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6일 월요일

김한나 [쇼룸;매일의조각] 평문


매일의 조각 ; 뾰족한 섬을 구축하는, 사유의 단초들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지난 개인전 [과,의, 것]이 일상적 삶 속에서 뾰족하고 날카롭고 불안한 관계적 속성을 지시한 서사들을 조각의 형태로 옮기는 작업이었다면, 이번 개인전 [쇼룸;매일의 조각]은 그 서사들을 풀어헤치고 작가의 구체적인 일상과의 접점에 보다 주목하여, 자신의 은연한 습관에서 비롯된 패턴 속에서 창작의 의미를 짚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작은 조각으로 표상된 이 하나하나의 정서적 형상들이 다시금 쪼개지고 응축되고 나열되는 과정을 통해서 시간적 흐름과 창작 행위가 서로 결합되는 지점들을 ‘일상과의 접점’의 구체적인 의미로 부가하는 작업인 것이다. 일종의 드로잉같달까. 이 드로잉과도 같은 조각들은 그의 습성 안에서 매일의 시간을 통해 수행적으로 주조된 덩어리들이다.
 
그의 습성이 흥미롭다. 그것은 지난 개인전 인터뷰에서는 미처 포착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였는데, 하루의 시간이 빼곡이 시간별로 분할되어 스스로 해내야 하는 계획들로 채워진 그의 스케줄러를 발견했고, 그것이 내게는 이번 그의 작업들을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하였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쓰임이란 상대적이고 습성화된 패턴 안에서 각자의 개별화된 특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매일의 (작은)조각’이라는 표현을 매일의 생산과 창작에 대한 실천 행위를 담은 것으로, 어찌보면 넓은 덩어리로 뭉뚱그려 나는 그렇게 이해해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매일’의 표현은 단위로서 시간이자, 이에 결합한 행위와 과정이 세밀하게 쪼개져 관리되는 작가의 습성을 설명하는 의미로서 보는 것이 적절함을 최근 다시금 깨달은 바다. 덕분에 ‘시간’이란 개념이 생각의 흐름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또한 그 흐름을 파편화하기도 하는 관념인 것이자, 습성의 단위가 아닐까 하는 확신도 가져보게 되었다. 이 확신대로라면 작가의 ‘매일의 조각’은 그의 습성적 패턴으로서 시간과 행위의 결합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에 다름 아니다. 거리를 산책하기 전후, 밥을 먹기 전후, 잠을 자기 전후, 생계를 위한 일을 하기 전후, 잡다한 생각들을 나열하기 전후, 그 시간의 틈 사이로 그는 자신이 문득 꽂힌 정서적 형상들에 의거, 그렇게 매일의 조각들을 조물조물 만들어왔다.
 
  “결국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자신의 정서와 뉘앙스를 외화시키는 ‘구도와 형상’에 있었다.”_[과, 의것] 평문의 일부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매일의 (작은)조각들을 통해 구성된다. 이 조각들은 작가의 사유와 세계를 구성하는 인식의 각 지점들을 포착하는 모나드와도 같다. 개개가 모나드로서 작은 조각들이면서 모듈화되어 만들어낸 볼륨들이 또한 인상적인 국면을 형성한다. 각각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행위의 이유를 뉘앙스로 담으며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구도와 형상’을 주조하는 방법론을 더욱 확장한 시도들이다. 핵심은 작은 조각들이고, 그것들이 모듈화되어 하나의 볼륨으로 구성되고 합쳐질 때 이 개개의 볼륨들은 시간과 행위의 결합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을 상징하는 구축적 사유의 베이스가 된다. 그리고 이들이 놓인 공간은 작가의 습성으로 축적된 요소들 즉 작가의 스케쥴러가 2차원 평면에서 3차원의 입체로 만들어지는, 나아가 시간의 개념이 깃든 4차원 물리적 세계의 시공간을 동적으로 시각화하는, 전체가 작가의 사유와 그의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미학적 볼륨으로서 ‘쇼룸’으로 완성된다. 그야말로 ‘나의 세계는 이렇게 구축되고, 내 안으로 접근해보라’는 당찬 선언에 마주한 듯한 기분이다.
다시금 지난 개인전 [과, 의 것]이 일상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형상을 발굴하고 그에 대한 정서적 서사들을 펼쳐보이는 시도였다면, 이번 [쇼룸;매일의조각]은 시간적 단위 틈새마다 놓여진, 예술가의 습성으로 화한 창작적 실천들의 원류를 결집하는 시도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모듈화된 작업들은 개개의 볼륨이면서도 연결되는 구조로 공간 전체에 서사를 가미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업 면면을 살피자면, 우선 일종의 관조적 감상의 틀을 가장 노골적으로 지정하는 상징이기도 한, 캔버스를 가지고 작가는 구조물을 계획하였다. 그 안에 매일의 (작은) 조각들이 또한 놓여지고 쌓여지는 구성을 사유의 구조틀 안에서 실험한 작업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볼륨은 작가의 태도, 그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관계적 상황이나, 세상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생각들이 낳은 ‘뾰족한 섬’의 형상들이다. (*뾰족한 섬 : 이는 작가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인지를 담은 것으로서 그를 지칭할 때 처음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 뾰족한 것들이 불안하면서도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지되기도 한다. 창작의 태도적 접근 및 내용적 고민을 시각화한 작업으로 읽힌다. 또 다른 작업은 시간의 틈 내지는 무언가 실행하기 전후를 상기하는 듯한 (시공간의) 분할 내지는 바로 그 시점을 전개하는 듯한 파란 구획물들이다. 공간에 서사를 입히고 개입을 하기 위한 설치적 측면에서 고안된 요소로 해석된다. 그리고 누르면 튕겨갈 것만 같은 행위의 일부를 표현하는 듯한, 점점이 의미롭지 않을 것 같은-인식되지 않을 것 같은 날日을 상징하는 듯한- 작은 조각들로 구성되어 도리어 일상의 긴장과 함께 리드미컬한 흐름들을 표현한 작업은 도리어 역설적이다.


이에 덧붙여 빼곡이 쪼개어져 기록된 자신의 스케줄러 구성에 대한 습성만큼이나, 작가에게는 생각의 흐름들을 기록해놓은 일상의 단상 및 작업노트 등 텍스트 기록의 양이 상당하다. 인터뷰 당시 이번 전시에서 소개할지 여부를 작가는 또한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이 텍스트들 역시도 어절단위로 지워지고 잇고 덧붙이는 방식을 통해서 마치 ‘작은 조각’처럼 작가의 발화적 특징 및 생각의 단면들을 구축하는 단위로 충분히 역할할 수 있다. 어쩌면 보다 내밀한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차갑게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바로 그 지점에 텍스트 작업은 때로는 유용하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창작작업이 자기 일상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중요한 가치로 두었다. 생존에 기반한 현실적인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장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성장에 대한 기민한 전략들을 포함한 관계적인 환경으로서의 일상을 이름한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예술가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단위들에 대해 더욱 과감한 형태의 방법술로 고안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는 환경에 대해 표출되는 자기 정서의 원형을 발견하고 사물을 마주하는 태도로서 대상 자체의 형태적 속성에 감응함과 동시에 고유한 ‘표현’으로서 이에 자신이 반응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듯 보인다. 왠지 이 과정들이 일종의 자기영토를 구축하는 도정에 서있기도 하지만, 자기영토의 속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관심있고 나의 흥미를 끄는 즐거운 것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누구나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 끝에 그가 속삭이듯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당시는 당연하게 들려서 한 귀로 흘린 말이기도 하였지만, 이 작업들을 관통하는 핵심에서 이 말이야말로 그의 사유와 창작의 줄기를 구성하는 모나드가 아니었을는지. 날카로운 물건이 살갗에 스치듯 차갑게 문득 내게 닿은 말이었다.

윤동희 <중첩된 간극> 2017 평문

피부, 은폐, 가시화 _윤동희 <중첩된 간극> 2017 평문
 
 
 
최 윤 정 ● 독립큐레이터, 미술비평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 보이는 겹들에 대해 작가는 시간의 피부를 떠올렸다. 실현해야 할 시대적 가치들을 향한 시간은 우리의 뒤에서 과거를 향해 돌아선 시간에 의해 대체된다. 이것은 형태들의 변형으로 가시화되며, 중첩되어 구조된 오랜 건축의 파사드들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들이다. 원래 파사드는 건물의 정면으로 그 건물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몸 움직임은 물론 건물에 대한 태도까지도 결정하도록 일조한다는 건축의 사회구조적 문화사의 한 단면으로 다뤄진다. 근현대 건축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북성로(대구 중구)에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경제 호황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두고 파사드 위에 파사드, 또 그 위에 파사드를 중첩해놓은 희안한 증거물들은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시간의 때가 고스란히 간직된 허름한 건물의 외피를 가리는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겹들을 그 기능을 충분히 추정하고도 남을 만큼 노골적이다. 파사드는 건물에 단순히 종속되어 있기보다 그 표면만을 보고 건물의 쓰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지각적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영향미치는 외부 환경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작용해야만 하는 역할을, 즉 ‘소통’을 이 건물의 얼굴이 있어야 할 궁극목적으로 삼는다. 물론 작가는 파사드 구조 자체에 대한 탐구에만 몰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대를 상징하는 각각의 겹들과 형태가 작가에게 투척하는 질문을 수용하고, 건물의 뒤편이 보내는 은폐된 메시지를 포착하는데 집중한다. 또한 건물과 함께 시간성을 직접적으로 닿게 하는 표면과 메시지들에 대해 특유의 냉소적인 감성으로 풀어놓은-언제나 그랬듯- 해석들이 과거의 작업들과 비교하며 보기에도 대단히 흥미롭다. 그가 예술을 예술로서 식별하는 가시성과 담론성이 늘 자신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에, 그렇기에 시각예술 안에서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과 리서치-정치 및 역사, 사회적 비극과 실천에 대한 고민들-를 특유의 감성과 비판적 관점으로 이끌어가는 각 지점들이 공허하지 않았음을 지켜봐왔다.
 
 
 온갖 욕망들이 충돌하는 근현대사 속에서 그 비극이 파사드에 닿는 지점과 바로 기념되지 못한 삶(일상)의 장면들을 애도하듯 자본과 역사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장면들이 펼쳐지는 장소는 과거 한 세기 동안 은행 건물로 쓰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총 5개의 섹션을 통해, 자신의 주제와 장소적 해석을 적절히 결합한다. 작가적 고민을 위한 리서치들을 시발점으로 담은 입구에서부터, 장소적 특성과 비판적 문맥들을 결합한 작품들, 또한 파사드의 피부와 시간성이 결합되어 흐르는 영상작업 등 그리고 가야할 바를 놓친 욕망의 향방을 보여주는 설치작업 등이 소개된다. 반복적으로 서로를 가리는 형태들이, 중첩된 파사드-애초 ‘소통’의 기능을 갖는다 할지라도-는 결국 소통되지 못한 시대 혹은 세태를 가리킨다. 현재까지도 종속되어 버린, 괴물같은 개발사회의 비극이다. 서로 진득한 덩어리들은 그렇기에 은폐된 구조와 대체됨의 형식에 의하여 ‘간극’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이 표현은 무엇보다 적절하다. 
 

2017년 8월 10일 목요일

아트포럼리 청년작가 초대전, Art-Critic/ 뾰족한 섬의 언저리에서 찾아가는 방법술


아트포럼리 청년작가 초대전, Art-Critic

뾰족한 섬의 언저리에서 찾아가는 방법술 : 작가 김한나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인터뷰 당시는 서로 이야기가 술술 풀려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 하였다. 그러나 실제 글을 쓰면서 몇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 이유를 추적하고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불현 듯 나의 습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작업의 기승전결과 문맥이 정/확/히 내안에서 규정되고 독해되어야 만이 글을 쓸 수 있었음을, 말인즉 이성적인 이해도를 넘어선 추상적이고 직관적 감응을 통한 글쓰기는 나에게 너무 힘든 과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순전히 작가 김한나 때문에.
처음에는 빠르게 읽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이미지와 문맥, 작가의 언변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빠르게 읽힌다 생각하여 쓴 글은 계속해서 동어반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수다는 많았지만 알고보니 작가는 그 무엇도 규정한 적이 없었다. 소름돋는 이 불편한 상황을 당시에는 미처 캐치하지 못하고 확고한 ‘틀(상황)’ 안에서 자신의 작업을 시각화한다는 전제로 글을 쓰려고 보니 나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빈약한 논리는 물론이거니와 그 부담으로 과도하게 육중함을 띠는 졸고가 나와버렸다. 과감히 버리기로 한다.
이 말을 ‘작가의 이번 개인전 <과, 의 것> 작업이 ‘결과없는’, ‘과정적인’ 특징을 갖기 때문에’ 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단히 작가 김한나와 김한나의 작업을 공식화한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출발은 A이나 알고보면 B같고, B는 알고보면 C인 듯도 한데, 거기에는 D도 있고 E도 있으니...그게 뭘까’ 그가 자신의 작업경향을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작업”이라 일컫는 데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어야 한다. 알고보니 정서의 원형태가 시각화되는 작업이다. 그 실마리를 놓치고 나는 계속 A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일상 속 단순 불화로 치부되는 것들은 강박적으로 뜯게 되는 손톱, 건조함에 예민해진 피부각질, 잘린 머리카락과 같은 히스테리적 모습으로(...) 잦은 거주지 이주, 스탠다드한 삶을 요구하는 환경, 개인적 갈등 같은 일반적 원인일 수도(...) 그렇기에 나는 구체적 이유를 찾아 서술하고자 하지 않는다.”(2017작업노트 중에서 발췌)
 
작가는 자신의 순수작업이 일상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다. 여기서의 일상은 소담한 내용의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생존에 기반한 현실적인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장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성장에 대한 기민한 전략들을 포함한 관계적인 환경을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작업과 일상의 접점을 편하게 찾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무엇이든 접점을 찾는다는 노력이 의도와 다르게 어긋날 수도 있고 성공적인 접근단계에서 자기 한계를 계속 깨우쳐야만 하는 피로감을 함께 수반하는 탓에 그만큼 쉽지 않다. 또한 예술가의 삶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이면서 여성의 삶을 돌이켜보자. 하물며 수많이 쪼개어져 문화 속에 내재화된 차별전략들 탓에, 정체도 알 수 없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를 옥죄고 있을 아비투스는 그 접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모래짐을 한덩이 한덩이 또한 보태고 있는 실정이다.
 
작가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의 화두는 출발지점으로서 막강하다.
 
“저는 어쨌든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게 눈에 계속 거슬리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는(...) 제가 보는(마주한) 사회는 사람을 무디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계속 말을 하는 행위가 되게 예민하고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요(...)” _2017워크숍 녹취록 중에서 발췌
 
일상, 자기 외부(관계, 사회)에서 느낀 불편부당함은 불화-강박-예민-히스테리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 한계로부터 좌절감과 회의감을 몸소 느끼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거리를 둔 관찰자적 시선을 동시에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관계들 속에서 대상화하는 용기도 내보았다. 이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수많은 지점들에 처한 자신의 일상이고, 치이고 옥죄는 상황에서도 예술가로서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처해있음’에 대한 하나의 저항적 실천이었다.
자신의 실천과 일상적 삶의 관계, 때로 이 관계는 갈등 속에서 서로 긁고 할키고 상처내는 등 내적인 불화를 조성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은 불화들이 그렇기에 관계들 속에서 스스로를 섬으로 표류하도록 만들기도 하며, 관계의 주체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법칙과 세력의 구조에 기울어있다면, 결국은 화해와 타협으로 장식된 ‘굴종’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수순일 터. 한편 상상해보자. 그 관계의 속성에서 ‘은폐된 무엇’을 가로지르는 틈이 생긴다면, 자각과 변화 등 자기영토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표류와 갈등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동력인이자 방법술이 될 수 있다.
그에게 미술을 한다는 것은 일상적 삶과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방법술, 다시 말해서 갈등과 은폐를 가시화하는 전략을 통해 그 한복판에 자신을 온전히 위치시키고 그로부터 자기영토를 점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삶이 보편적인 요구와 동떨어진 비일상적인 삶으로 오인된다 해도, 결국 그는 표류를 선택하고 작품을 통해 갈등을 가시화하면서 꾸준히 문제의식을 키워나갈 것이다. 행여나 당장은 답도 없더라도(갈등의 정체를 서술할 수 없을지라도) 현재 그의 작업은 갈등을 관찰하며 그 근본에 다가가는 도정에 밀착해 있기에, 그에게서 꾸준히 창작될 작업들은 자신의 방법술을 연마해가는 과정들을 드러내는 산물이 될 것이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 불화의 이미지를 ‘뾰족하고 예리하고 불안한 그 무엇’ 의 뉘앙스로 형상화한다. 그에게 작업의 핵심은 관계의 기류에서 발생하는 폭력, 갈등, 예민함, 날카로움 등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형상화하는 것이기에 그 형상은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는 보편적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기본 단위를 원뿔, 구, 원기둥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즉각적인 ‘뉘앙스’로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의 정체를 상상할 수 있게끔 한다.
결국 ‘고통’, ‘히스테리’ 정서의 원형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덩어리, 물성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뾰족하고 예리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한 혹은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물론 재료 선택에 있어서 ‘일상’ 내지는 ‘일상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의미화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작업에서 굳이 그것이 중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보기에 그의 재료들은 그 쓰임새보다도 그가 그저 사물의 일정한 형태에 주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라바콘이나 바나나우유곽, 에어볼 등이 그것이고, 이는 이미 작가가 주목하는 형상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로서 작가의 감응적 시선을 통해 발굴된 것들이다. 사물의 ‘쓰임’으로서의 가치는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모두 탈각된다. 또 한편 그물, 케이블타이, 테이프 등은 접합을 통한 덩어리들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인데, 이것들은 잇는 부분들을 그대로 노출시켜 형상이 주는 뉘앙스에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사물의 ‘쓰임’이 아닌 ‘형상’에 주목하고 있음은 석고캐스팅을 통해 일정한 형태(라바콘 등)를 계속 복제하는 행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덩어리들과의 접합을 시도한 작업들은 이미 일상적 사물을 그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끔, 그저 위태한 구조물로서 다양한 접합과 체현을 위한 실험물로 여길 수 있다. 결국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않는 그 무엇’에 대한 자신의 정서와 그 뉘앙스를 외화시키는 ‘구도와 형상’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찌르면서 합해지고 부정적이고 날카로워지는 불편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가 만들어낸 형상 속에서 발견되는 뉘앙스이다. 이 뉘앙스를 심화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주관/개별의 영토’에 관한 물음이다. 작가는 가장 객관적으로 인지가능한 개별의 영토를 제곱미터 등의 단위가 아닌 ‘평’으로 환산한 작업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2016년 발표한 <점점 얇아져 날카로워지는,>은 인지가능한 영역의 환산치인 평, 가장 기본으로 한평짜리 개인의 영토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폐허의 잔해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철망에 불안정하게 붙어있는 자신의 몸(손)을 들여 문지르며 더 얇게, 자신의 경계를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온갖 재료들이 서서히 탈각될 것 같은, 안전하지 않을 듯한 벽면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바닥 쪽 벽면 역시 훤히 뚫려 심리적인 안위를 보장받지 못하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 )평>(2015)은 공유지 아닌 공유지가 되어있는 텅빈 공터에 대한 상상력을 담는다. 이 땅을 자신이 마주한 일련의 중산층 계급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할까에 대해서 관찰한 일종의 ‘인상일지’로서 땅을 분할하고 인공의 것들을 입혀보는 시도였다. 마찬가지로 2015년 선보였던 <파랑은 푸르지 않고, 초록은 파랗지만도 않다>는 둥글고 온전한 파란색 에어볼들에 파란페인트를 거칠게 칠해놓고, 노끈-마찬가지로 연결지점이 노출된 재료-으로 묶어 울퉁불퉁한 덩어리들로 마치 온전하지 못한 암세포와도 같은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 뾰족한 각재들을 사이사이 ‘찔러’넣음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파란물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 작업에서 그는 사회-관계에서 도덕성 내지는 신뢰감의 색상으로 상징되는 파란색을 훼손하고자 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심경을 여실히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상징적으로 몇 개의 각목쪼가리와 바나나우유병으로 만든 작은 조각인 (2013)와 검정테이프와 비닐로 단단히 포장되어 내용물을 알 수 없는 (2013)은 작가가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업이기도 한데, ‘알 수 없는’의 뉘앙스와 불안한 구도에 대한 심리를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작업들이다. 이 작업들은 이번 개인전 <과, 의 것>(2017)에서 연속적으로 만들어져 선보이는 ‘작은 조각들’의 뉘앙스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복선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이번 <과, 의 것>(2017)은 애초 <매일의 조각>이라는 가제에서 출발한다. 이 작업은 일상에서 발견하는-아마도 마찬가지로 그것의 구도와 형상에 주목하여- 작은 사물들에 작가의 손을 통한 가공과정을 거쳐 전시기간 내 연속적으로 작은 조각들을 생산하는 것이고, 이는 전시공간의 장소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설치하기도 한다. 설치물들은 공간을 분할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며,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상황들까지도 고려하여 발란스를 견지하며 배치되지만, 또한 특유의 구도와 ‘과정적’이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음’에 의한 심리적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전시장은 ‘ㄴ’자 구조의 형태이고 한쪽 면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중정과 연결된다. 또한 마주보고 있는 공간은 연속적으로 작은 조각물들을 생산하는 아티스트의 스튜디오이자 전시 중에 교체되고 전시장에서 ‘탈락된 조각물’들을 다시금 재배치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전시장을 포함한 작품 전체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시각화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서 매시간 혹은 매일의 변용과정을 거칠 것이다. 새로 놓여져야 하는 작업들로 인하여 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기존의 작업들은 그대로 무용의 것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시기간 내내 변용을 겪는 상황들에 대한 흔적이자 증거이고, 작가의 행위에 대한 추보식 구성을 의미화하는 주석으로서의 역할을 지니는 것들이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세계 속에서 독한 생의 투쟁들을 겪고 있는 몸들이다. 전체의 부분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수동성을 시험당한다. 그 속에서 자기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전체의 페부에 접근하고 자신을 이에 동일시하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의 근간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미세한 균열지점들, 예술은 때로는 은폐된 것들을 들추어 세계에 맞서는 ‘의식’을 주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 스스로도 첨예한 감정의 한 복판에서 자신을 견뎌냄과 동시에 자신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다. 작가 김한나는 현재 바로 그 지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치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또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보이는 것 같기도 한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들추어 덩어리로 환산하는 그러한 ‘뾰족한 섬’ 같다. 뾰족한 섬에서 연속적으로 생성될 앞으로의 이야기들 역시 예술가로서 자기영토를 향한 유의미한 저항인 선에서, 이번 개인전 과정에서 선보일-아직 완성되지 않는 그 모든 매일의 조각들을 포함하여- 예술가에게 일상적 투쟁의 의미를 현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 역시도 틈틈이 관찰해보고자 한다. 결국은 나의 비평도 아직은 끝난 게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