 당시 홍대분위기는 추상 중심이었어요. 그 당시 졸업생이 만든 현대조각회, 시영조각회, 그리고 후기조각회 등이 있었는데, ‘구상’ 쪽을 하는 사람들은 설 곳도 없고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었죠. 전시랄까… 당시 공모전에서 추상전공 심사위원은 구상작업을 ‘못 볼 작업’으로 취급했어요. 그게 한이 맺혀서, 그런 미술계 풍토를 수긍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민성래 선생이 말했을 때 두말없이 모이자 했었죠.
김준기: 지금이야 전시기회가 다양화되었고 양이나 질로서도 보장이 되지만 당시만해도 작가활동 출구가 힘들어서 지금의 작가회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김석: 역사적으로 보자면 근대미술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0년대 초반 김복진과, 김종영에 의해서 였습니다. 1세대이지요. 이들을 통한 학교교육에서 후세대는 인체조각을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배워왔다는 분들, 즉 부르델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작가들한테 배운 선구자들이 구상조각, 인체조각을 시작한 겁니다. 조각사적으로 볼 때, 이처럼 인체가 늘 기본적인 수업으로서 교육했던 것이 작품화 되면서 생기는 괴리감들은 양식적으로 새로움보다는 수업의 연장으로 미술계에서는 인식됐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오상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체조각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미술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죠.
이후 우리나라 조각의 경향은 일본에서 수입된 미니멀리즘이 지배해왔습니다. 그런 경향들이 미술교육에서 역시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잡고, 교육방법론으로서 다뤄지면서 제자들이나 학생들은 인체를 단지 학교에서 수업하는 학습 방법이자 기초적 소양으로밖에 여기지 않았었죠. ‘소조각회’는 바로 이런 역사적 성찰에서 출발하고, 조각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으로 다시금 인체를 인식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 80년대는 고민이 많던 시기였죠. 지금 역시 그렇지만 80년대 미술이라는 게 추상 일변도에 서구 설치미술 가까운 것들이 오는 시기였고, 아울러 민중미술도 그렇죠. 그때는 구상도 아니고 인체조각에 몰두된 것도 아니고 아무튼, ‘형상성’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는 소조각회가 그런 요소들에 대해 어떤 하나의 구심점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역사적 배경에서만 보자면. 소조각회의 입장이라는 것이 중간에 선 입장, 즉 그런 시대적 배경에 놓여져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소조각회’가 맥락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민성래: 그게 비단 ‘미술’의 문제만은 아니었어요, 먹고 사는 문제도 중요했죠. 전쟁 같은 거에요. 일본의 후광을 얻은 일당과 그 일당들에게 소외되었던 실험계-구미 쪽 국전을 중심으로 했던, 거기서 일본중심의 ‘사실계열’ 사람들이 중심 세력이 되었고, 구미 쪽 영향을 수입했던 자들은 열외가 되었었습니다. 서구 분위기를 도입하는 사람들이 영리한 자가 많았어요. 쫓기고 배고프니까 역습을 하게 된 거죠. ‘박서보 사단’도 그런 맥락이고, 시대 상황도 그렇지만 서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들어요.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보다도. 또한 그게 학교까지 영향을 준 것이구요. 구상이나 사실적인 것, 인체 문제가 왜 미술에 필요한 걸까 그걸 논의하기 전에 이미 구조적으로 밀려난 것이죠.
이원석: 아, 그런 상황에서 소조각회가 시작됐단 말이죠. 그러려던 마음 자체가 소위 시대적인 상황에서 구상조각이 홀대받던 상황에서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궁금한 것은 그 당시 느끼시던 구상 조각의 ‘기예’와 비교했을 때 현재는 어떻습니까?
민성래: 구상조각을 만들 당시에는 미술에 대한 견해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상황, 또 하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라고 해두죠. 사람을 위해 작용하고 기능해야 하는 미술, 그런데 이 미술을 하는 사람들 사이가 너무 불편했죠. 후배가 선배를, 제자가 스승을 능멸하고 선생이 제자를 수단화하고 이런 것들이 너무 크게 느껴져 미술인들이 함께 잘 살면 안되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일종의 미술적 실천이라고 본거죠. 거창한 이념이나 시대 이런 게 있던 것은 아니었죠. 결국 인간이 인간을 말하는데 있어서 인체만큼 좋은 게 없지 않나 그게 상투적이라고 소외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물어야 했구요. 하나의 이념이나 가치관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 모두가 혼재되면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인데 다양성이 배제된 상태의 질서란 것이 바로 결함이 아닐까 합니다.
오상일 : 그땐 추상조각을 해야지만 현대적인 작가였죠. 구상조각은 구태의연한 취급을 받았고, 작가 인식이 치열하지 못하고 나이브하다 이런 평을 들어야 했고요.
김석 : 80년대 초에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미술의 흐름은 미니멀리즘이란 개념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물성을 말했었죠. 각종 오브제, 아상블라쥬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미술로서 소화할 수 없는 모호한 작품들만 계속 나왔고 동시에 점점 서구화되는, 그 상황에서 ‘인체’의 의미는 ‘소조각회’ 태동과 더불어 다시금 논의할 가치가 생긴 게 아닐까 합니다.

오상일 : 인류가 만든 조각의 90이상이 인체일 겁니다. 그것은 확실히 검증을 거친 것이라고 봐야겠죠. 일종의 약식이지만 이를 도외시하고 조각을 논한다는게 당시 우리로선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인체를, 인간을 모체로 작업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물체만, 말하자면 옆집아저씨는 경찰서 가서 이빨이 빠져나오는 시대적 상황에서 물성만 논한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민중미술이라는 것이 나와서 기대가 컸는데, 그러나 형식적으로 너무 아니더라고 비판했죠. ‘그게 프로파간다지 예술이냐 그건 민중미술도 아니다.’ 물론 삶의 이야기를 조각성에 넣는 것은 좋았으나 그 형식이 너무 거칠었다는게 맘에 걸리는 것이었죠.
김석: 우리나라에서 서구 근대 조각의 도입은 불안정한 태생을 가졌습니다. 실상 우리나라의 근대성은 상당히 모호하죠. 이에 ‘형상미술’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입장에서 볼 때 검증될 만한 단서도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소조각회’가 8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현상을 형식화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일종의 역사적인 검증 절차가 되고, 미래의 현존성도 유효할 수 있지 않을까 하구요.
김준기: 소조각회 1회 전시도록을 보면 “예술이란 삶의 기록입니다(…) 첫번째 전으로 얼굴을 택했습니다.”로 시작됩니다. 류경원 선생님 작업이 인체를 잘라서 재결합시키고, 류인 선생님 작업은 두상의 뒤가 단절된, 그리고 민성래 선생님 작업에서 얼굴도 여러 형태로 변형되고, 오상욱 선생님의 구상도 절단이자 부분적으로 결합이고요. 조상필 선생님 같은 경우 일러스트조각을 하셨네요. 소조각회 초기작 대부분이 인체, 사람, 몸에 대한 단순한 재현이라기 보다는 재구성과 재결합 그리고 재배치의 특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반 인체작업과는 변별적이지 않았나 하는데요. 전시가 3회, 4회를 지나면서 글도 지속적으로 쓰여지고, 소 조각회의 정체성을 잡아나가는 단계였겠죠?
이와 같이 인체를 다루는 특징적인 면면들이 다른 조각회들과의 변별점이 있었다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주제전으로 끌어갔던 것도 독특한 측면인 것 같군요.
오상일: 뭐 그렇죠. 공부를 좀 하자. 그래서 사루비아 다방에 와서 한 달에 한번씩 공부를 했어요. 민선생님이 늘 주제전으로 가야만 한다고 주장했었죠. 신입회원 영입 시 기존회원들이 그 포트폴리오를 보고 첫째로는 사실성을 가지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표현이야 물론 작가 맘이지만 사실적 묘사력을 지니고 있느냐가 우선이었죠
민성래: 사실력을 통한 모든 것을 얼만큼 갖추고 있나. 그런 측면과 만장일치제였죠 서로 간에 가장 중요시한 것은 무엇보다 성실성, 진지함이라고 보았어요.
김석: 저는 94년도에 들어갔어요. ‘소조각회’의 1회 전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죠. 자체적으로 생성되었고, 또 인체를 다루는 조각그룹 정도로 말이죠. 저는 이 집단에서 말하는 ‘형상’이라는 게 구태의연한 종류는 아닐까 해서 류인 선배와 많은 고민을 주고 받았어요. 이게 왜 있어야 하는 거고 당시 변형된 미니멀리즘과 같은 미술경향과 왜 변별력이 있어야 하냐를 물었죠. 하지만 저 자신도 형상성 작업들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확산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구태의연성도 있는 듯 했으나, 좀더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더 컸죠. 인체에 대한 작업은 성실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지금은 오히려 그 성실함이 아이디어나 표현성을 해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요.
김준기: 삶으로부터 예술을 끌어내겠단 이념을 가졌을 때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진영과의 차별화 그것을 오상일 선생님께서는 80년대 민중미술이 가졌던 결핍된 대목들에 거리를 확실히 두셨던 듯 하구요. 다만 현실인식, 접근, 개입, 참여방법에서 조형적 요소만이 아니라 삶이나 현실을 파악하는 시각자체도 달랐겠구나 이런 생각을 평론가입장에서 갖게 됩니다. 이원석 선생이나 80년대 미대를 다녔던 젊은 작가들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현실인식이 그런 면에서 선배 세대와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 형식에서도 과거 선배들의 작업은 옷을 안입히는 인체를 했지만, 이 세대의 작업은 옷을 입히는 그래서 구체적인 서사를 입히는 작업으로 구분되기도 하구요.
이원석: 80년대 중반작가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학교 생활을 했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작업’이 실상 철저히 개인적일 수만은 없구나 그리고 ‘형상성’이란 시공간적으로 개개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미술이 유미적인 아름다움 을 추구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현실적이고 직관적이고, 서사적일 수도 있고 등등 폭넓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거든요. 인체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인체를 통한 형상으로 비춰보는 것이죠. 소조각회의 발전과정에서 선배들의 활동을 답습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지양하면서 발전시켜가야 하겠죠. 단순히 목적적인 형상으로서 인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하나의 관계 속에서의 역할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발전의 큰 부분이자 소 조각회의 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준기: 그렇다면 21세기에 신입회원이신 황혜신 작가는 어떻게 소조각회를 바라보십니까?
황혜신: 저에게는 우선 선배님들과의 소통, 연결이 중요했어요. 93년도는 학생운동의 쇠퇴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선배님들의 작품도 모두 민중미술의 경향이 컸고요.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 제 삶은 대단히 동떨어져 보였습니다. 제 또래의 사람들은 사회현실참여라는 명목에 신물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전시를 보면 개인적인 내용, 색도 알록달록해지고요. 민중미술은 운동권만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죠. 말하자면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는 시대였던 거죠. 저는 당시 내 삶에서 내 고통이 절실했으므로 그런 밝은 쪽으로도 아니면 민중미술 그 어느 쪽도 끼지 못했어요. 결국 내 진실, 삶의 진실성을 드러낼 수 있는 조각회에 들어가고 싶었던 거죠.
이원석: 황혜신 작가의 작업, 크게 대학졸업, 결혼 전, 결혼 후 시기에 행해진 개인전에서 보면 자기 삶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대단히 생생합니다. 이것이 소조각회에서도 필요한 부분인 거죠.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축하는 측면에서 추천하게 되었고요.
이제 선배님들은 발을 빼려고 하시는데,
이게 우리 조각회의 입장에서 옳은 방향인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모임을 하더라도 선배님들 작업실에 찾아가서 가져볼까 했는데 쉽지는 않더라구요. 초창기 시작했었던 진정성은 지금 후배에게도 동일하게 있고, 그렇기에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거죠.
김석: 더불어, 소조각회가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들자면,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형상성’을 다룬다 하면 그 안에는 서사성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부족한 점은 세련되지 못한 구시대적 발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진부함을 갖는 게 아닌가 저는 늘 고민합니다. 이 지점에서 좀 성찰할 필요가 있어요. 첫 번째로 성찰의 계기라고 한다면 작품생산에 있어 관람자(독자)적 시각과 작가적 시각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품에 대한 궁극적인 가치나 밀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조각작품은 감동적인 것을 내면으로부터 끌어내기 어려워요. 조각에 소리와 색을 입히거나 다른 오브제들을 결합시켜 감동을 끌어내고자 하지만… 아무튼 조각을 통한 감동은 로댕시대에 끝났으므로 우리 내면의 것을 형식화시킨다는 점에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구요. 세 번째는 내용 전달을 위해 형식이 존재할 때, 우리는 분명 세련되지 않은 형식들 그 형식을 다듬을 필요가 있는 거죠. 구태의연하다고 계속해서 말을 듣잖아요. 소조각회가 직면한 문제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형상조각의 현실이 아닐까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김준기: 인체를 통해 형상을 끌어내는 내적 필연성이나 자기 체험과 내면으로부터 끌어내는 정당한 절차가 생략된 채 관념적으로만 접근했을 때 그것이 구태의연한 것 일테죠. 자기 삶으로부터 우리의 삶의 정황이나 삶의 네거티브를 끄집어낸다면 그것은 구태의연할 수가 없을 겁니다. 삶은 늘 새로우니까요. 새로운 사람, 관계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가지고 형상을 끄집어내면 늘 새로운 예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민성래: 그 비슷한 얘기로 오상일 선생님이 제 작품 서문을 두 번을 써줬는데, 항상 말씀하시는 게 ‘품격’, ‘품기’ 입니다. 아마 사실 입체를 매체로 해서 보여진 것에서 구태의연함을 넘어서기 위한 것은 자기를 성숙시키면서 세상을 깊이 있게 보고 자기 내공을 쌓아 그러면서 품기를 얼만큼 충만하게 하느냐에 따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은 것에 대해 다른 느낌을 지니듯이 그 사회나 정황이 하나의 수평적 다양성의 전개로만 느껴지고, 거기에 익숙해져 버린 게 문제겠죠. 다르지 않으면 새롭지 않은 것? 심적 깊이를 가지면서 수평적 다양성을 견지한다면 분명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김준기: ‘품기’가 무슨 뜻입니까?
김석: 원래 동양에서 일필휘지를 할 때 그 기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기’라 하지 않나요?
민성래: 어쩌면 후경하고 아우라 같은 개념과 어떤 맥락에서는 비슷하겠죠.
이병희: 소조각회 카페에 보면, 우덕송이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조각회의 창단 취지같은데 실려있는데요, 우선 우덕송은 어떤 뜻입니까?
오상일: 소의 덕성을 칭송함 노래함이란 뜻입이다.
이병희: 그렇군요. 90년대 당시 시대분위기를 보면, 한국에는 80년대 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밀려들어왔고, 8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거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민중예술 사이에 어떤 대립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에 들어서 황혜신 작가가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성의 폭주가 발생하죠. 그 와중에 IMF니 성수대교 붕괴니, 삼풍 붕괴도 발생하고요.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등장한 논의가 정체성 논의죠. 그런데 최근 2000년대에는 일상성이랄까, 정체성 논의랄까, 이런 것을 넘어서서 다시 본질을 언급하거나 그 과정 속에서 소조각회의 20년간의 행보를 보면, 이 같은 문화사와 정치사적 흐름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기 시대적 대결구도 속에서 소조각회 또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여기 글-우덕송-에서 이를 소조각회 ‘정체성의 원류’라던가 ‘복고’라고 치부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소조각회에 들어가고 있는 작가들 작업을 보면 하나는 존재성, 본질적인 것, 인간 존재에 대한 지속적 탐구를 담아내고 있는데, 때로 감성적인 측면이 강조되거나, 고전적인 파토스, 즉 비극적인 것 강조하거나 혹은 지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젊은 작가들은 삶이라기 보다는 일상과 굉장히 밀접한 작품들을 주경향으로 삼고요. 어떻게 보면, 20년이란 세월 동안 여러 작가분들의 작업은 1980년대에서 현재를 아우르는 동시대적 문맥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조각회의 역사성 혹은 문화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조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하나의 협회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담론이라던가 한국 현대 미술사적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고 작품들도 그와 더불어 분석 가능하다는 것이죠.
김준기 : 이렇게 되면 50대가 명예회원으로 빠져서 활동을 접으시면 안되겠는데요.
민성래 : 제가 의도적으로 소조각회를 멀리하는 이유가 나이든 사람이 있거나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계속 있으면 아무래도 눈치를 봐요. 애초에 그 다음세대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것, 그리고 또 이러한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표현을 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게 얼만큼 절실한가의 문제와 어떤 열정을 갖느냐의 문제라고 봐요. 명예회원이라는 게 거기서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병희: 덧붙이자면 작가들 자체가 매체나 표현 기교 등 너무 다르고, 어느 정도 공통적이라 볼 수 있는 측면은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이죠. 어쩌면 이제는 작품의 ‘소재성’에서 떠나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태도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조각회가 갖고 있던 처음에 내세웠던 것이 어떤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작품의 소재 면이나, 제작기법 등과는 큰 상관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준기: 이런 변화의 지점이 있는 건 분명할 것인데, 이병희 선생님의 당돌한 진단은 신입회원이건 중견작가건 동시대 작업 경향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민성래: 맞죠. 그저 이런 거죠. 그 시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느냐.
오상일: 소조각회는 한국미술을 장악하고 있던 모더니즘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구요. 모더니즘이 너무나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죠. 그런 의미에서 민중미술이라는 것도 거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거대 서사가 무너지는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징후라고 볼 수 있다면 민중미술은 물론 그 경계에 있었지만 오히려 모더니즘에 가까웠죠. 소조각회가 일상적 서사를 끌어냈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포스트모던한 거죠. 물론 그런 식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말이죠.
이병희: 거기에서 모던이 아닌 다른 것을 찾고 계셨다는 것이고, 그 ‘무엇’의 원류랄까, 그 ‘무엇’에 관한 탐구자체가 소조각회 정체성일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후의 작가들의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겠는지요?
오상일: 정확한 지적이자, 옳은 말씀이에요.
김준기: 지금까지 우리가 창립초기 신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자연스럽게 소 조각회의 이념과 정체성에 대해 논의를 해보았습니다. 좀 더 끌어가 보죠.
이병희: 소조각회 전시는 그 시대 항상 현대적인거다, 그 당시 이야기가 스민거다라고 했을 때 전시제목들 그때그때의 주제들 을 한번씩 보시면 어떤 줄기가 보이십니까?
김석: 전시 주제에 대한 논의는 늘 해왔어요. 한편, 전시주제는 많은 토론을 거쳐 나오기는 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많은 고민과 생산적 귀결이 있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만약 스무 분의 회원이 있으면 그 중 한 열분 되시는 분들이 전시 주제에 맞는 고민을 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이외의 작가는 기존의 유형들을 늘 그대로 답습합니다. 이런 점에서 더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은 조각회에서 주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해온 그 당위성, 즉 현재까지 그렇게 해왔으므로 지금 우리가 있다는 당위성이 항상 있습니다. 조각회가 그렇게 해온 사례가 없었어요.
이병희: 주제가 각 시대의 전형을 잡아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김석: 순수한 창작 그룹이었기 때문에 회원들 토론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이뤄지는 경우였습니다.
민성래: 매전시마다, 작품 안에도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듯이 매 전시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집중력이 높게 발휘되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내용과 형식의 문제에 있어서 ‘만상이 불여 심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모든 상이 마음 상만 못하다. 마음 상이 생기면 상이 일어나고 상이 있되 마음상이 없으면 상은 소멸한다. 그 관점에서 보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요.
김종길: 저는 이런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93년도 제대하고 나서 이 팜플렛을 처음 봤어요. 제대하자마자 처음 본 전시라 기억을 하죠. 크게 두 한국구상조각회가 있고 소조각회가 있죠. 평론가 입장에서 이런 용어들에 대한 작가들 스스로의 비판이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 이전에는 모두 조각이라고 불렸죠. 실상 추상조각이다 사실주의 조각이다 이런 구분이 없었던 것 같아요. 김복진 선생이 귀국해서 활동을 하면서 인체형상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없었죠. 이제 서울대, 홍대에서 아카데믹한 전통 속에서 다양한 조각 양식이 나타났죠. 그래서 이를 구분하는 구상/ 비구상/ 추상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죠 구상조각, 형상, 리얼리즘, 사실주의 조각으로 구상을 부르게 되죠. 사실주의 조각은 리얼리즘의 역어이기 때문에 용어를 80년대로 칠 것이냐 의문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19세기 서구미술사의 흐름을 보면 꾸르베가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통해서 반기를 든 예술의 경향을 리얼리즘이라고 했기 때문이죠. 오히려 80년대는 민중미술계열에서 리얼리즘 조각, 형상조각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게 됩니다. 딱히 형상조각이라는 의미에 굳이 사회참여적 의미를 담느냐는 좀더 연구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겠지만 모더니즘 조각 혹은 단순히 인체조각의 상대적 의미에서 형상조각이 80년대 초반에 제기되었던 건 아마도 한국 현실에선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소조각회 활동을 구상조각계열이라고 해서 구상조각이 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냐 단순히 그것은 구상조각이 아니라 형상조각을 추구하는 여러 다양한 층위의 작가들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주의적 조각뿐만이 아니라, 민성래 선생님척럼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작업도 있고, 굉장히 심미적인 작품도 있죠. 오상일 선생님 작품은 주로 이러한 경향에 있다고 봅니다. 대체적으로 OB 작가들에서 이러한 성향들을 발견할 수 있구요, YB작가들의 경우는 유희적이거나 팝아트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것을 담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굳이 구상조각이라는 정적인 용어보다는 형상조각이라는 측면에서 소조각회를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가지로 짚어보자면, ‘타 조각회와의 변별성’을 말해볼 수 있구요. 또 하나는 내부적으로 이론가들이 구상 혹은 형상조각에 대한 차이나 개념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지점이 아닌가. 또 하나는 구성원들의 작업의 행태와 형식들을 구분지어 연구해볼 필요도 있겠다는 것이죠. 도록을 보면서 도록에 없는 작품이 더 훌륭하기도 하고 주제는 설정했지만 그 주제에 부합하게 작업을 했느냐 비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년 어떤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준비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지만 개별 작가들은 자기 작품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을 제작했으므로 주제전으로 모였다고 해서 그 부분을 다소 긍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40대 이후에는 활동하지 않겠다는 측면에 있어서 사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좋은 취지인데, 제 생각으로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대교체론 같은 말로 들리기도 한데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게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토의를 통해서 작업의 방향을 논하고 이때 이것은 작품 경향, 형식, 형상의 계승이 아니라 사유와 정신의 영향이라고 보았으면 합니다. 선배작가들이 후배들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을 갖게끔 영향을 주어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김준기: 김종길 선생은 소조각회의 정체성을 구상조각이 아니라 형상조각이라고 한 측면을 규정할 수 있겠다 그렇게 진단을 하신 거죠?
김종길: 형상미술, 형상조각을 확산적 개념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민중미술 혹은 참여미술로 한계짓지 말고 형상성에 대한 논의를 이제 적극적으로 모색할 지점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 개념은 구상조각을 포괄할 수도 있고 감히 소 조각회의 형상조각의 틀로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이를 참여미술의 테두리로만 한정지으면 이것은 형상조각이라고 하면 아니죠. 그리고 형상을 추구하는 다양한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고요. 더불어 형상성의 본래적인 의미를 찾아서 이를 적극적으로 이론가들이 모색하여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말하자면 그 원류를 서구 조각에 대한 교과서적인 내용들만 믿고 가야 것인가, 그보다는 동양 관념적인 사유가 어떻게 근대 조각의 형식으로 드러나는가 등 우리 조각 속에서 다른 지점들을 끌어내야 겠죠. 그리고 우리가 구상, 비구상, 추상 조차도 정확한 개념으로 번역을 한 것인지, 우리가 너무 무분별하게 외국 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닌가 분석도 해야겠죠.
민성래: 재밌는게요. 어떤 생물학자가 말하길, 모든 생물들의 형태는 고도의 생존전략이 깔려있다고 하거든요. 형태가 문화적으로 접근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생물이라는 조건에서 본다면 형태는 기능이에요. 우리 언어쓰기에서도 그 경우가 있어요. 꼴에는 값을 꼭 얘기해든요. 그게 우리 생활 속에서 녹아있는 형태에 대한 의미부여에요. 꼴과 값 혹은 현대생물학자들이 얘기하는 형태와 생존전략과 유사한 맥락이죠. 저는 사실 그런 속에서 본거에요. 형태를 조각할 때 제가 느낀 걸 했지 하면서 나온 걸 보니까 어느 순간 저는 구상조각으로 분류가 되어있고 모든 게 분류가 되는 거에요. 하나도 납득치 않았어요. 그냥 저는 저 나름대로 느끼고 보고 그냥 온 거에요. 그냥 제 내부에서 시켜지는 데로 온 거에요. 그리고 내부는 제가 살아가면서 시켜지는 데로 온 거에요. 계보적인 것 공감해요, 그러나 그것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 의미를 쌓아놓으면 쌓은 위에서 출발하니까 좋다고 한 거에요.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요. 하나의 생물에서 보자면 틀은 필요하지만 결국 그 틀은 깨야 하죠. 부화가 되려면 말이죠.
김준기: 오늘 선생님들의 다양한 말씀들 정말 감사했구요. 소조각회 2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소조각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조각계에서 새로운 담론이 지속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가 지속적으로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위 내용은 소조각회비평집 '인간과 형상, 소조각20년'에 실린 것입니다 >

2007년 5월 31일 목요일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최근 나는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진행을 맡았다.
평택 대추리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일상의 여러 실천들과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더 솔직하게는 그것이 내 일상과 전혀 무관했다고 반성해본다.
'생존권' 대학 다니면서 무수하게 들어본 말. 대추리 주민의 생존권, 권익을 위해 예술이 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내 짧은 생각에 현대 미술은 예술실천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그것이 도구화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지녔던 형식과 인상파 화가들이 화려하게 수놓을 수 있게 해준 형식에 대한 현대적 대체 방안이 바로 '예술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실천...
현대미술의 정의와 그 문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있어서 나는 그저 대한민국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예술실천은 '도심지 공공미술'이나 '작가 창작스튜디오'와 같은, 우리 일상이 보기좋은 예술과 밀착할 수 있는 방향만을 고려해왔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에 약간 주춤거렸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향수와 그 속에서 보이는 선동성이 싫다. 어디선가 황당하게도 개념미술이라고 소개된 한국의 민중미술, 그 민중미술에서 보여왔던 조악함은 미술을 감상한 이래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형식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종용하는 바, '너/도/그/래/야/한/다'. 물론 나는 케테콜비츠의 작품을 대단히 좋아한다. 그 때문인지 화려한 민중미술을 보면 절제감이 느껴지지 않아 문득 거부감이 들고는 한다. 내 주관이 민중미술의 좋은 전형을 콜비츠에게서 찾기 때문일 게다.

아직 아카이브展에서 보여질 작품들이 어떤 것들인지 나는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그 작품들이 80년대 민중미술이 보여준 형식을 그대로 되물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예술이 등장한 맥락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우선은 보기에 과도한 선동성을 떠나고, 상징이나 다양한 메타포의 작용들을 감상할 수 있는 혹은 좀더 세련된 형식으로 마무리된 그러한 작품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소 혼란을 겪고 있는 것만은 분명 사실이다.
노래패 활동을 할 당시, 다소 큰 규모의 연합 형식인 문화제에 참여하면 가장 이해가 안되는 것이 '깃발패'_나는 그렇게 불렀다. 강한 절규보다는 부드러움과 정적인 몸짓에서 우리의 심정은 휘몰아치는 동요에 젖을 수 있다_ 혹은 아예 건조한 것이 더욱 좋다. 강한 절규는 둘 중 하나다. 선동되거나, 완전 거부되거나..
앞으로 만나 볼 작가들이 기대된다. 그들의 작품을 80년대 민중미술과 비교해보며, 이 참에 한국 현대 미술사의 한 줄기를_제대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_내 관점으로 움켜 쥐어볼 예정이다. ■ chOiYOoNC

2007년 5월 29일 화요일


5월 29일 화_'Art&culture' 드디어 개시


'장영혜 중공업'을 감상한 후, 이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계속 물색하다가 블로그 제작을 감행하기로 결심.

이제 내 글의 'ASt'는 이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