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프로젝트2015우주산책
희망의 존립근거, 우주산책
최윤정 ● 지리산프로젝트 큐레이터
‘희망,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 그러나 언제고 ‘이루어질 수 있음’을 몸소 실천하며 의식하고자 하는 것. 그렇기에 희망은 본질적으로 과거의 시간이 아닌 미래의 시간으로 향한다. ‘더 나아짐’, ‘새로움’에 대한 창조적 욕구와 역동성은 희망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현재의 성찰은 희망의 원리를 쫓기에.’
경남권 지리산프로젝트의 본부라고 볼 수 있는, 풍현마을/산청 성심원은 반세기 역사를 갖춘 한센인들의 삶을 그대로 품고 있는 마을이자,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관리하는 복지시설이다. 지금의 아름다운 성심원 풍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호강’은, 성심교가 생기기 전까지 세상과 한센인들을 분리하는 일종의 자연 경계선이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고무보트에서 시작하여 철로 만든 배 하나에 의지하여 세상과 접촉하였다. 소록도와 달리 풍현마을은 애초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마을,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니고 삶을 일구고자 하였던 그들의 희망이 빚어낸 마을공동체이다. 한센인 어르신들의 청년시절, 그들은 수도회와 함께 가정집을 건축하였고, 마을의 커뮤니티공간(대강당, 대성당) 등을 만들어가면서 마을의 형태를 구축했다. 근래 이 중 일부는 사용하지 않는 오랜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고, 이 공간들 중 일부는 <지리산프로젝트2014:우주예술집>을 통해 문화예술창작의 산실로 새롭게 거듭났다. 성심원에서 제공한 대강당과 구 가정사 건물은 예술가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창작을 하고, 지속적으로 프로젝트 구상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우주산책, 산책의 본연은 우연한 만남과 그 속에서의 교감에 있다. 때로 그것은 의식의 향방과 실천을 유도하는 사유의 장을 제공해주기도 하고, 현실 일상과의 순간적인 괴리를 꾀하여 관조적인 심리상태를 이끌기도 한다. 이는 지리산둘레길이 그간 ‘성찰의 길’로서 제안되었던 바와, 지리산프로젝트가 또한 사람과 마을과 지역을 마주하며 고민해왔던, ‘우주예술’ 개념구축에도 그 의미를 보태고 있다.
<지리산프로젝트2015:우주산책>은 전시 뿐 아니라, 특화프로그램 ‘지프달모’와 ‘우주예술캠핑콘서트’를 함께 개최함으로써 지리산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 둘레길 걷기, 자연에서의 캠핑, 어쿠스틱 콘서트 등을 함께 선보였다. 이에 참여예술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참여도 두드러졌으며,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구축하는데 있어서도 뚜렷한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전시는 각 권역별 거점 및 둘레길 일부에서 펼쳐졌는데, 경남권 전시의 테마는 <희망의 원리>이다. 이 전시에는 각 특화프로그램 활동과 예술가들의 창작활동, 그리고 성심원의 역사 및 마을 사람들의 활동들을 영상 도큐멘트를 통해 보여주었으며, 또한 ‘우주/산책’, ‘희망’, ‘지리산’, ‘자연’, ‘한센인마을’, ‘둘레길’에 대한 예술가들의 다채로운 시선들을 담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구헌주가 선보인 2014년 성심원을 상징하는 철선과 범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의 위계란 가치없음을 주제로 한 자화상 그래피티 등은 그가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낯선 장소의 누군가와 소통하는 실험에서 구상되었다. 2015년 구헌주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성심원의 사물, 이곳을 산책하면서 주운 작은 돌덩어리들을 보고 우주의 운석들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이를 크게 확장하거나 반전한 이미지로 공중에 떠있는 듯한 ‘우주돌’을 그리고, 경호마을 둘레길 구간으로 이어지는 길에 위치한 긴 벽면에 맞추어, ‘지구풍경’ 하늘과 산 그리고 강(4대강 녹조)을 표현하였다. 오치근은 딸과 함께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함께 그렸던 그림들을 2014년 하동 에코하우스에서 원화로 전시하였고, 이어 2015년에는 이 원화이미지와 지리산의 자연이 품고있을 법한 동화 속 이미지들을 가지고, 딱지를 연상케하는 스티커를 제작하여 전시장에 방문한 사람들 누구나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대범은 2014년 낯선 환경에 처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관계맺기’를 주제로 하여 그곳에서 발견된 것들을 기록하고, 예술가의 옷과 한센인 어르신들의 옷가지를 엮은 발을 만들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장소와 관계에 녹아드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시 되었던 작업이었다. 2015년에는 1945년부터 1999년 즉 새천년이 오기 직전까지 주요 일간신문 1면에 실린 새해 첫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상영하였다. 이는 막연히 희망 자체에 대한 것이기 보다, 시대별로 어떤 이미지를 ‘새해, 희망적임’의 대표표상으로 삼았는지 관찰할 수 있으며, 각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이었다. 이범용은 2014년 스튜디오에서 발견한 제비, 어린시절 보았지만 잊고 지냈던 신화와도 같은 존재를 통하여 그가 생각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2015년 그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기구도적인 관점에서 이 ‘장소’에서의 창작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묻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황금빛입니다’는 그의 수행적 노동을 보여주는 평면작업과 후속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소회를 담담한 필체로 적어낸 글로 구성된다. 후속작업으로 그는 성심원의 납골당과 한센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정용국은 한센인 어르신들의 구술사를 기반으로 했던 기념벽 작업 ‘첫번째사람’(2014)이후, 2015년에는 둘레길 어천마을 구간에 ‘두번째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직접 제작한 의자를 설치하였다. 한센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였던 ‘첫번째 사람’, 그리고 성찰적인 자아 ‘너’를 지칭하는 ‘두번째사람’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며 산책의 의미를 사유할 것을 주문하였다. 2창수는 2014년 ‘안녕’(둘레길 산청구간)에 이어 2015년 둘레길(하동 양이터재)에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는 누군가가 “God sent his son”이라고 낙서한 바위에, 잘못 불시착하여 사고를 당해 죽은 외계인의 슬픈 전설을 담았다. ‘우주사고’는 하동 양이터재에 위치하며, 지리산둘레길 구간 중 다소 지루한 구간으로 일컫는 곳이기도 한데, 이곳에 그만의 진한 위트가 녹아들었다. 또한 이곳에 지리산을 찾은 명사들이 남긴 글귀들을 새겨넣은 성신석조각회의 돌조각작업이 함께 놓여져 있어, 지치는 발걸음 생각하면서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허태원은 한센인 중증환자들이 요양하는 시설에 위치한, 중앙정원에 2014년부터 주민들과 함께 하는 장소특정적 꽃심기 ‘정원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꽃을 심고 있는 작가의 활동을 보면서 주민들이 함께 돕고 참여하며 만든 정원이다. 두 개의 원은 하나의 원이 되고, 그 안에 놓인 꽃들은 심지어 작은 숲을 이루는 듯 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꿈틀하고 생동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014년 작업의 흔적으로 살아남은 식물들은 2015년 새로이 심겨진 식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정원의 풍성함을 더할 수 있었다.
김신일은 ‘마음’을 형상으로 한 문자조각에 빛을 접목한 조형작업을 선보였다. 마음의 작용과 여전히 지리산에 서려있는 한국근현대사의 아픔이나 우리 사회에 상존하는 이념 갈등은 무관하지 않다는 입장에서, 그의 작업은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으로서가 아닌, 순수한 고요함 ‘마음 그 자체’를 직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황인모는 자연과 인간이 사는 마을 그리고 길을 주제로 하여 인간의 숨결이 깃든 풍광을 촬영한 ‘산책’연작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자연 풍광 속에 인공적인 도로의 한 단면, 흐르는 강 저편에 위치한 집, 산에 둘러싸인 경작지 등. 그 자연 속에 인간의 삶이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나규환은, 세월호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천일기도 장소가 마련된 성심원 은행나무 앞에,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을 담은 ‘아버지의 눈물’ 조각을 설치하였다. 아버지 그가 흘린 슬픔과 고통의 눈물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전신을 휘감은 파도가 되었다. 김경화와 소빈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예술창작을 통한 치유와 예술교육을 겸하여 주민참여의 작업들을 이끌어 내었는데, 김경화는 못 그릴수록 아름다운 그림, 기복신앙을 담고 있는 ‘민화’를 매개로 주민참여작업을 이끌었다. 여기서 나온 그림들은 ‘우주공’과 ‘소망상자’로 공동창작의 산물들은 작가의 손을 거쳐 설치작업으로 완성된다. 또한 야외 잔디밭(교육회관 앞)에 도시의 황량함을 상징하는 재료, 시멘트로 만들어진 고양이와 비둘기 일군들은 ‘굿모닝’이라는 제목으로 자연과 공생하듯 설치되었다. 소빈은 ‘소풍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센인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노래교실을 운영하고, 한지로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인형을 만들면서, 그 인형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어르신들의 흥을 돋우면서 밝은 분위기를 내고, 이윽고 공감과 이해를 통해 마음치유를 꾀하고자 한 작업이었다. 한편 이광기는 예술가들이건 방문객들이건 일종의 힐링을 제공하고 새로운 창작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곳’ 역시도 현실의 무게는 존재한다는 위트를 담아 ‘카드결제일’, ‘타임’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야외에는 축대에 의해 휘어져 자란 나무를 두고 설전을 벌였던 경험을 두고서, 그 과정에 대한 작가의 소회를 담아 작품 ‘세상은 생각보다 이유가 많다’를 축대에 새겨 넣었다.
예술가의 작업 외에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창작작업이 활발했던 것은 작년 활동으로부터 비롯된 공훈이라고 자부해본다. 정덕문(성심원 시설관리팀장)의 주도하에, 2015년 봄부터 마을입구 나무집 2층에는 ‘미술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이 함께 나른 경호강의 돌들은 희망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의 ‘희망의 돌탑’으로 재탄생하였다.
모든 것을 막론하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창작활동에서 비롯한 감동은 나에게는 잊지 못할 대사건이다. ‘예술은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가치로 이끌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중심 화두를 그들을 통해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서 예술창작을 통해 새롭게 생동하는 기운을 엿볼 수 있었고, 그들의 생동하는 기운은 다시금 현장에 임하는 나에게 강한 질타와 자극을 주었다. 마주침과 충돌에서 촉발될 수 있는 상호 ‘생산적인 자극’, 또한 예술가들의 적극적인 탐구에 의한 새로운 작업들의 탄생. 어쩌면 한때 예술가들이며 마을주민들을 수혜자로만 여겼던 나의 생각이 틀렸음도 간파하였다. 나는 이것을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다. 마을주민들이 예술가들에게 자극받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현장에 임하는 희망의 원리를 예술가들과 마을주민들의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화두가 그리고 지리산프로젝트의 화두가 이후로도 현재의 깊은 성찰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 희망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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