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폭로 : 여성주의미술과 행동주의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미투가 견인한 그 무엇-
미투운동(#ME TOO)은 권력에 의한 성폭력에 접근한다.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공감과 연대를 확장하는, 21세기 환경에 적합한 저항방식이자 투쟁의 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전지구적 연대는 물론 상호작용을 통해 그 폭발력을 현재도 계속 입증하는 중이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강자와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배제에 맞서 사회 내 만연한 강간문화를 뿌리뽑자는 이 운동은 기존의 질서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관계에 있어 철저히 합리적이고 평등적인 구도를 재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력히 투척하고 있다. 결국은 안전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안전하고 평등하게 일하기를 원하는, 힘과 권력에 의한 성범죄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마땅한 주장이므로 그 명분에 이견을 내기는 쉽지 않다.
예술계에서도 미투운동은 의미있는 양상을 띄고 있다. 특히나 천재성이나 예술성이 그 방패가 될 수 없다는 인식 역시도 이번 미투운동을 통해 모두가 학습한 결과이다. 그간 좁은 예술계 안에서 남성권력/남성성이 중심이 된 카르텔 속에서 힘없는 개인들이란 여성 및 소수자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제 그들이 차츰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그 목소리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답하고 발언하는 연쇄과정 속에서 변화의 희망도 보았다. 물론 이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제 시작이고, 우리는 어찌되었든 걸음을 떼었다는 인식적인 공감이 꾸준한 연대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심지어 SNS를 통해 빠르게 접속되고 유포되고 흔적으로 기록되는 탓에, 시간이 좀 지나면 잊혀질 만한 ‘단순한’ 문제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 처벌요구로 이어지는 양상은 가히 미투운동이 혁명의 수순과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미투는 일상생활 전반에서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 변화에 대한 육중한 책임감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2년전 트위터상에서 펼쳐졌던 ‘예술계_내_성폭력’에 비해 미투운동은 확실히 보다 확장성이 높고, 정치사회적인 이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어쩌면 미투운동을 통해 모두에게 육중한 무게로 다가온 생각들이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작업으로서 동시대 창작 주제로 다뤄질 수 있음을 대놓고 예측해보기도 한다.
-여성주의미술의 행동주의 계보학-
여성주의미술의 행동주의로서 ‘게릴라걸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행사에 와서 우리 주장에 동의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을 변화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을 페미니즘에 동의하게 만들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바로잡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유머가 사람들에게 문제의식을 일으키는 데 대단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왔다. 풍자는 정말로 위대한 저항의 형태다.”
게릴라걸즈는 1980년대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익명으로 활동해온 페미니스트그룹으로 미술관 화장실 벽은 물론, 잡지, 옥외광고판, 버스광고판을 활용하여 제도권 미술에서 여성 및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문제를 각종 선전물을 통해 풍자해왔다.
“여성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만 하는가? -현대화가 중 여성화가는 5% 미만, 그러나 누드화의 85%는 여성”이라는 직설적인 문구는 고릴라 가면을 쓰고 누드로 비스듬하게 누운 ‘오달리스크’ 작품을 패러디한 이미지에 삽입되어 1989년 뉴욕 시내버스 외벽광고로 소개되었다. 여성작가들이 받는 미술계에서의 부당한 대우와 허접한 위치를 고발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외에도 게릴라걸즈는 소수자 및 인종차별에 대해서 또한 미해결된 성범죄의 실상 등을 통해서 이 세계가 얼마나 남성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유럽중심주의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폭로하였다. 통계화된 수치와 그 기록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문구의 효과는 대단했다. 전시와 영화제 등 세계의 주요 메이져급 예술행사를 타겟으로 삼았으며. 광고 및 선전의 형식을 띤 작업은 당시 예술계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끄는 장치가 된 셈이었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너의 몸은 전쟁터다)” 대단히 유명한 문구로, 이 문구는 페미니즘 운동 등 저항의 영역에서 꾸준히 차용하고 있다. 1989년 바바라크루거의 작업으로서, 여성들의 몸에 이 글귀를 새겨고 이를 촬영하여 포스터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 낙태죄 폐지를 위한 선전물이기도 하였다. 타인의 신체를 바라보는 주류 사회의 시선과 태도, 역할에 따른 금기 등 우리 몸을 통제하는 지배적인 규칙에 저항하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차용되면서 페미니즘의 일갈을 강한 인상으로 남기는, 상징적인 작업이다. 몸을 둘러싼 전투, 그렇가면 ‘내 몸을 통제하는 것은 누구인가’ 내 ‘몸은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이 질문은 주류문화가 몸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가늠케 한다. 다시 말해 몸은 내가 결정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것이었다. 폭력과 억압, 불의, 사회적 시선과 그로부터 몰려오는 스트레스가 주는 우리 개개의 현실적 경험은 현대미술 안에서 종종 파편화된 신체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거세한 ‘그 무엇’을 향한 저항이자 거부의 시각적 대응물이다.
전통적인 휴머니즘에서 보자면, ‘인간으로서 보편적 주체’에는 여성이나 소수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세계대전이며 68혁명이며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도 페미니즘은 곧바로 중요한 담론으로 거론되지 못했다. 야만으로부터 휴머니즘을 회복한 듯한 시점에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늘 은폐되어 왔다. 페미니즘은 그간 은폐를 통해 무시되어 온 ‘성평등’, ‘주체 다양성’의 부재를 문제로 직시하여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젠더 관점에 따라 재구성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을 확장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승리의 역사 곳곳에서 가려져 왔던 지점들을 학문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중요하게 자리매김을 하도록 , 재조명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로서 필자 역시 최근 미투운동에 대해 관심이 높다. ‘여성’ 정체성으로 페미니즘 시각을 고수하고자 평소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투운동과 연관한 사회적 의제가 미술의 영역에서, 예술언어로 다뤄질 수 있는 방법론을 깊이 고심하는 중이다. 그간 한국에서 여성주의미술이라 일컬어왔던 작업들 외에도, 사회적인 의제에 직면하여 다양하고 촘촘한 지층들을 선보여줄 창작물들을 그리고 행동주의 여성주의미술로 읽을 수 있는 창작물들을 또한 기다리는 중이다.
-세 전시-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여성’, ‘여성주의’, ‘여성주의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들이 최근 국공립미술관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한 기간에 진행되었다. <금하는 것을 금하라>(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2.27~6.24 /조덕현, 박영숙, 손정은, 윤정미, 장지아, 정은영, 주황, 흑표범), <우리시대 여성작가들>(포항시립미술관, 3.8~5.27./김은주, 문혜경, 서옥순, 이정옥 정은주, 차계남), <부드러운 권력>(청주시립미술관, 3.15~5.6/김주연, 김희라, 윤지선, 임은수, 정정엽, 조영주)이 그것이다.
<금하는 것을 금하라>는 여성으로서의 금기에 저항했던 신여성 나혜석(수원출신) 타계 70주년에 맞추어 기획된 전시이다. 한국근현대사 질곡의 역사를 살아왔던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던 조덕현의 ‘프렐류드’는 나혜석이 자기 인생에서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표현한 작업이다. 이어 ‘미친년시리즈’와 ‘화폐개혁’연작을 소개한 한국 여성주의미술 1세대 작가인 박영숙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시각화한 윤정미, 전통적인 성역할을 거부하는 여성국극을 다룬 정은영 그리고 금기에 대해서 다룬 손정은, 장지아 등의 작업들이 소개되었다. <부드러운 권력>은 여성들의 중층적인 정체성에 대해 주목한다. 정정엽은 1세대 여성주의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곡물이 지닌 생장의 힘을 여성의 힘으로 대유해왔다. 그리고 조영주의 비디오댄스에서 ‘아줌마’로 통칭되는 익명의 여성들은 거주하는 장소에서 군무를 춘다. 같지만 고유한 춤사위를 통해 한 명 한 명이 개별 삶의 기념비가 된다. 김주연은 인간의 삶과 죽음, 생태적 순환성,생명과 육체에 대한 식물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위 두 전시가 한국 여성주의미술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역할, 금기, 정체성’ 등 주제가 명확하고 내적인 억압기제들을 발화하고 배열하는 형식이었다면, <우리시대 여성작가들>의 경우는 지역적 특수성, 유사한 세대(연령대), 작품에서 드러나는 개별의 여성성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의 남성편향적 구도 속에서 꾸준히 작업해 온 여성작가들을 통해 지역 여성주의미술의 특징을 맥락화하고자 한 시도로 보인다.
학습되어 공고해진 고정관념에 파열음을 내는 방식에서 “여성은 어떻게 정의되는가”는 모두에게 그 단초를 찾아가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특히나 이 질문은 여성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나는 나를 여성으로 자각하고 있는가”의 물음으로, 그리고 그로부터 “나는 (내 삶에서/환경에서/시선에서/관계에서) 자유로운가”를 부연으로, ‘여성’이라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서 여성/소수자를 위치짓는 양상들이 소위 여성주의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다. 생각보다 미투운동의 정국이 미치는 파급력이 높다. 세 곳의 국공립미술관은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전시를 통해 여성주의미술을 다루었다. 미투의 동시대성을 입증한 셈이다. 머잖은 후일 여성주의미술을 기반으로 행동주의의 단계로도 진입하는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 발표될 그 날을 또한 고대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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