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6일 금요일

Public Art 2019.1월호 / 최민화 <천개의 우회> 리뷰

효박淆薄한 이 세상, 民花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문득 최민화의 작품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천 하였어라>(1989)를 보며 동학가사집인 용담유사권학가편에서 그 구절을 찾았다. 그의 전 작품을 꿰어내는 하나의 열쇳말 같았다.
 
원문)‘대저인간(大抵人間) 초목군생(草木群生) 사생재천(死生在天) 아닐런가. 불시풍우(不時風雨) 원망해도 임사호천(臨死呼天) 아닐런가. 삼황오제(三皇五帝) 성현들도 경천순천(敬天順天) 아닐런가. 효박淆薄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不顧天命) 하단말가
 

최민화 작가에 대해 각인된 첫 인상은 그가 열창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그가 부른 노래는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70년대 독재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압력을 거절하고, 아름다운 대한민국 강산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한 음악가의 저항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곡이다. 특유의 몸짓과 표정,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번 전시 천 개의 우회를 마주하면서, 내내 이 노래가 울리는 듯 했다.

대구미술관의 2전시실과 3전시실에 최민화의 작품 100여점이 놓여있었다. 70년대 초기작부터 현재 미 발표작까지도 이어진 대장정이다. 그의 대표작들로 손꼽는 <분홍>연작(1989-1999)을 비롯하여, <부랑>(1976-1988), <유월>(1992-1996), 그리고 <회색청춘>(2005-2006), <조선 상고사 메모>(2003-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2014- )으로 최민화 연작들이 총망라되었다. 6.25전쟁의 상흔 속에서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보폭을 나란히 했던, 최민화는 1980년 광주 오월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회적 현실에 주목하면서 민중미술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83민중은 꽃이다의 의미로 민화民花라는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업은 개인의 현실과 사회, 일상과 거대담론, 개별민족과 인류보편성을 교차하는 결합적 인과관계의 특징을 띈다. 그의 대표작인 <분홍>연작, 분홍은 백골단,최루탄/백색 파쇼들과 시위대/붉은 혁명군의 부딪힘을 상징하는 혼란과 혼재의 상황으로, 당대를 보여주는 표면이다. 세 명의 청년이 휴식하듯 갈대밭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붉은 갈대>(1993)는 실상 1980년대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을 망월동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며, <두개의 무덤과 스무 개의 나>(1999)는 부모님의 무덤과 군대에서 의문사로 잃은 동생의 무덤을 전경에 두고 작가 자신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두 작업 모두 사회적이고 폭력적인 거대담론이 개인의 일상적 리얼리티에 닿는 관계적 상황을 다룬 것이다. 6월 항쟁에 대한 작업으로 걸개그림 형식으로 구현한 <유월>연작에서는 최루탄 자욱하고 공권력의 탄압이 자명한 시위현장 한 복판을 그린 <분홍 아스팔트>(1992)를 비롯해 종로 5가 도로를 점령하고 누워 시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파쇼에 누워I>(1992)를 통해 저항의 현장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현장의 긴박한 상황들 그리고 당대 탄압을 증거하는 작품들이다.
 
 
1976년 시작된 <부랑>은 소외된 민중의 삶과 고통을 다룬 작업과 함께 독재정권이라는 폭력적 현실 속에서 무기력한 자신, 청년의 모습, 소외된 자들의 모습을 다루었다. <회색청춘>연작은 50대가 된 그의 시선에서 사회의 근원적 문제들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을 그린다. 이 연작들은 젊은 청춘의 초상을 통해 1980년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라는 특수성을 넘어 근대적 인간조건에 대한 억압이라는 보편성으로확장된 의미를 만들어 온 과정이었다.
 
단군에서 백제까지의 역사를 재구성한 <조선 상고사 메모> 연작은 서구의 포스트모던을 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술계 세태를 비판하며, 사진과 서구의 영화 포스터 위에 유화를 덧입혀 신화적 도상을 재현하는 습작이었다. 이어 근작 <조선적인 너무도 조선적인>연작에서 작가는 우리의 고대설화를 중심으로 하되, 이분법적인 근대의 동서 개념이 아닌 고대의 동서 개념으로 유라시아를 인류사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를 꾀하고 있다. 르네상스, 힌두, 무슬림 등 유라시아 권역에서 발견한 종교와 신화 속 도상들이 우리의 고대설화 속에서 재탄생한 장면들이다.

 
그가 시대의식을 감지하고 민중미술화가로 활동하기 이전에, 70년대 초반에 그린 그의 자화상이 인상적이었다. 예술지상주의와 예술가를 꿈꾸며 대학에 입학하였을 이 젊은 예술학도가, 무수한 고민들 속에서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까지, 3세계 민중미술의 전형을 공부해가면서 민족과 인류사의 보편적 여정으로 자신을 견인해가는 과정들을 상상해본다. 그의 작품들이 발언하는 작가의 시대정신 지표들이 선연하다.

2018년 12월 4일 화요일

다시 걷기, 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김미련 개인전<랜덤그리드, 랜덤대구> 전시서문
 
다시 걷기, 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다
그저 걸어가자
설움과 희망이 뒤범벅된
알지 못하게 뻐근한 이 가슴을 안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박팔양 시*에서 발췌
 
주류담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형식들을 모색해왔던 작가 김미련은 이번 <랜덤그리드, 랜덤도시>에서 향촌동북성로를 리서치 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우선 제목에서 랜덤그리드는 확고한 규칙과 결정론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않은, 다만 확률적인 것이자 우연과 확장가능성의 계기를 품는 일종의 코딩 개념이다. 구조적인 합리성과 경제성, 효율성 등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을 과감히 변형시켜 새로운 구조를 생성하는 체계를 일컫는다. 이번 작업에서 랜덤그리드는 역사와 장소를 독해하고 근대적 시각과 주류적 담론이 지배해왔던 질서에 반질서적개념을 조합시켜 맥락화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랜덤대구또한 대구라는 확고한 도시성에 균열을 내는 미시적인힘을 발견하고 해석의 다양한 여지를 담보하기 위해 혼종적인 지점을 찾아내려는 의지적 표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는 대구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일본인거류지역으로서, 유곽지대였던 자갈마당(야에가키초)과 과거 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달성토성)이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다. 향촌문화관 역시도 과거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선남은행(1912)으로 일제 수탈의 역사를 상징하는 자리에 위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상업은행의 전신으로 1976년 신축된 건축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향촌동 일대는 한국전쟁시기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머물렀던 곳으로 예술교류 및 창작에 중요한 근거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문화적인 기억이 머무른 장소이자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대구 근대화의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던 순종어가길1909년 순종이 남서순행의 일환으로 행차했던 거리를 중구청에서 조성한 것으로, 수창동에서 달성공원에 이르기까지 약 1km에 이른다. 그 끝에 고증과는 다른 복장을 한 11m의 순종 동상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우뚝 서 있다. 시민 사회에서는 일제 치욕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고 미화시킨 처사로서 순종어가길을 비판하며 동상철거를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실상 반일감정을 잠재우고자 당시 친일파였던 대구시장의 부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강압적으로 순종을 보냈던 치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길이다. 심지어 순종이 지나갔던 그 길은 북성로, 수창동, 달성공원(달성토성) 등 일본인 거류지에 속한 지역이었다. 역사적 사실은 물론 시민사회의 요구와 무관하게 추진된 순종어가길에 대해 작가의 시선이 머문 것은 마땅해보인다. 평소 사회적 이슈나 공동체에 있어서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 작가였기에, 이 작업을 통해 역사적 왜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작업들은 현재의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의 변화와 과거 역사적 맥락들을 예술가적 실천으로 잇는, 말하자면 현재와 과거의 시간성 그리고 역사에 대한 기억감정들을 직조하는 과정에서 구현되었다. 그의 작업들은 세 가지 국면에서, 다시 걷기’, ‘지우면서 그리기의 퍼포먼스/ 다시 듣기의 사운드작업/ 사물금고로서 장소의 흔적을 품은 사물들을 채집한 설치작업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다시는 재귀적인 시선으로 역사와 장소, 공동체의 삶에 접근하는 성찰적 사유를 담은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랜덤 도시_다시 걷기>는 하얀 작업복을 입은 퍼포머가 모니터를 얹은 보행기를 끌고 거리를 걷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퍼포머가 놓인 거리는 순종어가길이다. 그 장면에는 지금의 아스팔트와 거리가 함께 기록된다. 퍼포머는 산책자 같기도 하다. 산책자는 주변의 풍경을 관조하는 관찰자이자 자신의 사유에 집중하는 자이다. 선택적인 장소에서 걷는 몸은 그 길을 걸었던 순종의 마음과 순종의 행차를 바라보는 공동체의 마음을 품은 과거와 마주하는 동시에, 장소를 호흡하며 현재를 체현하는 몸이다. 누군가 걸었던 그 거리를, 그리고 현재에도 삶들이 이어지고 있는 그 거리를 다시 걷는다는 것은 장소를 객관화하면서 경험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장소에 깃들어있을 기억들과 감정들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논구될 수 있는 여러 서술방법 중, 보행기 모니터는 퍼포머에 대한 서사를 덧붙이는 또 다른 몸이다. 산책자이자 관찰자의 태도, 왜곡된 역사와 진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욕구하는 몸이기도 하다. <랜덤도시_지우면서 그리기>는 대구 읍성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인근에 위치한 성진사라는 빈 공간을 다룬 것이다. 7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오래토록 비워져 있어 먼지가 가득할 바닥일진데, 작가는 먼지가 진득하게 붙은 바닥 위로 원을 그렸다. 원을 그리는 행위는 동시에 바닥을 닦아내는 행위와 동일하다. 이 원은 지도 위에서 순종이 지나갔던 장소들을 이은 형태이다. 작가는 지우면서 그리기라는 최소한의 행위적 개입으로 공간을 드러낸다. 사람의 숨이 닿았었을 빈 공간에 베인 미시적인 역사들, 개인 삶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았을, 잊혀진 역사적 진실을 강조하는 듯한 작업이었다. 특히 이 작업에 관한 한 산책자였던 퍼포머를 기록한 <랜덤도시_다시 걷기>에서 보였던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랜덤도시_지우면서 그리기>를 통해 도시와 환경, 어가길을 총체적인 상징기호로 합치한, 전지적인 시점으로 이동한 듯 보인다. 시점이 변하면서 연동되는 두 개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랜덤하게교차하고 직조되는 양상으로 서사를 확장하면서 주제를 부각시킨다.
작가는 또한 대구 근현대사 속에서 고유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장소이자 70대가 주 고객층인 향촌동의 한 캬바레를 찾았다. <향촌카바레>에서 작가는 R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가 찾은 이 독특한 장소에서 현재를 관찰하였다. 그것은 현실적 삶의 무게를 떨치려는 듯 카바레 안 사람들이 취하는 몸짓이다. 향촌동을 살아왔던 몸, 그 몸의 표현으로서 특정한 몸짓은 랜덤대구의 미시적 역사의 일부가 된다.
 
그의 사운드설치작업인 <랜덤도시_다시 듣기>는 순종어가길의 동상 제목이 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와 해방시기 만들어진 노래 귀국선을 교차시킨 것으로 즉각적으로 감각되는 비물질적 진동을 통해 역사적 모순에 다가서는 작업이다. 정처 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샤워기 모양의 스피커가 몹시도 불안하다. 치욕의 역사를 미화한 듯한 시대착오적인 제목을 가진 순종 동상은 마치 현재의 시간성을, 그리고 향촌동 오리엔트레코사에서 해방 이후 녹음된 귀국선은 과거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귀국선은 일제 강점기 해외로 징용되었던 노동자들이 귀향하는 모습을 담은 곡이다. 애절한 가사에는 해방과 독립에 대한 기쁨이 함께 담겨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의 작곡가는 친일행적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개의 시간성, 이 두 가요의 교차는 사실과 왜곡에 대한 작업적 해석이자 혼란스러운 정서적 감응을 표출하는 듯 하다.
작가는 장소 곳곳에서 사물들과 형상들을 발굴하였다. 그것은 사물을 채집한 작업 <사물금고> 연작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형상은 사물의 형태에 관련한 것으로, 그 형상의 본을 뜬 것이다. 말하자면 순종의 동상이 놓인 좌대며 주변의 공공조형물의 형태도 일부분이자 사물에 관한 기억으로 채집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채집한 사물들을 3D입체설치와 영상작업으로 구현하였다. 각 사물들은 유기체 내지는 유령처럼, 먼지나 공기가 되어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모습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인간에 의해 쓰인, 고안된 사물들이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은 살아있는 생명체보다도 죽은 사물, 잊혀진 사물, 미처 인식에도 닿지 않았던 사물에 향한다. 그것은 역사를 추론하며 증명하는 열쇠이자 삶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미시적인 역사의 담지자들이다. 작가는 또한 작은 빛을 뿜어내는 투명한 공 안에 작은 메달이며 총과 칼의 형태를 지닌 작은 피규어들을 집어넣었다. 아주 여리게 반짝이지만, 장소를 입증하면서 수탈과 아픔의 역사를 떠올리는 기념비적 작업이다.
 
일정한 사건들의 연쇄적 연결이 아니라,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입증할 수 있는지, 작가의 작업들은 마치 하나의 변증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가로서 실연하는 과 관찰하는 기록과 기억을 발굴하는 채집이라는 실천적 행위가 역사와 장소에 내재한 모순에 다가선다, 그 행위는 과거와 현재를 직조한 망 속에서 비판적 관점을 생성하는 동시에 통찰을 견인하고 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제에서 출발한 전시, <랜덤 그리드, 랜덤 대구>에 쓰여진 서사들, 그 너머의 서사들은 무엇을 향하게 될까.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김도희 작가 작품론>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1. 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
 
최근 작가는 활화산 형상의 배꼽을 캐스팅하는 <뱃봉우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배꼽을 캐스팅하는 짧은 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차가운 석고가 몸에 붙이는 낯선 경험으로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것이고, 어색한 침묵 내지는 호방한 이야기들로 수다를 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기록도 작업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왔던 작가에게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이후 어떻게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배꼽은 세상의 중심이자 인체의 중심, 생명이 시작된 자리다. 탯줄을 끊는 순간 지난한 인생의 고역에 서야 하는 생명체로서 그렇게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어머니의 몸을 존재근거로 삼고 그로부터 태어남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시간의 제약을 넘어 이 증거는 원형적 표상으로서 각인되어왔다. 이러한 배꼽을 캐스팅한다는 것, 지문의 형태가 다르듯 배꼽의 형태 또한 다양하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가 세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오름들이다. 기능적으로 잊혀진 흔적기관 배꼽을 통해서 나의 몸을 관통하는 원형적 상상을 펼쳐놓는 일은 작가의 연 잇는 작업들을 해석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2012년 진행했던 <만월의 환영>에서 산모의 호흡과 태동에 따라 계속 꿈틀거리는 임신중인 배를 마치 언덕처럼 촬영한 영상을 선보였다. 동시에 바닥에는 둥글게 파놓은 구멍에 모유가 가득 담겨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땅과 온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보름달이자 우물이다. ‘우물은 신화적 상징을 담은 성소로서 다뤄져왔다. 생명이 잉태하는 공간이거나, 건국이나 제의적 장소, 회복과 재생, 신화적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 등 탄생과 존재의 긍정성, 삶의 신박함을 담지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장 원초적 영양분인 모유가 담겨있다. 마치 여성신 창생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이 모유는 전시기간동안 증발되고 발효되어 공간에 진동하는 생명의 를 뿜어내었다. 썩는 것은 변형되는 것, 세포질과 원형질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현상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생명의 는 어린아이의 오줌을 뿌려 만들어낸 얼룩그림 <야뇨증>(2014)에서 더욱 과감히 실현된다. 오줌 역시도 신체의 작용을 증거하는 생명의 찌꺼기들이다. 그 찌꺼기들이 내뿜는 강렬한 지린내는 직접적인 감각을 넘어 상상계를 자극하는 생명의식에 맞닿아 있다.
 
2. 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
 
작가의 서정을 키워왔던 핵심적인 장소, 부산의 영도 깡깡이 마을은 쇳소리 가득하고 현재까지도 밤낮없는 소음과 배를 수리하는 조선소들이 있다. 철비린내와 바다냄새가 뒤섞여 연한 핏비린내가 자욱히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다. 과거 깡깡이 마을 할매들이 선박의 녹을 제거하거나 붙여있는 각종 오물들을 갈아내듯이, 작가는 지난 2017년 개인전 <혀뿌리>에서 전시장의 벽면들을 갈아내었다. 갈아낸 벽면에는 중첩된 시간들이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벽면의 가루들이 해변의 일렁이는 풍경을 자아내었다, <살갗 아래의 해변>(2017)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다시금 자기 몸으로 그 기억들을 새기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공간에 부유하고 표류했을 분진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생계를 이끌어야 했던 할매들의 모질고도 굴곡진 시간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시간과 기억을 후벼 판 듯한 벽면이 아름다우면서도 먹먹했던 이유다. <피속의 파도>(2017) 역시 그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썼던 파란색 유성페인트를 두르고, 생선 비릿내 가득한 상자들을 마치 산맥처럼 일정한 궤적으로 쌓아올린 작업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모습과 습성, 깡깡이마을을 에워싸고 작가 스스로에게 각인되어 있던 정서들을 육화시킨 것이다.
작가의 서정에 영향을 주었을 조부모의 삶, 어린 시절의 기억, 그때 그곳,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록과 장면들이 구체적이다. 어쩌면 해결이 안 되는 습성, 삶의 형태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강력하게 되물림되었을 심리적 영향들이 점점이 놓여있는 듯 하다. 또한 그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육기에 대해 작가의 의식에 소여된 명확함은 그의 영도시절을 빼고는 쉽사리 논구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작업들은 온전한 자기동일성 안에서만 자신의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없는, 작가가 견지해왔던 태도를 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순환적인 기억들을 숨고르기하면서 자기 정서의 뿌리를 발견하고, 현재의 접근법들에 맥락적으로 닿아있는 지점들을 엿볼 수 있는 작업들이다.
 
3. 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 ‘소설적인
 
저를 완결된 텍스트로 판단할수록 그들은 공간과 전시 자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덫을 쳐놓고 미끼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일지 이후의 편지’, 김도희 작가/콘크리트시계(2011)
 
그의 몸은 하나의 매질이 되어, 의식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겪게 되는 감각들을 포괄하는 처소이다. 실존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이자, 작가에게 몸은 변해가는징후로서 자신과 세계에 접속하는 인식코드가 된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 소리지르는 법을 배우고, 그마저도 모자라 형도의 채석장 바위에 누워 온몸을 열어젖히고 흡사 짐승소리 같은 곡소리를 보여주었던 행위에서 작가는 소리통이 된 자신을 느끼고, 그 소리들의 향방- 외부로 향하는 동시에 자기 내부의 찌꺼기들을 모두 발산시키는 듯한-에만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우주와 접신하듯이 발산되는 에너지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는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기운을 증명한다. 퍼포먼스는 행위자의 원초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면서, 주어진 형식이며 모든 것은 즉흥적이고도 우발적이다. 자신이 반응하는 이유들을 발견하게 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세계를 인지하는 접촉면을 확장하는 방법이고, 이 접촉면은 그가 예술가로서 세상을 다루는 진정성을 마련해왔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현하는 작업의 내러티브는, ‘과정적인것에서 확장하여, ‘소설적이다. 그것은 줄거리에 의해서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나 담론구조 내지는 확고한 내적 지향성과는 다른 과정적인요소와 우연성’, ‘즉흥성에 의한 변이가능을 지지하는 것이자 담론, 생성되어가는 지향성을 일컫는다. 처해진 상황(사건, 장소, 관계 등) 안에서 일상적/특정 장소가 무대가 되어 스스로를 놓아두는 것. 이때 주체는 안정된 작중인물이 아닌 감각하고 실재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자, 그저 행위하고그 자리에 존재하도록처하게끔 내던져진 주체이다. 이 주체가 만들어낼 이야기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록들과 관심들을 포괄하면서도 결과를 열어두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편재해있다. <신치로이드60>(2003)에서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복용해야만 했던 약을 약 한 달 간 끊고 장지를 이불삼아 지냈다. 약을 복용하지 않은 대가, 증세로 신체적인 무기력이 몰려왔다. 또한 아픈 감각에 의해 더욱 도드라지고 예민해지는 감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오롯이 몸의 기록이 되어 장지의 주름들로 남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작가가 구하고자 한 것은 죽음, 자해, 부정 따위로 단순화시킨 개념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유와 소설적인 체험을 통해서, 실존하는 양상을 자기 몸의 반응을 통해 인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_잠행_바닥>(2015)은 쇠락해가는 성매매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촌, 불탄 집인 하월곡88을 무대로 한다. 작가는 썩어문드러진 장소를 걸레질하며 청소하였다. 보자면 작가가 주로 포착하는 관심사에서 , 층위, 습윤, 침착등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몸에 새겨진 흔적이자, 세계에 다가서는 순차적인 단서들을 제공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장소에서 채집하는 벽지나 불에 탄 물건들이, 콘크리트를 비집고 올라온 생명력 강한 나무의 엉겨붙은 뿌리들이 모든 것이 멈춰버린 죽음의 장소와도 같은 하월곡88을 쓰다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벽면을 닦아내는 수행, 어쩌면 그 무용해보이는 행위들 저편에 작가는 장소가 간직하고 있을 법한 웅크린 기억들을 끄집어내었고, 그 주변의 소리와 대화들을 기록하면서 덤덤히 풀어내었다. 그는 일기를 썼고, 채집을 하였고, 말을 걸었고, 계속 걸레질을 하였다. 그 와중에 과거 자신의 대화들을 기억해내었다.
18일을 계획하고 14일째 스스로 나왔던 날, 바깥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을 디디는 걸음조차도 생소했다던 <콘크리트 시계>(2011)에서 작가는 자신이 세팅해둔 장소에서 14일 동안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알 수 없을 불확정한 상태 안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자기 당위로서 발생한 작업들이 놓여진 공간에 거주하면서, 작가는 머무는 동안 몸상태 변화 등을 신체적 기록으로 남겼고, 그 안에서 마주쳤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방문기록들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14일이 지나자 그에게 장소는 원래의 집에서 지낼 때의 감각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과잉 정보를 처리해내지 못하고 두 손 놓고 있는 멍청한 상태관계를 단절시켜 죽음을 가속화하려는자기 몸의 작용을 인지하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한바탕 몸속에서 소동이 벌어지듯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고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존적 윤곽을 찾기 위해 작가는 상황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반응들-자기언어들, 파편들-을 찾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마무리하며
작가의 주요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작품적 경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글의 제목을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로 했지만, 글의 순서는 거꾸로 간다. <1 .="" span="">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공명의 측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 작가의 현 상황을 담는다. 존재의 육기가 죽음과 부패가 아닌 본질적으로 생명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가늠하고, 설화적으로 연결된 원형적 상징들을 통해 확장된 주제와 방법론을 다뤄보았다. <2 .="" span="">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은 영향관계와 서정의 시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기질경향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 것이었다. <3 .="" span="">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소설적인 체험>은 작가의 퍼포먼스적인 특성이 강한 지점들을 다룬 것으로 자신을 한계점까지 밀고가거나 유폐하는 등 강렬하게 각인되는 작업들을 독해한 것이다. 이를 해석하는 특징적 용어로서 소설적인을 대입시켜 내러티브-열린으로서 그의 수행적 행위들을 맥락화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