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0일 목요일

아트포럼리 청년작가 초대전, Art-Critic/ 뾰족한 섬의 언저리에서 찾아가는 방법술


아트포럼리 청년작가 초대전, Art-Critic

뾰족한 섬의 언저리에서 찾아가는 방법술 : 작가 김한나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인터뷰 당시는 서로 이야기가 술술 풀려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 하였다. 그러나 실제 글을 쓰면서 몇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 이유를 추적하고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불현 듯 나의 습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작업의 기승전결과 문맥이 정//히 내안에서 규정되고 독해되어야 만이 글을 쓸 수 있었음을, 말인즉 이성적인 이해도를 넘어선 추상적이고 직관적 감응을 통한 글쓰기는 나에게 너무 힘든 과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순전히 작가 김한나 때문에.
처음에는 빠르게 읽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이미지와 문맥, 작가의 언변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빠르게 읽힌다 생각하여 쓴 글은 계속해서 동어반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수다는 많았지만 알고보니 작가는 그 무엇도 규정한 적이 없었다. 소름돋는 이 불편한 상황을 당시에는 미처 캐치하지 못하고 확고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작업을 시각화한다는 전제로 글을 쓰려고 보니 나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빈약한 논리는 물론이거니와 그 부담으로 과도하게 육중함을 띠는 졸고가 나와버렸다. 과감히 버리기로 한다.
이 말을 작가의 이번 개인전 <, 의 것> 작업이 결과없는’, ‘과정적인특징을 갖기 때문에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단히 작가 김한나와 김한나의 작업을 공식화한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출발은 A이나 알고보면 B같고, B는 알고보면 C인 듯도 한데, 거기에는 D도 있고 E도 있으니...그게 뭘까그가 자신의 작업경향을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작업이라 일컫는 데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어야 한다. 알고보니 정서의 원형태가 시각화되는 작업이다. 그 실마리를 놓치고 나는 계속 A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일상 속 단순 불화로 치부되는 것들은 강박적으로 뜯게 되는 손톱, 건조함에 예민해진 피부각질, 잘린 머리카락과 같은 히스테리적 모습으로(...) 잦은 거주지 이주, 스탠다드한 삶을 요구하는 환경, 개인적 갈등 같은 일반적 원인일 수도(...) 그렇기에 나는 구체적 이유를 찾아 서술하고자 하지 않는다.”(2017작업노트 중에서 발췌)
 
작가는 자신의 순수작업이 일상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다. 여기서의 일상은 소담한 내용의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생존에 기반한 현실적인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장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성장에 대한 기민한 전략들을 포함한 관계적인 환경을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작업과 일상의 접점을 편하게 찾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무엇이든 접점을 찾는다는 노력이 의도와 다르게 어긋날 수도 있고 성공적인 접근단계에서 자기 한계를 계속 깨우쳐야만 하는 피로감을 함께 수반하는 탓에 그만큼 쉽지 않다. 또한 예술가의 삶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이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이면서 여성의 삶을 돌이켜보자. 하물며 수많이 쪼개어져 문화 속에 내재화된 차별전략들 탓에, 정체도 알 수 없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를 옥죄고 있을 아비투스는 그 접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모래짐을 한덩이 한덩이 또한 보태고 있는 실정이다.
 
작가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의 화두는 출발지점으로서 막강하다.
 
저는 어쨌든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게 눈에 계속 거슬리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는(...) 제가 보는(마주한) 사회는 사람을 무디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제가 계속 말을 하는 행위가 되게 예민하고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요(...)” _2017워크숍 녹취록 중에서 발췌
 
일상, 자기 외부(관계, 사회)에서 느낀 불편부당함은 불화-강박-예민-히스테리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그도 자기 한계로부터 좌절감과 회의감을 몸소 느끼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거리를 둔 관찰자적 시선을 동시에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관계들 속에서 대상화하는 용기도 내보았다. 이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수많은 지점들에 처한 자신의 일상이고, 치이고 옥죄는 상황에서도 예술가로서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처해있음에 대한 하나의 저항적 실천이었다.
자신의 실천과 일상적 삶의 관계, 때로 이 관계는 갈등 속에서 서로 긁고 할키고 상처내는 등 내적인 불화를 조성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은 불화들이 그렇기에 관계들 속에서 스스로를 섬으로 표류하도록 만들기도 하며, 관계의 주체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법칙과 세력의 구조에 기울어있다면, 결국은 화해와 타협으로 장식된 굴종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수순일 터. 한편 상상해보자. 그 관계의 속성에서 은폐된 무엇을 가로지르는 틈이 생긴다면, 자각과 변화 등 자기영토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표류와 갈등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동력인이자 방법술이 될 수 있다.
그에게 미술을 한다는 것은 일상적 삶과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방법술, 다시 말해서 갈등과 은폐를 가시화하는 전략을 통해 그 한복판에 자신을 온전히 위치시키고 그로부터 자기영토를 점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삶이 보편적인 요구와 동떨어진 비일상적인 삶으로 오인된다 해도, 결국 그는 표류를 선택하고 작품을 통해 갈등을 가시화하면서 꾸준히 문제의식을 키워나갈 것이다. 행여나 당장은 답도 없더라도(갈등의 정체를 서술할 수 없을지라도) 현재 그의 작업은 갈등을 관찰하며 그 근본에 다가가는 도정에 밀착해 있기에, 그에게서 꾸준히 창작될 작업들은 자신의 방법술을 연마해가는 과정들을 드러내는 산물이 될 것이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 불화의 이미지를 뾰족하고 예리하고 불안한 그 무엇의 뉘앙스로 형상화한다. 그에게 작업의 핵심은 관계의 기류에서 발생하는 폭력, 갈등, 예민함, 날카로움 등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형상화하는 것이기에 그 형상은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는 보편적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기본 단위를 원뿔, , 원기둥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즉각적인 뉘앙스로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의 정체를 상상할 수 있게끔 한다.
결국 고통’, ‘히스테리정서의 원형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덩어리, 물성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뾰족하고 예리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한 혹은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물론 재료 선택에 있어서 일상내지는 일상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의미화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작업에서 굳이 그것이 중요해보이지는 않는다. 보기에 그의 재료들은 그 쓰임새보다도 그가 그저 사물의 일정한 형태에 주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라바콘이나 바나나우유곽, 에어볼 등이 그것이고, 이는 이미 작가가 주목하는 형상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로서 작가의 감응적 시선을 통해 발굴된 것들이다. 사물의 쓰임으로서의 가치는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모두 탈각된다. 또 한편 그물, 케이블타이, 테이프 등은 접합을 통한 덩어리들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인데, 이것들은 잇는 부분들을 그대로 노출시켜 형상이 주는 뉘앙스에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사물의 쓰임이 아닌 형상에 주목하고 있음은 석고캐스팅을 통해 일정한 형태(라바콘 등)를 계속 복제하는 행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덩어리들과의 접합을 시도한 작업들은 이미 일상적 사물을 그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끔, 그저 위태한 구조물로서 다양한 접합과 체현을 위한 실험물로 여길 수 있다. 결국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않는 그 무엇에 대한 자신의 정서와 그 뉘앙스를 외화시키는 구도와 형상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찌르면서 합해지고 부정적이고 날카로워지는 불편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가 만들어낸 형상 속에서 발견되는 뉘앙스이다. 이 뉘앙스를 심화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주관/개별의 영토에 관한 물음이다. 작가는 가장 객관적으로 인지가능한 개별의 영토를 제곱미터 등의 단위가 아닌 으로 환산한 작업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2016년 발표한 <점점 얇아져 날카로워지는,>은 인지가능한 영역의 환산치인 평, 가장 기본으로 한평짜리 개인의 영토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폐허의 잔해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철망에 불안정하게 붙어있는 자신의 몸()을 들여 문지르며 더 얇게, 자신의 경계를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온갖 재료들이 서서히 탈각될 것 같은, 안전하지 않을 듯한 벽면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바닥 쪽 벽면 역시 훤히 뚫려 심리적인 안위를 보장받지 못하는 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 )>(2015)은 공유지 아닌 공유지가 되어있는 텅빈 공터에 대한 상상력을 담는다. 이 땅을 자신이 마주한 일련의 중산층 계급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할까에 대해서 관찰한 일종의 인상일지로서 땅을 분할하고 인공의 것들을 입혀보는 시도였다. 마찬가지로 2015년 선보였던 <파랑은 푸르지 않고, 초록은 파랗지만도 않다>는 둥글고 온전한 파란색 에어볼들에 파란페인트를 거칠게 칠해놓고, 노끈-마찬가지로 연결지점이 노출된 재료-으로 묶어 울퉁불퉁한 덩어리들로 마치 온전하지 못한 암세포와도 같은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 뾰족한 각재들을 사이사이 찔러넣음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파란물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 작업에서 그는 사회-관계에서 도덕성 내지는 신뢰감의 색상으로 상징되는 파란색을 훼손하고자 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심경을 여실히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상징적으로 몇 개의 각목쪼가리와 바나나우유병으로 만든 작은 조각인 (2013)와 검정테이프와 비닐로 단단히 포장되어 내용물을 알 수 없는 (2013)은 작가가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업이기도 한데, ‘알 수 없는의 뉘앙스와 불안한 구도에 대한 심리를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작업들이다. 이 작업들은 이번 개인전 <, 의 것>(2017)에서 연속적으로 만들어져 선보이는 작은 조각들의 뉘앙스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복선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이번 <, 의 것>(2017)은 애초 <매일의 조각>이라는 가제에서 출발한다. 이 작업은 일상에서 발견하는-아마도 마찬가지로 그것의 구도와 형상에 주목하여- 작은 사물들에 작가의 손을 통한 가공과정을 거쳐 전시기간 내 연속적으로 작은 조각들을 생산하는 것이고, 이는 전시공간의 장소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설치하기도 한다. 설치물들은 공간을 분할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며,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상황들까지도 고려하여 발란스를 견지하며 배치되지만, 또한 특유의 구도와 과정적이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음에 의한 심리적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전시장은 자 구조의 형태이고 한쪽 면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중정과 연결된다. 또한 마주보고 있는 공간은 연속적으로 작은 조각물들을 생산하는 아티스트의 스튜디오이자 전시 중에 교체되고 전시장에서 탈락된 조각물들을 다시금 재배치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전시장을 포함한 작품 전체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시각화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서 매시간 혹은 매일의 변용과정을 거칠 것이다. 새로 놓여져야 하는 작업들로 인하여 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기존의 작업들은 그대로 무용의 것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시기간 내내 변용을 겪는 상황들에 대한 흔적이자 증거이고, 작가의 행위에 대한 추보식 구성을 의미화하는 주석으로서의 역할을 지니는 것들이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는 세계 속에서 독한 생의 투쟁들을 겪고 있는 몸들이다. 전체의 부분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수동성을 시험당한다. 그 속에서 자기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전체의 페부에 접근하고 자신을 이에 동일시하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의 근간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미세한 균열지점들, 예술은 때로는 은폐된 것들을 들추어 세계에 맞서는 의식을 주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 스스로도 첨예한 감정의 한 복판에서 자신을 견뎌냄과 동시에 자신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다. 작가 김한나는 현재 바로 그 지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치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또한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보이는 것 같기도 한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들추어 덩어리로 환산하는 그러한 뾰족한 섬같다. 뾰족한 섬에서 연속적으로 생성될 앞으로의 이야기들 역시 예술가로서 자기영토를 향한 유의미한 저항인 선에서, 이번 개인전 과정에서 선보일-아직 완성되지 않는 그 모든 매일의 조각들을 포함하여- 예술가에게 일상적 투쟁의 의미를 현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 역시도 틈틈이 관찰해보고자 한다. 결국은 나의 비평도 아직은 끝난 게 아니라는 것. 




2017년 7월 23일 일요일

월간미술 Review 2017.8 정재호 개인전 <열섬>

현존의 표면들로부터 게워내는 멜랑꼴리 : 정재호 개인전 <열섬> 리뷰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도시밀집의 주거 상징물로 고안된 아파트. 일종의 도시탐사에 대한 도큐멘테이션으로 정재호는 아파트에 주목하면서 도시의 표면들을 기록하고 훑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욕망에 대한 기이한 형태를 발굴하는 지점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근대국가의 철저한 고안물이자 압력과도 같은 상징물을 발견함으로써, 도리어 개별에 대한 익명성과 소외 그리고 동질성의 강요 등 주도적 틀에서 배제되어 왔던 삶의 다양한 형태와 문화적 파편들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는 입체적인 실재이자 시각적으로 현존하는 대상을 정면응시성에 기반해 균질화된 화면으로 그리면서 시공간의 서사를 어그러뜨리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이를 통해 현존하지 않을 것만 같은 백일몽이자 착시의 순간이 이미지 자체에 대한 추체험으로 접합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구성한 화면 속의 아파트는 구체적인 주거환경으로서 또는 개발시대의 기념비적 건축물 이상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고 볼 수 있겠다. 즉 그것은 구체적인 현존에 대한 반대급부인 백일몽을 통해서, 다양한 삶의 주체와 담론들이 교섭할 수 있는 상상적 사유의 영토를 주조하고 게워내도록 하는 인식의 문이자 표면이다
 
이번 전시 <열섬>은 국토면적이 좁고 태반이 산이어서 해안가나 도심에 밀집되어 있는 홍콩의 오랜 초고층 건물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홍콩은 인구밀도가 높지만 역사적으로 도시확장이 어렵고, 그렇기에 고층고밀 주거의 특징을 띤다. 살아가는 모양새에서는 내부공간을 다시 세분화하여 임대하는 경우도 일반적이다. 습도가 높아 자연환기며 자연채광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중정이라든지 돌출된 형태의 베란다들이 또한 구조적으로 특이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야말로 이 건물들은 홍콩이라는 도시의 근대성과 개발에 대한 서사를 함의하면서도, 그 속에서 꾸려지는 삶의 형태에 대한 인류학적 지표를 탐색하고 가늠하는 기초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열섬 Heat Island>, 아다시피 일종의 자연스러운 공기흐름을 막는 인공적인 구조와 개발이 낳은 환경용어이다. 시원하고 안락한 내부는 뜨겁고 진득한 바람을 바깥으로 내뿜은 결과들이며, 그렇기에 안락함과 불쾌함은 존재적으로 하나의 것이다. 그것은 열섬이라는 인공적 기후 현상을 통해 감각되고 인지되는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이토록 필연적인 인과율이자 동시적인 발생을 보여주고 있는데, 분명 어떤 종류의 행복은 특정 종류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결과이고, 타자의 불편함이 전제되는 선에서 자신의 안락함에 대한 기대치를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하물며 자본주의와 메가도시의 환경에서야 더 확고하지 않을까. 결국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열섬은 환경용어로서 순전한 해석을 넘어 내가 아닌 것사이의 대립과 반목, 출현과 교섭의 아우라를 함의하는 듯 하다. 문학적으로 주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상징용어로서의 재규정, 왠지 시지프스처럼 디스토피아적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사의 대목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도시의 멜랑꼴리와 염세적인 로맨티시즘의 정서를 자극하는 지점에 서 있기도 하다.     

 
고층아파트를 묘사한 작업들은 정면응시성을 포함하여 측면구도 등 입체적인 구조- 함몰되고 쏠리고 몰입되는 등-를 통해서 역동성을 보여준다. 전체를 구조적으로 전망하는 속에서도 부분에 대한 묘사가 세밀하다. 마치 주거환경의 몰개성적인 구조 안에서, 그렇다고 모든 삶들이 동일할 수 없음을 증명하듯이. 또한 일부 작업들은 말하자면 돌출된 구조물들과 외부에 겹쳐져 복잡하게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혈관/회로처럼 아파트 각 면들을 타고 이어지는 배기구 등을 확대하여 시선을 머무르게 한다. 기질과 풍토, 성향 등 삶의 현존과 다양성을 상징하듯 발견된 신체의 기관들이다.
 
장지에서 배어나오는 색채감은 오래된 건물이 지닌 시간의 중첩된 켜들이 남기는 흔적들처럼 마치 잔상과도 같은 질감들이자 멜랑꼴리한 도시의 색감들이다. 이번에 소개된 <폭청빌딩><럭키하우스> 등 대형작업들은 건물의 부분스케일을 정면/측면으로 균질화된 화면에 역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삶을 통제하는 구조/규율과 욕망/굴레의 반복 등 까지도 상기하도록 몰입감을 제공하였다. 더불어 풍경 속에 놓인 인공물들(밤 풍경 속의 구조물, 독립된 건축물 등)은 거대서사로부터 떨어져,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혹은 이미 벌어졌을 지도 모를 삶의 미시사를 담은 일상적 랜드마크인 것으로, 걷고 산책하고 머무르는 속에서 발견된 기억들을 문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7년 6월 11일 일요일

REVIEW. 융복합공연<단원화무도(2017.5.19-20)>

콘텐츠심화를 위한 제언 


최윤정 ● 독립큐레이터, 미술비평

<단원 김홍도를 주제로 각 장르들이 ‘융복합적으로’ 창작된 ‘단원화무도’>.  이것이 공연을 보기 전 내 사전지식의 전부였다. 이 공연에 대해서 시각예술전문가로서의 견해를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서 대단히 목적적인 관람을 진행했기에, 순수관람의 시점에서 다소 놓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우선 글을 쓰기 전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I.

언제서부터인가 예술창작에서 ‘융복합프로젝트’가 미션화되고 있는 경향에 대해서 다소 반발감이 있다. 이 공연에 대한 정보에서도 ‘융복합공연’이 수식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는데, 물론 그것이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지원사업의 요건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융복합’이라는 의미규정이 과거 ‘다원예술’의 의미규정만큼이나 모호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많은 경우 ‘협업’과 ‘융복합’의 의미가 구분되어 해석되고 있지 못한, 현장에서의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편이다. 장르간 협업구조는 ‘융복합’의 의미를 실현하는 충분조건일 수 없다. 창작의 문제에서 ‘융(복)합’은 ‘형식적결합’이나 ‘협업’의 구조에서 논구되기보다는 창작의 문맥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서로 살리고 잇는 가운데 발생하는 ‘가치’의 측면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다시 <단원 김홍도를 주제로 각 장르들이 ‘융복합적으로’ 창작된 ‘단원화무도’>에서 ‘융복합’이라는 규정이 타당한지에 대해 문맥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공연을 수식하는 ‘융복합공연’이 형식면(텍스트, 음악, 춤, 영상 등을 활용한)에서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무대예술, 종합예술 등 각 장르의 예술들이 하나의 공연을 이루는 자체는 특히나 형식면에서 무대예술의 특성이지 굳이 ‘융복합’의 의미를 붙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시각예술인이지만, 이 공연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해야 하는 지금, 보다 도움이 되기 위해서 공연 속에서 미술의 접목이라는 부분보다도-물론 뒤에 ‘미디어’를 통해 언급하겠지만- 특히 작금의 모든 예술장르 창작의 미션으로 다뤄지는 ‘융복합’의 의미를 지자체 사업에 따른 단순한 수식으로 수동적으로 다루지 않고, 이 공연의 수식어에 어떻게 그 용어가 타당한지를 이 작품을 일궈내는 문맥적인 힘으로 창작의 과정에 결합시켜 가는 담론화 작업을 제안하는 바이다. 또한 이 내용은 ‘단원화무도’가 이번으로 마무리된 공연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정기공연 콘텐츠로서 지향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출발지점에서부터 창작의 원리이자 성찰로서 ‘융복합’의 의미를 제대로 정립해갔으면 하는 기대와 바람을 담은 것이다.   

II.

공연을 접하기 전에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에 직면하여 그의 생애사를 해석한 일종의 교육 공연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침 12세 관람가에 대한 단순한 상상이기도 하였고, 단원 김홍도라는 묵직한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의 생애사 범위 안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미리 짐작한 탓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서는 ‘단원 김홍도’ 자체가 주제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단원 김홍도는 창작의 원리 안에서 영감을 수용하는 매개이자 현실의 세태를 잇는 중간다리로 작동하고 있었다. 무용수 각각의 안무들은 김홍도의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즉각적으로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무용수 한명한명 각각이 특화되어있는 몸짓이 있다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마치 7가지 색상들이 만들어내는 무지개로서 군무의 축을 이루었고, 합쳐져서 무채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 ‘무지개’라는 형상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듯한, 어쩌면 이것은 안무에서의 ‘융복합’의 의미규정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닐는지.
과거 종합예술로서의 무대에 대한 동경을 품은 적이 있었다. 특히 무대미술과 조명은 직접적으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구체적인 일 중의 하나이기도 했었다. 이번 공연에서 무대를 세팅하는 물질적인 조형들은 모두 홀로그램 내지는 영상 등 비물질적인 미디어들로 대체되었다. 김홍도 그림 속의 장면들 한 복판에 있는 느낌을 구현하기도 하고, 무용수들의 몸짓과 연계하여 손끝발끝의 ‘에네르기파’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은 ‘기술사용’이 공연과 접목되었을 때 가상을 현실화하는 방법론으로서 물질로서의 춤과 비물질로서의 장면들의 결합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고, 당연 이로부터 관객들은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들을 하였을 것이다.
비물질의 장점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계지점이기도 한 부분인 무게와 질량이 느껴지지 않는, 즉 물질의 육중함만이 줄 수 있는 실재적인 느낌이 부재하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 부재는 이번 경우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동적인 춤의 장면들이 육중하게 실재적으로 다가오는데 방해가 되지 않은 탓이다. 

다만 김홍도의 그림이 무대를 확장하는 면이 아니라,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의 규격처럼 프레임 속에서 긴 시간 배경으로 자리하고, 춤에 대해 설명적으로 머무르는 점은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그의 그림이 부각되는 방식에 대한 그리고 프레임에 갇혀 배경으로만 역할하는 것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김홍도 그림에 대한 몰입이 힘들었던 것은 해상도의 기술적인 문제도 상존했다. 비물질 특히 미디어의 특징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혼돈시키는 것이고, 특히나 무대 안에서 미디어의 탁월한 역할은 실재하는 무대 자체를 상상적 공간으로 재빠르게 변형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면들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기에 감각이 확장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기에. 제시되는 김홍도의 그림이 무대 전체로- 몇가지 제시되었던 홀로그램처럼- 2차원의 설명적인 프레임을 극복하는 속에서 미적인 감동으로 춤과 결합되어 진동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미디어가 춤을 방해한 경우도 있었다. <송하맹호도>에서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춤사위에 대비하여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미디어는 물론 강렬했지만 오히려 춤사위의 에너지를 빼앗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중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피로감을 느끼게 하였다. 정과 동에 대한 균형, 집중과 선택에 대한 미디어 사용의 절제미도 충분히 되짚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많은 이의 노력 속에서 일군 공연일 것이다. 이미 그 속에서 관계자들이 겪었을 창작의 과정들, ‘융복합’이 의미를 찾아나가는 실천에 대한 과정들을 나로서는 아직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쓴 졸고로 이 글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보완하며 성찰하며 거듭해나갈 <단원화무도>에 대한 관찰을 긴 시간 해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대되는 대목이다. ●끝     



<저자소개>

최윤정은 국문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대안공간 MEMISPACE 큐레이터(2008-2010), 대인예술시장프로젝트 레지던스 팀장(2009), 대구미술관 전시2팀장(2011-2014)을 역임하였다, 현재 독립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지리산프로젝트(2014-2015)_한센인마을, 자갈마당기억변신프로젝트(2016)_성매매집결지 등 장소성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여 꾸준히 기획과 비평활동을 실행해오고 있다. 또한 외부활동으로 대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UST(과학기술대학원대학교) 홍보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2017년 4월 5일 수요일

금천예술공장 8기 입주작가 Vincent Tanguy(france) 비평


굴종의 굴레_스펙타클을 향한 냉소주의 : Vincent Tanguy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실재하는 개인과 실재하지 않는 것들 사회_국가_민족_신호_규범_질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은 다만 유리한 생존을 위한 약속_상징체계에 지나지 않지만, 개인의 행동과 의식(인식)을 제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맹목적인 수용만이 집단의 이 될 것이며, 이로부터 추동된 이데올로기권력이란 위계강화와 체제유지에 절대적으로 복무한다. 주변부와의 차별분리는 그 핵심 실천과제이며, 사회적 소외란 단순한 부산물로 취급될 뿐이다. 집단에 의거, 개인은 그렇기에 소거가 가능하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다만 기호일 뿐으로, 그 자체는 허구이자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힘의 장을 쥐고있다. 상징적인 허구의 망을 들추어내는 것. 이것은 Vincent Tanguy의 작업을 해석하는 제 1지점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사회적시스템, 질서 등)에 대해 우리가 알든 모르든-굴종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그는 그저 냉소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서만 구조적 디스토피아의 상황들에 몰입하고 있을 뿐이다. Back to the future or Looking forward to the past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이 발견된다. 축구티셔츠에 찍혀있는 ‘Pinault’는 축구구단주의 이름이고, 그는 현재 프랑스의 유명 작품콜렉터로도 활동 중이다. 여기서 Pinault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작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사회적 시스템을 상징하는 은유가 되면서, 자본주의 스포츠 시스템이자 예술계 시스템 안의 권력을 드러낸다. 이 작업은 문맥적으로 그가 2014년 이래 선보여왔던 퍼포먼스Untitled(2017)와도 연결된다.


이 작업은 실재하지 않으나 우리를 굴종으로 이끄는 사회적 시스템을 사이버 가상세계의 게임 속 상황에 등치시킨 것이다. 퍼포머는 에러에 걸린 듯 방향을 선택하지도 못하고 구석 자리를 배회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게임 속 인물을 모방한다. 시스템 안에 고립된, 조작가능하고 무력한 개인의 모습이다. 현대의 과학이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의 생존투쟁에 혁신적 기여를 했다고는 해도, 도리어 기술사용에 의한 사회적 소외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실재하는 개인의 가치를 철저히 수동적인 객체들로 아주 효////로 격하시켰다.
한편 General synesthesia(2017)는 그가 서울 곳곳을 유람하며 발견한, 과도하게 많다 싶을 정도의 각종 표지나 신호체계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잘 따르고 있는 장면에서, 한국사회 사회적 시스템을 관찰하며 새롭게 구상한 작업이다. 신호 및 기호화된 색상은 이미 언어화된 채로 우리의 뇌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네이버 영문 읽기 기능을 통해서 자신의 서울감상기를 차갑게 읊조리고, 각 단어들의 뉘앙스(부정의 종류들, 긍정의 종류들, 중립적 언어들 등)에 따라 그가 한국에서 발견한 기호화된 색상들이 화면에서 번뜩인다. 인지시각적 자극이 시스템의 훈련을 통해 내재된,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의식 안에 형성되어 있는 집단적 전형성을 건드리는 작업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작업을 보면서 왠지 이후 그의 작업이 그저 냉소적인 관찰자의 시선에서만 머물지 않을 것 같다는 예측을 조심스레 해보게 되는데, 어찌보면 사회적 시스템 속 개인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이미 파레토 법칙(2013)에서도 보았듯이 오히려 언제나 우위에서 고정된 20의 범주보다 어쩌면 80의 모호한 범주에 의미를 입히고자 하였던 그의 작업은,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모호한 80으로 취급받는 계급이야말로 실천적 투쟁을 위한 역량과 전복의 가능성까지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집단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본격적으로 그는 이번 General synesthesia를 통해서 인간의 뇌의식까지 지배하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서 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작업을 읽는 두번째 연결고리는 시대착오이다. A Ruin under construction(2017)은 한강에서 발견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수직으로 뻗은 다리축대와 잔잔히 흐르는 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축대는 마치 고대의 건축물, 스펙타클한 기념비적 구조물인 것처럼 보인다. 공사 현장임에도 영원의 시간 속에 떠있는, 세속적 시간에 있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장면이다. 현대의 폐허에서 고대의 도상을 발견하는 혹은 고대를 희구하는 시대착오적상상. 인터뷰 내내 우리는 시대착오적(anachronic)’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떤 행위나 사물을 그저 낡은 것으로 취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사전적인 의미에 더해 지금의 장소와 시간 안에 놓여짐으로써 어울리지 않는, 그로부터 인지부조화의 불균형상태를 도리어 강화할 수 있는 촉매로서 이 단어의 사용이 보다 적절하겠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작업에서 보자면 케밥 Doener는 전통적인 소규모 사회의 미덕이자, 공동운명체 집단을 묶어주는 토템 Totems Doener(2013)으로 연결된다. 이 작업을 관통하는 내용도 시대착오적으로 수합된 바다. 작품을 통해 토템이 된 케밥은 한 사회에 머물러 있는 기호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음식으로 마주할 수 있다. 작품의 의미에 다가설수록 세계화의 명분까지 취하며 토템이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을 벗어나, 도리어 개인에 기초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실현한다는 상상까지도 이끄는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물론 세계화의 명분이란 것도 자본주의의 스펙타클한 사회 안에 또한 갇힌 언어일 테지만, 굴종의 낙타가 성난 사자가 될 수 있도록 포착된 지점에 서있는 아나크로니즘은 도리어 굴종의 굴레를 이탈할 수 있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다시금 시대착오인지부조화의 장면은 현실적 조건에서 현존하고 있는 억압의 실제 조건들을 얼룩지게 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한 사회의 전형성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일, 기이한 형상이며 시대착오적 도상이나 장면의 발굴을 통해서 도리어 사회적 시스템의 근간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사유를 매개하는 지점에, 냉소적인 관찰자로서 작가가 포착한 이미지들이 자리한다. 문득 든 생각이다.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내 삶 또한 재배치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조건을 안고 살아야 하지만, 이러한 일상에서의 시대착오적계기가 틈새로서 마련될 수 있다면, 이 스펙타클 사회의 아이러니라도 인지하면서 성찰하는 개인으로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