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4일 화요일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김도희 작가 작품론>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1. 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
 
최근 작가는 활화산 형상의 배꼽을 캐스팅하는 <뱃봉우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배꼽을 캐스팅하는 짧은 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차가운 석고가 몸에 붙이는 낯선 경험으로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것이고, 어색한 침묵 내지는 호방한 이야기들로 수다를 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기록도 작업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왔던 작가에게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이후 어떻게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배꼽은 세상의 중심이자 인체의 중심, 생명이 시작된 자리다. 탯줄을 끊는 순간 지난한 인생의 고역에 서야 하는 생명체로서 그렇게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어머니의 몸을 존재근거로 삼고 그로부터 태어남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시간의 제약을 넘어 이 증거는 원형적 표상으로서 각인되어왔다. 이러한 배꼽을 캐스팅한다는 것, 지문의 형태가 다르듯 배꼽의 형태 또한 다양하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가 세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오름들이다. 기능적으로 잊혀진 흔적기관 배꼽을 통해서 나의 몸을 관통하는 원형적 상상을 펼쳐놓는 일은 작가의 연 잇는 작업들을 해석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2012년 진행했던 <만월의 환영>에서 산모의 호흡과 태동에 따라 계속 꿈틀거리는 임신중인 배를 마치 언덕처럼 촬영한 영상을 선보였다. 동시에 바닥에는 둥글게 파놓은 구멍에 모유가 가득 담겨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땅과 온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보름달이자 우물이다. ‘우물은 신화적 상징을 담은 성소로서 다뤄져왔다. 생명이 잉태하는 공간이거나, 건국이나 제의적 장소, 회복과 재생, 신화적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 등 탄생과 존재의 긍정성, 삶의 신박함을 담지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장 원초적 영양분인 모유가 담겨있다. 마치 여성신 창생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이 모유는 전시기간동안 증발되고 발효되어 공간에 진동하는 생명의 를 뿜어내었다. 썩는 것은 변형되는 것, 세포질과 원형질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현상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생명의 는 어린아이의 오줌을 뿌려 만들어낸 얼룩그림 <야뇨증>(2014)에서 더욱 과감히 실현된다. 오줌 역시도 신체의 작용을 증거하는 생명의 찌꺼기들이다. 그 찌꺼기들이 내뿜는 강렬한 지린내는 직접적인 감각을 넘어 상상계를 자극하는 생명의식에 맞닿아 있다.
 
2. 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
 
작가의 서정을 키워왔던 핵심적인 장소, 부산의 영도 깡깡이 마을은 쇳소리 가득하고 현재까지도 밤낮없는 소음과 배를 수리하는 조선소들이 있다. 철비린내와 바다냄새가 뒤섞여 연한 핏비린내가 자욱히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다. 과거 깡깡이 마을 할매들이 선박의 녹을 제거하거나 붙여있는 각종 오물들을 갈아내듯이, 작가는 지난 2017년 개인전 <혀뿌리>에서 전시장의 벽면들을 갈아내었다. 갈아낸 벽면에는 중첩된 시간들이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벽면의 가루들이 해변의 일렁이는 풍경을 자아내었다, <살갗 아래의 해변>(2017)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다시금 자기 몸으로 그 기억들을 새기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공간에 부유하고 표류했을 분진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생계를 이끌어야 했던 할매들의 모질고도 굴곡진 시간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시간과 기억을 후벼 판 듯한 벽면이 아름다우면서도 먹먹했던 이유다. <피속의 파도>(2017) 역시 그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썼던 파란색 유성페인트를 두르고, 생선 비릿내 가득한 상자들을 마치 산맥처럼 일정한 궤적으로 쌓아올린 작업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모습과 습성, 깡깡이마을을 에워싸고 작가 스스로에게 각인되어 있던 정서들을 육화시킨 것이다.
작가의 서정에 영향을 주었을 조부모의 삶, 어린 시절의 기억, 그때 그곳,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록과 장면들이 구체적이다. 어쩌면 해결이 안 되는 습성, 삶의 형태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강력하게 되물림되었을 심리적 영향들이 점점이 놓여있는 듯 하다. 또한 그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육기에 대해 작가의 의식에 소여된 명확함은 그의 영도시절을 빼고는 쉽사리 논구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작업들은 온전한 자기동일성 안에서만 자신의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없는, 작가가 견지해왔던 태도를 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순환적인 기억들을 숨고르기하면서 자기 정서의 뿌리를 발견하고, 현재의 접근법들에 맥락적으로 닿아있는 지점들을 엿볼 수 있는 작업들이다.
 
3. 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 ‘소설적인
 
저를 완결된 텍스트로 판단할수록 그들은 공간과 전시 자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덫을 쳐놓고 미끼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일지 이후의 편지’, 김도희 작가/콘크리트시계(2011)
 
그의 몸은 하나의 매질이 되어, 의식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겪게 되는 감각들을 포괄하는 처소이다. 실존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이자, 작가에게 몸은 변해가는징후로서 자신과 세계에 접속하는 인식코드가 된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 소리지르는 법을 배우고, 그마저도 모자라 형도의 채석장 바위에 누워 온몸을 열어젖히고 흡사 짐승소리 같은 곡소리를 보여주었던 행위에서 작가는 소리통이 된 자신을 느끼고, 그 소리들의 향방- 외부로 향하는 동시에 자기 내부의 찌꺼기들을 모두 발산시키는 듯한-에만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우주와 접신하듯이 발산되는 에너지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는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기운을 증명한다. 퍼포먼스는 행위자의 원초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면서, 주어진 형식이며 모든 것은 즉흥적이고도 우발적이다. 자신이 반응하는 이유들을 발견하게 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세계를 인지하는 접촉면을 확장하는 방법이고, 이 접촉면은 그가 예술가로서 세상을 다루는 진정성을 마련해왔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현하는 작업의 내러티브는, ‘과정적인것에서 확장하여, ‘소설적이다. 그것은 줄거리에 의해서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나 담론구조 내지는 확고한 내적 지향성과는 다른 과정적인요소와 우연성’, ‘즉흥성에 의한 변이가능을 지지하는 것이자 담론, 생성되어가는 지향성을 일컫는다. 처해진 상황(사건, 장소, 관계 등) 안에서 일상적/특정 장소가 무대가 되어 스스로를 놓아두는 것. 이때 주체는 안정된 작중인물이 아닌 감각하고 실재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자, 그저 행위하고그 자리에 존재하도록처하게끔 내던져진 주체이다. 이 주체가 만들어낼 이야기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록들과 관심들을 포괄하면서도 결과를 열어두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편재해있다. <신치로이드60>(2003)에서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복용해야만 했던 약을 약 한 달 간 끊고 장지를 이불삼아 지냈다. 약을 복용하지 않은 대가, 증세로 신체적인 무기력이 몰려왔다. 또한 아픈 감각에 의해 더욱 도드라지고 예민해지는 감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오롯이 몸의 기록이 되어 장지의 주름들로 남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작가가 구하고자 한 것은 죽음, 자해, 부정 따위로 단순화시킨 개념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유와 소설적인 체험을 통해서, 실존하는 양상을 자기 몸의 반응을 통해 인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_잠행_바닥>(2015)은 쇠락해가는 성매매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촌, 불탄 집인 하월곡88을 무대로 한다. 작가는 썩어문드러진 장소를 걸레질하며 청소하였다. 보자면 작가가 주로 포착하는 관심사에서 , 층위, 습윤, 침착등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몸에 새겨진 흔적이자, 세계에 다가서는 순차적인 단서들을 제공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장소에서 채집하는 벽지나 불에 탄 물건들이, 콘크리트를 비집고 올라온 생명력 강한 나무의 엉겨붙은 뿌리들이 모든 것이 멈춰버린 죽음의 장소와도 같은 하월곡88을 쓰다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벽면을 닦아내는 수행, 어쩌면 그 무용해보이는 행위들 저편에 작가는 장소가 간직하고 있을 법한 웅크린 기억들을 끄집어내었고, 그 주변의 소리와 대화들을 기록하면서 덤덤히 풀어내었다. 그는 일기를 썼고, 채집을 하였고, 말을 걸었고, 계속 걸레질을 하였다. 그 와중에 과거 자신의 대화들을 기억해내었다.
18일을 계획하고 14일째 스스로 나왔던 날, 바깥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을 디디는 걸음조차도 생소했다던 <콘크리트 시계>(2011)에서 작가는 자신이 세팅해둔 장소에서 14일 동안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알 수 없을 불확정한 상태 안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자기 당위로서 발생한 작업들이 놓여진 공간에 거주하면서, 작가는 머무는 동안 몸상태 변화 등을 신체적 기록으로 남겼고, 그 안에서 마주쳤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방문기록들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14일이 지나자 그에게 장소는 원래의 집에서 지낼 때의 감각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과잉 정보를 처리해내지 못하고 두 손 놓고 있는 멍청한 상태관계를 단절시켜 죽음을 가속화하려는자기 몸의 작용을 인지하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한바탕 몸속에서 소동이 벌어지듯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고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존적 윤곽을 찾기 위해 작가는 상황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반응들-자기언어들, 파편들-을 찾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마무리하며
작가의 주요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작품적 경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글의 제목을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로 했지만, 글의 순서는 거꾸로 간다. <1 .="" span="">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공명의 측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 작가의 현 상황을 담는다. 존재의 육기가 죽음과 부패가 아닌 본질적으로 생명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가늠하고, 설화적으로 연결된 원형적 상징들을 통해 확장된 주제와 방법론을 다뤄보았다. <2 .="" span="">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은 영향관계와 서정의 시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기질경향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 것이었다. <3 .="" span="">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소설적인 체험>은 작가의 퍼포먼스적인 특성이 강한 지점들을 다룬 것으로 자신을 한계점까지 밀고가거나 유폐하는 등 강렬하게 각인되는 작업들을 독해한 것이다. 이를 해석하는 특징적 용어로서 소설적인을 대입시켜 내러티브-열린으로서 그의 수행적 행위들을 맥락화하고자 하였다.

2018년 8월 28일 화요일

행간, 정서, 표면의 조도 : 정용국의 ‘첫 번째 사람’

행간, 정서, 표면의 조도 : 정용국의 첫 번째 사람
(상업화랑_을지로143/ 기간 8.23-9.21)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첫 번째 사람의 각 단계들

어두운 공간, 벽으로부터 스미어 나오듯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글자들은 서서히 선명해지고 최절정에 이른 한 순간에, 하얀 빛이 온 공간을 채우면서 허망하게 모든 글자는 사라져버린다. 그가 한센인의 삶을 연구하며 작업화 한, ‘첫 번째 사람의 첫 작업이었다. ‘첫 번째 사람1인칭 ‘The first person’을 직역한 것으로, 주체로 끌어올리고자 한 행간의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었다. 이 작업은 2014지리산프로젝트의 주요장소였던 산청 성심원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서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말살되어야 했던 한센인들의 삶에 주목한 결과였다. 그는 한센인의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그들의 구술자료에서 유독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의 인칭 표현을 지나치지 않았고, 애달프고도 강력한 그들 스스로의 존재증명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의 인칭이 유독 강조된 문장들을 발췌하여 편집하기에 이르렀다. 그 문장들은 높이 7미터에 너비 8미터의 벽면에 세로글씨로 빼곡히 채워졌으며, 이는 그들이 살아왔던 삶을 공감해가는 과정을 그 스스로 직접 몸을 들여 수행적으로 풀어낸, 그 자신의 윤리와 태도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주목한 구술의 행간을 벽면에 기록하면서 작품에 더해진 빛의 연출은 시대적 억압과 편견을 시각화하는 것이자 작가의 총체적인 해석을 호흡으로 리듬으로 직관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된다.

첫 번째 사람의 두 번째 작업은 2016스코어전’(대구미술관)에서 소개되었다. 70년대 여성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일방직 인천공장. 사측의 이익을 대변하는 남성중심 조직으로 구성된 어용노조에 저항하여 한국 최초로 여성이 중심이 된 노조를 설립한 사실을 배경으로, 당시 노조활동에 참여했던 한 여성노동자의 구술을 다룬 작업이었다. 이것은 노조탄압이라는 권력의 폭정과 더불어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노동자를 인지하게 된 사건이자, ‘현장에 즉한 여성운동에 대해 관심을 촉발시킨, 한국 현대사 산업화 과정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장면이다. 정부와 회사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비인권적인 탄압으로 일관하였고, 여성노조원을 빨갱이와 동일시하는 언론의 여론몰이가 자행되는 와중에도 저항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화·산업화의 신기루 속에서 동등한 노동조건을 갖지 못했던 그저 평범한여성들이다. 작가는 그들의 저항을 특별한 사람들의 특이한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 땅을 살아낸 누이이자 이웃이고 동료이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산업화의 신화가 자행했던 탄압들을, 한 여성노동자의 구술을 통해 벽면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또한 사회적 구조가 평범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또한 그들을 빨갱이로 몰았던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빛으로 연출하여 두 번째 작업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구술작업에 대한 그의 실험과 연구는 더욱 본격화되어 갔다. 그는 2016자갈마당기억변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눈 먼 사랑이라는 작업을 발표하였다. 이 작업은 성매매경험당사자의 구술이 지닌 행간을 읽어냄으로써 그들이 처한 환경적 요인들(갇혀있거나 통제당하는), 스스로 자기 몸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유추해가는 과정이었다. 구술은 역사적인 사료로서 기록작업의 일환으로 채록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매매경험당사자 여성들의 구술은 특정사건이나 시간, 공간 등 구체적인 용어로 특정되지 않는 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그들의 삶, 상황적인 조건들이었다. 그것은 집결지 100년의 시간을 상징하는 듯한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의 구술작업 속에서 작가는 그나마 구체적으로 보였던 단어들조차 지워나갔고, 그렇게 편집된 문장들을 가지고 소리내어 낭독하도록 하였다. 나 역시도 직접 소리내어 읽어보라는 작가의 제안에 모호하게 구성된 문장들을 읽다가, 이상한 감정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인 단어를 모두 삭제한, 대명사나 조사, 말을 흐리는 어간 등으로 이뤄진 문장이었으되, 들은 적도 아직 읽어본 적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눈앞에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 구술작업을 진행하였던 한 연구자는 그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다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까지 가늠하며,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였다. 구체적인 지칭으로서 명사, 감정의 수식으로서의 형용사, 그리고 행위로서의 동사 등 문장을 이루는 핵심요소들이 빠져있는 그가 재구조화한 문장들이 그토록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들, 행간을 잇는 요소들로만 이어진 듯한 그 문장들이 그토록 기대하지도 못했던 정서를 촉발시키는 그 원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소리내어 읽는 행위 가운데 삶의 비애감이 느껴졌고, 웅얼거리는 소리는 리듬이 되어 이 비애감의 진폭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감정이 깃든 언어습관, 어투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18첫 번째 사람

작가는 탄핵정국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극기 집회를 이루는 극우세력의 첨병이 된 노인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모든 장면들과 교차하면서 삶을 끌어왔을 평범한 노인들이다. 그렇기에 성장과 안보를 지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는 더욱 맥락적일 수 있다. 작가가 구술작업으로 주목했던 것은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노인은 특별할 것 없는, 가난하고도 평범하게 살아온 70대 남성노인이며, 특정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보다는 노인세대에 대한 통시적 시선으로 접근한 구술생애사 책이다.
정용국 작가는 세 번째 첫 번째 사람작업을 위해 직접 저자 최현숙을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구술작업에 대한 상황적 맥락과 실제 남성노인의 육성을 담은 녹취자료들을 구하였다. 마찬가지로 곱씹으면서 그들의 삶을 반복하여 읽고 듣는 방식으로 이번 개인전의 주제들을 맥락화해 갔다. 그 중 그가 다룬 남성노인은 평생 건설현장에서 목수로 일했던 노인이다. “결혼도 못했고, 돈도 없고, 평생 노가다나 했고, 그런 건 창피한 거잖아요. 누구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안보지요...” 이 노인은 남성적임의 가치관 속에서 특유의 왜소한 체구로 인해 자격지심을 간직하고 살아온 삶을 증언한다. 남자답고 싶어 군대에 자원했고, 베트남 전쟁에까지 몸소 참전한다. 그의 삶은 전쟁, 유신독재 등 한국 사회의 모든 굴곡점과 궤를 나란히 하며 펼쳐진다. 작가는 노인의 구술을 총 15,480자로 편집하였고, 이를 벽면에 새겼다. 실수로 양잿물을 마신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였던 불행했던 유년시절부터 몸이 왜소하여 여자도 없고 남성적이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작동해온 그의 삶들이 벽면을 따라 이어진다. 그의 삶 중에서 그가 가장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던 목수로서의 삶은 가장 마지막 동선에 배치된다. 노인의 생애사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장면들의 서사들을 잇고 있다. 나즈막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육성이 공간에 더해지고, 한국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하듯 입구에서부터 미러지에 새겨진 태극기 문양이 실체 없는 빛을 반사하며 잔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번 작업은 특히나 빛의 움직임이 연출하는 장면들을 더욱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암흑 속에서 빛점들이 유영한다. 문득문득 흔적처럼 유령처럼 비춰지는 글씨들, 이윽고 벽면에 새겨진 글씨들이 선명하게 보일 무렵, 붉은 빛이 은연중 공간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내 서서히 밝아지는 하얀 빛을 통해 공간은 마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양, 그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으로 전이되어 있다. 빛의 움직임들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육성과 더불어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직접적인 감각으로 살에 스며드는 듯한, 한편의 분위기로 형상화된 서사로 구축된다

형광물감으로 새겨진 글씨를 비추는 푸른조명은 스며들고 배어나오는 글자의 움직임을 만들고, ‘붉은조명은 작가에게 사회적 편견 내지 경고, 한국현대사 속에서 행해진 무차별적인 억압기제들 그리고 저항의 시선 등을 담은 다층적인 해석구도를 포함하는 빛이다. 또한 하얀 조명은 일종의 소격효과로서 몰입을 차단하고 다시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일상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공감하지 못한 사유이자 존재하지 않음(무화)을 상징한다. 하지만 결국 하얀 빛은 매섭게 차단하여 빛의 서사적 흐름을 끊되, 그로인해 더욱 여운을 강조하는 역설의 빛이 되고만다.




작가는 자신의 구술작업을 느낌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실제 그가 접한 구술작업의 대상들은 한국 근현대사 안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자, 주류 사회의 담론과 편견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느낌의 윤리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주목하였고, 그들의 삶을 연구와 수행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다층적으로 이해해가는 실천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느낌의 윤리라는 표현은 예술가가 역사에 대한 성찰 및 타인의 삶을 주제로 한 내용을 창작의 방법론으로 다루는 온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인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평소 그가 화가로서 지속적으로 해왔던 회화적 실험은 대체로 명증적이었다. 재료자체에 골몰한 것이 작업의 주제가 되거나, 형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깊게 침잠하거나, 반복적인 요소들이 구성하는 덩어리 자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가는 것으로서, 회화 존재의 알레고리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각 요소에 접근해가는 예민함, 집중하여 요소들을 잇고 구성하나 드러나지 않은 메타포 등을 시각화하고자 표현의 방법론을 찾아온 탐색과정은 그의 회화를 특징화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2014년 이래로 구술을 특정화한 그의 작업들에서 단어와 문장을 분석하고 그 특유의 시선을 집중과 시선을 통해 맥락화하여 행간을 구성하는 과정들이 그의 회화작업과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로부터 그에게 다가온 주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느낌의 윤리란 예술가로서 그간 매체에 접근해온 그의 탐구적 태도 근간에 놓여있던, 늘 있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작가 정용국을 향한 접속어였다

2018년 7월 28일 토요일

장소를 증명해낸다는 것, 상황으로의 전개

장소를 증명해낸다는 것, 상황으로의 전개

<두려운 밤 시간에 너는 나를> 전리해展 / JEONRIHAE / 全梨晐 /2018.7.10~7.28 / 공간극

글■ 최윤정 독립큐레이터








작가와 인연을 맺었던 것은 2016년 진행했던 자갈마당_기억 변신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이는 아파트 건립에 따른 재개발 여론에 힘입어 비인도적인 행태들이나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성찰되지 않고 있음을 직시한 것으로, 그저 환영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자갈마당'(대구 소재)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된 프로젝트(대구 여성인권센터 주관)이다. 
자갈마당이 형성되었던 일제 강점기 시기, 이곳의 이름은 '야에가키초(팔중원정)였다. 이는 일본 [수진전]에 실린 신화 속에 나오는 지명으로, 천조 대신(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에게 12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초고대왕이 신궁에 쳐들어가서 여왕 히미코를 굴복시키고 천조 대신의 왕비 8명을 후비로 삼아 그들을 가둔 곳이 이즈모의 '야에가키'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해방 이후 이곳은 '도원동'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도원동은 과거 복사꽃이 만발했던 동네 혹은 성매매 여성을 '도화'라 일컬어 즉 '몸 파는 여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그러나 속칭 '자갈마당'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과거 대구천이 흐르는 저습지여서 그곳을 메우느라 자갈을 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포주들이 의도적으로 자갈을 깔아놓아 유녀들의 이탈을 막고자 자갈을 깔았다고도 전해진다. 유곽을 벗어나기 위해 밤에 몰래 도망치려 해도 자갈 밟는 소리에 의해 이내 다시 들킬 수밖에 없었다는 비극적 이야기다. 

작가가 자갈마당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도 2015년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하면서부터였다. 대구예술발전소에 머물면서 주변 지역을 리서치하였다. 인근에는 설계도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북성로 공구상가가 분포되어 있고, 낮에는 주차장이지만 밤이 되면 불고기와 우동을 파는 가게로 변신하는 대형포장마차가 또한 가깝다. 과거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의 근대 건축물 원형을 관찰할 수 있는 옛 건물들이 상존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이 또한 인근에 있는데, 이곳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동물원은 물론이거니와 노쇠한 말이 꽃마차를 끄는, 뭐랄까 다소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대구예술발전소의 뒤편에는 고종이 지나갔다는 길과 함께 오랜 수창초등학교가 있고, 그 앞 편에는 초등학교에서 200여 미터조차 떨어져 있지는 않은 거리에 성매매 집결지 '자갈마당'이 있다. 이 일대가 신사(공원), 학교, 유곽 등으로 이어지는 과거 일본 거류민 지역을 위한 계획도시로서의 보편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주마등처럼 변이되는 도시/개발 속에서 불연속적인 단층들을 만들어내면서 허물어질 듯 낡은 시간을 품고 있는 주변부로 시선을 향해 왔던 작가 전리해에게, 이곳은 강렬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장소였을 것이고, 이에 그가 그냥 지나쳤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2015년 「태연한 기울기」를 통해 이 장소들로부터 사유한 시선들을 전달하였고, 자갈마당에 대한 첫 작업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언니: 헛도는 삶」(2015) 와 「유리방인터뷰」(2015)가 대표적인데, 「언니:헛도는 삶」은 장소에 접근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얼마나 그 주변을 배회했을지 짐작케 하는 자갈마당에 대한 이미지들이, 성행 중인 자갈마당의 밤 시간을 기록한다. 지난 100년간 도시 한 복판에 존재하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이중적 잣대와 욕망의 구조 속에서 경계를 이뤄온, 유리된 섬이다, 이는 영상에서 때로는 90도로 기울어진 각도로 전이되는 장면으로 작가의 시선을 추측하게 한다. 영상 이미지와 더불어 성매매 경험당사자 여성의 한탄을 담은 듯한 판소리가 이어진다. "백 년의 역사라오, 욕이란 욕은 다 먹고... 그래도 살아남아 이곳이 지켜지는 데는 이유가 있소" 판소리의 내용은 한 성매매 당사자 여성의 목소리로 자신의 매춘을 사회의 필요악이라 하면서도, "그래, 나 창녀다, 다리 벌려 몸을 파는 년이다" 화를 내기도 하고, 종국에는 자포자기하듯 "악쓰고 몸부림쳐도...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읊조리기도 한다. 또한, 소설가와의 협업 작업인 「유리방인터뷰」(2015)는 한 기자가 집결지 폐쇄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 성매매 경험당사자 여성을 인터뷰하는 설정이다. 여성은 어쩌면 성매매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시각으로 그네들의 삶을 이미 편견적으로 규정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청자(기자)에게, 성매매는 스스로의 선택이자 노동일 뿐, 다른 노동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항변한다. 성매매방지특별법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사람들의 위선을 탓하기도 하고 점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신세 한탄으로 이어지다가 이내 급작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다 들어보니까 오빠야 생각은 어떤데?" (이 작업은 전리해의 협업연작으로 1화는 성매매 당사자 여성의 이야기, 2화는 성구매자의 상황을 다룬, 2016년 발표한 「숏타임콜렉터」로 이어지기도 한다.) 위 두 작업은 적정의 시간을 편성하여 몰입을 유도하는 서사작업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한편 성매매 경험당사자 여성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우, 위 두 작업에 대한 불편함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바꿔 부르거나 합법화의 단계에서 노동으로 인정을 해야 할 것인지. 왜냐하면 각 작업에 등장하는 두 성매매 경험당사자 여성들이 표면적으로 그리 주장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단 성매매를 비롯하여 사회적인 이슈와 연관된 주제는 언제나 감상자로 하여금 윤리적인 고민에 봉착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 그것들이 직접적인 서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오히려 한쪽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표면화' 작업에 의거, 항변/화냄/합리화/자포자기/비꼼으로 연잇는, 두 화자의 일관되지 않은 감정선이 그것이다. 마치 그 표면 아래, '일관되지 않은'의 진실은 무엇일지 떠올리게 하는 것, 어쩌면 작가는 이 '상황'에 닿게끔 하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이 작업을 의도했던 것이 아닐까.

2016년과 2017년은 그가 성매매 당사자 여성들을 직접 마주하기도 하고, 업소의 내부를 기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주어졌던 시간이었다. 그가 2년간 기록해온 「자갈마당」(2016-2017)은 일상이 아닌 듯이 아득하고 아련한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나, 스틸라이프로서 이미지로 구현되어 있다. 오랜 건축물의 구조, 특유의 조명으로 인해 주변부와의 경계가 오묘한 밤 풍경, 꽃무늬 벽지, 침대, 몇 개의 슬리퍼, 가운 및 각종 물건이 있다. 물결치듯 똬리 튼 커튼, 긴 복도를 따라 마주 보는 방문이 즐비하다. 쌓여있는 탄산음료 위에 클래식한 여인의 나부는 여신처럼 신비로울 지경이다. 각각의 사진들은 자갈마당의 민낯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성매매 당사자 여성을 구출하는 긴박한 현장이거나 의료 등 구호 활동의 현장에서 비롯된,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경험들을 아우르는 현장에서 촬영된 것들이다. 모호한 심경을 자아내는 장소에 대한 특유의 정적인 표현은 그의 작업 속에서 일관되게 관찰되는 부분이다. 급속한 변화 속에서 사라짐을 예측할 수 있는 장소, 장소가 품고 있는 흔적/단상들은 그만의 스틸라이프로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듯 보인다. 마치 비현실적 프레임을 구축하여 감응을 편중되게 배치하려는 의도처럼. 그것은 잔잔하면서도 극적이고 안온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 이러한 양가적인 정서로 말미암아 미묘한 생각이 잊히지 않는다. 그것들은 장소를 증명해낸다. 이번 개인전 「두려운 밤 시간에 너는 나를」(2018)을 통해 이은 그의 자갈마당을 에워싼 3년간의 작업은 연구자나 활동가에 의해서만 다뤄질 법한 사회적 이슈를 작가 자신의 고유한 창작 영역으로 이끌어온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장소 및 장면을 포착한 사진들을 통해 특유의 표현을 가늠하게 하였음은 물론, 대주제(자갈마당) 안에서 소주제(성매매경험당사자)로 접근하는 맥락은 서사로 잇는 협업작업을 통해 에둘러 현시하면서도 감상자를 몰입시키면서 사유지점들을 끄집어낸다. 복잡한 사유지점을 건드리는 서사와 장소를 증명해내는 이미지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전시의 호흡을 만들어내었다. 

 작가는 3년여의 시간 동안 꾸준히 장소를 리서치하며 스스로에게 다가온 혹은 습윤 되었음 직한 내용을 수집해왔다. 무엇보다도 그 장소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면서 현재의 추이까지 관심을 잇고 있으며, 그가 그렇게 힘주어 움직였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또한, 그의 창작과정 속에서 언제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장소를 에워싸고 특정한 '상황'에 마주하고, 그로부터 주제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태도였다. 습관적으로 산책을 통해 우연한 마주침을 꾀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을 추출해내었다. 또한, 그의 관심이 묻어있는 장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발견한 장소에 대해 리서치하는 과정은 그의 강단과 호기심 가득한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득 그 과정에서 어떤 의문이 생기면 그 의문을 해결할 때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상황에 몰입하는 것이다. 보자면 '상황'은 대면을 통해 사건이 벌어지는 현재성에 맞닿아 있는 것이고, 그에게 '산책'은 관ㄷ찰자로서 사건/타자와의 거리를 조율하게 하는 호흡을 내어주고 있다. 그간 그가 다뤄온 주변부의 이야기들은 '산책'을 통해 시선의 머무름을 견지한 것이고, 지난 시간의 꾸준한 머무름으로 '자갈마당'이라는 장소에 개입하는 그의 실천은 '상황'과 창작으로 몰입한 결과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 그 진정성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저 환영과도 같았던 심란하고 혼란하게 자리한 그 무엇이, 감각에 새겨질 때까지 자신을 내몰 듯이. 그리하여 흔적으로나마 자리했던 환영은 작가 전리해에 의해 '발견된 흔적'으로 구체화하고, 이내 상황 속에 놓여 현재를,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힘을 얻었다. 


2018년 6월 10일 일요일

아름다운 폭로 : 여성주의미술과 행동주의

아름다운 폭로 : 여성주의미술과 행동주의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미투가 견인한 그 무엇-
미투운동(#ME TOO)은 권력에 의한 성폭력에 접근한다.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공감과 연대를 확장하는, 21세기 환경에 적합한 저항방식이자 투쟁의 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전지구적 연대는 물론 상호작용을 통해 그 폭발력을 현재도 계속 입증하는 중이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강자와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배제에 맞서 사회 내 만연한 강간문화를 뿌리뽑자는 이 운동은 기존의 질서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관계에 있어 철저히 합리적이고 평등적인 구도를 재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력히 투척하고 있다. 결국은 안전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일하기를 원하는, 힘과 권력에 의한 성범죄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마땅한 주장이므로 그 명분에 이견을 내기는 쉽지 않다.
 
예술계에서도 미투운동은 의미있는 양상을 띄고 있다. 특히나 천재성이나 예술성이 그 방패가 될 수 없다는 인식 역시도 이번 미투운동을 통해 모두가 학습한 결과이다. 그간 좁은 예술계 안에서 남성권력/남성성이 중심이 된 카르텔 속에서 힘없는 개인들이란 여성 및 소수자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제 그들이 차츰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그 목소리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답하고 발언하는 연쇄과정 속에서 변화의 희망도 보았다. 물론 이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제 시작이고, 우리는 어찌되었든 걸음을 떼었다는 인식적인 공감이 꾸준한 연대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심지어 SNS를 통해 빠르게 접속되고 유포되고 흔적으로 기록되는 탓에, 시간이 좀 지나면 잊혀질 만한 단순한문제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 처벌요구로 이어지는 양상은 가히 미투운동이 혁명의 수순과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미투는 일상생활 전반에서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 변화에 대한 육중한 책임감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2년전 트위터상에서 펼쳐졌던 예술계__성폭력에 비해 미투운동은 확실히 보다 확장성이 높고, 정치사회적인 이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어쩌면 미투운동을 통해 모두에게 육중한 무게로 다가온 생각들이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작업으로서 동시대 창작 주제로 다뤄질 수 있음을 대놓고 예측해보기도 한다.
 
-여성주의미술의 행동주의 계보학-
여성주의미술의 행동주의로서 게릴라걸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행사에 와서 우리 주장에 동의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을 변화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을 페미니즘에 동의하게 만들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바로잡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유머가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을 일으키는 데 대단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왔다. 풍자는 정말로 위대한 저항의 형태다.”


게릴라걸즈는 1980년대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익명으로 활동해온 페미니스트그룹으로 미술관 화장실 벽은 물론, 잡지, 옥외광고판, 버스광고판을 활용하여 제도권 미술에서 여성 및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문제를 각종 선전물을 통해 풍자해왔다.
여성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만 하는가? -현대화가 중 여성화가는 5% 미만, 그러나 누드화의 85%는 여성이라는 직설적인 문구는 고릴라 가면을 쓰고 누드로 비스듬하게 누운 오달리스크작품을 패러디한 이미지에 삽입되어 1989년 뉴욕 시내버스 외벽광고로 소개되었다. 여성작가들이 받는 미술계에서의 부당한 대우와 허접한 위치를 고발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외에도 게릴라걸즈는 소수자 및 인종차별에 대해서 또한 미해결된 성범죄의 실상 등을 통해서 이 세계가 얼마나 남성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유럽중심주의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폭로하였다. 통계화된 수치와 그 기록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문구의 효과는 대단했다. 전시와 영화제 등 세계의 주요 메이져급 예술행사를 타겟으로 삼았으며. 광고 및 선전의 형식을 띤 작업은 당시 예술계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끄는 장치가 된 셈이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너의 몸은 전쟁터다)” 대단히 유명한 문구로, 이 문구는 페미니즘 운동 등 저항의 영역에서 꾸준히 차용하고 있다. 1989년 바바라크루거의 작업으로서, 여성들의 몸에 이 글귀를 새겨고 이를 촬영하여 포스터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 낙태죄 폐지를 위한 선전물이기도 하였다. 타인의 신체를 바라보는 주류 사회의 시선과 태도, 역할에 따른 금기 등 우리 몸을 통제하는 지배적인 규칙에 저항하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차용되면서 페미니즘의 일갈을 강한 인상으로 남기는, 상징적인 작업이다. 몸을 둘러싼 전투, 그렇가면 내 몸을 통제하는 것은 누구인가몸은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이 질문은 주류문화가 몸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가늠케 한다. 다시 말해 몸은 내가 결정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것이었다. 폭력과 억압, 불의, 사회적 시선과 그로부터 몰려오는 스트레스가 주는 우리 개개의 현실적 경험은 현대미술 안에서 종종 파편화된 신체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거세한 그 무엇을 향한 저항이자 거부의 시각적 대응물이다.
 
전통적인 휴머니즘에서 보자면, ‘인간으로서 보편적 주체에는 여성이나 소수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세계대전이며 68혁명이며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도 페미니즘은 곧바로 중요한 담론으로 거론되지 못했다. 야만으로부터 휴머니즘을 회복한 듯한 시점에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늘 은폐되어 왔다. 페미니즘은 그간 은폐를 통해 무시되어 온 성평등’, ‘주체 다양성의 부재를 문제로 직시하여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젠더 관점에 따라 재구성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을 확장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승리의 역사 곳곳에서 가려져 왔던 지점들을 학문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중요하게 자리매김을 하도록 , 재조명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로서 필자 역시 최근 미투운동에 대해 관심이 높다. ‘여성정체성으로 페미니즘 시각을 고수하고자 평소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투운동과 연관한 사회적 의제가 미술의 영역에서, 예술언어로 다뤄질 수 있는 방법론을 깊이 고심하는 중이다. 그간 한국에서 여성주의미술이라 일컬어왔던 작업들 외에도, 사회적인 의제에 직면하여 다양하고 촘촘한 지층들을 선보여줄 창작물들을 그리고 행동주의 여성주의미술로 읽을 수 있는 창작물들을 또한 기다리는 중이다.
 
-세 전시-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여성’, ‘여성주의’, ‘여성주의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들이 최근 국공립미술관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한 기간에 진행되었다. <금하는 것을 금하라>(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27~6.24 /조덕현, 박영숙, 손정은, 윤정미, 장지아, 정은영, 주황, 흑표범), <우리시대 여성작가들>(포항시립미술관, 3.8~5.27./김은주, 문혜경, 서옥순, 이정옥 정은주, 차계남), <부드러운 권력>(청주시립미술관, 3.15~5.6/김주연, 김희라, 윤지선, 임은수, 정정엽, 조영주)이 그것이다.
<금하는 것을 금하라>는 여성으로서의 금기에 저항했던 신여성 나혜석(수원출신) 타계 70주년에 맞추어 기획된 전시이다. 한국근현대사 질곡의 역사를 살아왔던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던 조덕현의 프렐류드는 나혜석이 자기 인생에서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표현한 작업이다. 이어 미친년시리즈화폐개혁연작을 소개한 한국 여성주의미술 1세대 작가인 박영숙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시각화한 윤정미, 전통적인 성역할을 거부하는 여성국극을 다룬 정은영 그리고 금기에 대해서 다룬 손정은, 장지아 등의 작업들이 소개되었다. <부드러운 권력>은 여성들의 중층적인 정체성에 대해 주목한다. 정정엽은 1세대 여성주의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곡물이 지닌 생장의 힘을 여성의 힘으로 대유해왔다. 그리고 조영주의 비디오댄스에서 아줌마로 통칭되는 익명의 여성들은 거주하는 장소에서 군무를 춘다. 같지만 고유한 춤사위를 통해 한 명 한 명이 개별 삶의 기념비가 된다. 김주연은 인간의 삶과 죽음, 생태적 순환성,생명과 육체에 대한 식물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위 두 전시가 한국 여성주의미술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역할, 금기, 정체성등 주제가 명확하고 내적인 억압기제들을 발화하고 배열하는 형식이었다면, <우리시대 여성작가들>의 경우는 지역적 특수성, 유사한 세대(연령대), 작품에서 드러나는 개별의 여성성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의 남성편향적 구도 속에서 꾸준히 작업해 온 여성작가들을 통해 지역 여성주의미술의 특징을 맥락화하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학습되어 공고해진 고정관념에 파열음을 내는 방식에서 여성은 어떻게 정의되는가는 모두에게 그 단초를 찾아가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특히나 이 질문은 여성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나는 나를 여성으로 자각하고 있는가의 물음으로,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내 삶에서/환경에서/시선에서/관계에서) 자유로운가를 부연으로, ‘여성이라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여성/소수자를 위치짓는 양상들이 소위 여성주의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다. 생각보다 미투운동의 정국이 미치는 파급력이 높다. 세 곳의 국공립미술관은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전시를 통해 여성주의미술을 다루었다. 미투의 동시대성을 입증한 셈이다. 머잖은 후일 여성주의미술을 기반으로 행동주의의 단계로도 진입하는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 발표될 그 날을 또한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