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장소성으로서의 ‘허(虛)’
최윤정 큐레이터, 대구미술관
I. 들어가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경향을 품어내는 곳
새로이 탄생하는 미술관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상징성을 특색있게 풀어낼 장소로서 대구미술관에는 어미홀이 있다. 이 장소에서 펼쳐질 기획의 방향과 미술관의 비젼들을 면밀히 고려하면서 명명된 어미홀은 22미터 높이에, 너비 15미터, 길이 42미터의 규모를 가지며, 3개 층에 이르는 미술관 각 공간 입구와, 전시장에서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모든 동선을 관람시야로 품고 있다. 이것은 각 전시들이 뿜어내는 기운들과 관람객의 숨을 고르게 엮어내는 무형의 역할을 하면서 더불어 어미홀에서 펼쳐지는 전시를 각 시야에서 색다르게 관찰할 수 있다는 미적인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리하여 연간 1회 작가와의 협업으로 펼쳐질 어미홀 전시는 어미홀의 장소적 특색과 그것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기조로 하여, 예술가의 창작적인 영감을 고양시키고 실험적으로 공간에 도전할 수 있게끔 하는 일종의 창작 인큐베이팅 기획으로 그 방향을 잡고 있다. 이러한 기획은 미술관의 랜드마크적인 특성을 보다 강화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대구미술관이 추구하는 비젼을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게끔 하여, 대구미술관의 질적인 역량을 프로모션하는 구체적인 안으로 역할할 것이다.
특화된 기획으로서 공간이 지향해야 할 색깔을 보다 분명히 한 뒤에, 품어내는 장소 내지는 도전과 생성, 모든 것의 흐름을 저장하고 그 흐름을 관리하는 협곡으로서 자연의 모체를 떠올리면서, 다목적홀은 '어미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로비와 기획공간 사이에서 어미홀은 미술관의 얼굴과 전시홀로서의 기능을 모두 담당해야 한다. 숨을 조절하는 산책의 공간이자, 계곡을 흐르는 물과 그 물의 역동성으로 발생하는 수포의 유동성처럼 우연적인 부딪힘이 관객과 작품 사이에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관객과 장소 사이에 일정하게 정해진 동선처리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며, 공기의 흐름이 살갗에 닿아 느껴지는 일종의 감각적 조우로서 예술 감상을 돕는 또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
어미홀 개관특별전1의 첫 손님은 작가 이강소이다. 이강소는 한국 개념미술사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대구현대미술제'가 태동할 수 있었던 주축으로서 평가받는다. 그는 현재 경기도 안성 및 통영 등지에 작업실을 마련하여 나날이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미 원로작가의 축에 있으면서도 동어반복식의 작업형태를 보이지 않고, 창작을 위한 연구 및 관찰에 있어 젊은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가 이강소, 그의 이번 신작은 '허(虛)-11-I-1' 이다.
II. 2011년 이강소의 첫 번째 설치작, '허(虛)-11-I-1'
1. Process
애초의 구상은 그가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프로세스 작업과 연결되는 문맥을 찾는 것이었다. 어미홀의 규모 및 그것이 뿜어내는 강한 기운은 그 어느 작가라도 첫 시도라면 어려움을 토할 수 밖에 없다. 몇 가지 시도가 있었다. 지금의 설치 이전에 흙을 재료로 하여 작업의 초안이 짜여졌다. 그리고 이후에 이강소 작가가 몇 년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목재를 이용한 조각설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중간에 선회하여 진행된 것이 바로 지금의 '허(虛)-11-I-1' 이었다. 해서 외부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신작을 설치하게 되었고, 또한 그 내용이 작가 이강소가 선호해왔던 장소/도시의 문맥, 그리고 일상을 관찰하는 그만의 세계관을 통합적으로 선보일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더불어 대구미술관의 장소적 문맥과도 자연히 연결되면서, 또한 미술관의 철학적인 지평과도 무관하지 않은 작업임이 분명하였다.
"예술이 싱그러운 원기에서 나오는 경우, 확실히 특성적인 것이 형성될 때에는 설사 감춰진 채라 하더라도 우미(優美)가 현재화되니, 영혼은 이미 양쪽에 걸쳐 앞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겨나는 작품들은 최초의 미완성이라 해도 이미 필연적인, 영원한 작품인 것입니다"1
어미홀 첫번째 전시였기 때문에, 기존 사례가 없었던 바는 공간해석에 대한 어려움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3차례의 변경과정을 거쳐 지금의 설치를 완료할 수 있었는데, 1차는 작가가 작업실에서 조각의 각 파트를 제작하고 그 규모와 형태를 자신이 직접 스케치한 도면을 토대로 하여 어미홀에서 조립 설치하는 것이었다. 2차는 미술관이 각 작품의 조립파트와 위치를 재조정하는 시도였다. 물성도 상당히 강하고 규모도 큰 작업이었지만, 어미홀의 특성으로 인해 작품이 좀 더 효과적으로 부각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했다. 이에 조립된 조각작품의 각 파트를 다시금 쪼개도 보고 틀어도 보면서 어미홀 바닥과 작품의 면면이 조화되는 방식을 구현하였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했던 스토리적인 요소가 다소 저해되었다는 의견에 따라 3차 재조정에 들어갔고 그제야 지금의 설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는 작품에 대한 소감과 해석을 편향화시킬 수 있다는 고민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작품의 명제를 '무제(untitled)'로 채택하거나 명제 자체에 그리 천착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시기에서부터 작품에 '허'를 새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창작의 전 과정에서 얻어지는 우연적인 관계항과 그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정립하고자 하는 세계관이 작품창작의 새로운 모티브로서 강력히 작용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 보인다. 따라서 '허' 자체는 이강소가 창작의 계기뿐만 아니라, 그의 작가 인생을 펼쳐 보이는 태도 전반을 담아내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 틈을 메우고 통(通)을 여는
지난 작업에서부터 일관되게 보여지는 것은 작업의 현장성이 그대로 작품에 노출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그의 작업에서 '프로세스'적인 요소가 강하게 살아있기 때문이었는데, 한편 이번 작업에서는 그것이 공간과의 조화를 꾀한 설치 작업임과 특히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와 그 사이를 채움으로써 '참여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완성한다'는 여지를 또 하나의 '프로세스'로 제안하고 있다. 이는 이강소의 작업적 특징이 또한 항시 주객간의 분리가 아닌 조화를 꿈꾸어왔고 이로부터 자기 세계에 걸 맞는 창작의 방향을 모색해왔기 때문이다.
"제가 생각하는 '허(虛)'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는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화하는 과정들, 즉 거기에서는 있을 수 있는 가/능/성 그런 의미를 담습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저는 거침없이 시험과 모험을 해봅니다. 그런데서 예상치 못한 것들이 실현될 때, 비로소 저는 살아있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이강소, 2011.4.3 인터뷰 내용 발췌
작가 이강소가 ‘허’라고 표현한 의미의 본래적 원형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철학적 공간, ‘태허’2에 가깝다. 장자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이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서 비롯되며, 기가 흩어진 상태를 '허'라 하고 근원적인 허의 상태를 '태허'라 일컬었다.3 그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이자 모체로서, 마치 우주의 시원이면서 모든 가능성을 숨긴 것들이 혼재하는 공간인, 서구 고대 신화 속 카오스와도 상통한다. 철학적 공간 '태허'로서 '허'는 또한 내재인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기가 발하여 생동하는 모든 운동과 변화들은 '허'의 지점에서 가능하다. 다른 말로 '허'는 모든 사물이 생성하고 소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끌어안은 장이 된다. 자연의 운행원리를 따르고 있는 모든 생명이나 사물들이, 이미 그들이 지닌 필연의 질서에 준해서, 일종의 ‘소우주’로 여겨질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모두 '허'이지 않겠는가. '씨앗이 싹이 되고, 싹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 이유는 자기 부정이나 초극이라는 단계적 해석이 아니라, 그 변화 자체를 가능케 하는 '애초의 힘_가능성'이 자기 안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힘은 단순히 변화 과정에서 비롯한 운동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체계도 아니고, 소소한 것조차 가치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위계적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모든 것들에 마치 빛의 '파장'이나 소리의 '공명'처럼 골고루 배어있으면서,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긍정적인 자연의 힘인 것이다. 그로부터 기의 운동이 시작되고, 서로 상이한 기는 어느 시공간 안에서 두루 섞이면서 서로의 틈을 메운다.
"이 세상에는 확실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명백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에 대해서 인간의 인식이 실재라고 믿는 것은 결국 환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강소, 2011.3.
자유자재로 흐르는 유동성과 변화를 추구하면서, 멈추고 고여 있는 자신을 경계하는 것. 그것은 작가 이강소가 일관되게 견지하고자 하였던 태도이다. 이것이 '허'라는 철학적 장소성과 개념적으로 만났을 때, 그의 작품과 작품이 놓인 장소는 서로 간 긴밀하게 각자의 기를 소통하고 조화를 거두어내어야 하는 소명을 띠게 된다. 이에 따라 일반이 감지할 수 있는 틈들이 보다 '허'로서 가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가지게 되며, 그 전제란 공간과의 무갈등에서 비롯되기에 이 작업에서 우리가 관조할 수 있는 바는 일견 집착이나 구애, 경직, 차별 따위의 내용과는 분명 판이하다.
집착을 전제로 하는 내용들과 달리, 그가 재료를 다루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에서도 그의 인식적 태도 및 특징을 또한 간파할 수 있다. 크게 보자면 그의 이번 설치작품은 특정한 장소 안에서 일상의 가치와 계기들을 조명하는 것이다. 그는 재료의 쓰임새를 정하기 이전, 길게 함께 두고 호흡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도 인정하는 그의 습성이기도 한데, 그의 첫 개인전 <소멸>이라는 제목의 선술집 프로젝트에 쓰였던 오브제나, 허-11-I-1의 목재나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도구로서 취급되거나 이미 잊혀진 혹은 버려진 것들이 그와 호흡하는 동안, 작가 이강소의 색깔을 부여해주는 매개체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의 직관은, 자신의 문맥과 재료의 쓰임새를 관련지어서 재료들이 생명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거나, 그들 고유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였던 예민한 관찰로부터 발한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작업의 의미나 의의는 이미 창작의 전 단계에서 맺어지는 모든 관련에 준거하여 생성된다. 이 경우 특히 그것이 예술작품이라는 매개체처럼 ‘감응적인 상태’에 대한 것이라면 ‘직관'이 유효 적절히 그것의 진의 내지는 주제를 파악하는데 행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4
직관이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이를 질서 짓고 교정하는 이성적 사유에서 한층 고차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적인 깨달음이다. ‘태허’와 같은 세계 본질 내지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모든 현상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유일한 인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가의 직관’이란 말 자체는 상당히 타당하다. 작가 이강소의 직관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나 늘 있어왔던 가치 내지는 일상 속에서 반짝이며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외치는, 소소한 것들이 지닌 가치들을 포착하면서 그만의 세계관을 의식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3. 시간성, 공간성
"늙어서 종말을 고하는 세계 위에, 창백한 하늘은 아마도 구름떼와 함께 떠나 버리려는 듯 하다. 석양의 해진 자줏빛 누더기들이 햇살과 물에 잠긴 지평선 근처의 잠자는 강 속에서 빛을 잃는다. 수목들은 권태로워하고, (길위의 먼지보다는 시간의 먼지로) 허옇게 바랜 잎새들 아래로/과거의 사물들을 보여주는 자의 천막집들이 떠오른다(...)"5“망(忘)은 단순히 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일체의 사념 내지는 판단의식과 같은 주체의 인식작용을 거부하고 나아가 자기존재까지도 자각하지 않기에 이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상의 대소나 시간상의 장단 같은 분별 의식까지도 초월하는 경지이다. 이는 단순히 자기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실상을 보는 데 필요한 일종의 방법, 무아와 무심의 경지에 드는 과정에 필요한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6
'허(虛)-11-I-1' 은 약 10여개 파트로 이루어져 있고, 각 형상은 "각기 다른 두개의 시간"7에 대한 서사를 띤다. 하나는 역사적인 장소 및 그 기운이 서려있을 옛 지주의 흔적으로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긴 세월동안 함께 했을 먼지와 풍파가 마치 화석처럼 옛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퇴적하면서 결을 만들어 내었다. 과거 누군가의 손으로 깎이고 소중히 다듬어졌을 이 오브제들이 간직한, 시간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들은 과거에서 온 변사(辯士)들이다.
과거의 시간에 대해서 작가 이강소는 고도 '경주'에서 주요 모티브를 찾았다. 역사로서 분황사의 지주 흔적이 그랬고, 또한 괘능의 상석으로부터 그는 과거의 것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비례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그가 이번 작업에서 의도한 서사의 시작이었다.
마치 괘능의 상석 비례에 찬탄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지금의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구조물들에서 단순한 형태적 본질을 구현하고, 미래의 시간성을 상징하고자 일부 면을 숯처럼 산화시켜 인위적인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것은 단순히 형상에 시간성을 덧붙이기 위한 장치로서만 고안되지는 않는다. '태움'은 '태우는 행위'로서 목재의 소멸을 의도하며, 목재의 소멸은 새로운 형질인 '숯'을 탄생시킨다. 형질의 변환이 단순한 에너지 전이가 아니라, 이전 형질의 소멸(죽음)을 전제로 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형질이 또한 발할 수 있게끔 하는 것, 이것은 계속해서 그 다음의 형질을 낳고 또 다음의 형질을 낳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순환적이고 원초적인 관계성을 떠오르게 한다.
"불은 공기의 죽음을 살고, 공기는 불의 죽음을 산다. 그리고 물은 흙의 죽음을 살고, 흙은 물의 죽음을 산다"8
이것이 그가 상정한 미래 시간성 속에서 다뤄지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구조물 형태에 부여한, 미래가 지닌 서사이다. 다시금 '태우는 행위'가 인위적인 시간성을 만들어내려는 이유 이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유기적인 관계성에 대한 사연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행위는 서사에 대한 '문체'로서 여겨져야 한다. 이로써 '각기 다른 두 시간'은 과거의 서사와 현재의 것에 새겨진 미래에 대한 서사를 담아낸다.
물론 이 작업은 여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지금 현재와의 관련에 대한 소통여부가 본 설치 작업에서 제안된 또 하나의 프로세스라 앞서 언급한 바 있다. '현재'의 시간성은 아직 여백의 상태로 남아있다. 그것은 과거의 속삭임과 미래의 자각들이 이어지고 관련되는, 문맥을 형성하는 가능태로서 자리한다.
그것은 보는 자의 '지금'이다.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서 보다는 공간과의 관련 속에 서 있다. 작품이 위치하는 영역, 그것이 놓인 ‘여기’에서 '지금'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성이 띠는 서사적인 요소가 작품적 의미를 구성한다면, 공간성은 '시간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허(虛)-11-I-1' 각 파트들의 통시적인 시간성을 잇는 결구가 상징적인 모뉴멘트로서 설치작의 시작과 끝에 위치하고 이를 기준으로 선적인 비례와 횡단 구성으로 과거와 미래의 형상들이 연결된다.
꽂힌 듯 세워진 형상, 바닥의 물성을 강화하듯 단단히 밀착해있는 판구조, 솟아나고 엎드린 결구들의 모습은 생경하게도 인간의 풍경과 닮아 있다. 더불어 바닥면과 밀착하여 오히려 이에 스며드는 것 같은 혹은 바닥이 형상으로 위로 솟은 것 같은, 지주 흔적으로서 무거운 세 개의 돌은 단순한 과거의 오브제라기보다 목재의 물성을 띠는 다른 작품들을 관찰하며 공간을 유영하는 유동성의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이것은 다른 작품들이 선적이고 비례적인 구성을 갖는데 반해서 흔들린 삼각 구도로서 적절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설치작은 우연히도 전시공간인 어미홀의 바닥면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작품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 근거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3층에서 전경을 보자면, 동일한 물성과 바닥면과의 관계로 인해 작품은 입체가 아니라 평면적인 회화로 보여진다. 바닥면을 캔버스라고 유추한다면, 각 작품은 마치 이강소의 회화에서 접할 수 있었던 단순화된 기호인, 일필휘지의 형상들로 읽히는 것이다. 3층에서부터 2층으로, 다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수록 그것은 다시금 애초의 입체적 형상으로 돌아온다. 이는 미술관의 외부로부터 시간적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색빛과 명암을 선사하는 자연의 빛이, 각 결구들의 특징을 강화하고, 사이와 틈새를 노닐며 정연히 깎아 다듬은 각 작품의 면들과 나무의 결들을 감응적으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금 3층으로 돌아가서 각 파트들의 시간성을 잇는 결구 역할을 하였던 모뉴멘트 사이 정 중앙이 비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결구 사이 빛으로 연결하는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의도와 더불어 빛으로 연결되는 길 자체가 어미홀과 작품 사이에서 발하는 ‘기의 소통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람자는 마치 공간을 유영하는 기의 흐름처럼 작품 사이사이의 틈을 메워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 길을 마주했을 때, 하나의 소우주로서 관람자는 '지금, 현재'의 의미를 채우게 된다. 작품의 서사 속에서 우리의 현재가 놓이는 순간이다.
"무심(無心)은 물아일체화된 세계, 있는 그대로의 사물현상 속에 주체가 용해되어 주체와 객체를 둘로 갈라낼 수 없는 상태로 표현된다. 대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대상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경지, 사물의 원래 모습의 자족함을 긍정하여 내가 어느새 물의 본모습과 하나가 되는 경지, 사물 대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내면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스스로가 그것의 생명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경지로 언술화 되는 것이다."9
그 순간에 대한 미적인 감응은 작품과 관람자, 공간과 관람자 사이의 호흡에서 비롯되는 바다. 그 호흡은 '허'에 대한 세계관이 기초가 되어, 어쩌면 작가를 포함한 그 누구도 모르던 사이, 공간과 작품 간에 기가 소통하고 발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자연히 필연적으로 얻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상대성조차도 상대적이므로”10 , 고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각기 내재된 가능성들이 이 같은 '관련' 속에서라면, 굳이 이를 두고 절대적인 계기를 포함하는 필연성을 언급하지 않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III. 나오며
이강소의 작품을 그간 '프로세스적'이라고 말했을 때는, 그것이 시각성 안에서 원초적으로 드러내는 요소에 준거하였다. 그러나 이번 '허(虛)-11-I-1'에서 말하는 프로세스는 관람자의 참여적 특질로서 작품 관조와 작품의 완성에 대한 관계에 대해 철학적 의미를 강화한 결과이다.
더불어 어미홀과의 관계에서 장소성 내지는 '공간해석적인' 요소를 유심히 고려하면서 진행되어야 했던 3차에 걸친 설치 과정들은, 창작과정의 일부로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에 부가적으로 진행되는 도큐멘트전을 통해서 설치 전 과정들을 담아 선보이고자 한다.
'허'의 의미는 어미홀의 특성과도 꽤 상통한다. 모든 것을 생성하고 흐름을 관리하며 펼쳐내는 장으로서 어미홀은 이미 '태허'의 세계관에 가장 걸 맞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에도 또 다음 그 이후에도 ‘소멸과 생성’의 제문제가 ‘새로운 형질로서 또 다른 가능성’을 선사한다는 전제를 안고 어미홀은 정말 낯선 것, 혹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온 시각들에 대해서, 날 것으로서의 순수한 숨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할 것이다.
철학적 장소성인 ‘허’를 마주하며, 또렷한 ‘정신의 눈’으로 그 행방을 좇고자 많은 이들이, 그들이 연구자이건 예술가이건, 애쓸 것이다. 작가 이강소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연구 및 작업 태도에서 이어지는 작품의 경향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펼쳐진다. 그것은 극명히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감각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계, 미세한 물리적 세계의 측면까지도 모두 그의 사정권 안에 든다. 그의 ‘허’는 채울 수 있다는 것 뿐 아니라, 비울 수 있다는 것까지 이미 ‘가능성’의 범위로 전제하고 있다. 역동성만이 에너지흐름인 것이 아니고 정적인 고요조차도 에너지 흐름의 한 형태이므로, 만일 기존 사유체계의 대립자들이 그의 ‘관련’ 속에 위치한다면, 무엇이 더 옳고 그르고, 무엇이 더 우위이고 열등한지를 평가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근거나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허(虛)-11-I-1'이 10여개로 이뤄진 하나의 설치작품으로, 각 작품 간 그리고 작품과 관람자 간 겪게 되는 ‘조우’에 대한 문맥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1 셸링,『조형미술과 자연의 관계』, 심철민 역, 책세상, 2002, 62
3 장자, 「지북유」'태허즉기(太虛卽氣)'를 수용하면서, 서경덕은 '태허'가 기가 작용하기 이전 본질이고 기의 체(體)에 대한 선천이라 설명하였다. 더불어 기가 모이고 흩어짐으로써 일어나는 만물의 생성은 기의 용(用)이라 한다. "태허는 허하면서 허하지 않다. 허는 곧 기이다. 허는 끝이 없고 바깥이 없다. 이미 허라고 말하면 이것을 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허하고 정한 것은 기의 체요,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기의 용(用)이다"
4 천상병,「크레이지 베가본드」2절 발췌, 43쪽. 시적 표현을 들어, 소소한 일상의 흔적을 ‘직관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한 방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구로써 인용한 것이다. 1절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 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
5 '미래의 현상(Le phénomène futur)' 말라르메,『목신의 오후』, 김화영 역, 민음사, 2004, 67쪽
6 신은경,『풍류-동아시아 미학의 근원』,도서출판 보고사, 2006, 414쪽
7 김용대는 이강소의 작품에 대해 "작업을 하는 시간"과 "내용이 가진 시간"을 구분하면서 "각기 다른 두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미묘함에서 작품적 의의를 언급하고 있다. 본 글에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내용이 가진 시간성의 관점으로 이 문구를 차용하였음을 밝힌다. 김용대, 「각기 다른 두 개의 시간」,2006
8 거스리,『희랍철학,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박종현 역, 서광사, 2000, 67쪽 이 문맥은 헤라클레이토스가 피타고라스 학파 등 당대 연구자들이 자연을 영속과 불변성, 조화적 시각으로 설명했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 자연의 법칙 자체가 '투쟁'을 본질로 한 '균형'이라는 부분에서 언급된 것이다. 이를 통해 자연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인 한, 또한 이 문구는 각 상관항 사이 좋고 나쁨에 대한 평가적인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없다는 하나의 근거로서 차용될 수 있다.
9 신은경,『풍류-동아시아 미학의 근원』, 도서출판 보고사, 2006, 413쪽
10 베르나르 베르베르,『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이세욱 역, 열린책들, 2009, 260쪽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따라서 상대성조차도 상대적이다. 따라서 상대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 어떤 것이 상대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따라서...절대적인 것은 존재 한다"
Intention : 'Emptiness(虛)' as a Philosophical Placeness
Choi Yoon Jung, Curator of Daegu Art Museum
I. Intro
A Place embracing familiar and unfamiliar trends
There is a characteristic place to actualize the value and symbolic significance of a new born museum. We named this place, considering the direction of projects to be fulfilled and the Museum's vision, Umi Hall of which scale is 18m in height, 15m in width and 42m in length. From the hall, every entrance of the exhibition rooms of the three-story museum building and the traffic line connecting them come into the spectator's view. It plays an invisible role that harmonizes the energy emitted by the exhibition room and the vigor of spectators. In addition, it gives spectators an aesthetic pleasure to appreciate the exhibitions distinctively from various viewpoints.
Thus, on the basis of its characteristic structure and the role it ought to play, we plan to make the annual Umi Hall exhibition, in cooperation with artists, a sort of creation-incubator which will enable artists to raise their creative inspiration and experiment their challenges in this space. We expect this project to reinforce the Museum's character as a landmark and to make the vision of Daegu Art Museum be shared within and without Korea, thus playing a role to promote the qualitative power of Daegu Art Museum.
This multi-purpose hall was given the name, 'Umi Hall', which, having a distinctive color as a space for specialized project, reminds us of Mother Nature, a valley, holding and managing the flow of everything, including challenge and creation.
The Umi Hall has a dual role as lobby and exhibition space, thus it is important to demonstrate a balanced interplay between these two roles. The space is not only a place where spectators pace their breath in tranquility, but also a place where a fortuitous clash happens between the spectators and the works as bubbles are created from the flow and dynamism of valley waters. It does not mean to fix a uniform traffic line of spectators, but to help their appreciation of work of art as a sort of sensible encounter felt on their skin through the flow of air.
We invite the artist Lee Kang So as the first guest for the special opening exhibition in Umi Hall. Lee is a central figure in the history of conceptual art in Korea, having played a pivotal role in establishing 'Daegu Contemporary Art Exhibition'. He continues to work on new art forms in his studios situated in Anseong, Gyeonggi-do and Tongyeong, Gyeongsangnam-do. Though a veteran artist, Lee has never insisted on the repetition of his own style, but kept observing and investigating in order to invent new style, much like a young man with vigor. The title of his new work is 'Emptiness(虛)-11-I-1'
II. Year 2011, Lee Kang So's First Installation 'Emptiness(虛)-11-I-1'
1. Process
Lee's initial conception was to find a context that was in connection with the process work he had shown in Paris Biennale in 1975. However, the overwhelming scale and atmosphere of Umi Hall imposed some challenges to him, as it would to anyone. There were some trials and errors: before the current installation, he had conceived a draft of work using soil as his material. It soon came to our knowledge that he had been working on his carved-wood installation, leading us to change the initial plan. This work has not yet been opened to the public, and its theme, we believe, shows the context of place/city the artist has preferred and his own world view that values the quotidian. This very process resulted in the installation, 'Emptiness(虛)-11-I-1'.
"In the production of the distinctly characteristic, if it proceed from a fresh original energy, grace is already present, even though hidden, and in both the advent of the soul already determined. Works produced in this manner, even in their rudimentary imperfection, are necessary and eternal."1
For there was no previous instance of exhibition in Umi Hall, the first exhibition proved the difficulty of how the space were to be interpreted. This installation process has undergone three rounds of modification. The first round was to make each part of this installation in his studio and then to assemble these parts in Umi Hall on the basis of Lee's sketch of the size and form of the installation. The second round of change was to rearrange the assembling parts of each work and their positions. Though the work had strong material character and was huge in scale, a better way to highlight this work effectively through the character of Umi Hall had to be conceived. Disassembling and shifting around each part of the already assembled installation, a way to harmonize the floor of Umi Hall and every aspect of this work was realized. However, in accordance with the view that the narrative element that the artist intended was compromised, a third and final adjustment had to be made, thus finalizing the installation.
Lee has titled his work as "untitled' or cared little about the title itself, because he was concerned that feelings and interpretations of his work would be biased. However since sometime he began to title his work as 'emptiness(虛)', showing a strong creative motivational force of incidental relational terms obtained from the whole process of creation and his world view about which he has been mulling over and trying to establish. Therefore 'emptiness(虛)' itself is an important keyword holding not only Lee's occasion of creation but also all attitudes through which he shows his life.
2. Filling the Gap and Opening Communication
One consistently notices from his last works that they reveal the process of creation in virtue of Lee having left the element of 'process' in them. In this work, the fact that it is an installation concerned with its harmonization with space and that it invites its spectators into the work to fill the gap between them provides another element of process, that 'the meaning of work is completed through the participation.'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he has been dreaming of a harmony between subject and object and searching for a method of creation that is proper to his world.
"'Emptiness(虛)' includes, I think, the process of creation, extinction and change in the constantly changing and flowing world, that is, the meaning of possibility could be there. [...] When I think it is possible to actualize my suggestion, I test and venture into it without hesitation. I get a real feeling that I am alive when something unexpected is actualized there." Lee Kang So, 2011.4.3 excerpt from Interview
When Lee uses the word 'emptiness(虛)', its original meaning is close to 'Great Void'2, a great philosophical space containing the process of creation and extinction of everything. Chuang-tzu said that the creation and extinction of everything is caused by the gathering and scattering of energy, and he called 'void' the state in which energy is scattered and 'Great Void' the original state of void.3 'Great Void' as the origin and the mother of everything in the universe is also compared to 'Chaos' in the ancient myth of the Western world, the origin of universe and a space where things hiding all potential are mingling.
'Emptiness(虛)' as a philosophical space of 'Great Void' also means immanence. The point of 'emptiness(虛)' makes possible every movement and change caused by the emerging of energy and its vibrancy. In other words, 'void' is a field embracing the possibility of creation and extinction of everything. If we suppose that every life and thing following the law of nature, according to the order of necessity they have, could be considered as a sort of 'microcosm', then aren't they all but 'void'? The reason that 'a seed becomes a bud, a bud a tree, and a tree bears fruits' is not a phase-by-phase interpretation like self-denial or overcoming, but that they have the 'original power-potential' within themselves which makes the change possible.
This power does not simply refer to a motility occurring in the process of change. In other words, it is not a system of cause and effect and it does not permit a hierarchical interpretation because it values any triviality. It is a positive power of nature that evenly saturates everything as 'wave' of light and 'resonance' of sound are, while bringing all into harmony. Movement of energy starts from it and opposite energies mingle with each other, filling up the gap of the other somewhere in space and time.
"I believe there is nothing certain and absolute in the world.[...]In the end, our epistemic belief that the evident phenomenon is real is not different from illusion." Lee Kang So, 2011. 3. excerpt from Interview in Anseong
Artist Lee Kang So maintains the attitude that pursues change and free-flowing mobility while guarding himself against inertia and stagnation. When this attitude meets 'emptiness(虛)' as a philosophical conception of space, his work and the place it occupies are commanded to exchange their energy and to achieve perfect harmony with each other. Therefore, the commonly perceptible gaps become a passage that acquires value as 'emptiness(虛)', and the content of this work we contemplate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restraints, attachment, rigidity and discrimination, because it presupposes the absence of the conflict with space.
Even from the stage of conceiving new work and handling material, one can detect Lee's epistemic tendency and characteristics, differing from content that presupposes attachment. Understood from a broader perspective, this work illuminates the value and occasion of the quotidian in a specific space. Lee takes much time to decide the usage of his material, for he needs the process of living and breathing with it - a habit to which he himself admits. The objet that he used in his first solo exhibition, the tavern project titled , and the wood used as the material for 'Emptiness(虛)-11-I-1' would have been treated as plain device or trash, but through the process of living and breathing with them, Lee endows them with significance as a medium conveying characteristics of the artist. Lee's intuition takes an active part both when he connects his context with the usage of material and confers upon them a value of life, and when he acutely observes them in order to find their own proper value. Every meaning and significance of his work emerges on the basis of all connections it holds prior to its creation. Especially when the medium is about the 'responsive state,' such as is a work of art, 'intuition' takes an effective part to grasp the real meaning and theme of it.
“Hugging the sky, embracing the sea, I take a suck at a cigaret
Hugging the sky, embracing the sea, I take a sip of water
Someone sat for a while beside the well then went on, leaving a cigaret butt behind...”4
Intuition is an instant realization that functions on a level that is higher than sentiment and rational thinking which arranges and corrects that sentiment. It is the only ability of recognition that is directly connected to the phenomenon we experience in relation to the essence of the world such as "Great Void' or things invisible. Therefore the expression 'intuition of artists' is quite appropriate. The intuition of Lee Kang So makes us recognize his world view, capturing values that are barely perceptible but have always existed, values found in trivial things that twinkle in the quotidian asserting their raison d'etre.
3. Timeness, Spaceness
"A pale sky, hovering over a world that is dying of its own decrepitude, is perhaps going to depart with the clouds: the shreds of worn-out purple sunsets fade in a river lying dormant on an horizon submerged in sunbeams and water. The trees are wearied and, beneath their whitened foliage (from the dust of time rather than from that of the roads), rises the tent of the Showman of things Past:(...)"5
“Wang(忘) doesn't simply mean forgetting [...] It means the state that denies the subject's activity of recognizing, such as private thinking and judgement, eventually heading toward the absence of self-awareness. It is thus a state that transcends the ability to recognize, an ability that distinguishes the size of space and the length of time. This does not mean one is not aware of one's self-existence, but it should be understood as a sort of method that is needed to see truth and reality, in the process of going to the state of No-Self and No-Mind.”6
'Emptiness(虛)-11-I-1' is comprised of 10 parts, and each form makes a narrative on "Two Different Timenesses7." One transfers the historic time and place into the old mainstay that retains the vestiges of the past. Over the span of time, dust and wind pile up old stories like a fossil. These objets hold a story of time carved and finished by someone who lived in the past. They are narrators from the past.
Lee Kang So found the motive of the past in the ancient city of 'Gyeongju'. He noticed the beautiful proportion in the vestige of the mainstay of the temple Bunwhang, a place of historicity, and also in the stone table of Georeung(one of the royal tombs). They are the beginning of the narratives he intended in this work.
Just as he admired the proportion of the stone table of ancient time, he created an artificial time with scorched surfaces like oxidized charcoal, in order to symbolize the temporality of the future and to materialize the simple formal essence in the structure commonly found in the everyday.
This is not contrived simply as a device to add temporality to a form. 'Scorching', as an 'act of scorching', intends for the extinction of wood, and the extinction of wood gives birth to a new character that is 'charcoal.' Transformation is not simply a transfer of energy, but reveals a circular and primitive relationship of natural law that constantly gives birth to the next character on the condition of the extinction (death) of the previous character.
"Fire lives the death of air, and air of fire; water lives the death of earth, earth that of water"8
It is treated in the temporality of the future which he assumed. This is a narrative of the future given to a commonplace structural form. Again, if 'scorching' is serving for an organic relationship among past, present and future, as well as reason for making artificial timeness, this act should be considered as a 'style' of narrative. In this way, "Two Different Timenesses" holds the narrative of the past and the narrative of the future inscribed on the thing of the present.
Of course, the significance of this work does not stop here. It was mentioned earlier that this work suggests another conception of 'process' as a sort of communication related with the present. The temporality of the 'present' remains empty. It stands as a site of potential creating a context where the whisper of the past and the awareness of the future are connected.
It is the 'now' of the seer.
Time does not stand in itself but in relation with space. This work speaks of the 'present' from the 'here' it occupies.
If the narrative element of temporality constitutes the meaning of the work, spatiality creates a 'landscape of time.' In 'Emptiness(虛)-11-I-1', the diachronic temporality of each part is connected by heads of the wood, a symbolic monument located in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is installation. On this basis, forms of the past and the future are connected with linear proportion and crossing composition.
The form standing like a post, the plate structure reinforcing the physical properties of floor, the heads soaring and creeping, all oddly resemble landscape of mankind. In addition, the three heavy stones -- stones that are so glued to the floor that it rather looks as if they have seeped into the ground, or the ground have burgeoned into form -- are not only an objet of the past but also give a feeling of wafting through space. For its irregular triangular composition causes a proper tension against the linear and proportional composition of other parts of work.
Coincidently, this installation reinforces the property of the surface of the floor, adding another effect to the work itself in return. When viewed from the third floor, the installation looks like a flat painting because the floor and the installation share the same property. If the floor were a canvas, we could read this work as a simplified sign, a form created at a single brush stroke as found in the previous paintings of Lee Kang So. As the spectator descends from the third floor to the second, and subsequently to the first, the installment recovers its three dimensional form: natural light from the outside of the museum gives various colors and contrast as time flows, highlight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heads and responsively touches the carved surfaces and woodgrains of each part of the work.
Back to the third floor, we find that the center of the monument which played the part of the head connecting the timeness of each part is empty. This is due to Lee intending not to hinder the way between the heads connected with light and his conviction that this way itself is an opening for the interchange of energy emitted between Umi Hall and the work.
Spectators should fill up the gap between works like a flow of energy wafting in space. Upon suddenly encountering this way, the spectator as a microcosm realizes the meaning of the 'now, present.' It is the moment we are placed in the narrative of the work.
"No-Mind(無心) is explained as a world where the thing and I become one, the state in which subject and object become inseparable, as the subject is dissolved into the phenomenon of things as they are. It can be described as a state in which we understand ourselves by means of losing ourselves in the object, object and I become one by means of affirming the self-sufficiency of the original form of object, and we rush into the object, feel it internally, and unify its life by ourselves."9
The aesthetic response to the moment begins with the harmony between works and spectators, space and spectators. Perhaps this harmony, based on the world view on 'Emptiness(虛)', cannot but result from the process in which energy is transferred, emitted and accepted between space and work, unknown to anyone, even the artist himself. “Even relativity is relative”10 , and if all invisible immanent possibilities are in these 'relations,' then it is only apt to mention the necessity that includes the absolute occasion.
III. Outro
Lee's work has been defined as a 'process' on the basis of the element primitively emerging in its visibility. However, the 'process' mentioned with respect to the work 'Emptiness(虛)-11-I-1' results from reinforcing the philosophical meaning of the relation between the contemplation of work -- a participatory property of the spectator -- and the completion of the work.
In addition, the process of installation itself should be considered as part of the creative process: much caution was put into interpreting the spatiality of the work considering its relationship to Umi Hall. The entire process of the installation will be shown in the additional document exhibition.
The meaning of 'emptiness(虛)' corresponds to the characteristics of Umi Hall. Umi Hall, as a site where everything is created, its flow managed and developed, has already become the most fitting place proper to the world view of "Great Void." Embracing the premise that the problem of 'extinction and creation' offers 'another possibility as new property', Umi Hall will play a role as a medium transferring pure breath as rawness, in relation to the perspectives that are either truly unfamiliar, or ambivalently both familiar and unfamiliar.
As people come face to face with the philosophical space of 'emptiness(虛)', many -- whether they are scholars or artists--will strive to track this space with a clear 'eye of mind'. Lee Kang So is one of them. The tendency of his work influenced by his posture of research and work is unraveled not from himself but in the interconnection of the entire world affecting him. It could be something evidently visible or something like an invisible flow of energy. The world unidentifiable with the senses, microscopic aspects of physical world are also within his boundary. Lee's 'emptiness(虛)' presupposes as its range of possibilities not only of filling but also of emptying. Not only is dynamism a flow of energy, but stillness is also an aspect of the flow of energy, thus if we position opposite terms of the existing thought-system in his 'relation', there would be no grounds or device to reduce the superiority and inferiority of things into evaluative values. 'Emptiness(虛)-11-I-1', an installation work comprised of 10 parts, enables us to track the context of the encounter between works and that between works and the spectators.
10 Bernard Werber, L'Encyclope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 translated by Lee Se Ook, The Open Books, 2009, p. 260 "Everything is relative. Therefore even relativity is relative. Therefore there exists something not relative. If something is not relative, naturally it is absolute. Therefore there exist something absolute"
9 Shin Eun Kyeong, Pungryu: the Root of Aesthetics in East Asia, Publisher Bogosa, 2006, p. 413
8 Guthrie, The Greek Philosophers from Thales to Aristotle, 1960. p. 44
This sentence is mentioned in the context where Heraclitus criticizes the Pythagorean on that they explain the nature with respect to eternity, invariability and harmony and he insists law of nature is an attunement of opposite tensions. As far as maintaining the order and balance of nature, according to this text, we cannot evaluate the value of opposite terms.
7 Kim Yong Dae mentioned that the significance of Lee Kang So's work consists in the delicacy of coexisting "Two differenrt Timenesses", distinguishing "Time for working" from "Time of content." I borrow this phrase with respect to 'Time of content', distinguishing the past and the future. Kim Yong Dae, 「Two Different Timenesses」,2006
6 Shin Eun Kyeong, Pungryu: the Root of Aesthetics in East Asia, Publisher Bogosa,, 2006, p. 414
5 'Le phénomène futur' Mallarme, Afternoon of a Faun. Translated by Kim Wha Yeong, Min Eum,, 2004, p. 67
4 Chon Sang Pyong, "Crazy Vagabond", excerpt from 2nd stanza, With this poetic expression, we can easily understand the way he intuitively observes and expresses the traces of everyday life. 1st stanza “Today's wind is leaving tomorrow's wind is beginning to blow/ bye-bye. Today's been far too dull./Like baby rats mewling in a backyard cesspit tomorrow's wind is beginning to blow. ”
3 Chuang-tzu, "Knowledge Wandered North". Accepting "Great Void is energy", Seo Kyeong Duk explains "Great Void is the essece of operation of energy and origin of body of energy. Creation of everything, occurred by gathering and scattering of energy, is Working of energy. "Great Void is void but not void. Void is energy. Void has no end and no outside. If I say void, does it mean energy? That is, if something is void and stable, it is the body of energy, something gathering and scattering is the work of energy."
2 Kim Bok Yeong, "Emptiness, the boundary of the invisible thing", Art in Culture, Oct. 2000. Kim mentioned the philosophical aspects of Lee Kang So's works as showing "the thinking of Great Void" on the ground of the effect of emptiness and Karma as a proper origin of Korean contemporary art or cultural character.
1 Schelling, "On the Relation of the Plastic Arts to Nature", Translated by Shim Chul Min, Book World, 2002, p. 62
2 김복영은 이강소 작업의 철학적 면모에 대해서 '여백'의 효과 및 우리 현대미술의 고유한 유래로써 연기나 문화형질에 바탕을 둔 '태허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한 바 있다. 김복영, 「여백,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아트인컬처』, 2000,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