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2일 일요일

기고문)
 
내가 잠시 당신의 삶에 스쳐지나가도 되겠습니까?
 
몽골의 국기를 보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무구의 형상과 음양의 조화에 대한 상징이 그려져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과거 세계 종교들이 유입되었을 즈음에도 결국 몽골의 풍토에는 샤머니즘과 불교 등이 적합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는 종교가 이원적 체제로서 단순히 유한함과 무한함만을 가르지 않고 하늘과 땅이 마주한 지평선을 일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삶의 방식을 지칭함을 보여준다. 바람도 물도 하늘도 땅도 그리고 초원에 함께 살아가는 동식물 모두 하나하나 의미를 지닌 신이자, 신의 자손이다.
 
사방에 지평선을 끼고 있는 초원을 다니다보면 그 거리조차 가늠하기 힘든 곳, 곳곳에 오색 천으로 장식된 돌탑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몽골에서는 이를 어워라고 부르는데, 우리의 서낭당과도 같은 곳이자 이정표 역할도 한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과 자손의 안녕을 기도하는 장소임은 물론, 낯선 자들에게는 그 땅을 지배하는 신령에게 내가 이 땅을 지나가도 되겠습니까공손히 허락을 구하는 장소이다. 곳곳에서 마주하는 어워들은 같은 모습이되 지역마다 고유한 차이를 띠기도 한다. 마을의 당산나무나 서낭당을 이제는 문화적 자원 발굴의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몽골초원의 사람들에게 어워는 여전히 그들 삶과 연동 중이다. 돌탑을 구성하는 돌 무더기 뿐만 아니라, 짐승의 두개골, 종교적 장식품, 아끼는 물건들, 미처 다 녹지 않은 초, 사진 등이 어워주변을 장식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간절했을, 기도의 흔적들이다. 도시 주변, 혹은 명성이 있는 곳으로 갈수록 어워는 더욱 화려해진다. 행여나 장난삼아 재미삼아 오는, 무작위 다수의 사람들이 어지럽히는 기운에 따라, 신성한 어워주변이 악령으로 덮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자연을 더럽히는 인간행동에 대한 경계이자,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무관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또한 타인과 문화에 대한 존중을 일깨우는 의식들이 주조해낸 도덕적 원형으로서의 샤머니즘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영원의 시간, 신화가 되어버린 역사
역사가 신화가 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이 있다. 일반적으로 조상 대대로 전해주는 옛 구전일 수도 있고, 사견이지만 현재와의 비교 속에서 너무나도 강렬했던 그 시대에 대한 아련한 동경도 한 축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 의식을 무장하는 것과도 같다.
중국조차도 그 두려움에 씨를 말리려 하였던 대초원의 지배자 몽골인들, 그러나 그들의 현재는 세계 근현대사와 맞물려 강제되었던 이념과 현재 도상국으로서의 각종 개발진통,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인한 정신적 황폐화를 또한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역동적이기도 하지만, 도시, 도시민, 빈부격차의 장면이 한눈에 보이는 울란바토르의 도시전경은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초원이 선사하는 이///인 거룩함이 몽골인들에게는 현재 어떤 의미로 역할하고 있을까?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여전히 일상의 영역이지만, 계속해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그것은 모든 가치를 떠나 그저 가난함’, ‘시대에 뒤떨어짐으로 퇴색될 수도 있겠고.
그렇다면 나를 포함하여 다소 천박한 오리엔탈리즘적 감상과 환상을 충족시키려는 여행자에게는 대초원은 어떤 의미가 될까? 타문화에 대한 성찰적 기제가 부재했음을 깨닫게 하는 한낱 혹은 한갓 (인간주제에)’의 부끄러움, 건방짐을 무참히 깨버리는 대자연의 스펙터클한 기후, 나와 그들의 일상에 대한 동등한 비교.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는 막연하게나마 대륙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바다가 없으되, 하늘과 마주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있고, 행성의 일부 같은 사막과 작지만 거친 수풀로 뒤덮인 초원, 이러한 풍경이 선사하는 바는 먼 옛날 저 초원을 따라 실크로드가 생기고 서로 다른 문화, 이질적인 문화들이 결집한 국제적인 도시들이 생성되고 또한 이후 소멸되는 과정들을 상상하게 하였다. 반도의 땅, 또한 분단으로 인해 섬과도 다를 바 없는 한반도의 좁은 지형에 살면서, 나에게 중앙아시아는 사통팔달의 행로에서 일어났음직한 무수한 서사들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하여 문학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더욱이 좋은 신비적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초원 한 복판, 아련하게 전설의 증거들을 담은 유적지들을 탐사하면서 나의 막연한 동경의 이유를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카라코롬의 에르덴주 사원 그리고 튀르크 유적지
우리의 여정에는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튀르크(돌궐)제국의 유적지와 에르덴주의 불교 사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착했던 그곳들은 그야말로 과거의 환영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몇날 며칠이고 망부석처럼 지새면서 교감하고 싶은 심정을 자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그 첫 심경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지금은 불교사원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과거 카라코롬은 국제도시의 명성답게 세계의 온갖 종교들이 창궐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몽골의 삶과 가장 닿아있는 불교와 토템사상을 기반으로 한 샤머니즘이 사장되지 않고 남아있다.
튀르크족은 북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보통 돌궐족이라 표기하지만, ‘몽골을 과거 중국에서 낮추어 몽고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돌궐또한 중국에서 폄하하여 표기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들 표현인 튀르크로 표기하기로 한다. 튀르크족은 야만적인 북방오랑캐라며 그들을 낮추어 기록하였던 중국문헌의 내용들을 일축하면서, 국제적 도시이자 문명사회로서 기능하였던, 그들의 자존감을 표출하는 몇 기의 돌궐비문을 남겨놓았다. 어떤 비석은 벽으로 둘러 친 정방형 벌판에 손길이 닿지도 않았을법한 풀들과 함께 방치되듯 덩그러니 놓여있으되, 묘하게도 튀르크제국의 흥망성쇠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듯하여 내게는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튀르크인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인데, ‘낭생설화라는 것이 있다. 참으로 흥미롭다. 먼 고대 튀르크인들은 주변의 공격을 받아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죽는다. 이 아이는 인간의 아이를 궁휼히 여긴 늑대에 의해 양육되는데, 훗날 이 아이가 늑대와 결혼하여 열 명의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중 아사나(늑대)’라는 이름을 지닌 막내아들, 그의 후손들이 돌궐제국의 칸들을 배출시킨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그러한 이야기이다. 이는 우리의 단군설화와도 같은 맥락으로서, 고대의 역사 및 토템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초원의 늑대를 숭배하는 유목민족이라.
과거 몽골제국의 기마군대가 서구를 점령할 때, 서구사람들의 눈에는 다만 말들이 떼거지로 달려오고 있는데, 그 말들이 좀더 가까운 시야에 들어왔을 무렵, 활을 조준하는 무사들이 말의 허리에서 갑작스레 우뚝우뚝 솟으며 활시위를 당기는 장면을 보고 얼어버렸다는, 몽골 전사들의 그 용맹함에 가히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사견이지만 전쟁의 두려움을 넘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것은 스펙터클한 군무에 가까웠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경외감과 숭고함과 공포의 세 축이 이 기마민족에 대한 유럽인들의 심경이지 않았을까?
몽골인들은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우람한 편이다. 몽골 남성들의 고유 의상은 남성미를 확고히 살리는 차림이기도 하다. 입으면 어깨가 더욱 넓어보이며, 키는 더욱 훤칠해 보인다. 거기에 말을 타고 달리거나, 큰 짐이라도 이고 가는 모습을 보면 ~ 대륙의 남자구나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게다가 몽골어 자체는 발음이 독일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소리의 강약, 발음의 세기 정도가 상당히 강건하다. 몽골 여성은 어떠한가. 초원을 떠돌아야 하는 남성에 비해 몽골의 가족들을 지켜낸 것은 바로 몽골여성들이었다. 그리하여 몽골사회를 이야기할 때 모계사회적 특징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문득 북방초원에서부터 공유되는 마고신화 등 여성 창세기 신화가 이러한 배경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몽골을 다녀온 나에게 새로 붙여진 별명이 있다. ‘몽골유학생 캠퍼, 최큐’, 낯선 이들과 동행한 사막에서의 트래킹이며 호수에서의 캠핑, 그 와중에 우정도 발견하고 의리도 발견하고 친구도 생겼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몽골역사 및 유적, 문화에 대한 많은 공부를 선행하지 못한 바가 후회되기는 하였지만, 이번 여행 덕분으로 다시금 대학시절 읽었던 중앙아시아의 역사책을 다시 펼쳐들기 시작했고, 더불어 그들의 현재,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새로 생긴 별명이 보다 막역해지지 않겠는가.
 
* 여행사 '몽골세븐데이즈'와 여행잡지 '트레비' 기획으로 참가한 몽골여행 후기입니다.  

2015년 6월 13일 토요일

기고문) 예술과 철학, 사회사적문맥과 함께 본 17세기 네덜란드의 두 거장


 
예술과 철학. 사회사적 문맥과 함께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와 화가 베르미어(Johannes Vermeer)’
최윤정 큐레이터 미학/미술비평
 
1. ‘모든 것 속에 실체가 있고, 실체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인간이 유한한 이상 실체를 깨닫는 인식은 이성적인 분석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가의 철저한 주관에 의하므로. 이에 기반하여 사회사적 문맥을 담아 17세기 네덜란드의 두 거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한쪽은 철학자(스피노자1632-1677)로서, 또 다른 한쪽은 예술가(베르미어1632-1675)로서, 그들이 그들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 실천해왔던 가치는 물론, 그로부터 예술과 철학의 긴밀함을 추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17세기 철학에서의 합리주의와 미술에서의 장르화
유럽의 17세기는 전반적으로 르네상스를 통해 중세를 넘어서고 본격적인 근대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신과 내세에 대한 사유를 중심으로 삼았던 중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심속에 그 빛을 잃는다. 이는 17세기 유럽사회에서 일어난 종교, 정치, 경제의 흐름과도 상응하는데, 이 시기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합리주의의 철학적 테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면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사회변화는 과학과 밀접하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17세기는 과학적이고 필///인 법칙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우주는 무한대이며, 통일적으로 단 하나의 원리에 의해 조직된 상호작용적이며 연속적인 체계라 주장했고, 이는 일체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자연법칙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신학적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의미의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후 우주에 대한 탐구는 케플러,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을 통해 계승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적 세계관(천동설)을 전복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학적 향방과 더불어 사상에 있어서도 신 중심적 세계관은 과학적인 태도에 근거한 근대적 사유의 주체로서 자연의 빛인 인간의 이성을 연구하는 합리주의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에 있어서도 절대주의적 왕정체제에 대립되는 공화주의의 탄생을 예고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적절한 기수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 북부 7지방은 카톨릭 진영의 수호자였던 스페인의 펠리페2세로부터 독립(1609)을 달성하여 그들의 종교와 시민적 자주를 이루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 시기는 네덜란드의 전성기로 불리며 경제적인 번영은 물론, 이를 토대로 자유와 관용을 낳으며, 지성인들의 피난처로서 역할하기도 하고 동시에 예술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 성장한 시민계급은 문화와 예술향유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예술은 성스러운 종교화나 역사적 사건 혹은 영웅이 아닌, 스페인으로부터 자주적으로 획득한 소중한 삶-세속적인 현상들에 대한 관찰-을 담아낼 수 있었다. 당시 신교의 성상숭배금지령은 화가들로 하여금 더 이상 성스러운 주제에 주목하지 않고 그 관심을 일상에 향하게끔 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점도 주지할 일이다.
장르화(*풍속화,세속화)에 나타나는 인간의 삶은 비속하고 사악하고 천한 것과 더불어 기쁨과 진솔함이 펼쳐지는 일상의 자////운 현상으로 묘사된다. 스피노자 역시 인간의 정서적 삶이 전형적인 선과 악의 갈래로 규정지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이러한 맥락은 당시 사회가 눈에 보이는 실제 세계에 대한 관심을 전제로 하고, 이 관심은 자기 외적인-초월적인 것에 대한-도덕에 의해 강제되지 않음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서 장르화에 나타나는 도덕이란 인간이 속한 현실의 삶에 기초한다. 작품에 표현된 도덕은 작품 속 대상들의 상징성 즉 알레고리(allegory)를 통해 구현된다. 이러한 알레고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해골, 거울, 시계, 비누방울, 진주 등과 같은 장신구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고, 술과 굴, 개나 원숭이 등은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는 식으로, 또한 이와 더불어 작품해석의 방향을 정해주기 위해 화가의 장치는 그림 속의 그림이나 직접적인 단어삽입 등을 통해서도 현실적 도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베르미어, 델프트풍경




3. 베르미어와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유작에서 ‘1662101날짜가 적힌 하나의 문서가 발견된다. 이 문서의 내용은 어떤 유명한 시민이 델프트의 화가 베르미어가 가치있다고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베르미어는 이러한 장르화의 전통 속에서 고유의 표현을 찾았다. 하여 장르화의 도덕적 교훈을 훨씬 뛰어넘는 회화 그 자체의 근본가치를 상기시키는 미적인 탁월성에 도달하였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그의 표현은 화면의 일부가 아닌 화면 전체, 표현대상 하나하나에 생생한 질감을 꿈트게 한 의 표현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념적 요소, 즉 사물에 내재한 빛과 내재성의 철학을 주장한 스피노자를 연상시킬 수 있다.
 
잠시 스피노자 내재성의 철학을 간략히 살펴보자. 스피노자에게 모든 존재는 무한한 존재자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무한한 존재자란 인간 외의 세계에 있으면서 피안에 대한 구원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격적 신이 아닌 전체로서의 자연이자 필연적인 자연의 질서로서 무한자이고 세상의 실체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 있게 하는내재적인 원인(이유/)으로서 이러한 신은 인간과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않으며 내재적인 관계(역능/)를 통해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생을 긍정하는 힘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인간이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소중한 것이다. 이는 당시 시대가 요청한 합리적 인간관과도 상통한다.
스피노자와 베르미어는 1632년 각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그 시기는 네덜란드의 시민사회가 정립된 때였고, 관용적 분위기를 통해 자유로운 학문이 생동할 수 있었기에 유럽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밀집하기도 하였다. 암스테르담 유대인 거주지에 살던 스피노자는 레이든을 거쳐 1660년대부터 레인스뷔르흐에 살았고, 이휴 1663년 포르스뷔르흐로 옮겼으며, 그리고 나서 1670년대부터 16772월 죽기 전까지 헤이그에 살았다. 여기서 포르스뷔르흐는 베르미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던 델프트에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마지막 정착지 헤이그는 또한 델프트와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지리적 근접성은 스피노자와 베르미어가 서로에 대한 명성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는데, 실제 베르미어는 델프트에서 주로 활동하기는 하나 헤이그에서 예술감정인으로서도 활동했고, 1661년 이래 화가 장인길드의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즈음 스피노자는 유대교에서 파문당하고 저편 세계에 대한 표상을 거부한 사상가로서 당시 네덜란드 종교 팜플렛에 악명높은 이단자 계열로 표기될 만큼 그 이름이 자자했다.
그 와중에 스피노자가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 화가들과도 어울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심지어 한 측에서는 스피노자와 렘브란트는 이미 서로 알고 있었고 심지어 직업 만났다는 내용이다. 이 말인 즉 당대 환경에서 스피노자와 베르미어 역시도 접촉을 했거나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더욱 뒷받침한다.
 
다만 양자의 연관에 있어 종교에 대한 문제는 한 가지 걸림돌로 작용하는데, 스피노자는 신학을 다룸에 있어 자연의 빛즉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사유가 우선한다고 보았고, 그리하여 초월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를 비판하였지만, 베르미어는 이러한 신앙을 가진 당대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베르미어가 카톨릭적 이념에 봉사했다가 보다 그의 현실적인 문제로 종교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의 처가는 베르미어를 재정적 압박에서 해방시켜주는 역할을 하였고, 결혼 전 재산상속을 이유로 하여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일 뿐, 그의 작품세계에 종교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피노자와 베르미어 간에 형성되는 내적 연관성의 단초는 그리하여 첫째, 그들 각각의 작업이 종교와 무관하다는 것, 이는 일상의 장면을 통해 종교적인 구원의 의미를 담았던 렘브란트에 비하여 스피노자가 베르미어의 문맥에 더 가깝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둘째, 그들이 활동했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북부에서 보이는 특유의 문화적 환경이다. 이곳은 전반적으로 종교적이고 궁정적인 문화를 표방했던 다른 유럽사회와 구별적인 특징을 갖는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시민계급의 대두는 이에 대한 외적인 근거가 되었고, 과학적 세계관과 장르화의 경향은 양자의 내면에 머물면서 그들 고유의 작업이 성취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의 작업이 바로 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빛이 사물에 스며드는 그 모든 특성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내재성의 주요 테마이자 그 자체이며, 베르미어 회화의 고유의 표현과 그것이 함의하는 철학적인 성격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4. 내재성의 빛 표현,
행위의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포착하는 인간의 사유를 가시화하는 바
장르화가 선사하는 일상의 유머러스한 요소는 베르미어 회화에 이르러 천의 색깔을 고조시키는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통해 신성한 감응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집중점 창조와 더불어 관조의 효과로서 정적인 분위기를 배가한 요소에 기인하는데, 실내의 일상적 장면은 그리하여 여러 인물이 아닌 하나의 인물이 주로 위치한다. 이 인물들은 모두 공간적으로 창문이 닿아있는 왼편 구석에 있는데, 이러한 격리 효과를 통하여 베르미어는 관람자가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집중되는 상황은 그 인물이 행하고 있는 행위로 의도하였다.
빛이 형성하는 분위기는 베르미어가 의도한 주제들에 핵심적이다. 부드럽고 정적인, 그 어떤 시간적 흐름도 배제하는 빛.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인물들의 행위의 순간은 무시간적인 빛 속에서 영원히 지속되듯이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들이 당대 장르화가들과 구별점을 보이면서 베르미어 회화의 고유한 지점을 형성한다.
 
* <우유를 따르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45.45x40.6cm, 1658-1661,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소장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은 우유를 붓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우유를 붓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이 와중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혹은 누가 등장하는지, 우유를 따르는 사연 등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 다만 그 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행위 자체를 보고 있을 뿐이며, 조심스럽게 흐르는 우유의 지속적인 흐름과 함께 우유를 따르는 일상의 한 행위 자체가 영원할 것 같은 인상을 강화시킨다. 여기에는 시간적 흐름조차 감지할 수 없다. 일상의 평범한 행위가 신성한 감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주변 사물들에 표현된 빛점들이 이를 더 강화시켜주고 있다. 소박한 일상 속에서 여인의 우유를 따르고 있는 팔은 굵으면서도 힘차고, 노동하고 있는 여인의 팔은 환하게 빛난다. 전통적인 알레고리에서 우유/액체등을 붓는 행위는 절제를 상징한다. 많이 부으면 넘치고 적게 부으면 모자라는.
 
 
<지리학자> 캔버스에 유채, 53x46.6cm, 1668-1669, 슈테델미술연구소 소장
 
 
이 작품은 정적인 분위기에서보다는 빛의 표현에서 더욱 면밀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그는 내면적 관조상태에 있던 여인과는 달리 창 밖 세계로 고개를 든다. 이 젊은 자연과학자는 사유의 행위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구성요소들 중 책상위에 놓인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종이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달리 환하다. 흰 종이는 자연과학자의 세계에 대한 사유, 즉 진리탐구의 장을 마련한다. 더불어 원근법적으로 과도하게 크게 그려진 콤파스를 쥔 손은 학적이고 능동적인 사유를 의미하며 이 작품의 주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차가운 빛의 표현을 통해 강화되고 명석하고 판명한지성의 질서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빛나는 흰색은 현존하는 사유하는 자와 대화하는 힘의 영역으로서 취급된다. 이러한 흰 영역은 새출발을 상징화할 수 있다[...]희고 맑은 고문서는 인간에게 어떤 순화를 일으키게 하고[...]학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의미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것이 빛이고, 어두운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한낱 빛의 효과일 뿐이며, 그 빛을 반사하거나 흡수하는 여러 신체들 위를 비추는 빛의 한계 내지 경계이다[...] 명암 그 자체는 그림자의 밝음과 어둠의 효과이다
 
빛은 색을 창조하고 색은 밝음과 어둠으로 지시된다. 빛의 어두운 효과는 색을 탁하게 하는데, 이는 외부적인 자극이 신체에 남기는 흔적으로서 인간 등 유한한 존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한계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빛의 표현이란 초월적인 인간의 역사적인 행위나 성서의 중요한 장면을 밝히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베르미어의 빛은 작은 사물에서 조차 반짝이며, 작품의 인물 역시도 내면화된 관조로서 행위에 몰입하고 있다. 유한한 세계조차도 내재성의 질서 하에 의미 있게 결합된 빛의 세계, 빛의 순수형상으로서, ‘신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생에 대한 본질적 의지 등 스피노자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바.
 
철학에 대한 시각적 대응물로서의 예술이란 시대적 요청, 사회사적 문맥 독해와 함께 해야 하는 연구과제로서 풍성한 단초들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 스피노자와 베르미어를 통해 17세기 네덜란드 사회가 추구하는 세계관의 한 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혹은 역으로 예술과 철학의 관계를 고민하며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대적 특징을 주요 지점으로 삼아 스피노자와 베르미어의 작업 속에 새로운 관계적 서사를 가미하여 연구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 나에게는 진정 흥미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