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4일 화요일

다시 걷기, 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김미련 개인전<랜덤그리드, 랜덤대구> 전시서문
 
다시 걷기, 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다
그저 걸어가자
설움과 희망이 뒤범벅된
알지 못하게 뻐근한 이 가슴을 안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박팔양 시*에서 발췌
 
주류담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형식들을 모색해왔던 작가 김미련은 이번 <랜덤그리드, 랜덤도시>에서 향촌동북성로를 리서치 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우선 제목에서 랜덤그리드는 확고한 규칙과 결정론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않은, 다만 확률적인 것이자 우연과 확장가능성의 계기를 품는 일종의 코딩 개념이다. 구조적인 합리성과 경제성, 효율성 등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을 과감히 변형시켜 새로운 구조를 생성하는 체계를 일컫는다. 이번 작업에서 랜덤그리드는 역사와 장소를 독해하고 근대적 시각과 주류적 담론이 지배해왔던 질서에 반질서적개념을 조합시켜 맥락화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랜덤대구또한 대구라는 확고한 도시성에 균열을 내는 미시적인힘을 발견하고 해석의 다양한 여지를 담보하기 위해 혼종적인 지점을 찾아내려는 의지적 표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는 대구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일본인거류지역으로서, 유곽지대였던 자갈마당(야에가키초)과 과거 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달성토성)이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다. 향촌문화관 역시도 과거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선남은행(1912)으로 일제 수탈의 역사를 상징하는 자리에 위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상업은행의 전신으로 1976년 신축된 건축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향촌동 일대는 한국전쟁시기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머물렀던 곳으로 예술교류 및 창작에 중요한 근거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문화적인 기억이 머무른 장소이자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대구 근대화의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던 순종어가길1909년 순종이 남서순행의 일환으로 행차했던 거리를 중구청에서 조성한 것으로, 수창동에서 달성공원에 이르기까지 약 1km에 이른다. 그 끝에 고증과는 다른 복장을 한 11m의 순종 동상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우뚝 서 있다. 시민 사회에서는 일제 치욕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고 미화시킨 처사로서 순종어가길을 비판하며 동상철거를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실상 반일감정을 잠재우고자 당시 친일파였던 대구시장의 부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강압적으로 순종을 보냈던 치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길이다. 심지어 순종이 지나갔던 그 길은 북성로, 수창동, 달성공원(달성토성) 등 일본인 거류지에 속한 지역이었다. 역사적 사실은 물론 시민사회의 요구와 무관하게 추진된 순종어가길에 대해 작가의 시선이 머문 것은 마땅해보인다. 평소 사회적 이슈나 공동체에 있어서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 작가였기에, 이 작업을 통해 역사적 왜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작업들은 현재의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의 변화와 과거 역사적 맥락들을 예술가적 실천으로 잇는, 말하자면 현재와 과거의 시간성 그리고 역사에 대한 기억감정들을 직조하는 과정에서 구현되었다. 그의 작업들은 세 가지 국면에서, 다시 걷기’, ‘지우면서 그리기의 퍼포먼스/ 다시 듣기의 사운드작업/ 사물금고로서 장소의 흔적을 품은 사물들을 채집한 설치작업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다시는 재귀적인 시선으로 역사와 장소, 공동체의 삶에 접근하는 성찰적 사유를 담은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랜덤 도시_다시 걷기>는 하얀 작업복을 입은 퍼포머가 모니터를 얹은 보행기를 끌고 거리를 걷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퍼포머가 놓인 거리는 순종어가길이다. 그 장면에는 지금의 아스팔트와 거리가 함께 기록된다. 퍼포머는 산책자 같기도 하다. 산책자는 주변의 풍경을 관조하는 관찰자이자 자신의 사유에 집중하는 자이다. 선택적인 장소에서 걷는 몸은 그 길을 걸었던 순종의 마음과 순종의 행차를 바라보는 공동체의 마음을 품은 과거와 마주하는 동시에, 장소를 호흡하며 현재를 체현하는 몸이다. 누군가 걸었던 그 거리를, 그리고 현재에도 삶들이 이어지고 있는 그 거리를 다시 걷는다는 것은 장소를 객관화하면서 경험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장소에 깃들어있을 기억들과 감정들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논구될 수 있는 여러 서술방법 중, 보행기 모니터는 퍼포머에 대한 서사를 덧붙이는 또 다른 몸이다. 산책자이자 관찰자의 태도, 왜곡된 역사와 진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욕구하는 몸이기도 하다. <랜덤도시_지우면서 그리기>는 대구 읍성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인근에 위치한 성진사라는 빈 공간을 다룬 것이다. 7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오래토록 비워져 있어 먼지가 가득할 바닥일진데, 작가는 먼지가 진득하게 붙은 바닥 위로 원을 그렸다. 원을 그리는 행위는 동시에 바닥을 닦아내는 행위와 동일하다. 이 원은 지도 위에서 순종이 지나갔던 장소들을 이은 형태이다. 작가는 지우면서 그리기라는 최소한의 행위적 개입으로 공간을 드러낸다. 사람의 숨이 닿았었을 빈 공간에 베인 미시적인 역사들, 개인 삶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았을, 잊혀진 역사적 진실을 강조하는 듯한 작업이었다. 특히 이 작업에 관한 한 산책자였던 퍼포머를 기록한 <랜덤도시_다시 걷기>에서 보였던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랜덤도시_지우면서 그리기>를 통해 도시와 환경, 어가길을 총체적인 상징기호로 합치한, 전지적인 시점으로 이동한 듯 보인다. 시점이 변하면서 연동되는 두 개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랜덤하게교차하고 직조되는 양상으로 서사를 확장하면서 주제를 부각시킨다.
작가는 또한 대구 근현대사 속에서 고유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장소이자 70대가 주 고객층인 향촌동의 한 캬바레를 찾았다. <향촌카바레>에서 작가는 R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가 찾은 이 독특한 장소에서 현재를 관찰하였다. 그것은 현실적 삶의 무게를 떨치려는 듯 카바레 안 사람들이 취하는 몸짓이다. 향촌동을 살아왔던 몸, 그 몸의 표현으로서 특정한 몸짓은 랜덤대구의 미시적 역사의 일부가 된다.
 
그의 사운드설치작업인 <랜덤도시_다시 듣기>는 순종어가길의 동상 제목이 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와 해방시기 만들어진 노래 귀국선을 교차시킨 것으로 즉각적으로 감각되는 비물질적 진동을 통해 역사적 모순에 다가서는 작업이다. 정처 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샤워기 모양의 스피커가 몹시도 불안하다. 치욕의 역사를 미화한 듯한 시대착오적인 제목을 가진 순종 동상은 마치 현재의 시간성을, 그리고 향촌동 오리엔트레코사에서 해방 이후 녹음된 귀국선은 과거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귀국선은 일제 강점기 해외로 징용되었던 노동자들이 귀향하는 모습을 담은 곡이다. 애절한 가사에는 해방과 독립에 대한 기쁨이 함께 담겨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의 작곡가는 친일행적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개의 시간성, 이 두 가요의 교차는 사실과 왜곡에 대한 작업적 해석이자 혼란스러운 정서적 감응을 표출하는 듯 하다.
작가는 장소 곳곳에서 사물들과 형상들을 발굴하였다. 그것은 사물을 채집한 작업 <사물금고> 연작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형상은 사물의 형태에 관련한 것으로, 그 형상의 본을 뜬 것이다. 말하자면 순종의 동상이 놓인 좌대며 주변의 공공조형물의 형태도 일부분이자 사물에 관한 기억으로 채집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채집한 사물들을 3D입체설치와 영상작업으로 구현하였다. 각 사물들은 유기체 내지는 유령처럼, 먼지나 공기가 되어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모습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인간에 의해 쓰인, 고안된 사물들이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은 살아있는 생명체보다도 죽은 사물, 잊혀진 사물, 미처 인식에도 닿지 않았던 사물에 향한다. 그것은 역사를 추론하며 증명하는 열쇠이자 삶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미시적인 역사의 담지자들이다. 작가는 또한 작은 빛을 뿜어내는 투명한 공 안에 작은 메달이며 총과 칼의 형태를 지닌 작은 피규어들을 집어넣었다. 아주 여리게 반짝이지만, 장소를 입증하면서 수탈과 아픔의 역사를 떠올리는 기념비적 작업이다.
 
일정한 사건들의 연쇄적 연결이 아니라,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입증할 수 있는지, 작가의 작업들은 마치 하나의 변증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가로서 실연하는 과 관찰하는 기록과 기억을 발굴하는 채집이라는 실천적 행위가 역사와 장소에 내재한 모순에 다가선다, 그 행위는 과거와 현재를 직조한 망 속에서 비판적 관점을 생성하는 동시에 통찰을 견인하고 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제에서 출발한 전시, <랜덤 그리드, 랜덤 대구>에 쓰여진 서사들, 그 너머의 서사들은 무엇을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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