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31일 목요일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최근 나는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진행을 맡았다.
평택 대추리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일상의 여러 실천들과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더 솔직하게는 그것이 내 일상과 전혀 무관했다고 반성해본다.
'생존권' 대학 다니면서 무수하게 들어본 말. 대추리 주민의 생존권, 권익을 위해 예술이 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내 짧은 생각에 현대 미술은 예술실천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그것이 도구화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지녔던 형식과 인상파 화가들이 화려하게 수놓을 수 있게 해준 형식에 대한 현대적 대체 방안이 바로 '예술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실천...
현대미술의 정의와 그 문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있어서 나는 그저 대한민국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예술실천은 '도심지 공공미술'이나 '작가 창작스튜디오'와 같은, 우리 일상이 보기좋은 예술과 밀착할 수 있는 방향만을 고려해왔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에 약간 주춤거렸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향수와 그 속에서 보이는 선동성이 싫다. 어디선가 황당하게도 개념미술이라고 소개된 한국의 민중미술, 그 민중미술에서 보여왔던 조악함은 미술을 감상한 이래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형식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종용하는 바, '너/도/그/래/야/한/다'. 물론 나는 케테콜비츠의 작품을 대단히 좋아한다. 그 때문인지 화려한 민중미술을 보면 절제감이 느껴지지 않아 문득 거부감이 들고는 한다. 내 주관이 민중미술의 좋은 전형을 콜비츠에게서 찾기 때문일 게다.

아직 아카이브展에서 보여질 작품들이 어떤 것들인지 나는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그 작품들이 80년대 민중미술이 보여준 형식을 그대로 되물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예술이 등장한 맥락도 분명 중요하겠지만 우선은 보기에 과도한 선동성을 떠나고, 상징이나 다양한 메타포의 작용들을 감상할 수 있는 혹은 좀더 세련된 형식으로 마무리된 그러한 작품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소 혼란을 겪고 있는 것만은 분명 사실이다.
노래패 활동을 할 당시, 다소 큰 규모의 연합 형식인 문화제에 참여하면 가장 이해가 안되는 것이 '깃발패'_나는 그렇게 불렀다. 강한 절규보다는 부드러움과 정적인 몸짓에서 우리의 심정은 휘몰아치는 동요에 젖을 수 있다_ 혹은 아예 건조한 것이 더욱 좋다. 강한 절규는 둘 중 하나다. 선동되거나, 완전 거부되거나..
앞으로 만나 볼 작가들이 기대된다. 그들의 작품을 80년대 민중미술과 비교해보며, 이 참에 한국 현대 미술사의 한 줄기를_제대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_내 관점으로 움켜 쥐어볼 예정이다. ■ chOiYO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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