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윤정
의미규정- ‘공공’은 구체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공공미술 활동은 예술가로 하여금 실제 작업실 및 전시장을 벗어나 외부에서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한 장을 이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활동 범위로서 ‘공공’의 규준과 개념적으로 ‘공공’에 대한 의미에 대해 명확한 규준이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된다.
개념적인 측면에 맞물려 논해보자면, 과연 공공미술을 추진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다. 총체적으로 예술계의 구성인자와 향유층 및 재정적인 요건들과 맞물려, 그것이 혹여나 사회 복지 차원의 투자이든 예술활동에 대한 지지이든 그 비용적 루트가 국가로부터 혹은 기업으로부터 즉 제도이자 권력으로부터 받는 한, 유감스럽게도 공공미술의 주체는 활동가와 예술가-혹은 주민까지 포함하자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순진한 것이다.
1년 단위의 성과로서 우리는 공공미술의 효과와 예술가의 사회참여를 논할 수 없다. 소외지역들을 찾아 전국적으로 골고루 공공미술 사업을 진행한다할 때, 공공미술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지 않은 지역의 경우 공공미술에 대한 공유된 인식기반 없이 사업기간에 쫓겨 대충 진행되는 사례도 분명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의 재정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대안적인 미술활동, 공공미술에 대한 타당성과 뚜렷한 목적성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공공’이나 ‘지역 형평성’에 대한 다른 시각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이것은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필자가 초반부터 공공미술에 대해 다소 냉소적 규정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의의에 동참할 수 없다는 의미는 분명 아니다. 공공미술 논의가 진행된 이래로, 정치적인 입장 및 개인적인 성향을 미루어 보면, 공공미술 활동이야 말로 예술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생각들을 해본 적이 있다.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예술가는 작업실에 처박혀 있지 않고, 세상으로 나와 곧바로 사람들을 마주한다. 예쁘게 전시장을 꾸며놓고 사람들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작업과정을 날 것으로 드러내면서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예술, 그것은 돈이 없어도 우아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향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된다. 하다못해 부담갖지 않고 그냥 지나쳐도 된다. 그렇기에 소외지역을 찾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술과 일상이 숨을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공미술 활동 전 과정들을 나는 분명 동의한다. 그러나 결국 ‘공공’은 ‘제도’를 수반한다. 공공미술 역시 그 지원의 핵이나 선정규준 등에서 이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생각들이 강렬한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제도로서 공공미술을 장려하고 이를 진행하게끔 국가에서 돕는 것은 비단 이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온 활동가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훌륭하고 적합한’ 기획을 실현할 수 있게끔 돕는 것, ‘가난한’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게끔 장려하고,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예술의 문제로 끌어오는 것, 또한 비슷한 문제로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작업실 혹은 생활공간을 주는 창작스튜디오 등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예술계의 상황들이 계속해서 작업하기 좋은 환경들을 이끌어주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실상 여기서 놓치고 있는 바는 제도나 권력이 장려하는 것 속에서 정작 그 수혜를 받게 되는 사람들의 태도는 오히려 제도나 권력이 꿈꾸는 것만도 못하게 흐르는 경우가 있다. 공모전이 주된 경력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공공미술의 의의에 동의하거나 깨닫기도 전에 작업은 마무리가 되고, 정작 훨씬 좋은 작업실을 가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굵직한 경력으로 제공되는 창작스튜디오 등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와 비판이 오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활동가들은 제도와 권력의 태도보다 뒤쳐질 것이다.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진정성을 확고히 담은 개별의 ‘태도’이다. 그럴듯하게 포장할 필요 없이 차라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방향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잘못에 대한 ‘합리화’라는 빌미와 계몽적인 생각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공공미술이라면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예술에 대한 의지나 공유된 인식기반이 없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발성 & 기획에 대한 모색
현실적으로 제도나 권력이 마련한 틀 속에서 공공미술 활동이 어떤 의의를 갖추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선적인 ‘자발성’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사업공고가 나면 내용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미 있는 생산지점에 있는 독자적인 시각으로 일종의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공공미술에 있어서 작업적인 부분의 한 의의가 ‘과정’이라면 짧은 사업 기간 속에서 이를 소화하기는 힘들다. 또한 ‘과정’이 중요시된다면 사후 관리 및 지속성의 측면에 대해서 미리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겉보기에 성공적으로 진행된 사례라 하더라도 실상 현장 관리 차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반짝하고 버려두는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모습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과 비용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에 대해 감수하거나 부끄러워 할 수 있는 지점까지 발견할 심적 여지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의 문제는 사업의 성과를 판가름하는 진면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작가의 자발성은 공공미술에 대한 개별적이고 개념적인 인식 기반을 수반한 상태에서 끌어지는 것이며, 기획 역시도 이에 대한 청사진과 그 반향들을 고려해야 한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일회성이어서는 안 되며 비록 현실적으로 물리적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을 지언 정, 인식적으로는 국부적이고 지속적인 담론작업 및 이에 확산을 통해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기획’으로 공공미술 사업이 집중되는 현시점에서 ‘공공’의 의미는 참여자와 일꾼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의미는 좋으나 계속해서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공공미술 기획에 대한 태도와 도덕성이 투철하지 않은 경우 그나마 민주적이어야 하는 활동 자체가 대개는 ‘코디네이터’ 혹은 ‘참여작가’라는 명시 하나로 ‘착취’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결국 기획자의 이름 하나로 프로젝트가 판가름되는 상황들은 분명 뼈저리게 고민하고 이에 대한 개선의 여지를 솔직하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루트의 발견_참여자와 ‘공공’에 대한 의미 재성찰
‘사회적 기업’ 사업은 분명 지역의 예술활동을 장려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한 측면들이 있다. 이를 통해서 문화적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인건비 혹은 작업비 조로 생활에 큰 무리가 가지 않게끔 활동할 수 있는 여지 역시 충분히 마련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실상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은 또 다른 조직체를 구성하는 것이기에 하다못해 분배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기획자에게 맡기기 보다는 ‘기업’이라고 했을 때는 분명 전문인을 투입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지없이 여기서도 ‘착취’문제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히려 문화예술기획인이 되고 싶어하던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상처로 자리하거나 혹은 문화예술계에 대한 혐오를 낳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여지는 실상 안하느니 못하다라는 불신을 가져왔을 뿐이다. 제도 속에서 공공미술의 문제도 실상 이러한 제반상황에 대한 고려를 피할 길은 없다. 이 논의는 분명 관련 전문인이 투입되어야 한다 혹은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기획자의 책임문제가 더 확장될 수밖에 없기에 기획자 선정문제 혹은 기획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지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다.
공공미술은 작가들로 하여금 작업만이 아닌 그 너머의 것과 활동 측면에서 기획의 몫을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작업실과 전시장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작업할 수 있는 환경 여건이 외부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끔 한 것이다. 그렇기에 형식적으로 이러한 청사진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들이 여러 지역에 할당되고 진행되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더불어 그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함께 수반되고 논의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의지가 우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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