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장병언 첫 개인전 평문 2014.6


소요逍遙하는 까닭

'장공, 생각을 움직이니 눈앞에 다가오는 형상을 마주할 수 있었더냐' 
최공, 2014년 6월 축사

글 ● 최윤정(지리산프로젝트 큐레이터/미술비평)


그의 자아는 옹고집이다. 아마도 이번 개인전에서 부각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행보 속에서, 그만의 특징으로 점유할 수 있는 바, 고전적 정신에 대한 동경이자 그것을 형상화하고자 준법을 연마하고 수행하는 과정을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똑같게 모사하는 바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현대미술논의에서 말하는 차용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는 중국 산수화 대가들의 주요 작품을 '스스로 모사한다고 말한다.(작가는 이렇게만 말한다.)' 여기까지 보자면, 장병언 작가의 작업과정을 상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때로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오해하고 옛것을 따라했다는 형식에만 그쳐 고루하게 보는 등 판단적 우를 범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겠다. 

그의 작업이 가지는 참신함을 발견하려면, 우선 그가 말하는 '모사'의 의미에 접근하는 단초가 필요하고 그것은 그의 작업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모사' 자체로서의 진정성 그리고 또한 그것이 의미상 변경되고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바다. 옛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힘들게라도 무수한 과정을 겪으며 원본을 쫒아 곁에 두고 혹은 장시간 작업하는 모사의 방법을 쓸 수 있겠지만, 지금에서 찾고자 하는 원본이란 박물관에 미술관에 고이 모셔져 있기에 곁에 두고 작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허나 차라리 단순한 형식 모사에서 작가의 정신과 태도에까지 확장되고 무엇인가를 덧붙여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이 때문에 역으로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모사하고자 하는 작품의 최상도의 이미지를 수소문하여 가장 뛰어난 화질로 뽑은 종이를 들고 그것을 원본삼아(?) '모사'한다. 그의 고전은 따라서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에 도리어 그 준법을 더욱 부각하고자 혹은 스스로의 성향에 맞추어 작가 특유의 고집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정신에 의거, '모사'를 꾀할 수 있었던 바다. 대가들의 준법을 모두 익히겠다는 각오로부터 꾸준하게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 '모사'를 이야기 하면서. 작가는 여기에 고전을 마주하는 무게감과 긴장감을 순간적으로 녹여버리는 유머러스한 자신의 도상을 덧붙였다. 그것은 고전에 대한 작가의 태도적 오마주이자, 그 세계에서 노니는 자신의 모습이다. 작가는 평소 산을 좋아하여 마음이 동하면 열 일 제치고 떠날 수 있도록 문 곁에 항시 등산용 모든 장비가 탑재된 가방을 준비해둔다 한다. 그냥 떠난다. 그의 성향은 온전히 독자적인 행동방식에 기반한다. 따라서 그의 옹고집은 절대적 힘에 의해 자신을 다른 것으로 화하게끔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순전한 자아로서의 작가로 정립하도록 하는, 수월한 재료와 반짝 아이디어로 충분히 무장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자꾸만 인간적인 태도적인 궁금증을 유발하는 또 다른 참신함을 낳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본질적 성향이란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고, 보다 다양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자 하는, 이를 다양한 언어로 해석하거나 혹은 그 언어에 대답하고자 하는 모든 충동을 수반한다. 또한 모든 예술의 뿌리는 다양성 뒤에 숨겨진 거대한 통일성,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과 피조물들 배후에 있는 창조자 혹은 에너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세계의 시원에 관한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면,  그에게 이러한 관심은 고전 산수화가들의 준법과 철학을 온몸으로 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범관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점을 찍어, 산수를 유람하면서 직접 바라본 바들을 자신의 순전한 세계의 반영으로 표현하고자, 우점준을 사용했듯이 그리고 이당이 날카로운 것으로 찍어낸 듯한 기법으로 소부벽준을 활용하여 그만의 철학을 담은 산수를 표현했듯이, 또한 곽희가 자연을 소요하면서 자연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자기만의 시선을 리드미컬하게 연결한 삼원법으로 산수의 기를 보여주었듯이, 작가 장병언에게 고전 스승들이 전한 준법은 단순한 기법이라기 보다는 본인이 도달하고 싶은 작가로서의 이상향, 삶과 예술의 경지를 실험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학습도구였다. 또한 이 고전스승들은 속세의 경험을 단순히 은둔자이기 보다, 준법을 통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규율, 즉 실천적 규범으로서 이를 제시하였다. 그들의 산수화가, 보통 산수화에 대해 무지한 현대인이 오해하는, 속세를 벗어나 은둔자의 삶을 지향한 혹은 현실정치와 무관한 자율성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의 산수화에는 속세의 거친 삶의 모습과 수행으로서 절대정신에 도달하고자 하는 삶 그리고 그 너머의 자연(신)의 본질과 원리에 도달하려는 세계가 담겨져 있다. 여기에는 합일의 경지에서 각자의 철학적 태도와 예술가로서의 특성적 면모도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다시금 산수화에 깃든 도교적인 이상향이란 별도의 것이 아니라, 그 구도와 준법에서 이미 현실을 동시에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와 평행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바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곽희의 조춘도, 이당의 만학송풍도, 범관의 계산행려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을 모사한 <遊조춘도>, <遊만학송풍도>, <遊계산행려도>, <遊몽유도원도> 등을 선보인다. 이 작품제목들도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유머러스하면서도 중요한 지점이 된다. 말하자면 고전 스승의 그림들을 지속적으로 모사하면서 스스로의 준법들을 습하고 스승들이 자연과 세계를 소요하며 거두어낸 화폭에 스스로를 던져 본인이 그들의 작품에서 '소요해왔음 혹은 여전히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것을 그리며 익히며 행복을 느끼고 그들의 정신과 세계에 대한 철학을 체득하면서 깨닫는 그만의 감응적 세계. 한편, 시간이며 물리적 공간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무법자와 같은 개인성과 창작적 태도에서 장병언이라는 작가는 또한 자신의 속세적인 삶에서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되 인간사회 자연의 규율에도 어긋나지 않는 아주 특이한 젊은 예술가이다. 저 고전 스승들이 다만 준법을 익히기 위한 도구적 스승들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며, 또한 저 준법들이 기술로서의 화법이기 보다, 삶의 철학과 규율을 녹아낸 정신적 기법이라는 측면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끝>

  
후기:
작가와 나의 인연은 3년전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30대 중반의 전업작가 또래 작가들이 그 사이 개성 넘치는 그들만의 참신함들을 소개하고 있을 때, 장병언 작가는 그야말로 고전 산수화의 세계와 흠뻑 일체가 되었고 대학교육이 신통치 않음을 감히 '스스로' 깨닫고, 곧이어 '스스로' 스승을 정하여 그를 찾아 '사사받는' 형식을 과감히 '신선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품고 살며, 그의 삶에는 어떤 층위들이 있는지 인간 자체가 궁금해지는, 신묘한 측면이 있는 작가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참신하다.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월간미술(2013.11) Review : 염성순, 감옥에서 보낸 한철展(2013.10.8-10.27)



그대가 선택한 고통의 궤적_ 염성순, ‘감옥에서 보낸 한철’展
(2013.10.8-10.27, Project Bgallery)
 

나는 본다. 한 여자를 39x 54.5 종이 펜 아크릴릭 2011

“그대 고통은 그대 오성(悟性)을 싸고 있는 껍질을 깨는 것. 마치 과일이 부숴져야만 그 핵이 태양을 볼 수 있듯이, 그대 역시 고통을 이해해야 하리라”(<예언자>, 칼릴지브란) 고통은 삶의 열락을 위한 키워드였다. 고통은 어떤 욕망이든지간에 나에 의해 선택된 그것이자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한 파괴의 과정을 도모한다. 고로 그 근원은 ‘나’의 실체에 기인하고, 깊은 어둠에서도 빛의 작은 한 줄기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에 관련한다. ‘고통’이란 따라서 그냥 ‘고통스러운’의 의미이기 보다, ‘~에 대한 인지를 위해서’ 내지는 ‘~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에 닿아있다.
염성순 작가의 ‘감옥에서 보낸 한철’[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에서 따옴]은 크게 두 가지의 연작으로 소개된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여성시리즈>가 그것인데, 이 둘은 ‘감옥에서 보낸 한철’에 대한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동시에, 현재를 통할하는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만한 솔직함이 있을까. “(...)화가들은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그릴 것이다. 정반대의 화가종족들도 있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내 납덩어리는 여전히 납덩어리인 채로 내 속에 남아있다”<‘작가의 노트’에서 발췌> 창작은 세계에 대한 욕망을 투척하고 이를 발산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역으로 ‘발산’자체는 창작과 동일하지 않다. 그저 기계적인 ‘발산’도 가능한 것이므로, 다만 “납덩어리”가 예술가가 지녀야할 비극 내지는 소명이라면,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예술가는 스스로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
멀리서,혹은 가까이에서 (7) 78x54.5 종이 펜 아크릴릭 2011
그리하여 창작을 위한 발산의 공간이자 예술가로서 구체적인 삶이 펼쳐지는 물리적 장소 ‘아틀리에’가 작가에게는 ‘감옥’일 수 있고, 욕망을 구체적인 것으로 잉태하기 위한 ‘고통의 시간성’은 ‘한철’로 압축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연작은 나의 바깥 세계가 지닌 욕망의 근거와 세계의 끈적한 욕망의 기운이 다시금 나에게로 회귀하는, 그것이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인지하게 되는 무형의 흐름을 이야기 한다. 유기체적인 확산, 세포의 증식, 초고도 압축의 상황,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감을 지닌 화면은 그 만으로 작가가 발산하고자 하는 그의 고통이다. <여성시리즈>는 그 안에서 ‘나는 본다, 한 아픈 여자를’, ‘나는 본다, 한 여신을’ 등으로 색감의 높은 밀도와 함께 여성성을 범주화한 타이틀을 사용하여 마치 시의 운율을 만들어내듯이 연속적이고 강렬한 심상을 뿜어낸다.
염성순 작가는 글쓰기와 작시(作詩)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어가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문학이 되면 때로는 음률로 화하여 음악이 되기도 하고, 심상으로서 감각으로 전이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문에 그의 회화는 음률이자 심상을 도상화한 마치 한편의 문학작품과도 같다. ■ 최윤정 /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2013년 4월 24일 수요일

월간미술 5월 Review : LEE Myung-Mi

이명미 : '넓은 들이여 내려앉을 마음 없이 우는 종다리' *


대구를 기반으로 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 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하였던 작가 이명미가 분도갤러리의 초대로 개인전 ‘Game’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약 20여점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작가는 화려한 색채와 단순화시킨 도상들을 주요 조형어법으로 삼고, 초등학교 앞 작은 문구점에나 있을법한 장난감 피규어와 입체스티커를 특유의 재료로 활용하고 있었다.

처음 독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녀의 작업에 대해 장난스럽고 한없이 밝고, 또한 질풍노도의 소녀가 겪는 감성을 담아낸 듯하다고 여길 법하다. 일차적인 독해로서 타당하다.

“젊은이의 감성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는데 어느덧 거울을 보면 한 노파가 서있더라.”(작가) 담담하지만 자조적인 회한이 묻어나온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세월은 지나치지만 정신만큼은 젊어야 한다”(작가)며 우연한 자리에서 ‘스스로 철없음’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논하는 작가를 보고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묘한 해학성의 근거를 엿본 듯 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온갖 희로애락의 순간은 ‘사건’으로서 현재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 다시 말해 감정을 수반하는 모든 사건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삶의 당위와 현재의 문맥을 주조해낸다.

멀찌감치 작품을 보면 그저 화려한 색채와 단순화된 여인의 조형이 있다.  <사랑해_캔버스 위에 아크릴, 혼합매체_194x130cm_2012>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세상이 온통 여러 번 덧칠이 된 핑크색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성의 한쪽 눈에는 눈동자 대신 ‘saw’(텍스트)라는 단어가 다른 한쪽은 ‘king’(텍스트)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또한 얼굴에는 하트무늬 스티커가 ‘사랑해’를 연발하며 사랑에 빠진 여성의 표정을 'very much'(텍스트) 만들어 내고 있다. 그저 터져나오는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무채색 스트로크로 무관심하게 그어진 여인의 눈코입이 역으로 이를 발산하지 못하는 듯한 갑갑함으로 장면을 마무리한다.
<떠나자_캔버스 위에 아크릴, 혼합매체_194x130cm_2012>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차용한다. 입체스티커가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자 떠나자’의 노랫가사를 구성하고, 가장 간략한 형체로 비행기며 배며 자동차가 작품 하단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만화캐릭터를 담은 입체 스티커들이 한 구석에서 마치 지점에 도달한 여행자인 양 스토리를 생산하고 있다. 햇살의 잔상과도 같은 다채로운 색의 점들이 자유로운 청춘의 심경을 사방팔방으로 흩뿌리며 만들어내는 장면은 대단히 감각적이며 유희적이다.
빈 의자가 무관심적으로 덩그러니 한 구석에 놓인 <너와같다면_캔버스 위에 아크릴, 혼합매체_200x200cm_2011>은 텍스트의 배치가 전면을 장악한다. 다양한 형태의 입체스티커가 점이 되어 하나의 글자를 생산한다. 각 스티커마다의 이미지와 조형성이 강한 탓에 어쩌면 입체스티커라는 하나의 (사건적)개체마다 의미나 심경이 별도로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기능적인 표음문자가 하나하나 이어붙이는 작가의 행위에 의해 그 자체 심정적인 표의문자로 변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그저 조형성이라고만 여기더라도 이 또한 그저 스티커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와 색채감으로 충만한
<보고싶다_캔버스 위에 아크릴, 바느질_181.3 x 227.3_2012>는 추상적인 표면성을 보여준다. 텍스트들은 스미듯 색면 뒤에서 불룩 솟아오고, 도상이라기보다는 스트로크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화면의 어지러움을 가중시킨다. ‘목련꽃그늘아래...편지읽노라...보고싶다..’

감각적 가시성은 참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베일에 가깝다. 각종 모티브가 뒤범벅이 된 듯 온 감각을 자극하는 이명미의 작품들은 심리적 거리로서 통속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한편 무심히 펼쳐내고 드러내놓고 있는 듯하면서도 세부를 직시하게 하고, 동시에 장면에 대해 집중하게 하는 내러티브적 이끌림이 놓여있다.


* 마츠오 바쇼오(1644-1694) 의 하이쿠 :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르고 잠시 나무에 앉았다가 다시금 하늘을 향해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봄날의 종달새를 노래함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월간미술11월 Review : LEE Kyo-Jun


<이교준>, 리안갤러리, 2012.9.5~10.13

글 ● 최윤정/대구미술관 큐레이터

회화의 내러티브를 제거하고 대상을 인식하는 '선과 면'의 단위성에 근거하여 독자적인 예술의지를 표해 왔던 작가 이교준, 그의 이번 개인전에 발표된 작품들은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우선 각 부분은 그가 90년대부터 치열하게 고민해왔던 표현에 대한 의지와 문맥적으로 일맥상통하며, 그저 신작발표이기보다 관람자를 향해서 작가 이교준을 관통할 수 있도록, 기하학적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그의 현재에 나란히 보폭을 맞추면서도 이후 그의 평면과 입체가 어떤 입장과 방향으로 진전되어 갈지를 보여주는 지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전시작품 세 종류 중 한 측면은 색면과 색선으로 분할되고,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개의 사각 틀들이 그 배열방식에서 거두어낸, 시각적 착시로서 일종의 투시적인 운동성을 유발하고 있다. 이는 각 사각틀이 교차가 아닌 순차적으로 혹은 등차적으로 배열되면서 전면과 후면, 상하좌우의 가녀린 떨림을 감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측면은 차가운 금속소재의 매체를 캔버스나 밑색의 용도로 활용하여 모노톤의 색채와 경계긋기에 기인한 무채색의 선이 자아내는 소품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측면은 입체물로서 사각의 일정한 틀 안에 면과 선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경계면-색면-을 강화함으로써 시야의 각도에 따라 분할된 형태를 달리 관찰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우선 금속소재를 사용한 소품은 작가 이교준이 지닌 오랜 고집의 역사에 대한 단초를 시각적으로 단호하게 보여주는 상징이자, 신작에 대한 '명제' 내지는 '공리'로서 역할하고 있었다. 작가 이교준을 독해하는, 그를 관통하는 '공리'를 함의하면서도, 그가 말하고자 한 '인식에 대한 제물음'을 통할하는 시작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시각적으로 교란하듯 긴장을 일으키는 근작들, 즉 현재의 작가를 증명하는 나머지 두 종류의 작업들은 공리에 따라 문맥적으로 정당하였고 또한 더 나아갈 수 있는 자기반성성까지도 획득해내었다.
인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표현의지는 엄정히 그어진 선을 통해 경계를 설정해내고 그로부터 '면'을 발생시킨다. 이는 그 자체로 개체로서 '부분'이자 '단위형성' 단계와 동일하다. 우리는 이차원이든 삼차원이든 부피를 가진 사물들을 인식할 때 점,선,면의 기초단위 구성을 인식하며 그로부터 전체의 형태를 수용한다.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모든 문화적 요소들-그 무엇이든지 간에-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자 혹은 그로부터 각 개체가 자기인식을 꾀하며 자신에 대해 제삼자로 서는 일, 예술은 그 매개이자 진실에 접근하는 행위로서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를 내재한다. 작가 이교준에게서 그의 작업은 사물 자체를 인식하기 위한-형태적 본질을 포함하여- 일종의 방법론이자 제안이며, 또한 그만의 표현과 의지 자체로 인 것으로 여겨볼만하다.


2012년 9월 19일 수요일

김해문화의 전당 '미디어전' 연구평문

메신저
백남준 전자고속도로
: 한국의 초기 비디오아트





글 ● 최윤정(대구미술관 큐레이터)







1. 들어가며

한국의 미디어아트의 역사 속에서 그 시발점이 되었던 초기 비디오 아트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장을 한층 광범위하게 넓히는 계기가 된다. 이에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1932-2006)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비디오작업을 했던 박현기(1942-2000), 이후 과거와 현대가 지닌 한국사의 단면들을 특유의 설치작업으로 구현하였던 육태진(1961-2008)과 육근병(1957)의 작품은 한국의 초기 미디어아트의 수용과 향방에 대한 개념적인 시선을 마련할 수 있게 한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에 유목적 사유와 실천으로서 인류학적인 시선을 뚜렷이 구현하고 그저 기술 매체에 불과한 텔레비전을 문화사회사적인 접근을 통해 소통기구로서의 오브제로 자리하게 하였다. 박현기는 텔레비전이 비추는 오브제 가상을 도리어 동양적 세계관과 정신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개입시켰고, 육태진은 반복되는 행위를 담은 영상으로 현대인의 삶의 단편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육근병은 세계를 담아내는, 우리의 육안을 상징하는 외눈박이 작업을 통해 응시를 통한 세상과의 연결을 상징하여 왔다.
이들이 담아내는 초기 작업 속에서는 미디어의 사용이 ‘메신저’로서 기능함과 더불어 심층적인 작가적 사유의 차별적인 부분을 모색할 수 있게 하였다. 초기 미디어 그것은 오히려 세상과 인간의 인식을 연결시키는, 가상과 실재가, 그리고 보여지는 것과 진리가 맞닿는 가교로서 설정되고 있다.
실제 백남준의 작업이 작품 자체로 한국에 소개된 이후, 비디오 아트의 개념이 정립되기도 전에 한국에는 그저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수용에 급급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현상으로서 언급될 때가 있다. 마치 50~60년대 서구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갑작스런 수용으로 단순히 형식적인 요소만을 반영했을 뿐이라는 비판을 떠올리게 하는 단면이다. 과연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 형식이 혹은 매체가 효과적이었는지를 질문하기 전에, 그로부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미니멀리즘 역사와 과정을 본다면 그것이 단순한 수용에 그쳤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 형식은 한국적 풍토를 기반으로 한 내용적인 요소들_문인적, 철학적 사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제문제 등 이에 적절한 구현 방식으로 유효할 수 있음을 도리어 증명해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디오아트 역시 기계매체에 대한 수용을 넘어 그 시작에서 1세대들 각각이 자신의 차별적인 텍스트성 영역으로 논의를 발전시켜왔기에 도리어 그것이 한국의 미디어아트 역사를 이끄는 중요한 조짐이 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예술가들에게 당대의 과학기술은 오브제적 확장으로서 그들의 기발한 아이디어 생성과 상상적 지평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제이며, 기존에 대해 보여지는 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고, 또한 그 속에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해 의심스런 틈새를 만들어 놓았다. 백남준으로부터 처음 명명된 비디오아트는 “텔레비전의 폭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 하는 임무를 띠었다. 이는 그가 해프닝을 통해 현실의 헤게모니를 좌초시키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그래밍된 수동 개체인 텔레비전 그 뒤로 숨은 수많은 의도들과 그에 따라 은연중에 침투해오는 명령에 순응해나가면서 이를 다만 하나의 오락으로서만 관성적으로 수용하게끔 한 그 모든 것에 대해-스펙터클한 사회와 그 틈새에 대해 비판적 독해와 공격을 의도한 바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매체를 형식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탐구 및 개념적 차원으로 해당 오브제에 그리고 표현매체로서 그 효과에 더욱 주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2. 세계를 잇는 메신저로서의 샤먼

'샤먼의 궁극적인 목표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매개하는데 있다.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예술가들/학자들은 분명 세계인식에 대한 메신저로서 역할해 왔다. 고유한 정체성으로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연관을 발견하고 개념적인 사유에서 인지적 증폭을 통한 새로운 직관의 길을 열어주는 사람. 이들은 분명 세계를 통해 자기애와 자각을 꾀하고, 다시금 정신적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세계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세상에 처해짐이란 단순한 처함이 아니고 스스로가 선택한 처함이다. 더불어 자기 자각을 통해 행위의 필연성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주목하는 예술가는 어쩌면 이러한 샤먼적 의의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로서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자기 질문과 회의, 자신의 기억과 원형적인 사유를 통해 세상을 가로지르고 동시에 접합하는 행위자. '
샤먼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메신저로서, 우주와 인간의 소통을 매개하고, 우주와 인간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역할자로서 설정된다. 모든 샤먼은 상징적인 미디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인공적인 것이건 혹은 자연적인 것이건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미디어이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마술적 징후를 통해 작용하는 상징과 기호의 세계는 다시금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둔 미디어적 세계라 말할 수 있다. 다시금 그것은 오늘날 기술매체로 넘쳐나는 미디어적 현상이 고대 샤머니즘의 세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을 제공한다. 이승과 저승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실과 가상을 왕래하며 두 공간을 잇고,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밀접한 관련 속에 있다는 신비한 체험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샤먼의 역할이고, 샤먼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의식을 통해 인간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하기도 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예술적 지향과 의식의 도구 내지는 퍼포먼스이자 샤머니즘의 상징과 동일한 지점에 서있다.
백남준은 고대 한반도가 북방초원의 유목문화를 기반으로 한 기마민족이었음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아적 정체성과 철기시대 매개체로서의 문명적 진보가 그의 작품 심층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인류 샤머니즘의 기원을 동북아 내지는 시베리아에서 찾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창작 속에서는 꾸준히 황색DNA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들이 수반된다. 그의 오브제는 때로는 불교적이면서도 도교적이고, 샤머니즘적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기술적 매체와 서구 중심적 문화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태도를 형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또한 도리어 이를 이분화하지 않고 개척의 상징, 초원길의 모티브로서 ‘전자고속도로’를 제시하여 전 세계가 미디어에 의해 결합되고 소통되고 ‘달’에 의해 ‘전파되는’ 구상들을 실현해왔다. 여기서 중요한 매개인 ‘달’은 또한 단순한 매개로서 표출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생명주기, 일종의 리듬이자 위성으로서 지점을 잇고 연결하는, 세계를 하나의 근원으로 모아주는 태초의 것이 된다.
백남준이 사료 및 인류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샤먼적 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면, 육근병의 경우는 샤먼 자체의 구체적인 의식에 더욱 근접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에 인간의 눈 한 쪽을 담은 텔레비전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눈’은 백남준의 ‘달’과도 같다. 그는 인간의 눈에서 우주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주라는 것은 자연적 요소에서 진리적 사유 등 모든 것을 꿰뚫는 심미안과 다르지 않다. 그 속에서는 부정된 것이며 이질적인 형국, 대립되는 것 모두다 하나의 점과도 같은 것으로서 우주의 정신 안에서 모두가 합치될 수 있고 가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작가에게 무덤은 과거이자 죽음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육체에 지나지 않고, 우주를 응시하는 눈은 강하게 주제화된다. 샤먼의 탄생과정 중 ‘상징적인 죽음’의 절차가 있다. 그것은 세속의 모든 선을 끊고 온전히 접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초기과정이다. 이미 끝난 것-죽음, 과거의 역사로부터 지금의 현재와 우주와 스스로 자신이 무관하지 않음을, 또한 세계에 표명될 수 있는 지지대가 바로 과거에 있음을 육근병은 동양적 윤리관과 사유에 기대어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징적인 죽음은 다시금 샤먼으로서의 부활의 계기로 전환된다. 이 과거의 무덤은 다시금 그의 작품에서 터널의 형태로 전이되는데, 시간성이 더해진 터널로서 이 오브제는 역사의 순환과 더불어 불교적인 윤회사상 속에 놓인 인간의 역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환영적이고 마치 주술과도 같은 그의 비디오는 무속적이고 신비한 의식과 구체적인 삶속에 내재한 시간성이 결합하여 문화 ․ 역사적 시원을 떠올리게 한다. 깨어있는 눈, 세상에 대한 심미안에서 이어진 그의 작품은 신비함과 자연의 서사, 드라마틱하고 영적인 산물로서 원형상징적 요소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3. 세계를 비추는 거울

인간의 육욕이 고대 만다라의 형상과 결합된 박현기의 ‘만다라 시리즈’(1997)는 포르노비디오의 영상조각들과 시바의 여신이 동영상으로 혼재되어 있는 작품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형상 내지는 현대사회와 고대 만다라의 결합 안에서 지금 우리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평가적 가치를 들이대지 않은 동양적 사유에서 비롯된, 현재를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 작업이다. 그리고 ‘도시의 지하철 역에서’(1998)는 도시 속의 대표적인 장면, 밀집된 지하철 안에 사람들의 표정은 텍스트에 감추어져 있고, 텍스트를 구성하는 각각 글자는 지하철이 달리는 속도와 리듬에 맞춰 때로는 유영하듯이 혹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긴장감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육태진의 비디오아트는 현대인의 익명성, 그리고 소비사회와 대중사회 속에서 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대표적이고 무기력한 행위(보행)를 반복적으로 영상에 담았다. 그는 고가구를 활용하여 그 속에 현대인의 삶을 삽입시킨다. 고스트퍼니처(1995)에서 인물은 끝없이 걷거나 혹은 끝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그리고 작품의 주제에 상통하는 폐쇄적인 현실과 그에 따르는 정형성이 ‘서랍’이라는 네모진 박스 안에 인물의 움직임을 갑갑하게 가두어 놓는다. 고가구는 오랜 과거 혹은 이미 죽은지 오래된 오브제이다. 그 결합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인물의 반복된 보행장면은 그저 더욱 ‘환영’인 것으로 각인된다. 지극히 단순한 반복, 혼자 있음, 누군가의 혹은 나의 자화상, 익명성 등 이같은 내용은 고가구를 넘어 터널 구조의 공간설치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루할 정도의 반복성은 마치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응고되고 물질화된 이미지와 다를 바 없다.


4. 나가며

초기 비디오아트가 가능할 수 있었던 지점은 이견의 여지없이 기술매체의 수용과 사용에 있다. 그러나 초기 비디오아트에 대한 담론이 자생적으로 생산되지 못했던 환경에 대해서 비판하고 반성할 필요성은 충분하나, 도리어 예의 형성에 있어서 과연 ‘차별성 없는 전략’ 내지는 ‘기술을 위한 기술자체’로서만 과정이 소요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메신저로서의 경향을 2항와 3항으로 나누기는 하였으되, 네 작가의 작업 모두에서 보다 깊이 있게 접목해보고 싶은 부분은 무엇보다도 ‘메신저로서의 샤머니즘’에 대한 것이고 이는 초기 비디오아티스트 모두에게 해당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매개하고, 잇는 것이 예술의 본위라고 보았을 때, 특히나 비디오 아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형상과 개념까지도 제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환영이며, 환영은 우리 인식의 틈새에서 노니는 직관성에 맞닿아 있다. 그것은 세계를 제시하는 메신저로서, 혹은 실체를 폭로하는 인식의 전환적 계기로서 역할하며, 또한 실재에서 목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이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결과적으로 초기 비디오아트에는 그야말로 ‘한국 미디어아트’의 차별성을 주조할 수 있는 전위적 특징이 있다. 각 환영들이 담아내고 있는 서사를 고려한다면 초기 비디오 아트의 문맥을 유의미적으로 소급할 수 있는 지점들이 제각각 발화할 것이다.

2012년 7월 8일 일요일

Review. 노동식, 홍상식 2인전 ‘22세기’展

Review. 노동식, 홍상식 2인전 ‘22세기’展
오픈스페이스배 전시전경





욕망의 Doomsday



글 ● 최윤정(미학/미술비평)



한 사람에게 그것은 ‘핵폭발’의 형상이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 그것은 온 세상이 미친 듯 메카시즘을 부르짖는 이때, 그 반작용으로서 등장했던 이벤트로 나열된다. 22세기에 대한 두 작가의 관점은 대단히 뚜렷하면서도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작품의 재료가 지닌 특성 내지는 구상적 조형성이 이를 지지해주고 있고, 버섯구름이라는 명확한 구상과 ‘LEFT’라는 문자간 결합에서 우리는 두 예술가가 투척하는 바를 정확히 목도할 수 있다. 노동식 작가가 솜으로 만든 거대한 핵폭발의 구름은 ‘파괴와 자멸’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이 작품을 응시하고 있는, 빨대로 만들어낸 단 하나의 ‘눈’이 이에 대한 역사적 관찰자로서의 서사를 읊어낸다. 간간히 붉은 색 조명이 핵폭발의 징후를 내보이는 가운데, ‘하나의 눈’ 양 사이드를 채우고 있는 것은 올해를 비상하리만큼 달구었던 ‘청춘 콘서트’ 주인공들의 초상이다. ‘22세기’展은 두 작가의 관점을 통해서 담아낸 다음 세기에 관한 계시록이다.





#. 첫 계시록



일차적인 유사죽음을 유도했던 제국주의나 이념을 통한 인간성의 참담함을 담아냈던 냉전주의 등, 과거 확연했던 대립구도는 다시금 민주주의와 경제적 효율성에서 추출한 ‘악’을 경제적,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양’의 것으로 이용하는 시대로 전이되고 있을 뿐이다. 무너져도 다시금 창궐하거나, 그러다 또 무너져도 다시금 꿈틀거리는 욕망. 이쯤 되면 이것은 본성이고 인간의 가장 진면목은 아닐 런지. 더군다나 인간은 그 욕망을 논리화하고 합리화하고 사유하기까지 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보호와 모종의 장막을 위한 공동이념을 허구로 만들어낸다. 국가와 민족의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때로는 물리적으로 상대의 폭력을 전제하며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무기로 나타난다. 비로소 이 땅에 머무르게 되는 ‘충돌과 파괴’, 노동식 작가는 이를 ‘핵폭발’의 형상으로 제시하였다. 역시도 그가 바라보는 22세기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이념이 조장한 실존의 관성물인 ‘핵’이다. 작가는 우리의 몸을 일차적으로 보호해주는 옷감과 이불의 재료가 되는 솜으로 핵폭발의 구조물을 만들어내었다. 우선 그의 전 작업에서도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재료이자, 가벼움의 속성으로 공중에 떠오르는 형상을 가장 잘 구현하는데 이는 적합하다. 이번 작업에서는 또한 가장 온순하고 익숙한 재료가 22세기 디스토피아를 표현하는 파괴적 형상의 재료로 쓰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맥이 부가될 수 있으며, 솜 내부에 설치된 조명의 분위기가 재료의 속성과 합쳐져 이 조형물은 마치 긴급하고 심각한 사안을 풍자하는, 현대의 조악스런 팝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각 욕망 간 충돌로서 ‘핵폭발’은 22세기의 형상일 뿐이기 보다, 과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비견한 역사와 지금 현재 일본 원전파괴와 관련한 생존의 위협, 오랜 시간 망각 속에 흐르다가 다시금 꿈틀거릴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접합체였다. “..그대의 의상을 좀 더 적게 입고 그대의 살갗이 보다 많은 태양과 바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생의 숨결이 햇빛에 있으며 생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다는” 단순한 진리로 살아갈 수 없겠는가에 대한 소박한 비애감이 진하게 묻어나는 작업이다.





#. 두 번째 계시록



좌우 계파에 관한 용어는 오랜 역사적 관점을 수반하여 구분할 수 있다. 극과 극이라는 대척점에서 사회에 대해 변치 않는 지극한 관점이 혁명적 계파 및 보수우익의 태도를 성립시켜 왔다. 기본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논리적 합의와는 거리가 먼, 이 경우 양자 모두 일종의 경고처럼 ‘대안의 대안에 대한 대안에 대한 대안에 대한...’ 얕은 깨달음과 우매함을 전사하며, 권력속성이 지닌 여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색안경이라 표현하였고, 스스로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그것이 진보적 시각이든 보수적 견해이든 결국은 각자의 주관에 따른 사회적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스펙터클의 대립물들 밑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비참함의 통일성이다. 모든 선택의 가면들 아래에는 각기 형태는 다르지만 동일한 소외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이같은 다양한 형태의 모든 소외는 억압당하고 있는 현실적 모순들 위에 세워져 있다. 스펙터클은 집중된 형태 또는 산재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들 중 어느 형태를 취하느냐는 스펙타클 자신이 부정하거나 지지하는 비참함의 개별무대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두 형태 어느 쪽에서나, 스펙터클은 비참함의 평온한 한 복판에서 황폐함과 두려움에 둘러쌓여 있는 행복한 통합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스펙터클이자 ‘스펙터클적’이며 그것은 지금 우리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속성이다.

빨대로 이뤄진 입체 전면에서 후면의 색빛이 반영됨은 좌우익의 구분 논리 자체에 대한 허구를 보여주려는 바다. 전면의 인물과 후면의 권력 속성을 상징하는 색상이 흘려 비친다. 이는 작가의 개별사고가 이미 현재 보수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견지하되, 그 이면에 있어서만큼 집단적 권력의 속성에 대한 경계태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극명하게 문자로 표기된 LEFT는 보이는 시선에 따라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뭔가를 주장하는 듯 아닌 듯, 흐릿한 구조로서도 작가가 무엇에 대해 ‘대안의 대안에 대한 대안..’ 그 끊임없는 연쇄고리의 측면을 잠시라도 멈춰보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혹은 왠지 작업적 속성으로 인해 모호하게 떠오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의미는 여전히 모든 것은 경계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중립적이고도 한편 비애적인 시선을 고수하고 있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22세기에 대한 음울한 디스토피아의 로맨틱한 서사에 근거한 판타지로부터, 탈출하게끔 하는 접속코드였다.







#. Epilogue



현대 군중의 상징이라 생각되는 네티즌들의 끄적거림을 관찰해보았다. 역시 군중은 비슷하다. 우주여행과 인간의 모습을 닮은 휴머노이드에 대한 기대가 만만치 않다. 물론 누구에게나 동일한 지점이 있다. 그래, 군중은 동일하다. 더불어 2101년에서 2200년까지 머잖은 미래이지만, 내 육신이 세상에 남아있을 리는 만무하기에, 그러나 내가 꾹 참았다가 10년 뒤라도 나의 자손을 갖게 되면, 나의 자손은 그 세상에 남아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내 피를 이어받아 맹위를 떨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으려나. 다르지 않구나. 한편 인간이 개인으로 있으면 위험에 대처하는 자세가 좀 더 예민해진다고 한다. 다만 군중에 속한 인간은 모든 위험에, 또한 모든 범죄에 무감각해지고 우매하게 행동한다. 특히나 현대의 조직사회를 보면 똑똑한 개인도 우매한 인간 군중의 흐름을 쫒는다. 때로는 그것이 위기에 출중한 개별 인간의 심리극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결국은 생존을 지향하기 위해서 상대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또한 나의 생존을 위해 연민의 감정마저도 끊어내도록 한다.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으랴, 그래서 나는 아직 22세기에 대한 아무 입장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를 미래를 예견하는 눈은 아티스틱한 상상에서 가장 첨예하고 가장 불편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학문은 차가운 지성인 양 표면의 비애감에 젖어들지만, 예술은 감정선 바닥까지 올곧이 드러낸 비애를 그냥 표출하지 않던가. ● 끝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손영복 작가 비평글, 변형된 캔버스展 Wicked Canvas(2012.6.15~6.23)

손영복 작가 비평글, 변형된 캔버스展 Wicked Canvas(2012.6.15~6.23)

‘손’의 맛



글 ● 최윤정(미학/미술비평)



<그의 오마주> 손가락으로 부벼 바르는 흙덩어리는 유화의 터치감을 상기하고, 회화에 대한 호감은 지속적으로 덩어리에 색채를 입히는 시도로 이어진다. 명화의 대표적인 인물 도상들이 평면 밖으로 나와 그의 초기 입체회화가 구축된다. <소재발견> 공감이 용이한 일상적 단상들(단물/쓴물, 술마신 다음날 Moday Morning 등)을 주제로 자기 주변에 익숙하게 굴러다니는 사물들을 관찰·채집하고 형태 그대로 캐스팅한 조형물을 만들어 색으로 표면을 입힌다. <작업실 그리고 소재발견의 진화> 살아가는 접근방식 및 창작을 위한 환경적 요소의 변화는 그에게 덩어리와 색채, 평면에 대한 입장을 사회적 문맥과 잇게 하는 중요한 시점을 제공한다. 작가는 시장에 들어왔다. 시장에 들어와 스튜디오를 마련한 후 그는 적잖은 심리적 충돌을 겪고, 이에 따른 창작적 방법의 변화들을 무수히 겪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대부분의 자폐적인 작업실 환경은 집중과 예술가로서의 신비함 등을 그득 선사하기도 하지만, 작업에 대한 즉각적 평가나 생산적 참견을 통해서 단계적 사유를 꾀할 수 없는 불안함이 있다. 당연 사람들과 맞부딪히고 낯선 이들의 방문을 꺼리지 않아야 하는, 또한 ‘~으로 침투’해 간 조건으로 인해 ‘주민화되기’가 정착의 성공 요소로 판가름되는 그곳에서,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회적 활동 및 늘 지녀왔던 취향을 다시금 재발견하고 이를 창작의 모티브로서 심화시켜볼 수 있는 계기를 쥐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환점을 마련해준 요건의 ‘제 1’은 꼬깃하게 접혀있던 인간 심리 일부를 편편이 펼쳐내게끔 역할하는, 즉 삶을 구체화시키는 어떤 장場, ‘장소’라고 나는 보고 있다. 거기서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주변 상인이나 주민들과의 공감능력도 키워왔을 것이며,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문화적 스펙트럼을 자기 취향으로서 솔직히 발언하고 발산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데 있어 그만큼 애잔하고 순진한 땅도 없었을 것이다 - 혹자에게는 슬픔과 절망을 그리고 과거에 대한 영화와 미련 때문에 결국은 떠날 수 없는 땅이라면, 다른 혹자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으로 혁신을 모색할 수 있는 상상적 봉화대가 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손’의 맛> 그리하여 기능을 상실해가는 시장이 간직한 멜랑꼴리한 생애사와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시장에 놓인 오랜 건축물들은 그에게 사회적 시선을 결합한 상상적 사유의 초석이 되었다. 문 닫힌 상점 간판은 건물의 지난 기능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치적 명품의 도상들이나 현대의 공산품들은 건물의 형태가 되어 지금 우리를 패러디한다. 낡은 상가 건물이 층층이 쌓여진 형태의 고층 빌딩은 현대의 세련된 주상복합아파트에 대한 일종의 풍자이기도 하다. 이번 ‘Wicked canvas’展은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더욱 심화된 작가의 조형어법을 구체화시킨다. 우선 오랜 건축물에 대한 탐구는 실제 매체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진다. 그가 가장 최근 선택한 매체인 시멘트는 물로서 잘 게이고 응집되면서도 올록볼록 특유의 거친 결을 만들어낸다. 이전 작업에 보이던 건물을 수식하던 간판이며, 도상들은 모두 소거되었다. 다만 건물의 단순한 형태와 각 단층 건물의 양식에서 느껴지는 시대성이 있고, 겹겹의 층으로 둔탁하게 쌓아올린 형태에서 기존의 비판적인 시각적 수식어구들이 모두 개념과 사유의 어구들로 화하여 머릿 속을 맴돈다.

한결같이 고수되었던 회화에 대한 오마주는 몇 가지 기법 도입 후 더욱 극을 발하면서 일편 스토리를 갖게 된다. 입체의 일부는 평면의 소실점을 담아내며, 그에 따라 형태가 변형되는데 이는 실재하고 기능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물품과는 전연 다르다. 그것은 ‘입체도상’으로 읽어야 한다. 각이 진 모든 모서리를 검은 선으로 드로잉한다. 이는 빛의 반사와 그림자를 통해 자연히 나누어지는 입체감을 주는, 오히려 모서리를 따라, 빛의 면을 분절하여 색의 구분을 명확히 함으로써 평면적 효과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비단 모서리 뿐 아니라 빛이 스미지 않아 얼룩진 입체감을 주는 작은 홈이나 틈 하나하나에도 검은 테두리를 입혔기에, 입체적 물성으로 이룩한 모든 것은 ‘입체’ 혹은 ‘입체설치’이기보다, ‘평면’ 개념에 더욱 몰입한 형태가 되었다. 이것이 캔버스의 바깥으로 혹은 구겨진 캔버스에 놓인 ‘변형된’ 것으로 형상화되는 그의 조형어법이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 사귀게 된 지인으로부터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된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을 가지고서, 마찬가지로 그는 시선의 일정한 방향(소실점)을 담아 새로운 조형으로 만들어내었다. ‘커피 한잔’ 조형과 함께 놓여 작가의 일상을 담백하게 설명하는 듯하다. “늘어지게 실컷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시면 폐가 부풀대로 부푼다. 그러면 이어 깊이 숨을 들이쉬고 싶어지고 가슴 근처의 피부와 근육에 유쾌한 운동 감각이 일어난다. 자아, 이젠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그러한 때..”(책 본문 중)
 상상하기에 입체와 평면, 색채에 집중하여 내적인 자기 취향과 외적인 역할-거주, 사회적 역할, 예술가적 태도 등-을 교차시키고 이를 심화시키는 작업이 지속될 것 같다. 왠지 때로는 극단적으로 모든 사물을 평면화시키는 대형작업에 도전해보지 않겠나 제안해보는 상상도 하는 것이, 직업인지라 작가의 작업적 변화를 지켜보고 연구하는 것만큼 만족스런 일도 없다. 특히나 애초의 시작이 회화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던 젊은 청년이 지닌 ‘순수한 가슴’에는, 자신과 자기 주변/처한 장소와 사회/예술가적 태도 사이에서 교집합을 발견해내고 생산적 프로세스를 구축해가면서, 일상적 가치에 대한 예술적 반성과 세련된 패러디를 키우는 진보가 싹트고 있다. 내게도 계기가 되었으니, 이제 그에게 그 정체를 물을 자격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