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전자고속도로 |
글 ● 최윤정(대구미술관 큐레이터)
1. 들어가며
한국의 미디어아트의 역사 속에서 그 시발점이 되었던 초기 비디오 아트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장을 한층 광범위하게 넓히는 계기가 된다. 이에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1932-2006)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 처음으로 비디오작업을 했던 박현기(1942-2000), 이후 과거와 현대가 지닌 한국사의 단면들을 특유의 설치작업으로 구현하였던 육태진(1961-2008)과 육근병(1957)의 작품은 한국의 초기 미디어아트의 수용과 향방에 대한 개념적인 시선을 마련할 수 있게 한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에 유목적 사유와 실천으로서 인류학적인 시선을 뚜렷이 구현하고 그저 기술 매체에 불과한 텔레비전을 문화사회사적인 접근을 통해 소통기구로서의 오브제로 자리하게 하였다. 박현기는 텔레비전이 비추는 오브제 가상을 도리어 동양적 세계관과 정신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개입시켰고, 육태진은 반복되는 행위를 담은 영상으로 현대인의 삶의 단편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육근병은 세계를 담아내는, 우리의 육안을 상징하는 외눈박이 작업을 통해 응시를 통한 세상과의 연결을 상징하여 왔다.
이들이 담아내는 초기 작업 속에서는 미디어의 사용이 ‘메신저’로서 기능함과 더불어 심층적인 작가적 사유의 차별적인 부분을 모색할 수 있게 하였다. 초기 미디어 그것은 오히려 세상과 인간의 인식을 연결시키는, 가상과 실재가, 그리고 보여지는 것과 진리가 맞닿는 가교로서 설정되고 있다.
실제 백남준의 작업이 작품 자체로 한국에 소개된 이후, 비디오 아트의 개념이 정립되기도 전에 한국에는 그저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수용에 급급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현상으로서 언급될 때가 있다. 마치 50~60년대 서구의 미니멀리즘에 대한 갑작스런 수용으로 단순히 형식적인 요소만을 반영했을 뿐이라는 비판을 떠올리게 하는 단면이다. 과연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 형식이 혹은 매체가 효과적이었는지를 질문하기 전에, 그로부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미니멀리즘 역사와 과정을 본다면 그것이 단순한 수용에 그쳤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 형식은 한국적 풍토를 기반으로 한 내용적인 요소들_문인적, 철학적 사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제문제 등 이에 적절한 구현 방식으로 유효할 수 있음을 도리어 증명해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디오아트 역시 기계매체에 대한 수용을 넘어 그 시작에서 1세대들 각각이 자신의 차별적인 텍스트성 영역으로 논의를 발전시켜왔기에 도리어 그것이 한국의 미디어아트 역사를 이끄는 중요한 조짐이 되었다는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예술가들에게 당대의 과학기술은 오브제적 확장으로서 그들의 기발한 아이디어 생성과 상상적 지평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제이며, 기존에 대해 보여지는 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고, 또한 그 속에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해 의심스런 틈새를 만들어 놓았다. 백남준으로부터 처음 명명된 비디오아트는 “텔레비전의 폭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 하는 임무를 띠었다. 이는 그가 해프닝을 통해 현실의 헤게모니를 좌초시키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그래밍된 수동 개체인 텔레비전 그 뒤로 숨은 수많은 의도들과 그에 따라 은연중에 침투해오는 명령에 순응해나가면서 이를 다만 하나의 오락으로서만 관성적으로 수용하게끔 한 그 모든 것에 대해-스펙터클한 사회와 그 틈새에 대해 비판적 독해와 공격을 의도한 바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매체를 형식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탐구 및 개념적 차원으로 해당 오브제에 그리고 표현매체로서 그 효과에 더욱 주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2. 세계를 잇는 메신저로서의 샤먼
'샤먼의 궁극적인 목표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매개하는데 있다.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예술가들/학자들은 분명 세계인식에 대한 메신저로서 역할해 왔다. 고유한 정체성으로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연관을 발견하고 개념적인 사유에서 인지적 증폭을 통한 새로운 직관의 길을 열어주는 사람. 이들은 분명 세계를 통해 자기애와 자각을 꾀하고, 다시금 정신적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세계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세상에 처해짐이란 단순한 처함이 아니고 스스로가 선택한 처함이다. 더불어 자기 자각을 통해 행위의 필연성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주목하는 예술가는 어쩌면 이러한 샤먼적 의의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로서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자기 질문과 회의, 자신의 기억과 원형적인 사유를 통해 세상을 가로지르고 동시에 접합하는 행위자. '
샤먼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메신저로서, 우주와 인간의 소통을 매개하고, 우주와 인간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역할자로서 설정된다. 모든 샤먼은 상징적인 미디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인공적인 것이건 혹은 자연적인 것이건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미디어이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마술적 징후를 통해 작용하는 상징과 기호의 세계는 다시금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둔 미디어적 세계라 말할 수 있다. 다시금 그것은 오늘날 기술매체로 넘쳐나는 미디어적 현상이 고대 샤머니즘의 세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을 제공한다. 이승과 저승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실과 가상을 왕래하며 두 공간을 잇고,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밀접한 관련 속에 있다는 신비한 체험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샤먼의 역할이고, 샤먼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의식을 통해 인간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하기도 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예술적 지향과 의식의 도구 내지는 퍼포먼스이자 샤머니즘의 상징과 동일한 지점에 서있다.
백남준은 고대 한반도가 북방초원의 유목문화를 기반으로 한 기마민족이었음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아적 정체성과 철기시대 매개체로서의 문명적 진보가 그의 작품 심층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인류 샤머니즘의 기원을 동북아 내지는 시베리아에서 찾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창작 속에서는 꾸준히 황색DNA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들이 수반된다. 그의 오브제는 때로는 불교적이면서도 도교적이고, 샤머니즘적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기술적 매체와 서구 중심적 문화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태도를 형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또한 도리어 이를 이분화하지 않고 개척의 상징, 초원길의 모티브로서 ‘전자고속도로’를 제시하여 전 세계가 미디어에 의해 결합되고 소통되고 ‘달’에 의해 ‘전파되는’ 구상들을 실현해왔다. 여기서 중요한 매개인 ‘달’은 또한 단순한 매개로서 표출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생명주기, 일종의 리듬이자 위성으로서 지점을 잇고 연결하는, 세계를 하나의 근원으로 모아주는 태초의 것이 된다.
백남준이 사료 및 인류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샤먼적 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면, 육근병의 경우는 샤먼 자체의 구체적인 의식에 더욱 근접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에 인간의 눈 한 쪽을 담은 텔레비전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눈’은 백남준의 ‘달’과도 같다. 그는 인간의 눈에서 우주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주라는 것은 자연적 요소에서 진리적 사유 등 모든 것을 꿰뚫는 심미안과 다르지 않다. 그 속에서는 부정된 것이며 이질적인 형국, 대립되는 것 모두다 하나의 점과도 같은 것으로서 우주의 정신 안에서 모두가 합치될 수 있고 가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작가에게 무덤은 과거이자 죽음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육체에 지나지 않고, 우주를 응시하는 눈은 강하게 주제화된다. 샤먼의 탄생과정 중 ‘상징적인 죽음’의 절차가 있다. 그것은 세속의 모든 선을 끊고 온전히 접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초기과정이다. 이미 끝난 것-죽음, 과거의 역사로부터 지금의 현재와 우주와 스스로 자신이 무관하지 않음을, 또한 세계에 표명될 수 있는 지지대가 바로 과거에 있음을 육근병은 동양적 윤리관과 사유에 기대어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징적인 죽음은 다시금 샤먼으로서의 부활의 계기로 전환된다. 이 과거의 무덤은 다시금 그의 작품에서 터널의 형태로 전이되는데, 시간성이 더해진 터널로서 이 오브제는 역사의 순환과 더불어 불교적인 윤회사상 속에 놓인 인간의 역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환영적이고 마치 주술과도 같은 그의 비디오는 무속적이고 신비한 의식과 구체적인 삶속에 내재한 시간성이 결합하여 문화 ․ 역사적 시원을 떠올리게 한다. 깨어있는 눈, 세상에 대한 심미안에서 이어진 그의 작품은 신비함과 자연의 서사, 드라마틱하고 영적인 산물로서 원형상징적 요소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3. 세계를 비추는 거울
인간의 육욕이 고대 만다라의 형상과 결합된 박현기의 ‘만다라 시리즈’(1997)는 포르노비디오의 영상조각들과 시바의 여신이 동영상으로 혼재되어 있는 작품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형상 내지는 현대사회와 고대 만다라의 결합 안에서 지금 우리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평가적 가치를 들이대지 않은 동양적 사유에서 비롯된, 현재를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 작업이다. 그리고 ‘도시의 지하철 역에서’(1998)는 도시 속의 대표적인 장면, 밀집된 지하철 안에 사람들의 표정은 텍스트에 감추어져 있고, 텍스트를 구성하는 각각 글자는 지하철이 달리는 속도와 리듬에 맞춰 때로는 유영하듯이 혹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긴장감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육태진의 비디오아트는 현대인의 익명성, 그리고 소비사회와 대중사회 속에서 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대표적이고 무기력한 행위(보행)를 반복적으로 영상에 담았다. 그는 고가구를 활용하여 그 속에 현대인의 삶을 삽입시킨다. 고스트퍼니처(1995)에서 인물은 끝없이 걷거나 혹은 끝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그리고 작품의 주제에 상통하는 폐쇄적인 현실과 그에 따르는 정형성이 ‘서랍’이라는 네모진 박스 안에 인물의 움직임을 갑갑하게 가두어 놓는다. 고가구는 오랜 과거 혹은 이미 죽은지 오래된 오브제이다. 그 결합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인물의 반복된 보행장면은 그저 더욱 ‘환영’인 것으로 각인된다. 지극히 단순한 반복, 혼자 있음, 누군가의 혹은 나의 자화상, 익명성 등 이같은 내용은 고가구를 넘어 터널 구조의 공간설치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루할 정도의 반복성은 마치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응고되고 물질화된 이미지와 다를 바 없다.
4. 나가며
초기 비디오아트가 가능할 수 있었던 지점은 이견의 여지없이 기술매체의 수용과 사용에 있다. 그러나 초기 비디오아트에 대한 담론이 자생적으로 생산되지 못했던 환경에 대해서 비판하고 반성할 필요성은 충분하나, 도리어 예의 형성에 있어서 과연 ‘차별성 없는 전략’ 내지는 ‘기술을 위한 기술자체’로서만 과정이 소요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메신저로서의 경향을 2항와 3항으로 나누기는 하였으되, 네 작가의 작업 모두에서 보다 깊이 있게 접목해보고 싶은 부분은 무엇보다도 ‘메신저로서의 샤머니즘’에 대한 것이고 이는 초기 비디오아티스트 모두에게 해당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매개하고, 잇는 것이 예술의 본위라고 보았을 때, 특히나 비디오 아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형상과 개념까지도 제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환영이며, 환영은 우리 인식의 틈새에서 노니는 직관성에 맞닿아 있다. 그것은 세계를 제시하는 메신저로서, 혹은 실체를 폭로하는 인식의 전환적 계기로서 역할하며, 또한 실재에서 목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이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결과적으로 초기 비디오아트에는 그야말로 ‘한국 미디어아트’의 차별성을 주조할 수 있는 전위적 특징이 있다. 각 환영들이 담아내고 있는 서사를 고려한다면 초기 비디오 아트의 문맥을 유의미적으로 소급할 수 있는 지점들이 제각각 발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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