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입주자가 모두 선정되었고,
3월 9일은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각 작업실 및 공동시설들을 둘러보고 프로젝트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
반응과 반작용, 수긍과 긍정 사이에서
입주자들의 면면을 관찰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참으로 묘한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나의 모든 감각과 체험이 일년전 한 기억으로 연동되는 시점이었다.
내가 처음 광주에 왔을때,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갈망하고 있던 것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발견했을때 그날 난 전혀 잠을 이룰 수도, 자고 싶지도 않았다. 운명까지 운운하는 것은 다소 유치하기는 하지만, 땀 한줄기가 뒷목을 타고 내려와 귀중하지 않은 맥락의 과도한 고민이 자연스레 주변으로 발산되었던 그러한 차원의 경험. 그것은 이후 내 마음 그릇의 크기로 인하여 버티기 힘들었을 지도 모를 많은 일들을 끌어안으려 애를 쓴다거나 혹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벗겨내 버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항상 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번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내가 그러했듯,
일년 전 당시 공간을 소개하면서 나의 반응을 살피시던 선생님의 유독 긴장되어 보였던 표정이 떠오른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표정의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나는 그저 행복했으므로 긴장된 표정을 당연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저 행복했던 마음은 다소의 우려나 육체적으로 겪는 고초로 인한 정체모를 마음이 되었다가도, 일반적으로 부정적일 수 있는 그 정체모를 마음이 한편으론 오히려 막연히 행복했던 기분을 들뜨지 않게끔 강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의 긴장된 표정, 그것이 언제쯤 풀리셨을까? 풀리기는 한 것일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살짝 그 마음이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책임의 무게로부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나도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입주자들의 상반된 반응을 살피며
우선 예쁘게 잘 다듬어져 있는 것보다는 일부러 날 것을 보여주자 하였다.
날 것을 보고 입주자들이 어떤 고심을 하게 될 것인지, 숨기지 말고 보여주자 하였다.
그것이 나는 다소 우려가 되기도 하였지만, 우리 프로젝트는 애초 겉멋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러자고 수긍하였다.
그 예전 나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그들의 반응 속에서 나는 정말 긴장하고 있었고 솔직히 말하건데, 살짝 겁도 났다. 그러나 물론 아/주 살짝이다.
결국 날 것을 보고 수긍하지 못한 자는 정중히 작별인사를 했고, 애매한 반응을 보인 자는 그래도 한번 해보자 의기를 다졌고, 날 것이 좋아 신난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어느 반응 하나하나 평가적으로 다뤄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호하게 한 가지 아쉬운 마음이 한켠에 들었다.
지금이 무슨 개척시대도 아니지만, 이미 그 모든 것이 가능하고 할 수 있는 하드웨어가 갖춰진 세상에서, 그것이 정말 당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 역의 방법으로 그것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가치를 찾고자 애를 쓰고 있다. 일반의 시선에서 그것은 어떻게 보일까? 다만 이것은 각자가 선택한 방법론이자, 그저 생활의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지, 고귀한 노스텔지어의 꿈을 향한 돈키호테의 놀음 정도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자연스러운 또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난 개인적으로 억울한게 참 많은 모양이다. 난 허파에 바람들어간 적도 없고, 간이 부어있지도 않다. 허황된 꿈, 그런 꿈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이에 관해 나는 항시 부정적이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그 누구라도 그러하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다. 삼각형이라는 것은 나름의 어떠한 균형을 전제했을때 가능하다. 이에는 직각삼각형도 있고, 정삼각형도 있고... 그저 난 나에게 '좋은 것'에 약간의 비중을 더욱 두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푸념이 필요하다.
자기 희생과 극도의 자아도취 사이에서
무언가 차려진 상에 수저를 놓기보다, 없는 상부터 만들어가는 것은 당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갖는 애정도와 만족감이 자기 수저에만 그치지 않고, 수저가 올라오기까지 그 모든 전과정을 경험하고 만들어가는 것에서 파생되는 그 모든 감각과 사고를 수반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는 그만큼의 자기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에게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자기 희생을 감내하고 얻은 일은 그만큼 자신의 속을 단단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되는 말이라고 주장한지가 몇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문제는 '자기 희생' 그 정체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단순한 정의감, 사회적 책무, 남들의 평가... 어설픈 나이에 지금 현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나에게 가능한 자기희생이란 나의 '자존감'이 중심이 되어 그것이 '그러한 바'라고 판단하는 것들을 행했을때 의미를 갖는 것일 게다. 내가 말하는 '자존감'이란 내가 나로서 살고 싶은 마음, 자기 성찰적이고 반성적인 지점을 제공할 수 있는 여력, 내 존재에 해가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리는 것등을 포함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나다. 필요 이상으로 사회적일 필요도 없고, 필요이상으로 사회를 꺼려할 필요도 없다. 생각도 없는 사물에 대해 자기 잘못을 전가해버리는 몹쓸 짓들, 결국 그 모든 잘못과 고민과 해악은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항상 자기 자존감과 자아도취 사이를 헷갈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나다.
지하철 2호선에서 3호선을 갈아타는 사이 정면 벽에 쓰여있는 시구를 보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시인 조병화"
문득 일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들이다.
그 일년동안 난 참으로 많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참 재미있다. 어떤 사건이나 일을 계기로 과거를 떠올리고 전혀 다른 시간에서 이를 곰곰히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그러나 한편으로 그래서 더더욱 아쉽다. 왜 진작에 알지 못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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