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 위에서 노니는, 주관적 감응을 찌르는 형식실험
_이진우 작가 평문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학‧미술비평
100개의 파트들이 모여 전체를 일구고, 이미 익숙한 혹은 알고 있는 주제들로 선별되어 집결한 부분들의 집합이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전체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금 부분이 재조합되어 풀어내는 감응의 세계.
서사는 이렇게 구성된 ‘하나의’ 이미지 속에 불확실한 해석의 여지 속으로 파묻힌다. 인간에게 외적형식에 대한 지각은 ‘이해’의 내적 감각을 자극하지만, 다만 ‘이해’의 영역은 객관적인 것으로서가 아닌 주관적인 집중으로 각자의 특유한 해석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조합을 통한 이미지 생산은 곧 감상자 개별의 감정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복무한다.
그리하여 작가 이진우에게서 그가 생산한 고유의 ‘이미지’에 대한 테제는 그가 인물을 사건을 또한 구체적인 형상들을 추상화하는 형식에 맞닿아 있으며, 개별의 작품들을 접합하고 흩뜨리고 다시금 재조합하는 평면설치를 통해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해석’의 의미에 주목하게끔 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장치로서, 작가는 본인의 의도에 부합하는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조합형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우선 바라보기에 익숙한 사이즈의 캔버스_하나의 셀‧색점 역할을 하는 데에 통일감을 줄 수 있는_ 를 직접 제작한다. 그리고 사물형태에 대한 일차적인 인지로서 ‘원’, ‘세모’, ‘네모’ 등의 차가운 도상들과 정서의 표현으로서 붓질을 일차적 ‘해석’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매개로 활용한다. 보기에 이진우 작가는 우선적으로 ‘보편성’이라는 견지에서 자신의 ‘형식’을 탐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스케치의 대상이 그렇고, 매개적 장치로서의 도상들이 그렇고, 또한 색채를 담아내는 캔버스가 그렇다. 인체에 대한 드로잉에서 출발하여 인물의 표정이나 분위기에 집중한 인물화 그리고 사건의 한 장면에 대한 스케치로 이어져 온 그의 작업은 구체적 형상 내지는 서사성을 그대로 두는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선택한 매개적 도상들_도형, 붓질_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지우는’ 작업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인물, 사건 등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거대서사나 역사적 상징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감정 및 순간적인 소회와 환경에 대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람자는 해석의 ‘불확실성’을 통해 도리어 다양한 심미적 해석을 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쥐어낸 주체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의 창작에 대한 문맥을 가늠하고 작품의 주제를 추출할 수 있다.
‘불확실성’, 그의 작업은 실재를 담은 사진을 참조하여 이를 스케치하고 페인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다시금 강조하자면 일차적으로 하나의 인물화나 사건기록 같은 그림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미지의 일부를 덮어버리거나 생채기를 내듯이 인물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도록, 붓질이 혼미하고 거칠게 표현되기도 하고, 보편인지가 가능한 도형들이 인물의 표정을 막고 있다. 붓질의 분위기나 차가운 디자인으로서 도형들은 지우고 가리고 관람자의 시선에 상처를 내는 장치이지만, 한편 이면에 대한 해석의 영역으로 이끄는, 무엇이든 하나의 해석으로 귀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순전한’ 이미지로 변모시키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의 작업 중 한 시대 전혀 다른 노선을 지닌 두 인물, 그들의 닮은 부분적인 형상들을 조합하여 마치 한 인물인 듯 표현한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역사성과 시대적 고통 속에서 마주한 두 대결자를 합해놓음으로써 해석에 대한 관람자의 심리적 방황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인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행위로부터 그리고 형상으로서 이미지 자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과 모호함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 방황 자체, 그것이 ‘불확실성’에 내재하는 혹은 ‘불확실성’을 생성하는 핵심이지 않겠는가? 다시금 그의 작업은 보편적 견지의 서사성과 상징성을 그 끝에서 장치를 통해 교란시키는, 교란의 상황에서 불거지는 주관의 느낌과 이를 통해 서사가 아닌 시각이미지 자체로서의 분위기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것이 작가가 진술한, “순간순간 마다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열린 해석”, “그저 전체로서 부분으로서의 이미지”이며 작품의 문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심미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이해가치에 종속된 사물, 그것이 지닌 형식에 머무르는 경우 일반적으로 관심적인 집중의 상태에 돌입한다. 이 경우 자신의 관심이나 이해의 영역에서 이미 잘 알고 있는 혹은 경험하여 알고 있는 무언가에 집중을 하면서 해석을 꾀하게 된다._배고픈 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접시에 빵을 놓아 선사한다. 과연 그의 집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접시로 향할까 아니면 빵으로 향할까_ 관심적인 집중이란 결국 세계를 둘러싼 진실과 정수를 도외시한, 자기 발 끝에 놓인 표면을 훑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장치를 통해서, 시급히 만족해야 하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관심적인 집중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상황이 전제된다면, ‘무관심적’이고 ‘심미적인’ 상태로의 접근이 용이할 수 있다. 심미적 감응을 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형식실험,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담았던 그 작품들이 또한 타인에게 그들의 고유한 감정으로 전이되도록 하는, 전체가 혹은 부분이 함께 유영하고 때로는 교란되면서 생성하는 무차별적 정감의 장, 그의 주제의식은 이렇게 전개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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