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트 기고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 독해
글 ● 최윤정
Intro. '만인보' 고은 작가가 노벨상 수상후보자 등극
훌륭한 역사와 지력을 지닌 '만인보'의 탄생비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은시인의 노벨상 수상 후보자 소식이 비엔날레를 달구고 있다. 현대미술의 총화, 동시대와 미래적 예술의 향연인 '비엔날레'와, 제목과 문맥적 상징으로 차용하였던 문학작품 '만인보' 사이에 끈끈한 관계가 이후 비엔날레의 세계적 명성을 다시금 공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고 외곽(?) 주변이 유난히도 시끄럽다.
의미와 의도와 시도와 정의 사이에서 여하간 비엔날레라는 미술권력과 노벨상이라는 상징권력이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를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저 그냥 그러한 사실에 모두가 의연하고 세련되게 대처하길 기대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이 전시가 광주비엔날레를 보다 위치적으로 유의미적으로 전문적으로 존속해갈 수 있도록 순수한 전시자체로, 열정적이고 젊은 총감독과 뜻을 함께 한 주변 관계자의 의기와 노고, 사연들에서 좀 더 중요하게 읽혀졌으면 하는 미래적인 바람인 것이다.
#1. 발견한 의제
'개인의 일대기가 사진매체로 하나의 역사로 기억되고, 개인을 담은 사진은 이미지 자체로서 역사화 되었다. [예징루, 퉁빙쉐가 발견한 앨범]'
어느 한때 나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사진들에서 묘한 기운을 느낄 때마다 현재까지 나의 일대기를 정리하게 되고, 혹은 기억도 안 나고 다소 낯선 경우에 사진은 이미 나의 기억감정과 무관한 그 자체로 자리하여 애초의 사연을 숨긴다. 한 인간의 순수 개인적 일대기를 간직한 사진들이 이미 당사자와 별도로 그 자체 이미지의 역사가 되어 그것이 생성된 이유와는 무관한 존재근거를 갖기도 한다. 바로 그 경험이었다. 관심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그것이 지닌 스토리에 우리는 분명 주목을 하지만, 그것이 컬렉션으로 예술작품의 현장에 놓여진 순간 보편적인 견지에서 형식과 내용에 주목하게 되는 것, 이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미지의 역사化'에 대한 문제였다. 2010광주비엔날레에 있어 '만인보'의 일차적인 의미와 '이미지의 역사化'에 대한 내용이 이번 전시를 읽는, 본 리뷰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 의제_ '만인보'
이번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는 다시금 "사람과 이미지간의 관계와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인간의 욕망", 관계적 역사에 대한 기록의 대서사시를 상징한 제목으로 차용된 것으로 안다. 특히 올해 5.18 30주년을 맞이하여 '광주'라는 역사적 도시의 성격을 아시아 및 제 3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사를 엮는 일종의 아카이브적인 요소로 보편적인 대중들이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잘 감지해냈기에 타이틀이 그다지 무색해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만인보' 작품의 문맥과 상징을 떠나서도 그것이 전시의 타이틀로 사용되었을 때, 이미 2010광주비엔날레의 작품들 경향에 대해서 감상자들에게 일차적인 이해도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아마도 내용에 대해서인데, 우선 의미 있게 바라본 몇 군의 작품들을 거론하고자 한다. '캄보디아 투올 슬랭 사진 컬렉션' 및 '테디베어 아카이브', '코트야드 컬렉션', '신로 오타케의 스크랩북' 등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개별화된 이미지 담론으로서 라기 보다는 스펙터클한 기억감정 내지는 심적 과부하로 그 규모에 감탄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욱 적절해보인다. 이 경우 대중적인 호감 및 감상에 있어 기본 전시문맥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매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의미있게 본 작품은 우웬광의 수백 시간에 걸친 농부들의 일상을 각자 촬영하게 하고, 이를 1인의 시간으로 개별설치하며 동시에 참여자 전체의 일상적 시간이 한 공간에 배치된, '우리마을'이다. 이 작품은 주관적 촬영자에 의한 자기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아카이빙의 기존 '대상화'전략에 대해서 '주관과 참여', '자기기록'이라는 새로운 문맥을 담는다. 마치 김지혜<대추리 심리적 기억지도>의 또 다른 영상적 표현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특히 애착이 많이 갔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스 피터-펠트만의 9.11테러에 대한 9.12일자 세계 신문언론의 1면 헤드라인 기사 아카이빙도 눈에 띄었는데, 무역센터의 상징성과 일방적 국수세계대전 시도의 기폭제가 되었던 9.11이 갖는 스펙터클한 역사에 대한 공동 기억을 일차적으로 끌어올리되, 그 어느 국가도 그것이 1면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작품이다. 마치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티벳의 자유'가 묻히고, 월드컵으로 인해 묻혔던 '수많은 아픔들'이 외면되었던 기억이 왜 이때 괜시리 떠올랐는가 말이다. 그만큼 미국의 존재감과 전쟁에 대한 기대 혹은 공포에 대한 보편적인 시선들을 담아내고는 있으되, 개인적으로 무수한 사건들이 유령처럼 전세계 9.12일자 신문 1면 주위를 떠돌아다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지는 무역센터 사진 곁에 기사규모를 달리한 각국의 사건사고들에 대해서 나의 시선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막시밀리오니 감독이 지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지평에 대해 감탄을 마지하지 않았다. 극히 이것은 기획자로서 막시밀리오니 개인에 대해 갖는 호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중 또 하나는 협업 큐레이터 없이 총감독 재량으로 본 전시를 이끌었다고 하는 점, 특히 이점은 기존 비엔날레 전시들이 시선과 동선에 대해서 '통솔'에 실패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그리고 전시연출에서 항상 감상자를 대상화시켰던 난해함에 대해서 상당 극복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수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적당한 동선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그리고 수많은 텍스트가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구성으로 인해 어렵지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묘미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전시를 둘러싸고 "평이하다, 대중적이다, 몸을 너무 사렸다, 특성적이지 못하다" 라는 일견 판단들 속에는 기존의 비엔날레 전시의 형식적 구성이 난해했던 사실에 익숙한 바, 바로 전시연출방식의 편안함에 기인한 바도 심리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한다.
#3. 의제_ '이미지의 역사화'
'이미지의 역사화'에서 '이미지의 역사', '이미지사'가 본 글의 주요 테제로 읽혀질 것이다. 실제 이번 전시연출의 형식적부분의 일관성에 대해서 나는 분명 칭찬을 마지하지 않았지만, 미시적인 접근에서, 즉 전시된 작품과 내용적 깊이에 대해서 일부 나는 여전히 내 의견을 확정하지 못했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들과 지금 동시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로 다가가는 작가들, 신진작가들의 구성이 편향되지 않고 골고루 배치되었던 부분에서 총감독의 광주비엔날레를 대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일관된 주제 안에서 펼쳐지는 전시인 만큼 작품과 주제의 밀착도도 대단히 성실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왠지 시선의 깊이가 대단히 '서구적'이고, 다소 '고루한' 부분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성과 제3세계의 사회사 및 이미지에 대한 담론들은 객관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익숙한 부분들이었다. 말하자면, 내용적으로 이 전시가 추구하는 담론들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대단히 강한 정도로 '그래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바라보는 중요한 쟁점과 이슈, 현재도 일관되게 지속되는 폭력의 장면들, 움직임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섬세한 기획에서 다소 탈장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무언가(강자와 약자, 관계, 권력과 민중, 봉기와 혁명의 역사, 아시아와 제3세계 투쟁의 역사, 죽음)에 대한 오마주'로서의 기록 아카이브로 읽혀지는 부분이 크고, 다소 서구적 시선에서 바라본, 심하게는 '오리엔탈리즘'적 기술로서, 마치 '디아스포라'와 '노마디즘'이 같은 자리에서 일차적인 형식에서 공통된 입장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 같은 오류를 느끼기도 했으니 말이다. 서사는 있으되 사연이 없고, 역사는 있으되 개인이 보이지 않았으며, 작가에 대한 소개가 충실했으되 작품은 그에 따라가 주지 못한 경우도 간혹 발견할 수 있었다.
만일 억측이라면, 나는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설치물에서 안타까움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데, 물론 최병수 작가에게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를 저항적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당시 민주화운동 문맥 뿐 아니라 그 이후 그가 계속해서 현대 사회 모순에 기반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면, 그에게서 꺼낼 수 있는 재 2의, 제 3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에 대한 의제는 또 다른 부분에서 상당했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 최병수에 대한 동시대적 유사 면모 내지는 그가 해석하는 현대 사회 모순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본 기획 틀 안에 전달되지 못했으며, 5.18 전시관에 적합할만한 설치물로, 결국 나에게는 그렇게 읽혀질 수 밖에 없었다.
전체 5관에 시립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에 이르는 거대 전시인 만큼 어려움은 짐작하나, 작가 개개인의 작업이 전시주제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하였더라면 '이미지의 역사화'이건, '만인보'에 대한 디테일이 보다 지금 현실과 접목되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움도 그만큼 컸다.
2008광주비엔날레의 전시연출 및 내용들이 다소 산발적이고 과다했다면, 2010광주비엔날레는 그 해석범위가 분명 대단히 정제되어있다. 그리고 스펙터클한 과거사에 대한 기록에 초점이 맞춰져 대중에게는 호응이 높았으되, 전문가 및 관심자 집단들에게는 평이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록은 있으되, 동시대성과 연결되는 '무엇', '오마주'로서 그리고 '설명적인' 아카이빙이기 보다는 이에 대해 '들춰냄', '전복, 엿보기' 등 '이미지'가 지닌 특성들로 직관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메타포가 컬렉션형 작업에서 부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Outro.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격/효/과_ 그 과제로서 '예민함'의 결합
"이미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작되어 어떻게 유통되는가? 이미지와 미디어를 통한 자아의 구성.. 수많은 사진들로 가득찬 이번 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 생산 기계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보도자료 내용 중에서>
"삶은 연속되는 사진영상_수잔손탁" <보도자료 내용 중에서>
작품에 대해서 개별예술가들의 시선은 작품창작 및 인식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부족했다고 말한다. 특히 사진작업이 많이 구성되어 있어서 지루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기획자가 밝힌 의도에서 이미 그 근거들이 충분히 소개되었기에 기획의도 면에서 그의 생각이 자신의 전시에 잘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전체를 통찰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가 주요하게 선택한 예술형식은 분명 존중되어야 한다.
한편 전시를 바라보면서 나는 '비엔날레'가 무엇인지 다시금 지루한 질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보여야 하는가' 말이다. '비엔날레'가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경향과 진취적인 측면을 소개하고 미술이 할 수 있는,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시대를 읽는 전초기지로서 역할해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명제라면, 이번 2010광주비엔날레 '만인보'가 일차적 의미의 비엔날레 본령과 일치하였는가 세심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현대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 보고 익히 알고 있지만, 새로운 것으로서 기대했던 작품이기보다는 그것은 국립미술관 전시로서 기대해볼 만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이미지 자체의 담론과 대중적 이미지, 역사와 5.18 30주년에 맞이하는 비엔날레로서 내용을 숙고하여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배경에는 총감독의 성실한 기획을 존중하지만, 다만 거대 전시이기에 전시주제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사실들 즉 아시아, 제3세계/ 장소성, 휴머니즘/ 역사/ 권력/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인용과 해석, 예술형식을 펼치는 부분에 대해서 예민함이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보도자료와 기획의도에서 언급된 "삶은 연속되는 사진영상_수잔손탁"의 인용에 대해서도, 도리어 나는 스펙터클한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관음증에 대해 사진영상이, 슬픔을 모방하는 '연민'의 시각으로 도리어 역사적 책임에 대한 이성적인 경계를 흐리고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폭력적인 방임을 야기한다했던 수잔 손탁의 의견이 이 인용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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