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7일 일요일

2010Gwangju Biennale(BeArt Article)

비아트 기고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 독해


글 ● 최윤정


Intro. '만인보' 고은 작가가 노벨상 수상후보자 등극

훌륭한 역사와 지력을 지닌 '만인보'의 탄생비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은시인의 노벨상 수상 후보자 소식이 비엔날레를 달구고 있다. 현대미술의 총화, 동시대와 미래적 예술의 향연인 '비엔날레'와, 제목과 문맥적 상징으로 차용하였던 문학작품 '만인보' 사이에 끈끈한 관계가 이후 비엔날레의 세계적 명성을 다시금 공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고 외곽(?) 주변이 유난히도 시끄럽다.

의미와 의도와 시도와 정의 사이에서 여하간 비엔날레라는 미술권력과 노벨상이라는 상징권력이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를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저 그냥 그러한 사실에 모두가 의연하고 세련되게 대처하길 기대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이 전시가 광주비엔날레를 보다 위치적으로 유의미적으로 전문적으로 존속해갈 수 있도록 순수한 전시자체로, 열정적이고 젊은 총감독과 뜻을 함께 한 주변 관계자의 의기와 노고, 사연들에서 좀 더 중요하게 읽혀졌으면 하는 미래적인 바람인 것이다.


#1. 발견한 의제

'개인의 일대기가 사진매체로 하나의 역사로 기억되고, 개인을 담은 사진은 이미지 자체로서 역사화 되었다. [예징루, 퉁빙쉐가 발견한 앨범]'


어느 한때 나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사진들에서 묘한 기운을 느낄 때마다 현재까지 나의 일대기를 정리하게 되고, 혹은 기억도 안 나고 다소 낯선 경우에 사진은 이미 나의 기억감정과 무관한 그 자체로 자리하여 애초의 사연을 숨긴다. 한 인간의 순수 개인적 일대기를 간직한 사진들이 이미 당사자와 별도로 그 자체 이미지의 역사가 되어 그것이 생성된 이유와는 무관한 존재근거를 갖기도 한다. 바로 그 경험이었다. 관심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그것이 지닌 스토리에 우리는 분명 주목을 하지만, 그것이 컬렉션으로 예술작품의 현장에 놓여진 순간 보편적인 견지에서 형식과 내용에 주목하게 되는 것, 이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미지의 역사化'에 대한 문제였다. 2010광주비엔날레에 있어 '만인보'의 일차적인 의미와 '이미지의 역사化'에 대한 내용이 이번 전시를 읽는, 본 리뷰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 의제_ '만인보'

이번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는 다시금 "사람과 이미지간의 관계와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인간의 욕망", 관계적 역사에 대한 기록의 대서사시를 상징한 제목으로 차용된 것으로 안다. 특히 올해 5.18 30주년을 맞이하여 '광주'라는 역사적 도시의 성격을 아시아 및 제 3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사를 엮는 일종의 아카이브적인 요소로 보편적인 대중들이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잘 감지해냈기에 타이틀이 그다지 무색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만인보' 작품의 문맥과 상징을 떠나서도 그것이 전시의 타이틀로 사용되었을 때, 이미 2010광주비엔날레의 작품들 경향에 대해서 감상자들에게 일차적인 이해도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아마도 내용에 대해서인데, 우선 의미 있게 바라본 몇 군의 작품들을 거론하고자 한다. '캄보디아 투올 슬랭 사진 컬렉션' 및 '테디베어 아카이브', '코트야드 컬렉션', '신로 오타케의 스크랩북' 등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개별화된 이미지 담론으로서 라기 보다는 스펙터클한 기억감정 내지는 심적 과부하로 그 규모에 감탄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욱 적절해보인다. 이 경우 대중적인 호감 및 감상에 있어 기본 전시문맥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매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의미있게 본 작품은 우웬광의 수백 시간에 걸친 농부들의 일상을 각자 촬영하게 하고, 이를 1인의 시간으로 개별설치하며 동시에 참여자 전체의 일상적 시간이 한 공간에 배치된, '우리마을'이다. 이 작품은 주관적 촬영자에 의한 자기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아카이빙의 기존 '대상화'전략에 대해서 '주관과 참여', '자기기록'이라는 새로운 문맥을 담는다. 마치 김지혜<대추리 심리적 기억지도>의 또 다른 영상적 표현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특히 애착이 많이 갔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스 피터-펠트만의 9.11테러에 대한 9.12일자 세계 신문언론의 1면 헤드라인 기사 아카이빙도 눈에 띄었는데, 무역센터의 상징성과 일방적 국수세계대전 시도의 기폭제가 되었던 9.11이 갖는 스펙터클한 역사에 대한 공동 기억을 일차적으로 끌어올리되, 그 어느 국가도 그것이 1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작품이다. 마치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티벳의 자유'가 묻히고, 월드컵으로 인해 묻혔던 '수많은 아픔들'이 외면되었던 기억이 왜 이때 괜시리 떠올랐는가 말이다. 그만큼 미국의 존재감과 전쟁에 대한 기대 혹은 공포에 대한 보편적인 시선들을 담아내고는 있으되, 개인적으로 무수한 사건들이 유령처럼 전세계 9.12일자 신문 1면 주위를 떠돌아다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지는 무역센터 사진 곁에 기사규모를 달리한 각국의 사건사고들에 대해서 나의 시선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막시밀리오니 감독이 지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지평에 대해 감탄을 마지하지 않았다. 극히 이것은 기획자로서 막시밀리오니 개인에 대해 갖는 호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중 또 하나는 협업 큐레이터 없이 총감독 재량으로 본 전시를 이끌었다고 하는 점, 특히 이점은 기존 비엔날레 전시들이 시선과 동선에 대해서 '통솔'에 실패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그리고 전시연출에서 항상 감상자를 대상화시켰던 난해함에 대해서 상당 극복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수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적당한 동선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그리고 수많은 텍스트가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구성으로 인해 어렵지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묘미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전시를 둘러싸고 "평이하다, 대중적이다, 몸을 너무 사렸다, 특성적이지 못하다" 라는 일견 판단들 속에는 기존의 비엔날레 전시의 형식적 구성이 난해했던 사실에 익숙한 바, 바로 전시연출방식의 편안함에 기인한 바도 심리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한다.


#3. 의제_ '이미지의 역사화'


'이미지의 역사화'에서 '이미지의 역사', '이미지사'가 본 글의 주요 테제로 읽혀질 것이다. 실제 이번 전시연출의 형식적부분의 일관성에 대해서 나는 분명 칭찬을 마지하지 않았지만, 미시적인 접근에서, 즉 전시된 작품과 내용적 깊이에 대해서 일부 나는 여전히 내 의견을 확정하지 못했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들과 지금 동시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로 다가가는 작가들, 신진작가들의 구성이 편향되지 않고 골고루 배치되었던 부분에서 총감독의 광주비엔날레를 대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일관된 주제 안에서 펼쳐지는 전시인 만큼 작품과 주제의 밀착도도 대단히 성실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왠지 시선의 깊이가 대단히 '서구적'이고, 다소 '고루한' 부분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성과 제3세계의 사회사 및 이미지에 대한 담론들은 객관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익숙한 부분들이었다. 말하자면, 내용적으로 이 전시가 추구하는 담론들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대단히 강한 정도로 '그래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바라보는 중요한 쟁점과 이슈, 현재도 일관되게 지속되는 폭력의 장면들, 움직임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섬세한 기획에서 다소 탈장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무언가(강자와 약자, 관계, 권력과 민중, 봉기와 혁명의 역사, 아시아와 제3세계 투쟁의 역사,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서의 기록 아카이브로 읽혀지는 부분이 크고, 다소 서구적 시선에서 바라본, 심하게는 '오리엔탈리즘'적 기술로서, 마치 '디아스포라'와 '노마디즘'이 같은 자리에서 일차적인 형식에서 공통된 입장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 같은 오류를 느끼기도 했으니 말이다. 서사는 있으되 사연이 없고, 역사는 있으되 개인이 보이지 않았으며, 작가에 대한 소개가 충실했으되 작품은 그에 따라가 주지 못한 경우도 간혹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억측이라면, 나는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설치물에서 안타까움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데, 물론 최병수 작가에게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를 저항적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당시 민주화운동 문맥 뿐 아니라 그 이후 그가 계속해서 현대 사회 모순에 기반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면, 그에게서 꺼낼 수 있는 재 2의, 제 3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에 대한 의제는 또 다른 부분에서 상당했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 최병수에 대한 동시대적 유사 면모 내지는 그가 해석하는 현대 사회 모순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본 기획 틀 안에 전달되지 못했으며, 5.18 전시관에 적합할만한 설치물로, 결국 나에게는 그렇게 읽혀질 수 밖에 없었다.

전체 5관에 시립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에 이르는 거대 전시인 만큼 어려움은 짐작하나, 작가 개개인의 작업이 전시주제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하였더라면 '이미지의 역사화'이건, '만인보'에 대한 디테일이 보다 지금 현실과 접목되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움도 그만큼 컸다.

2008광주비엔날레의 전시연출 및 내용들이 다소 산발적이고 과다했다면, 2010광주비엔날레는 그 해석범위가 분명 대단히 정제되어있다. 그리고 스펙터클한 과거사에 대한 기록에 초점이 맞춰져 대중에게는 호응이 높았으되, 전문가 및 관심자 집단들에게는 평이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록은 있으되, 동시대성과 연결되는 '무엇', '오마주'로서 그리고 '설명적인' 아카이빙이기 보다는 이에 대해 '들춰냄', '전복, 엿보기' 등 '이미지'가 지닌 특성들로 직관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메타포가 컬렉션형 작업에서 부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Outro.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격/효/과_ 그 과제로서 '예민함'의 결합


"이미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작되어 어떻게 유통되는가? 이미지와 미디어를 통한 자아의 구성.. 수많은 사진들로 가득찬 이번 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 생산 기계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보도자료 내용 중에서>


"삶은 연속되는 사진영상_수잔손탁" <보도자료 내용 중에서>

작품에 대해서 개별예술가들의 시선은 작품창작 및 인식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다고 말한다. 특히 사진작업이 많이 구성되어 있어서 지루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기획자가 밝힌 의도에서 이미 그 근거들이 충분히 소개되었기에 기획의도 면에서 그의 생각이 자신의 전시에 잘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전체를 통찰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가 주요하게 선택한 예술형식은 분명 존중되어야 한다.


한편 전시를 바라보면서 나는 '비엔날레'가 무엇인지 다시금 지루한 질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보여야 하는가' 말이다. '비엔날레'가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경향과 진취적인 측면을 소개하고 미술이 할 수 있는,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시대를 읽는 전초기지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명제라면, 이번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가 일차적 의미의 비엔날레 본령과 일치하였는가 세심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현대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 보고 익히 알고 있지만, 새로운 것으로서 기대했던 작품이기보다는 그것은 국립미술관 전시로서 기대해볼 만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이미지 자체의 담론과 대중적 이미지, 역사와 5.18 30주년에 맞이하는 비엔날레로서 내용을 숙고하여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배경에는 총감독의 성실한 기획을 존중하지만, 다만 거대 전시이기에 전시주제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사실들 즉 아시아, 제3세계/ 장소성, 휴머니즘/ 역사/ 권력/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인용과 해석, 예술형식을 펼치는 부분에 대해서 예민함이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보도자료와 기획의도에서 언급된 "삶은 연속되는 사진영상_수잔손탁"의 인용에 대해서도, 도리어 나는 스펙터클한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관음증에 대해 사진영상이, 슬픔을 모방하는 '연민'의 시각으로 도리어 역사적 책임에 대한 이성적인 경계를 흐리고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폭력적인 방임을 야기한다했던 수잔 손탁의 의견이 이 인용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


2011년 4월 20일 수요일

2010ArtRoadProject_for Gungdong Generation

2010ARP
'궁동 제너레이션'을 위하여

글 ● 큐레이터 최윤정 (2010ARP)


'도깨비학교와 삼총사(양수아, 배동신, 강용운),
나는 광주와 예술의 거리를 언제나 그 느낌으로 반추한다,
한 시대 '궁동제너레이션'으로서 빛깔나게 살아진
그들에게 항시 뭔가를 표하고 싶다.'



2010아트로드를 진행하면서 '예술의 거리' 고유명사에 대한 번역을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아트로드 프로젝트'라는 것은 문화예술의 각 부분을 단어로서 차용하고 이를 한 서사로 묶어 예술의 거리 곳곳을 차고 넘치고 빛깔이 돌게끔 노력해보자는 기획팀 태도에 대한 일종의 '지시어'였다.

물리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도시의 가지 중 일부인 스트릿이 예술의 거리(Art Street)에 대한 번역어로서는 무엇보다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현재 예술의 거리는 도시의 한 '거리(Street)'로서는 다소 육중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말인 즉, 이곳은 전혀 발랄하지 않다. 이미 광주 문화예술계 스토리텔링 장소로서 유의미하게 여겨지고 있는 장소이면서, 전문성에 대한 숨은 인재들이 곳곳에 상존한다. 이를 연구하여 프로그램의 기초를 세울 필요가 있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어왔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자는 것이 예술의 거리에는 더욱 적합해 보인다. 여기 반드시 낯설고 젊은 기운이 수혈되어야 함은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며 필수적이다. '스트릿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이 말이 맞다. 낯선 것, 이질적인 것 또한 수혈되어야 한다. '스트릿'처럼 좀 더 발랄해져야 한다. 마치 멀리 산바람이 전해온 낯설지만 상쾌한 미풍처럼, 이것은 예술의 거리에 생동감을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다. 익숙한 가치에 대한 내실과 이질적인 것을 수혈하여 얻는 다양성이 동시에 발할 때 얻을 수 있는 바를 상상해보자. 항시 이질적인 것은 충돌을 가져오게 되어 있다. 다만 생산적인 충돌이라면 혁신으로 이어지며, 단 이러한 경우, 모두들 긴 시간동안 사람들의 의식 사이에서 이질적인 것의 수용이 골고루 스며들 때까지 넓은 아량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장은 항상 너무나 조급해서 많은 것을 놓친다.

예술의 거리 아트로드 프로젝트가 단순히 이벤트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고안된 프로그램이 얼마나 예술의 거리 주민들의 삶과 어우러질 수 있는지, 또 어우러지는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새로운 가치로 효과적으로 자생적 활력을 띨 수 있게 될 것인지 총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현장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개미시장1+1 의도는 좋았으되, 구체적인 실천이 부족했다. 예술의 거리 상인은 물론이고, 개미시장 참여자들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면서 더불어 예술의 거리 상인과 개미시장 참여자들의 협업을 도모하여 예술의 거리 상가에 젊은 기운을 북돋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극히 짧은 기간에 또한 광주시 및 해당기관 행정에 따른 사업자체의 지연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시간적으로 형식만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의미를 심화하고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니, 겨우 남은 형식은 매주 스태프들의 고단함을 가중시키고 현장 일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뿐이었다.

우선적으로 관계지향적인 프로젝트-혹은 일정한 패턴을 지닌 삶에, 어떤 비젼을 다소 계몽적으로 주입해야 하는 프로젝트(명칭 자체가 'oo활성화 사업' 내지는 'oo특화지구 조성 사업')에서 1년 이내에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장이 화려하면 속은 텅 비고, 속이 꽉 차려면 장기를 내다보고 프로젝트의 성패를 논해야 한다. 말하자면 관계형성기, 주민참여 제안기, 프로그램 기획 및 실행. 이렇게 관계지향적인 프로젝트에서는 3단계의 과정이 필요한데, 실상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거꾸로 시행된다. 그러다 보니 초기 마찰이 심하고 결국은 연간 단위로 팀을 바꾸게 되면서, 애초의 문맥도 아이디어도 사라진다.

그러나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거리 특화프로그램으로서 주민과 기획팀 사이에서 공동 제안된 '무료감정', '경매' 프로그램이 진행된 과정은, 절차를 논외로 했을 때, 중요한 모범사례로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궁동제너레이션' 전시가 예술의 거리가 지닌 이야기와 정체성을 보여주고, 더불어 광주미술사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기에, 논의의 차원은 달랐지만, 이러한 고민을 심화하면서도 이벤트적으로 프로그램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술의 거리 활성화 전략으로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술의 거리 자체 역량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상가번영회와 공동 기획한 '무료감정'과 '경매' 프로그램은 2010ARP의 주민활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단, 첫 시작은 '선물'의 의미로 다소 느슨하였지만, 앞으로는 전문화된 시스템이 장착된 프로그램으로서, 예술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 전문화/고급화 전략으로 장기간 예술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랜드마크화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궁동제너레이션이라는 말만큼 지금의 예술의 거리 부제로 어울리는 이름은 없어 보인다. 지금 예술의 거리에 예술의 거리에 관한 한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한 장소를 추억하는 경험과 동일한 기억의 나이를 지닌 사람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그리고 이후 궁동제너레이션의 새로운 모습을 포착하면서, 있어왔던 가치들을 발굴하는 수색과 연구가 일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흔히들 습관적으로 말하듯 '스토리텔링'이라며, 단순화할 수 있는 개념과 차원이 다르다. 기획은 연구여야 한다.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8월 경기창작센터 발제문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
대상에 대한 미묘한 심리 'What is the Real?!'



최윤정 ● 2009 PAAD 레지던스 팀장/매미큐레이터



I.

History..



‘매개공간 미나里’는 축약하여 공식적으로는 ‘매미’, 영문으로는 발음대로 ‘Memispace’로 불린다. 보통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유성음의 발음이 긴한 산뜻함을 주는 관계로 ‘미나리’로도 많이 불리고 있다. 매개공간은 기존의 대안공간이 미술관 및 화랑에서 전시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주는 의미를 넘어서서, 미술만이 아닌 공연 및 타예술 장르를 접목시키고 예술인들 사이의 교류를 꾀하려는 의미에서 지어진 명칭이다. 또한 장소적으로 재래시장 쪽에 위치하게끔 한 이유 역시도 매개공간의 역할이 생활과 예술이 보다 친밀해질 수 있게끔 서로 연결하고자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里’는 곳곳에 매미의 바람처럼 많은 문화적 공간과 인프라가, 또한 향유자들이 늘어 예술로 행복해지는 장소, 지점, 곳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나름의 공간 주소임을 함축한다.
이곳은 지역 안에서 대안적인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해온 지역 예술인들이 힘을 합쳐 꾸려진 공간인 것만큼은 분명 확실하다. 현재까지도 그 일원들이 운영위원으로 남아 역할하고 있다. 논의 초기에서부터 이 같은 대안적인 공간의 필요성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지역예술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작금의 지역예술인들 사이의 벽들을 허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심이 개입할 수 없는 공간이자 ‘사랑방’ 개념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왔고, 현재는 이를 안고 구체적으로는 예술인들의 작업에도 일조할 수 있는 질적으로 만족스런 프로그램들을 기획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역할할 수 있는 몇 가지들을 실행하고 수정하면서 완성시켜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고, 더불어 행여나 기획에 파묻혀 이 공간이 지닌 애초의 바람이었던 ‘사랑방’ 역할을 놓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공간의 한 기준이 된다.


지난 2008광주비엔날레에서 주 전시가 아닌 보조전 형식으로 진행된 ‘복덕방 프로젝트(2008 광주비엔날레 제안전)’의 파장은 오히려 주 전시보다 더욱 주목받는 성과로 이어졌다. ‘복덕방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물적교환의 장소이자, 또한 정보교류의 역할을 했던 ‘복덕방’에서 모티브를 딴 것이다. 이것이 예술프로젝트로 진행되었을 때, 그 주요 핵심은 다음과 같다. 예술가의 창작노동이 자폐적인 작업실 구조가 아닌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그들과 감정적인 교류를 하면서 정적인 가치로서 그 교환가능성을 실현해 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고, 중앙에 비해 지역 예술이 그렇듯, 도심공동화와 현대적인 시설의 대형마트들이 곳곳에 생기면서 점차 그 활력을 잃어가는 ‘재래시장’이 이 프로젝트의 실행에 있어 장소성(site-specific)이라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7회에 걸친 국제적인 비엔날레 행사가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 지역예술계는 큰 탄력을 받지 못했다고 공공연히 평가되는 사례를 듣게 된다. 한편 최근 시장 상인들의 협력과 지역예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하여 ‘복덕방 프로젝트’가 한편 성공을 거두면서 국제적인 행사 치르기에만 골몰하던 광주광역시 역시도 이 프로젝트의 가능태를 살피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 대인시장은 입구 쪽 회센터를 제외하고 한 낮에도 손님이 거의 드나들지 않았고, 눈에 띌 정도로 많은 빈 점포들은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배가시켰다. 대형마트와의 경쟁력을 갖기 위해 각종 현대화사업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뭔가 대안을 찾고 있던 시장 상인들에게, 빈 점포를 예술가의 작업실로 혹은 전시실로 바꿔보고자 하는 프로젝트 팀의 아이디어는 어찌 보면 대단한 활력소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적극적인 시장 상인들의 호응 하에 예술가들이 시장 곳곳을 점유하며 채워나가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비엔날레가 끝난 후, 복덕방 프로젝트는 관의 지원을 받고 또한 ‘매개공간 미나里’ 가 시행처가 되어 다시금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2009 대인시장 공방거리 조성사업)’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그 파장 속에서 미술인 뿐 아니라 VJ, 공연가, 문학인, 지역 대안언론, NGO단체들까지도 문화활동의 실험장으로서 대인시장을 바라보고 이에 함께 참여하였다. 재밌는 것은 많은 지역민들이 오가고, 또한 타 지역에서 방문한 관심있는 사람들과 혹은 이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하고자 하는 타지역 관계자들이 연이어 오가면서, 국밥집 외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없었던 대인시장에 저렴한 분식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시장 사람들의 작은 바자회로 간혹 비정기적으로 열렸던 ‘풍물시장’이 지금은 하루도 쉬지 않는 ‘벼룩시장_장깡’으로 점차 그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그 누구도 그것이 지역에 또한 타 지역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대단히 회의적이었고, 또한 지역에서의 예술 활동이기에 주목받을 리 없다고, '어려움'에 대해서도 격려가 아닌 비난이 우선이었던 일부 풍조는 너무나도 일반적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예술을 통한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에 맞물려 그것이 성공한 사례가 드문 탓에 지금 대인시장은 개발정책으로만 일관하는 현 정세에 예술과 문화의 숨결이 그보다 더한 가치를 생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은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예술가는 시장 상인들과 언제서 부터인가 이웃이 되었고, 시장 상인들은 멀게만 느껴졌던 예술을 자신의 일터에서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를 향유하고 또한 예술활동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자, 젊은 기획자로서 현장예술 활동에 대한 무수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점검하는 시기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II.

論_'문화도시'를 괴롭히는 몇 가지 사안


<기관_광주시/광주문화예술위원회>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며, 광주비엔날레이며 동시대 문화예술의 기반 형성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광주시 자체의 문화예술기관 관리시스템 및 메뉴얼은 그다지 준비가 많이 되어있지 않은 듯하다. 말하자면 광주시 지원으로 진행되는 사업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직속기관 광주문화예술진흥위원회는 문화행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진행에 있어 안티에 가까울 정도로 현장예술활동 및 동시대 예술활동에 대한 마인드가 심각히 결여되어 있는 실정이며, 놓쳐서는 안될 '현장성'과 적정한 '아이디어'의 발현과 펼침에 저해되는 요구들을 빈번하게 해왔다. 이는 담당자 개인의 문제로서라기 보다는 기관이 존립해야 하는 시스템적 근거에 대한 공유가 기관 자체에도 수립되어 있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실제로 2009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 진행시 행정서식이 몇 차례 뒤바뀌는 경우가 있었으며, 그중 한 이유는, 바뀐 행정관의 '취향' 때문이라는 담당자의 변명을 들은 적도 있었다. 전통시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만큼 '현장성'은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또한 전통시장 활성화의 문맥과 더불어 가능하다면 시장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출은 상인 및 상가번영회와의 관계성을 고려하여 고민할 필요도 있었다. 행정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식 및 협의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 '10억 사업에 유레알 카드 한장으로만 지출하라'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이미 여기에서부터 문제는 내포되어 있었다. 과정 중간중간 이에 따라 다양한 개선책을 내놓고 협의를 하면서도 결국은 협의만 하다가 프로젝트 마무리까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동반자적 시선의 결여이다. 총감독의 역할과 본인의 역할을 헷갈려하는 담당관의 태도에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이디어의 입안자와 주관/주최의 개념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 집행기관으로서 세부 기획의 내용이며, 내용에 대한 이해 없이 섭외자에 대해 간섭하는 양태는 기본이었고, 느끼기에 일종의 길들이기를 위한 것인가 의심한 적도 여럿 있다. 이는 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동반자적인 역할 분담(행정/기획)이 아니라 대기업의 '하청업체'로서 인식하는 기본 틀이 대단히 공고했던 탓이다.
핵심으로 다루고 논의의 출발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문화행정의 시스템 부재와 동반자적 마인드의 결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으되, 평소 '좋은게 좋은'에 걸맞게 다각도로 행동해야 한다는 다소 비합리적인 결론으로 논의를 정리하는 것은 극히 무리라고 본다.

세부 진행 방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최근의 경향/유행에 따라서 사업을 공고하고 세부 기획및 문화행정 지원에 대해서 탁상공론하며 스스로 사업의 주최 자리에 서야하는지 혹은 주관의 자리에 서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듯한 모습에서 시간이 참 많은가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역 내 이해관계>

'범위가 좁으면 좁을수록 이해관계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된다'
프로젝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무성한 소문과 일종의 간보기가 시작된다. 개인적인 인맥에서부터 압력까지 '도대체 이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무엇으로 생을 유지했을까' 싶을 정도였으나 그러나 대처 못할 것은 없었다.
기관사업의 한계라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당한 절차와 심사과정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기준 없이 이를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항목이다. 점차 줄어가는 지역의 젊은 작가들을 키워 근간을 탄탄히 하고, 보다 프로젝트의 의도를 살리고 그에 장소성을 고려하여 마련한 작업계획에 준해 레지던스가 운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설득과정은 결국 '너희들끼리 해먹기'라는 오해로 귀결되는 일부 세간 비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의 의의 중 하나는 지역 내 기획자의 고민에서 시작된 복덕방 프로젝트에 대한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추진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그간 타지역에서 섭외된 외부기획자 활동에 대한 오랜 불신이 배경에 놓여 있다. 물론 각 프로젝트의 상황이 일회적이고 또한 단기간 동안 광주에 체류하면서 지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한계를 탓해야 하는 부분이 크다는 점 또한 모두들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광주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기획자의 손에서 프로젝트가 구상되었다는 점은 지역에서도 중요한 의의로 꼽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역 내 기획자의 활동은 외부기획자의 활동에 비해 자유롭지 못하다. 온갖 이해관계에 시달려야 하고 왜곡된 '지역성'을 무기로 하는 내용에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부분은 프로젝트의 집중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기있는 대처가 필요한데, 이 대처방안은 항상 '뒷말'을 들을 각오가 단단히 갖춰져야 하고 스스로를 상당히 무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항목이기도 하다. 대단히 차갑고 저돌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 실제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를 순수하게 지지하는 지역 일부 예술계는 아예 프로젝트 및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유는 본인들의 참여로 프로젝트팀이 비합리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감에서였다.
이러한 현상을 개인적으로 담론생산에 대한 그간의 부재 혹은 낯설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 이것이 필요한지, 지금 시대에서 지금 이곳에서 왜 이러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기대와 파장이 어떨 것인지 등. 당연히 담론을 향한 자리도 곳곳 마련되고는 있으나 종종 그것이 무슨 이야기를 위해 마련된 자리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결국은 한 자리를 맴돌거나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론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역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제 3자의 시선과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부에서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 봇물치듯 쏟아져 나오는 각종 프로젝트, 우후죽순 내용없이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에 대해서 낱낱이 객관적인 비판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III.

'발견_가능태로서의 지역 컨텍스트'


<고생의 정점_레지던시 참여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빈 점포에 예술가들을 입주시키고, 전통시장이라는 장소성과 상인들과의 관계('주민화'), 공통의 목적을 지니고 활동하는 예술공동체의 실현을 주요 핵심으로 삼았다. 예술가들의 입주 조건은 그들의 포트폴리오로 일차적 역량을 평가하여 1차 선발하고, 대인시장 현장 답사 후 작업수행계획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타지역 4인/ 지역 3인의 구성으로 7인의 심사단이 구성되어 각각의 배점표를 작성하여 최종선발자를 가르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상반기 단기작가 15인/ 하반기 단기작가 15인 등 30인을 선발하였고, 심사제외로 지역내 장기작가 10인은 기획팀 주관으로 선발하였다. 지역내 이해관계에 따른 고충들로 인해 대단히 차갑게 진행되었던 심사였다.
총 40인이 참여한 레지던시는 현장의 우연적인 상황과 더불어 수많은 변수들이 작용하였는데, 짧은 기간 내 작업실 개조며, 유레알 카드 하나로 개개인의 작업재료비를 구입하러 스케쥴표를 짜고 쫓아 다녀야 하는 상황이며(한장의 유레알카드는 레지던시 만이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 프로그램과 공유), 공동체이기에 함께 해야 할 일이 많아 개인작업에 보다 몰두할 수 없었던 상황이며, 일부 상인들의 오해와 반발로 애초 작업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부분들이며 수많은 난제들이 있었다. 40인의 작가 개개인을 꼼꼼히 챙길 수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서 참여작가들에게 큰 미안함과 아쉬움을 남긴다.
무엇보다도 욕심을 냈던 것은 담론을 위한 '비평작업'이었다. 비평가 1인 대 작가 3인 매칭, 주말 현장크리틱, 오픈스튜디오 기간 이뤄진 삼고초려 비평워크숍으로 그 기반을 다졌으나 현장 운용의 미와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진행자로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많이 느끼고 반성하게 되었던 사건들이었다.

현재로서는 당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던 작가들 사이에 당시 함께 고생했던 내용들이 끈이 되어 젊은 작가층들 사이에서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아예 대인시장에 작업실을 옮겨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스레 자생적인 공동체가 형성된 셈이다. 또한 당시에도 자생작가(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자율입주작가')군이었던 팀들이 여전히 남아 대인시장의 빈점포를 메우며 '대소쿠리'(자율입주작가 협의체)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사업이 '2009 대인시장 공방거리 조성사업'이었으니, 그 성과는 남은 셈이다.

이미 모두들 작업실이 부재한 상황도 아니고 작업환경적 조건에서 대인시장이 전혀 훌륭하지 않았음에도 프로젝트 이후 왜 대인시장에 지원 없이도 자율적으로 남았는가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었다. 공통된 의견은 혼자서 고민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하고 짊어져야 하는 기존의 자폐적인 작업환경 구조에서 많은 작가들이 한데 모여 작업에 대해 논하고, 정보도 공유하고 작업에 대한 새로운 영감에 대해서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게 되는 체험이 대인시장에 남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밝혔다. 결국 이 프로젝트가 예향 광주를 알리는데 어떤 기여를 했고, 명성을 얻게끔 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오히려 그것이 끝난 후 남은 흔적과 파장, 참여 예술가들의 고민과 판단, 작업적인 모색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것이 보다 더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21세기 예향 광주>

최근 예향 광주는 기존 문인화 전통 및 수많은 예술가, 일반인들의 예술교육에 대한 접근 가능성, 광주비엔날레, 아시아문화중심도시 등 전반적으로 복합적인 문화도시로서의 틀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웨어가 부재한 상황에 하드웨어는 계속해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고, 소프트웨어는 단순히 형식만 갖춘 모양새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에 대한 비판도 많고 비난도 많지만, 다행스럽게도 '의/향'의 의의를 잘 계승하고 있는 새로운 주 세대들이 문화활동가로 많이 등장하고 있고 네트워크에 대한 욕망도 이전 세대에 비해 상당히 열려져 있다. 또한 과거 남도문화, 문인화의 전통을 벗어나 현대적인 콘텍스트와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끈기있는 예술가들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더불어 관성적이지 않고 '지역성'에 대한 합리적이면서도 대안적인 활동을 펼치는 '전라도닷컴'이나, 문화예술활동에 대한 아낌없는 비판과 지지,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주저하지 않는 '광주드림' 등의 언론 활동도 점차 문화예술 활동가들을 다그치면서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반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우며 역할하고 있고 타 언론의 기자단도 일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어느 곳이나 지역 내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이해관계의 '진실'에 대해서 자율적으로 차가운 판단을 하며 활동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새록 발견된다는 점이다. 더불어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비롯하여 광주비엔날레의 경우에도 '복덕방 프로젝트'를 함께 일군 일원으로서 지역예술계에 대한 수용과 참여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서 모색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예술은 항상 문제적 지점에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오히려 불안한 시기나 혹은 부조리한 현상에서 예술은 항상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그에 걸맞는 공적인 기여를 한다. 비단 전통적인 문화의 장이나 축제 등으로 ‘문화예술의 도시’를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문화예술’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합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해 사려하는 범위가 훨씬 더 넓어야 한다. 작은 움직임들이 그래서 더욱 광주에는 소중하다.


<새로운 모색_Issue Maker>

2009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가 막이 내리고, 2010 대인시장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기관에서 선정한 단체는 매개공간 미나리가 아니다. '2010 아시아문화특화지구 사업'으로 대인시장, 예술의 거리 일대가 공표되었고, 매개공간 미나리는 '예술의 거리'를 재각색해야 하는 시점에 섰다. 실제 애초에 꿈꿔왔던 대인예술시장의 연속성이 파기되는 시점이다. 기관사업의 한계로서 장기간 플랜과 연속성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마도 2010년에는 기존 '문전성시프로젝트'에 준하는 프로그램들이 대인시장을 채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원을 받았건 아니건, 매개공간 미나리의 설립 목적과 추구하는 지점에서 대인시장은 당연한 존립 근거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Artists in Research' 프로그램으로 매개공간 미나리가 운영하는 레지던시가 대인시장에서 동시에 펼쳐진다. 보다 예술가간 공동협의 및 자율적인 연구에 대한 다원적 접근을 강화한 시도로서 입주자 5인을 선발하고 일본 및 카자흐스탄 단체와의 1개월간 작가 교류(지역작가 매칭, 스튜디오 공동사용, 협업작업)로 '아시아성' 및 '아이텐티티_교포' 내용적 담론을 심화시킨 구성이다. 더불어 매개공간 미나리 공간 내 프로그램과의 연결성을 강화하여 작지만 밀도있는 창작소 프로그램으로서 매미 2010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_레지던시가 새롭게 마련되었다. 비용적인 한계로 우선은 지역의 젊은 작가 및 연구자, 단체들을 모집하여 9월부터 본격적으로 3개월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참고로 예술의 거리 프로젝트 관련해서는 예술의 거리 활성화에 따른 시민참여 프로그램(개미시장, 궁동예술제) 및 예술인 DB구축(소규모 커뮤니티 활성화, 자료아카이브)이 핵심이며, 이미 노쇠한 예술의 거리에, 지역 내 소외 예술기반 지원을 전략으로 하여 광주의 독립예술 활성화를 위한 거점 기반을 구축하고 오랜 시간 '광인뮤페_광주인디뮤직페스티벌'을 주관해왔던 네버마인드와의 협력으로 올해 처음으로 작게나마 '광주 프린지 페스티벌'을 기획하게 되었다. 2009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와 그에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예술가군들과 마찬가지로 이 프로젝트 역시 지역내 창작자들에게 소소한 파장을 안겨줄 수 있기를 바란다.



<끝>

BEART 10월호 기고문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 독해


글 ● 최윤정 (매개공간 미나리 큐레이터/ArtCritic)



Intro. '만인보' 고은 작가가 노벨상 수상후보자 등극


훌륭한 역사와 지력을 지닌 '만인보'의 탄생비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은시인의 노벨상 수상 후보자 소식이 비엔날레를 달구고 있다. 현대미술의 총화, 동시대와 미래적 예술의 향연인 '비엔날레'와, 제목과 문맥적 상징으로 차용하였던 문학작품 '만인보' 사이에 끈끈한 관계가 이후 비엔날레의 세계적 명성을 다시금 공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고 외곽(?) 주변이 유난히도 시끄럽다.

의미와 의도와 시도와 정의 사이에서 여하간 비엔날레라는 미술권력과 노벨상이라는 상징권력이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를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저 그냥 그러한 사실에 모두가 의연하고 세련되게 대처하길 기대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이 전시가 광주비엔날레를 보다 위치적으로 유의미적으로 전문적으로 존속해갈 수 있도록 순수한 전시자체로, 열정적이고 젊은 총감독과 뜻을 함께 한 주변 관계자의 의기와 노고, 사연들에서 좀 더 중요하게 읽혀졌으면 하는 미래적인 바람인 것이다.


#1. 발견한 의제


'개인의 일대기가 사진매체로 하나의 역사로 기억되고, 개인을 담은 사진은 이미지 자체로서 역사화 되었다. [예징루, 퉁빙쉐가 발견한 앨범]'


어느 한때 나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사진들에서 묘한 기운을 느낄 때마다 현재까지 나의 일대기를 정리하게 되고, 혹은 기억도 안 나고 다소 낯선 경우에 사진은 이미 나의 기억감정과 무관한 그 자체로 자리하여 애초의 사연을 숨긴다. 한 인간의 순수 개인적 일대기를 간직한 사진들이 이미 당사자와 별도로 그 자체 이미지의 역사가 되어 그것이 생성된 이유와는 무관한 존재근거를 갖기도 한다. 바로 그 경험이었다. 관심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그것이 지닌 스토리에 우리는 분명 주목을 하지만, 그것이 컬렉션으로 예술작품의 현장에 놓여진 순간 보편적인 견지에서 형식과 내용에 주목하게 되는 것, 이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미지의 역사化'에 대한 문제였다. 2010광주비엔날레에 있어 '만인보'의 일차적인 의미와 '이미지의 역사化'에 대한 내용이 이번 전시를 읽는, 본 리뷰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 의제_ '만인보'


이번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는 다시금 "사람과 이미지간의 관계와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인간의 욕망", 관계적 역사에 대한 기록의 대서사시를 상징한 제목으로 차용된 것으로 안다. 특히 올해 5.18 30주년을 맞이하여 '광주'라는 역사적 도시의 성격을 아시아 및 제 3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사를 엮는 일종의 아카이브적인 요소로 보편적인 대중들이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잘 감지해냈기에 타이틀이 그다지 무색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만인보' 작품의 문맥과 상징을 떠나서도 그것이 전시의 타이틀로 사용되었을 때, 이미 2010광주비엔날레의 작품들 경향에 대해서 감상자들에게 일차적인 이해도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아마도 내용에 대해서인데, 우선 의미 있게 바라본 몇 군의 작품들을 거론하고자 한다. '캄보디아 투올 슬랭 사진 컬렉션' 및 '테디베어 아카이브', '코트야드 컬렉션', '신로 오타케의 스크랩북' 등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개별화된 이미지 담론으로서 라기 보다는 스펙터클한 기억감정 내지는 심적 과부하로 그 규모에 감탄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욱 적절해보인다. 이 경우 대중적인 호감 및 감상에 있어 기본 전시문맥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매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의미있게 본 작품은 우웬광의 수백 시간에 걸친 농부들의 일상을 각자 촬영하게 하고, 이를 1인의 시간으로 개별설치하며 동시에 참여자 전체의 일상적 시간이 한 공간에 배치된, '우리마을'이다. 이 작품은 주관적 촬영자에 의한 자기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아카이빙의 기존 '대상화'전략에 대해서 '주관과 참여', '자기기록'이라는 새로운 문맥을 담는다. 마치 김지혜<대추리 심리적 기억지도>의 또 다른 영상적 표현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특히 애착이 많이 갔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스 피터-펠트만의 9.11테러에 대한 9.12일자 세계 신문언론의 1면 헤드라인 기사 아카이빙도 눈에 띄었는데, 무역센터의 상징성과 일방적 국수세계대전 시도의 기폭제가 되었던 9.11이 갖는 스펙터클한 역사에 대한 공동 기억을 일차적으로 끌어올리되, 그 어느 국가도 그것이 1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작품이다. 마치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티벳의 자유'가 묻히고, 월드컵으로 인해 묻혔던 '수많은 아픔들'이 외면되었던 기억이 왜 이때 괜시리 떠올랐는가 말이다. 그만큼 미국의 존재감과 전쟁에 대한 기대 혹은 공포에 대한 보편적인 시선들을 담아내고는 있으되, 개인적으로 무수한 사건들이 유령처럼 전세계 9.12일자 신문 1면 주위를 떠돌아다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지는 무역센터 사진 곁에 기사규모를 달리한 각국의 사건사고들에 대해서 나의 시선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막시밀리오니 감독이 지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지평에 대해 감탄을 마지하지 않았다. 극히 이것은 기획자로서 막시밀리오니 개인에 대해 갖는 호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중 또 하나는 협업 큐레이터 없이 총감독 재량으로 본 전시를 이끌었다고 하는 점, 특히 이점은 기존 비엔날레 전시들이 시선과 동선에 대해서 '통솔'에 실패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그리고 전시연출에서 항상 감상자를 대상화시켰던 난해함에 대해서 상당 극복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수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적당한 동선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그리고 수많은 텍스트가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구성으로 인해 어렵지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묘미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전시를 둘러싸고 "평이하다, 대중적이다, 몸을 너무 사렸다, 특성적이지 못하다" 라는 일견 판단들 속에는 기존의 비엔날레 전시의 형식적 구성이 난해했던 사실에 익숙한 바, 바로 전시연출방식의 편안함에 기인한 바도 심리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한다.


#3. 의제_ '이미지의 역사화'


'이미지의 역사화'에서 '이미지의 역사', '이미지사'가 본 글의 주요 테제로 읽혀질 것이다. 실제 이번 전시연출의 형식적부분의 일관성에 대해서 나는 분명 칭찬을 마지하지 않았지만, 미시적인 접근에서, 즉 전시된 작품과 내용적 깊이에 대해서 일부 나는 여전히 내 의견을 확정하지 못했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들과 지금 동시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로 다가가는 작가들, 신진작가들의 구성이 편향되지 않고 골고루 배치되었던 부분에서 총감독의 광주비엔날레를 대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일관된 주제 안에서 펼쳐지는 전시인 만큼 작품과 주제의 밀착도도 대단히 성실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왠지 시선의 깊이가 대단히 '서구적'이고, 다소 '고루한' 부분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성과 제3세계의 사회사 및 이미지에 대한 담론들은 객관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익숙한 부분들이었다. 말하자면, 내용적으로 이 전시가 추구하는 담론들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대단히 강한 정도로 '그래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바라보는 중요한 쟁점과 이슈, 현재도 일관되게 지속되는 폭력의 장면들, 움직임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섬세한 기획에서 다소 탈장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무언가(강자와 약자, 관계, 권력과 민중, 봉기와 혁명의 역사, 아시아와 제3세계 투쟁의 역사,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서의 기록 아카이브로 읽혀지는 부분이 크고, 다소 서구적 시선에서 바라본, 심하게는 '오리엔탈리즘'적 기술로서, 마치 '디아스포라'와 '노마디즘'이 같은 자리에서 일차적인 형식에서 공통된 입장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 같은 오류를 느끼기도 했으니 말이다. 서사는 있으되 사연이 없고, 역사는 있으되 개인이 보이지 않았으며, 작가에 대한 소개가 충실했으되 작품은 그에 따라가 주지 못한 경우도 간혹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억측이라면, 나는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설치물에서 안타까움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데, 물론 최병수 작가에게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를 저항적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당시 민주화운동 문맥 뿐 아니라 그 이후 그가 계속해서 현대 사회 모순에 기반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면, 그에게서 꺼낼 수 있는 재 2의, 제 3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에 대한 의제는 또 다른 부분에서 상당했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 최병수에 대한 동시대적 유사 면모 내지는 그가 해석하는 현대 사회 모순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본 기획 틀 안에 전달되지 못했으며, 5.18 전시관에 적합할만한 설치물로, 결국 나에게는 그렇게 읽혀질 수 밖에 없었다.

전체 5관에 시립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에 이르는 거대 전시인 만큼 어려움은 짐작하나, 작가 개개인의 작업이 전시주제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하였더라면 '이미지의 역사화'이건, '만인보'에 대한 디테일이 보다 지금 현실과 접목되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움도 그만큼 컸다.

2008광주비엔날레의 전시연출 및 내용들이 다소 산발적이고 과다했다면, 2010광주비엔날레는 그 해석범위가 분명 대단히 정제되어있다. 그리고 스펙터클한 과거사에 대한 기록에 초점이 맞춰져 대중에게는 호응이 높았으되, 전문가 및 관심자 집단들에게는 평이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록은 있으되, 동시대성과 연결되는 '무엇', '오마주'로서 그리고 '설명적인' 아카이빙이기 보다는 이에 대해 '들춰냄', '전복, 엿보기' 등 '이미지'가 지닌 특성들로 직관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메타포가 컬렉션형 작업에서 부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Outro.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격/효/과_ 그 과제로서 '예민함'의 결합


"이미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작되어 어떻게 유통되는가? 이미지와 미디어를 통한 자아의 구성.. 수많은 사진들로 가득찬 이번 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 생산 기계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보도자료 내용 중에서>


"삶은 연속되는 사진영상_수잔손탁" <보도자료 내용 중에서>

작품에 대해서 개별예술가들의 시선은 작품창작 및 인식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다고 말한다. 특히 사진작업이 많이 구성되어 있어서 지루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기획자가 밝힌 의도에서 이미 그 근거들이 충분히 소개되었기에 기획의도 면에서 그의 생각이 자신의 전시에 잘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전체를 통찰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가 주요하게 선택한 예술형식은 분명 존중되어야 한다.


한편 전시를 바라보면서 나는 '비엔날레'가 무엇인지 다시금 지루한 질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보여야 하는가' 말이다. '비엔날레'가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경향과 진취적인 측면을 소개하고 미술이 할 수 있는,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시대를 읽는 전초기지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명제라면, 이번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가 일차적 의미의 비엔날레 본령과 일치하였는가 세심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현대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 보고 익히 알고 있지만, 새로운 것으로서 기대했던 작품이기보다는 그것은 국립미술관 전시로서 기대해볼 만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이미지 자체의 담론과 대중적 이미지, 역사와 5.18 30주년에 맞이하는 비엔날레로서 내용을 숙고하여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배경에는 총감독의 성실한 기획을 존중하지만, 다만 거대 전시이기에 전시주제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사실들 즉 아시아, 제3세계/ 장소성, 휴머니즘/ 역사/ 권력/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인용과 해석, 예술형식을 펼치는 부분에 대해서 예민함이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보도자료와 기획의도에서 언급된 "삶은 연속되는 사진영상_수잔손탁"의 인용에 대해서도, 도리어 나는 스펙터클한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관음증에 대해 사진영상이, 슬픔을 모방하는 '연민'의 시각으로 도리어 역사적 책임에 대한 이성적인 경계를 흐리고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폭력적인 방임을 야기한다했던 수잔 손탁의 의견이 이 인용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이은정 작가 비평

글|최윤정_미술비평/미학



'화면 속 시각적인 것이 엷은 붓질로 인해 묘한 잔영을 일으킨다. 잔상 혹은 잔영, 눈에 보이는 명확함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이고 기억감정을 구체화하는 형상, 작가 이은정의 작업은 그리하여 흡사 환영과도 같다. 그러나 망막에 결코 맺히지 않았었을 법한, 곧바로 형식 자체에서 물리적 감각체험을 끌어내는 이 이미지는, 도리어 내적으로 명확해지며 역으로 시각을 자극한다.'

I.

그녀가 일필의 가는 선에 주목하고 이로써 머리칼, 피부의 표면 등을 근 10여 년간 연구하고 표현해왔던 전작에서부터 보자면 지금의 ‘흐릿한 초상’ 연작은 의도적으로 숨겼으되, 그 이면의 주제를 정직하게 공개하고 있다. 한편 이전 작업은 작품에 드러나는 얼굴의 '결'과 머리칼 한올 한올을 세밀한 붓질로 표현하며, '이형사신'의 정신성을 기반으로 한 고도의 관찰력과 집중을 요한 작업이었다.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소재와 주제에 대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반복하고 훈련하고 실천해온 작가 이은정은 이와 관련한 상당한 작업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예의 작업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가늠케 하는 사람이다.


최근작에서 나는 작가의 말대로 그녀가 여성이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있고, 그러다 보니 여성과 모계에 관심이 가고, 그 한 결과로 작품의 내용이 ‘모계’, ‘지폐 속 여인들’, ‘종부이야기’로 이어진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기서 '뉘앙스'라 표현한 것은 작가가 확실히 그것을 고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비록 일순간이라 해도 내 시선에서 작가 이은정은 이와 왠지 절실히 밀착되어 있다거나 대단히 유관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고안한 작품형식과 여기에 보다 어울리는 내용적 관심사를 효과적으로 잘 조합했다.


II.

그녀의 작품을 바라볼 때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일정 '거리'를 두어야 이미지가 제대로 보인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자세히 보고자 가까이 다가가면 연한 펄코팅에 반사하는 빛만 보일 뿐이고, 대형화폭에 새겨진 이미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감상자의 발이 점점 작품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작품자체가 시선의 일정한 거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시선의 일정한 거리는 또한 작가가 주제로서 다루는 대상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와도 닮아있다. 그녀의 ‘종부이야기’는 심층 자료연구를 토대로 한다. 일차적으로 전국의 종부들을 열심히 발품 팔아 찾아다니며 인터뷰 자료를 수집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 혹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동일시하거나 오마주를 띤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 관찰자로서 그들의 보이지 않던, 주목 받지 못했던 행위를 재조명하기 위해서 접근하는 식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작업에 아카이브적 특성이 가미되어 있음을 중요하게 보고있다. 이는 작가가 고유하게 설정한 '흐릿한 초상'의 일환으로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이 형식적 동일성 내지는 유사성을 띠고 있다 해도, 주제적인 차별성에서 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제를 이끌기 위한 면밀한 연구와 조사는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검토와 반성를 수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초상화에 대해 말해보자. 보통 초상화는 그 대상자의 사회적 위치와 분위기, 당대의 주요한 교훈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자체 문맥적인 요소를 획득했기에 역사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의미있는 반향을 가진다고 본다. 그러나 초상화는 일차적으로 어떠한 의미이든지 개인에 대해서 마주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는 개인의 특성과 분위기를 단호히 표현하며 오히려 그/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종부이야기'에서는 절대 개인이 강조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작가 이은정의 작품을 마주할 감상자가 앞서 말한 '시선적인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의미적으로 '심리적인 거리두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고자 한다. 초상화의 인물(개인)과 서로 응시하는 요소라기 보다는, 오히려 연작 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는 전체 흐릿한 초상들이 한 공간 안에서 공명을 일으키고 이 분위기에 감상자가 압도되는 형국이 야기되는 것이다. 흐릿하기에 대상의 구체적인 형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 그로인해 '거리두기'의 행위가 겹쳐지고, 이로써 물리적인 '감각체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잊혀져가는 것과 가려져 있던 것이 또한 표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감춰지는 탓에 의도했던 혹은 아니건 오히려 작가 이은정의 작품 자체에서 발하는 소명은 더욱 명확해진다. 형식은 그 자체가 내용이 되었다.


III.

이은정의 작업은 보통 상처와 자존, 자신의 일상과 내면,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서에 대한 자기 고백 등으로 풀리는 태반의 여성작가들의 일반적인 양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대단히 계획적이며, 과학적이며, 연구적이며, 대상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전 작업 중 내가 특히 주목하는 바는 ‘겹친여백’ 시리즈이다. 동양의 정신적 여백 사상을 주름으로 무늬로 표현하여 물리적인 공간감을 실재화하였으며, 겹친여백 자체는 기존의 정신성의 확산 내지는 파장이라는 전통적 여백 느낌에서 입체, 공간감, 시각적인 착시 등의 요소를 끌어오고 있다. 마치 관찰자, 연구자의 태도를 함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 것이다. 내용상에서 비슷한 문맥을 보이는 ‘모계’시리즈의 경우는 그녀가 시어머니를 토해 모계를 정리하여 초상작업을 한 것이었다. 그때의 연작과 '종부이야기' 연작은 자칫 내용적 맥락이 유사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전혀 다르다. '흐릿한 초상' 시리즈는 그녀가 10년간 해온 작업과 형식적인 결별을 맺는 지점이다. 물론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아카이빙 및 연구조사는 일견 방법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흐릿한 초상-종부이야기' 시리즈는 '모계'연작보다 심리적 거리감이 한층 강화된다. '모계'연작에 표현된 인물이 개개인의 계보가 드러나며 관계적 선형을 구성하는 시점이라면, '종부이야기'는 그녀가 택한 혹은 개발한 작품형식을 보다 긍정적으로 완성해줄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다.


IV. 인터뷰

내가 느낀 작가 이은정은 따뜻하지만 고집스럽고 또한 세심하지만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까 혹은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가 분명 작가로서는 신경이 쓰일 테지만, 내 느낌으로 그녀는 근본적으로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와의 만남 그리고 첫 인상, 죽 이어진 그 내면의 인상에 대해서 이같이 말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최근 그녀의 작업 ‘흐릿한 초상’의 과정에 대한 단초를 일부 여기서 발견했다고 보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한다는 것을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가능하지도 않겠는가. 작가 이은정을 마주하고 문득 든 생각이다.■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작가 이창수 비평

확대된 영역 실험 : 투시적 접근을 통한 회화적 한계 벗어나기



최윤정|미학·미술비평

현재 그의 작업은 레이어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3차원적 형식을 구현하면서 근본적으로 회화 장르에 대해 그가 추구하거나 고민해왔던 지점을 첨예화한다. 이전 작업에서 작가로서 그가 내용적・형식적 모티브로 '시간성'에 대한 관심에 보다 천착했었다고 본다면, 현재는 이에 대한 무게중심이 회화의 근본 형식에 대한 주된 고민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과 유사한 방식에서 레이어 효과를 작업적 모티브로 활용하는 기존 작업들은, 주로 공기원근법적인 요소와 맞닿아 이로써 그 깊이감이나 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동시에 형식적으로 회화와 입체의 경계를 탈피하고자 애쓰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편이다. 그러나 이창수의 작업은 원근법적인 요소로서 레이어의 겹침 효과를 이용하기 보다는 파편적인 평면들의 연속, 위치적으로 계산된 이미지들의 순서, 레이어와 레이어 간 간격에서 비롯되어 다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평면 이미지, 그리고 그것이 회화임을 강조하는 둣한 색면 표현 등에서 레이어를 활용한 기존 작업들과는 분명 주목하는 지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회화'임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테두리를 빗겨가지 않는 전략에서 평면 형식에 대해 그가 견지하고 있는 근본적인 고민을 거론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재적으로 주변 배경을 제거하고 생물을 포함한 단일한 일부가 작품에 표현된다. 이 경우 관조로서의 방식이 아닌, 관찰로서 소재에 대해 접근하는 경우로 간주할 수 있는데, 실제 각 레이어는 사물의 전체가 아닌 부분들을 순차적으로 묘사한다. 순차적인 묘사는 이미지를 쪼개는 방식, 각 구성위치, 쪼개어 놓은 부분들이 전체로 통일되어 보여지는 효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에 입각한 흔적이다.

한편 레이어로 구분된 각 이미지들의 부분 컷은 각각이 두께감있는 색면 표현으로 이루어지기에, 정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평면 회화로서 고스란히 그 특성은 유지된다. 그러나 분명 레이어 겹침에서 효과를 취하는 작업임이 중요할 때는 이를 기존 회화를 감상하는 시점과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시점을 빗겨보면, 간접적으로 빛이 부딪히고 반사되며 시지각적으로 인지되는 이미지가 각각이 굴절률을 표하는 유리를 통하기에, 이는 일견 '착시'로서 평면들의 연속이 입체적 조형성을 획득하거나, 그리하여 관찰하는 각도마다 '다른' 전체-이미지로 통합되기도 하고 이내 사라지기도 하는 등 시각적 효과를 거두어낸다. 이는 이미 기존 회화의 형식적 요소를 벗어난 지점이다. 또한 '투시'로서 합성되는 전체이미지는 어떤 각도에서든 동일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기에,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이 이미지의 굴절과 왜곡을 염두에 둔 결과로서 보여지기 때문에, '투시'는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투명한 유리라 하더라도 약간의 푸르스름한 색비침으로 인해서 우연적으로 공기원근법적인 효과가 보이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의 계획은 이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와는 무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매너리즘 시기 방법적으로 고안된 왜곡상을 말하던 '아나모포시스(anarmorphosis)'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적인 눈속임을 위한 과학-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 이창수가 자기 회화의 지형을 3차원적으로 확대하여 투명한 유리를 화면 및 레이어로 활용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투시를 가능하게 하였던 부분, 왜곡을 전제로 하는 '투시' 자체에 비율과 형식을 맞추어 이미지를 세단하였다는 것은 관점을 위한 철저한 실험이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매너리즘 시기는 예술적 재현을 위한 모든 과학적인 지식과 비례에 대한 온 지식이 만개했던 때였기 때문에, 당대 예술가들에게 그 시기는 더이상 지식적으로 확장하고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애매했던 때이기도 했다. 유사하게도 현재 무한 반복되고 있는 회화적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 자체만으로 신선하다 할 수 없는 한계적 요소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한계를 설치적인 접근으로 해소하고자 한다거나, 타 형식으로 전향을 꾀하는 데 반해, 작가 이창수는 우선 태도적으로 그것이 회화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회화이길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회화의 형식과 인식에 대한 한계를 실험적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아나모포시스'는 당대 지녔던 형식을 완전히 새로움으로 극복하고자 한 시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미지를 왜곡하는 형식을 적극 도입하여 작가의 주관 내지는 터부시되는 것들을 더욱 적극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을 위한 하나의 형식 실험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 이창수의 작업에서도 일부 유사한 의미를 추출해보자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면이 그 소재를 쪼개어 객관적으로 묘사한 정물 형식을 갖추고 있고, 또 다른 면은 소재의 이면적 내용이나, 작가의 주관적인 상상의 영역으로 전혀 다른 풍경을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나무의 또렷한 형상이 이면에는 속이 허하게 비어있는 형국이라던지, 마치 유리 수조 안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 보이는 장면 이면에는 물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물고기의 비애가 저 하늘 위 스카이 다이빙을 꿈꾸고 있는 듯한 풍경과 자연히 이어지며 그로부터 해학적 감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차가운 폭포수에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남성이 그려진 장면의 이면에는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그의 욕정을 말하듯 용광로 속 나체 여인이 마주하고 있다.


이면의 내용들은 도덕적인 주관의 관념이건, 순수한 상상의 영역이건 실재적인 묘사 이면에서-묘사로서의 사실성, 합리적인 계산 등으로 점철되는 앞면과는 달리- 작품이 지닌 과중한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단순한 형식실험에 그칠 수 있었던 위험에서 내용적으로 긴장완화를 시키며 이후 감상의 단계를 고려할 수 있게끔 열어둔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서 떠올리는 것은 바로 '유머'이다. 정신적인 집중과 긴장의 상태가 어느 순간 어떤 표현방식으로 인해 우연히 풀리는 상황들이 존재하며, 이 상황들로 인해 집중의 에너지는 경제적으로 남는 잉여의 에너지로 전이된다. 이 상태에서 발산되는 감정들(잉여의 에너지)은 '쾌'를 가져온다는 것. 그렇다면 '유머' 내지 '유머러스한 태도'는 예술작품, 혹은 예술의 태도에 대한 제문제 등에 심리적인 과정에서 전제해야 할 하나의 가치로서 자리할 이유가 충분하다. 작가 이창수의 작품은 이를 좀더 수월하게 구분지어 준다. 두터운 질감의 이미지 표현과 단순 묘사로서 정물로서만 보일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입체적 접근으로서 과학적인 태도가 지닐 수 있는 무거운 위험이, 일종의 '유머'로 인해 긴장을 완화하며, 삶을 조근히 사고하는 감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전 작업1)에서 그가 주관적으로 설정한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과 이번 작업에서 회화의 형식에 대한 확장으로서 실험을 꾀하고 내용적으로 사물 묘사의 이면을 작은 서사로 던지는 방식은 일정 유사점이 있다. 이 방식들은 분명 작업 '형식'에 대한 일정 실험을 전제로 하는데, 그에게 주제는 형식 실험과 대단히 밀착해있어 보인다. '시간성'과 '뚜렷한 감각적 체험', '입체성'과 '양면회화' 등, 순서는 그가 고민하는 형식과 밀착한 소스를 발견하고, 발견된 소스와 연관한 내용을 전개하는 식이다. 글쎄, 이번 작업의 경우는 그 목적은 보다 뚜렷해보인다. 작가는 현재의 작업이 아직 실험기로서 일련의 완성태를 갖추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그는 시각적인 관찰과 직접적인 체험에 대해서 늘 중요시해왔으며, 그 일환으로 감상자에게 그것이 지닌 양태를 수용하길 강요하기 보다는 작품 자체를 스스로 관찰하고자 애쓰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게끔 하였다. 실은 이 부분은 아마도 이후 그의 작품과 작업관을 살피는 데 있어서 긍정적 고정관념 내지는 하나의 편견으로 자리하여, 계속해서 그를 예의 주시할 만한 기준이 되리라고 본다. ■



1) "감각을 통해 기억된 시간(...) 나는 시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는 중이다" '7가지 시간 찾는 방법'에서 그는 파동과 나이테, 주관과 속도, 그림자와 잔상, 박제 등의 상황을 구분하였다. 이는 구체적으로 그가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물에 대한 감정-기억 내지는 감각-기억 등 분절적으로 저장된 의식을 자극하여, 그가 설정한 시간성에 대한 관념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파이고 스며들고 흩뿌리는 표현행위가 거둔 오감적 효과에 순차적으로 대응하면서, 주제로서 자연 노출된다.





Experiment for an expanded sphere : To escape the limit of painting, through an approach of 'seeing through'



Choi YoonJung | Aesthetics·Artcritic



His recent work is represented by using layers and a three-dimensional effect. Making his topic acute, artist Lee ChangSu researches into a painting itself. In previous work, he was all attention to the concept of 'timeness' as a motif of its form and substance. But now the core of importance moves to the original form of painting itself. Generally other artists's similar works are represented by aerial perspective to express contemplating substances and feeling the depth of a canvas. they also make their efforts to escape the limits between planes(of painting) and formative arts. But Lee ChangSu's work is emphasized by some technique-succession of fragmental planes, calculated order of images, plane images found by a gap between layer and layer, and color expression on glass-canvas. This doesn't mean to stop being painting, but keeping characteristic boundaries of painting, just search an original form of painting itself.

In materials including living things, His work is mainly described as a single part/thing. In this case, this is not for contemplation. Because each layer is described by fragmental part in order. The whole effects occur from dividing images or combining images. we can regard the whole effects as traces made by a result of his own detailed calculation.

On the other hand, each part of fragmental images is accomplished by thick color expression. So in the front side of his work, we can find that it has its own character as a painting. Especially the remarkable point is to pile layers, so if we observe his work, we must seek the other method to access his work. Because the image appears in reflection of light through glass. If observer changes his/her visual point, an optical illusion occurs. So the succession of planes obtains a kind of formative arts, combines into 'different' whole-image or disappears. This is now the spot that overcomes the form of existing paintings. And the whole-image, combined by 'Seeing through', doesn't offer the same images. Because I think his work is a result of refraction and distortion of image, so 'seeing through' is the most important keyword in my critic.


Glass exposes some bluish-color, no matter how transparent it is. Accidentally, it sometimes occurs aerial perspective effects. But in his plan, it doesn't bring this situation into relief, just seems to have no connect. While watching his work, It reminds me of 'anarmorphosis' that means devised distortion of images during mannerism. Just as 'anarmorphosis', that is a sort of scientific play for fantastic hoodwink, expanding his painting to a three dimensional form and uses transparent glass as a canvas, artist Lee ChangSu makes various views from different angles. 'Seeing through' supposes distortion of images. Fitting into proportion and form, he cuts images. This is a thorough experiment for a view-point.


In Art history, mannerism was the bloom of almost science and knowledge about a proportion for artistic representation. Artists of those days would maintain an uncertain attitude to research the related knowledge. In the same way, nowadays in a flood of painting-images that seem to the very tautology. I can't feel fresh in many cases. Recognizing the limits, for solving this problem, so many artists seem to try an installation-approach or to turn from their own formal method to another. However artist Lee ChangSu emphasizes it must be a painting in his attitude. This means that he never abandon the meaning of painting, rather expands the capability of form and acknowledge. 'Anarmophosis' was not the try of overturning artistic forms of those days. This is an experiment of a form for substances that express artist's subject and taboo. In the same manner we can find similar meaning in artist Lee ChangSu's work. Dividing image, the one side that we think the front side looks like a still life painting. And the other side presents quite different scenery to us, the scenery is made by artist's own subjectivity. For example, the form of bamboo is vivid in the front side, but its inside is just empty in the other side. A swimming fish in a water tank describes in front, but in the back skydiver flies in the sky as if a fish dreams. From this, a sense of humor occurs. There is a man who builds up his moral character, in the other side a woman exists in a blast furnace as if it shows his irresistible desire.


Behind the actual descriptions, The substances of the other side are organized by subjective ideas or pure imaginations - different from the front side that expresses rational calculation and reality. So its function is to reduce a heavy burden that his work owns. Shown only simple experiment of a form, the danger is indebted to substances of the other side for relieving the tension and making us to look at the next sensible observation. From here, 'humor' occurs in our mind. A condition of mental concentration and tension, by a certain moments or expression, is transfered from that to a condition of relax. So the concentrated energy becomes the economic surplus, in this situation a certain emotion radiates. The very 'pleasure', this is 'humor'. In that case 'humor' and 'humorous attitude' always have existed in artistic values impressed on artworks and artistic attitudes. Possessing 'humor', his work leads us to an emotional moment about self-reflection including one's lives to us.


His previous work1) 'the method of recording time' is established subjectively and his recent work is about an experiment for expanding forms of his painting and describing the other side as a small narrative. Both his previous/recent works have some similarities partly. These methods and his primary subject are associated with an experiment of forms. 'Timeness' and 'sensitive experiences', 'a three dimensional form' and 'two-faces painting' and so on. The procedure is to find sources for forms that he have thought, and then develops contents relating to the found sources.

Well, the purpose of this recent work is very clear. Artist Lee ChangSu doesn't think that this work is perfect. He just says that this is on an experimental stage. He always regards the visual observations and direct experiences as the most important viewpoint. For this reason he don't force people to listen to him, he make people watch his works with attention. This is about the attitude of people(called 'observer'), he thinks they must also have an effort to watch his artworks, If they don't do that, cannot obtain anything. Actually, this will be a criterion that I research Lee ChangSu's woks and attitude as an artist and sense of values. This is like an affirmative stereotyped idea or prejudice for him.■

"

1) The time, remembered by one's sense(...) I'm expressing 'time' as various methods" In 'the 7 ways that we find time', artist Lee ChangSu had classified the situation into waves, the annual rings, a subjective gaze & speed, shadows, afterimages. This means his own descriptions for some select objects stimulates one's fragmentary memories as complex emotions and senses about the objects. So observer can approaches his idea for timeness. In his work, 'time' represents the shape of digging, soaking, sprinkling. And corresponding to each sensory effects held by his expressive act in order, time exposes itself properly.

< translated by choiyoon>

2009년 9월 6일 일요일

연구 II

Hive_이은정, 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