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경남예술창작센터 레지던시 참여작가 이진우 작가 평문, <보편성 위에서 노니는, 주관적 감응을 찌르는 형식실험>


보편성 위에서 노니는, 주관적 감응을 찌르는 형식실험
_이진우 작가 평문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학미술비평
 
100개의 파트들이 모여 전체를 일구고, 이미 익숙한 혹은 알고 있는 주제들로 선별되어 집결한 부분들의 집합이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전체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금 부분이 재조합되어 풀어내는 감응의 세계.
 
서사는 이렇게 구성된 하나의이미지 속에 불확실한 해석의 여지 속으로 파묻힌다. 인간에게 외적형식에 대한 지각은 이해의 내적 감각을 자극하지만, 다만 이해의 영역은 객관적인 것으로서가 아닌 주관적인 집중으로 각자의 특유한 해석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조합을 통한 이미지 생산은 곧 감상자 개별의 감정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복무한다.
그리하여 작가 이진우에게서 그가 생산한 고유의 이미지에 대한 테제는 그가 인물을 사건을 또한 구체적인 형상들을 추상화하는 형식에 맞닿아 있으며, 개별의 작품들을 접합하고 흩뜨리고 다시금 재조합하는 평면설치를 통해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해석의 의미에 주목하게끔 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장치로서, 작가는 본인의 의도에 부합하는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조합형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우선 바라보기에 익숙한 사이즈의 캔버스_하나의 셀색점 역할을 하는 데에 통일감을 줄 수 있는_ 를 직접 제작한다. 그리고 사물형태에 대한 일차적인 인지로서 ’, ‘세모’, ‘네모등의 차가운 도상들과 정서의 표현으로서 붓질을 일차적 해석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매개로 활용한다. 보기에 이진우 작가는 우선적으로 보편성이라는 견지에서 자신의 형식을 탐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스케치의 대상이 그렇고, 매개적 장치로서의 도상들이 그렇고, 또한 색채를 담아내는 캔버스가 그렇다. 인체에 대한 드로잉에서 출발하여 인물의 표정이나 분위기에 집중한 인물화 그리고 사건의 한 장면에 대한 스케치로 이어져 온 그의 작업은 구체적 형상 내지는 서사성을 그대로 두는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선택한 매개적 도상들_도형, 붓질_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지우는작업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인물, 사건 등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거대서사나 역사적 상징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감정 및 순간적인 소회와 환경에 대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람자는 해석의 불확실성을 통해 도리어 다양한 심미적 해석을 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쥐어낸 주체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의 창작에 대한 문맥을 가늠하고 작품의 주제를 추출할 수 있다.
 
불확실성’, 그의 작업은 실재를 담은 사진을 참조하여 이를 스케치하고 페인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다시금 강조하자면 일차적으로 하나의 인물화나 사건기록 같은 그림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미지의 일부를 덮어버리거나 생채기를 내듯이 인물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도록, 붓질이 혼미하고 거칠게 표현되기도 하고, 보편인지가 가능한 도형들이 인물의 표정을 막고 있다. 붓질의 분위기나 차가운 디자인으로서 도형들은 지우고 가리고 관람자의 시선에 상처를 내는 장치이지만, 한편 이면에 대한 해석의 영역으로 이끄는, 무엇이든 하나의 해석으로 귀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순전한이미지로 변모시키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의 작업 중 한 시대 전혀 다른 노선을 지닌 두 인물, 그들의 닮은 부분적인 형상들을 조합하여 마치 한 인물인 듯 표현한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역사성과 시대적 고통 속에서 마주한 두 대결자를 합해놓음으로써 해석에 대한 관람자의 심리적 방황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인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행위로부터 그리고 형상으로서 이미지 자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과 모호함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 방황 자체, 그것이 불확실성에 내재하는 혹은 불확실성을 생성하는 핵심이지 않겠는가? 다시금 그의 작업은 보편적 견지의 서사성과 상징성을 그 끝에서 장치를 통해 교란시키는, 교란의 상황에서 불거지는 주관의 느낌과 이를 통해 서사가 아닌 시각이미지 자체로서의 분위기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것이 작가가 진술한, “순간순간 마다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열린 해석”, “그저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이미지이며 작품의 문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심미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이해가치에 종속된 사물, 그것이 지닌 형식에 머무르는 경우 일반적으로 관심적인 집중의 상태에 돌입한다. 이 경우 자신의 관심이나 이해의 영역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혹은 경험하여 알고 있는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서 해석을 꾀하게 된다._배고픈 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접시에 빵을 놓아 선사한다. 과연 그의 집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접시로 향할까 아니면 빵으로 향할까_ 관심적인 집중이란 결국 세계를 둘러싼 진실과 정수를 도외시한, 자기 발 끝에 놓인 표면을 훑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장치를 통해서, 시급히 만족해야 하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관심적인 집중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상황이 전제된다면, ‘무관심적이고 심미적인상태로의 접근이 용이할 수 있다. 심미적 감응을 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형식실험,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담았던 그 작품들이 또한 타인에게 그들의 고유한 감정으로 전이되도록 하는, 전체가 혹은 부분이 함께 유영하고 때로는 교란되면서 생성하는 무차별적 정감의 장, 그의 주제의식은 이렇게 전개된다.
 

경남예술창작센터 레지던시 참여작가 박진영 작가 평문, <몸짓, 숨의 흔적으로서의 삶을 공감하는 자>


몸짓, 숨의 흔적으로서의 삶을 공감하는 자
-박진영 작가 평문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학미술비평
 
인간의 기본정서에는 쾌락과 고통, 슬픔과 분노 등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유기체로부터 장소와 환경 그리고 태도로 집결되는 영향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바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보자. 공동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역사적 문맥에 의거, 공통의 기억을 공유하는 바탕 위에서 생성된다. 이 기억은 언제고 그것이 뿜어내는 감정과 정서를 통해 또한 함께 겪어졌음을 공감하는 형태이며, 그들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너를 이해하는 방식, 나를 규정하는 방식. 때로는 그리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이 자신이 처한 공동체의 기억감정 속에서 어떠한 식으로든 발견되고 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계 안으로 낯선 자의 침투. 그것은 때로는 공격적인 충격에 의한 이격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불편부당한 충격으로부터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고 내가 겪지 못한 그들의 흔적을 공유하고 삶을 공감하는 과정속에서 도리어 낯선 자의 태도적 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안무가로서 무용수로서 박진영은 비디오댄스를 통해 한 공동체의 삶에 침투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가 침투한 방식은 그들과 함께 시간보내기’.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_다만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_ 그들의 삶을 공유하고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던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자 하는 태도적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결과물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소통하고자 하고, 소통의 내용들을 어떻게 작품 속에서 성실히 선보일 수 있는지 그 모든 바탕 위에 그에게는 그가 꾀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참여와 소통의 문맥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을의 어린이들부터 노년기에 접어든 여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어떠한 주제를 성급히 끄집어내는 오류를 저어한다. 또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정감들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관심을 표현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예술가로서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 그 자체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미지생산자로서 그는_그의 특유의 안무가적 특징과 무용을 통한 몸짓표현을 고려하자면_ 사람, 공간 등 낯선 자와의 소통과 호흡이 중요한,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과정이 돋보이는 작업에 탁월한 연출력을 발휘해왔다. 그에게 몸짓은 자신이 처해있는 시간과 공간과의 호흡, 들숨과 날숨의 기묘한 조화, 온전히 공감하고, 스스로를 주체로 설정하기보다 하나의 구성물임을 표명하고, 그리하여 스며들고 뿜어내는 아지랑이의 형국으로서의 자신이다. 작업과정에 있어서 안무, 시각적 연출, 사운드, 촬영 등은 전문가들과의 협업으로 이끌고 있는데, 이 단면은 무대예술에 대한 작가의 이해도와 직접적으로 맞닿는 부분으로 작품의 질적인 측면을 담보하고 있다. 그렇기에 비디오댄스작업은 그 자체로 그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유형으로 자리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와 숨도에서 진행했던 그의 작업들은 _공간을 사유하고 호흡하는 과정을 시간적 추이에 맞물려 몸짓과 기운 그리고 사운드로 채워나가며 공간자체 그리고 관람자들과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가는_이미지생산자로서의 실험적 시도로 읽혀진다. 거기에 비디오댄스영역은 이전 작업들과 동일선상에 있으면서도 그가 늘 고민해왔던 공감과 공유에 기초하는 참여의 문맥을 심화시키면서, 예술가로서 자신을 인지하고 창작에 대한 태도적 진정성을 다져가는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타인, 공동체에 대한 시선. 그 속에서 그는 관찰자이자 연구자로서의 예술가가 아닌, 도리어 그 속에 함몰되어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익숙한 편안한 혹은 어떤 사연이 있는 공간에 함께 처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들의 사유를 나눈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 그리고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어르신들. 작가는 그 안에서 시간의 경계선에 서있는 자신_두려움과 겁을 지닌_을 발견한다. 또한 지역의 기후에 따른 생산물의 차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어디에 가나 낯선 자들은 그곳에서 타 지역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한 시간동안, 마을공동체에게 특유의 정서를 선사하는 공간들, 추억이 깃들고 아픔이 있었고 일상적인 동선이면서도 새로이 발견될 수 있는 동선을 추출하는 일은 작가의 주된 관심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그 동선들과 공간들을 조망하면서 비디오를 통해 또한 시간과 그 공간들을 기록한다. 그 속에서 마을의 현재는 협업한 작품_그 당시, 그 시간, 그 공간의 소리를 기록한/사이먼_을 통해 표현이 되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지닌 시간성/미래와 온통 기억과 흔적으로 점철되는 이야기를 품은 어르신들이 상징하는 과거라는 시간성. 그렇게 시공간은 몸짓이라는 생의 표현과 한데 어우러지고 함께 했던 시간을 상징하는 계절감을 통해 부각된다. 여기서 작가는 기본적으로 참여자들과 공감의 시간을 보내고 자연적인 흥의 춤사위를 이끌어내면서 본인은 아주 작게, 아지랑이처럼 속삭이는 최소한의 개입으로서 춤사위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낯선 공간에서 시간의 경계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 타인의 삶을 공유하면서 조력자로서 자신을 설정하는 행위. 그렇기에 작가에게 이 작업은 마을의 새로운 기억감정을 생성하는 것 뿐 아니라, 결과물조차도 그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자리하였다.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타인으로서 그 나름의 소통하는 자로서의 자신으로부터 경계인으로서 자아를 발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마주하는 낯선 공동체의 기억감정을 공유하고자 애쓰는 일. 그들의 지금과 여기, 앞으로의 시간과 과거의 흔적들을 몸짓을 통해 잇는 매개자로서 박진영은 앞으로도 비디오댄스를 통해 참여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적 문맥과 진정성에 계속해서 물음을 던질 것이다. 이것은 창작에 대한 주제의식이 예술가의 소명,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여지를 또한 충분히 남기고 있다.
 

2015년 10월 9일 금요일

기고문) 예술과 과학. BIO-ART와 생명경계


예술과 과학. BIO-ART와 생명경계
 
최윤정(큐레이터, 미학/미술비평)
 
필자가 예술과 과학이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로 4~5년 전부터 시작된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공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과학자들-물리학자, 뇌과학자, 생물학자, 의학자, 공학자 등과 함께 시작한 스터디는 주로 바이오아트에 대한 것이었다. 생명을 지닌 유기체가 작품의 재료가 되거나 혹은 그 자체 주제로서 다뤄진 작품들을 살피면서, 바이오아트를 바라보는 관점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혹여나 오해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지금의 바이오아트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요한 전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첫째, 기본적으로 바이오아트는 ‘Low-테크안에서 이루어진다.
약간의 기술만 있다면 누구든 다룰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이고 위험하지 않은 정도의 유전자조작 단계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예술가들에게는 생명윤리에 대한 언쟁이 있었음과 달리, 공부모임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그 정도의 실천은 누구나 의도한다면, 할 수 있는 아주 낮은 단계이고, 생명윤리에 대해 혹은 생태계 교란에 대해 크게 염려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의 의견을 내놓았다.
둘째, 작품의 재료로 이용되는 측면 보다는 그 자체가 주제로서, 더불어 이면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이것은 바이오아트가 단순히 과학의 사용을 통한 생명체 연구를 넘어, 왜 그것이 ‘Art’여야 하는지, 왜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문맥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 결과와 결과에 대한 예측담론들이 곧바로 동시대 담론과 연결된다.
셋째, 생명경계에 대한 인식
우등함과 열등함에 대한 시선, 생명창조와 예술행위, 유기체적 교감-우연성, 그리고 생명 권리에 대한 고찰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 ‘유전자 조작 생물체에게도 생명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1962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에드아르도 카츠는 바이오아트의 선구자로 분류된다. 유전자 조작기술을 통한 생명체의 탄생, 이식과 배합을 통해 조작된 생명을 다루는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00‘GFP Bunny프로젝트로 그는 그가 창조한 형광토끼를 대중에 처음 소개했다. 흰 토끼의 배아에 해파리의 유전자_녹색형광단백질GFP을 주입하여 빛을 내는 토끼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조작행위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내 생명윤리에 대한 비판이 가해질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업은 작가 개인이 아니라, 프랑스농업연구소의 장소를 사용함은 물론, 공동연구로 협업한 작업이기도 하다. 전시에서 형광토끼를 소개하며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카츠는 이후 자신의 가정으로 토끼를 데려가고자 하였다. 반려동물로서 평생을 함께 하고 책임져야 할 생명체로 여겼기 때문인데, 프랑스농업연구소는 이 토끼의 반출을 막기로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유전자 조작 생명체 특히나 이보다도 더욱 혹심한 괴물들을 만들어내었을지 모를 연구소들의 기본 방침은, 유전자 조작 생명체에 대한 제작과 동시에 폐기처분에 있다. 한편 더욱 크게는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형광토끼로서, 지적재산권에 대한 갈등도 이에 한 몫을 하였다. 여기까지 어쩌면 에두아르도 카츠는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그의 예술창작에 대한 근거와 의문들을 끌어내기 시작했고 실천적인 구상들을 꾀하기 시작했다. ‘유전자조작 생명체는 생명체로서의 권리가 없는 것인가?’ 그는 이 형광토끼의 이름을 ‘Alba’라고 짓고 그의 사랑스런 반려동물로 삼았다. 그리고 유전자조작 생명체의 상징이면서도 생명체로서의 권리침해에 직면해 있는 현상들을 담아 ‘Free Alba’ 캠페인을 진행한다. 깃발은 물론 티셔츠 등으로도 제작되고, 그리고 이 운동은 추후 실험실에서 희생되는 동물들에 대해 고민해볼 여지를 남겨준 사건과도 같았다. 괴물일지도 모르는 연구실 생명체에 대한 관점을 쓸모/용도/폐기의 상황이 아닌 생명체인 것으로,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이끈 것이다. 그 생명의 제작자였고, 자신이 길들인 동물에 대한 책임감, 유전자변형생물의 생명에 대한 책무로서 그는 인간의 윤리관을 강조하면서 생명 본연의 의미를 일깨우고자 애쓴 것이다.
 
에듀니아- 생명의 위계, 경계에 대한 물음. 일부분은 꽃이고 일부분은 인간인 새로운 생명체, 이종 간의 결합
 
카츠는 자신의 혈액에서 면역유전자를 추출하여 페튜니아 꽃에 이식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다. 두 생명이 연속하고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기존의 페튜니아보다 유난히 붉은, 마치 그의 피부색과도 같은 붉은 잎맥이다. 이는 비록 서로 다른 종이지만 생명이 공유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생명이라는 개념이 인격체적 동물 뿐 아니라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생명, 유기체들 모두를 포괄하는 무차별적 의미임을 깨닫게 하는 작업이다. 이 꽃은 카츠와 DNA를 공유한 페튜니아로서 그에게는 세상에 하나뿐인 에듀니아로 명명된다.
 
 그의 작업들은 유전자이식 생명체에 대한 미래 윤리관과 연결되는데, 생명의 위계 및 경계를 구분짓는 대신 생명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에 인간의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생명이며 에너지이고, 내재적인 힘으로서 생명의 빛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다. 재밌지 않은가? 인간의 과학으로 하나의 순수생명체를 조작하여 새로운 종을 직접 생산하고서, 도리어 인간의 우위를 관철하는 바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치달은 생명의 위계를 비판하고, 생명의 가치를 환기시키며 이종 간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는 것. 바로 이 지점이 바이오아트가 왜 예술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술은 늘 이면의 것들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혹은 침투와 스미는 방식으로 또한 때로는 대단히 역설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기 때문에, 생명을 조롱할 뻔했던 과학기술의 사용은 도리어 생명의 진중함으로 우리의 사유를 이끄는 도구가 되었다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작업으로서 아트 오리젠테 오브제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실천과 공유, 교감의 과정에 대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수단은 인간과 동물 이종 간 결합에 있다. 아트 오리젠테 오브제의 내 안에 말이 살게 하소서(may the horse live in me)’는 수차례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소개되었는데, 어찌보면 에드아르도 카츠보다 더욱 극단적으로 나아간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몸과 동물의 몸을 섞는 행위이다. 작가는 혈장주사를 통해 인간의 혈액과 호환이 가능한 말의 혈액을 만들고자, 자신의 혈액과 말의 혈액을 혼합시킨다. 혼합된 혈액은 그 속에서 항체들을 실험하면서 동시에 호환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져 다시금 서로의 몸에 주입된다. 상징적인 작업이지만, 동물의 피가 인간의 몸에 직접적으로 주입이 된다는 부분에서 다소 충격적이다.
작가는 이 과정에 도달하기 전에 열흘이 넘도록 자신의 혈액과 섞이게 될 대상인, 말과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 그 속에서 유대를 쌓고 편안한 관계를 구축한다. 또한 말의 다리와 동일한 구조물을 제작하여 자신의 몸에 장착한다. 그리고선 말과 함께 걷고 보폭을 맞추면서 말의 혈액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종(異種)에 대한 존중이자 배움이다. 생명가치에 대한 존중을 표상하는 작업인 것이다. ‘함께 걷는 행위도 이와 마찬가지로 개별자로서 의 특질을 존중하는, 또한 혈액이 섞임으로 인한 특질의 수용/전이에 대한 적극적인 제스처로 읽혀진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세하다고 여기는, 종에 대한 엄격한 경계에 대해 또한 무용함을 일깨워준다.
이 외에도 바이오아트의 영역은 세균/박테리아의 움직임과 분화 등을 활용한 회화라던지, 이종간의 대장균을 혼합하면서 그 변화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발견될 만한 시각적인 자극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극도의 기술적 발전을 이룩한 미래사회에 대해 생명소외, 도구화 등의 관점에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치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유전자조작에 의한 식물을 먹으며 살고 있고, 생명복제 등 유전자 조작에 의한 생명체가 뉴스에도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만큼, 인간의 과학이 개입하여 생성된 인공적 창조물들에 대해 우리의 영토를 나누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노예화할 것인지 판단 시점이 곧 도래할 지도 모르겠다. 이에 바이오아트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대단히 강력한 존재론을 표방한다. ‘자연적 생명체나, 인공적 생명체나 모두 생명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재산권이나 위계를 만들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함의하고 있다는 것. 또한 언제든 이후로도 인간의 손길이 개입된 생명체들이 이 땅을 공유하며 권리를 가지고 살아야할 지도 모른다는 것. 바이오아트가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그에 대한 윤리관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