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월간 퍼블릭아트 2016.8/ Utterance. 쓰면 쓸수록 이토록 불편한 글(큐레이터Fee에 대한 단상)


큐레이터피에 대한 단상,
쓰면 쓸수록 이토록 불편한 글
최 윤 정


*이 글은 원문으로서, 퍼블릭아트(2016.8월호)에는  전체 분량의 3/5정도 축약된 분량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얼추 가늠을 해보니 벌써 큐레이터 10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그간 대안공간의 큐레이터로, 현장프로젝트의 기획자로, 국공립미술관의 전시팀장으로 기획의 영역에서 행정관리영역까지 여러 경험들을 축적해온 시간들이다. 현재 나는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고, 그 시간도 벌써 3년차에 접어든다.
최근 평소 일을 선택하는데 있어 내가 어디에 주안점을 두는지, 왜 그것이 나에게 주요했는지 곱씹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는 3년차 독립큐레이터로서 잘 가고 있나에 대한 불안을 조정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최근 선택해서 읽는 자료나 큐레이팅 연구 방향은 일을 위한다기 보다 일에 임하는 명분으로 독립큐레이터로서 만들어가야 할 특색 혹은 나다움을 찾기 위한 지난한 노력에 밀착해 있다.
일에 임하는 태도를 논할 때, 유독 생계형이란 단어를 빈번히 사용하는 편인데, 이 말은 이 글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시작이 되었다. 평소 나는 이렇게 주장해왔다. “이 일은 생계형으로 해서는 안 된다이 말은 혹자에게는 일종의 지적 허세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읽힐 수도 있고 혹은 진정 현실적인 문제를 실감한 깨달음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이번 <‘큐레이터 피에 대한 단상>을 주제로 한 글을 편집부로부터 청탁을 받았을 때, 이미 내 삶과 무관하지 않은 이 내용을 어떤 화두로 열어야 할 것인지 고심이 컸다. 또한 쓰다보니 비판적 거리설정을 하기에 상당히 힘들었던 부분도 있다. 할 말은 많지만, 명확히 의미가 전달되어야 하니 가능한 개인의 사연이기보다 큐레이터피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에서 이를 바라보고자 애썼음을 우선 밝힌다
   
 
1. 우리는 //작 예술인이에요.
 
2014년 공장미술제 이후 젊은 예술인들의 용기있는 발언으로 시각예술인 표준계약서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었다. 이후 2015년까지 정책을 위한 공청회들이 열렸고, 관련연구자료들이 줄이어 나왔다. 그 결과 이 내용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으로 공정한 계약문화 정착을 위한 표준계약서에 반영되었다. 2016년은 국가 및 지자체 예술지원사업들로부터 시작하여 표준계약서사용을 명시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술계 일원으로서, 그간 고질적인 문제들을 인지하고 예술가들이 주체가 되어 공론의 장이 펼쳐지고 이것이 정책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고무할 만한 일이다. 한편 그것이 현장에서 얼마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은 다시한번 논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예산 속에서 펼쳐낼 수 있는 범위가 좁아졌다 한탄하는 점은 납득하기 힘들다.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현저히 다르며, 넉넉하지 않은 예산 속에서 누군가의 희생으로 도모하는 큰 일이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게 우선이 아닐런지. 적어도 인식적으로나 태도적으로 시각예술 표준계약서를 설계하게 된 맥락들은 시각예술계 구조 안에서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다.
최근 나 역시도 기획을 맡은 프로젝트에서 참여예술가에 대한 처우와 활동범위들을 고민하는 가운데, 표준계약서의 내용들을 숙지하고 있다. 예산확보의 문제에서부터 쉽지 않은 일이기에 사용의 범위를 고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큐레이터와 작가간의 위치가 역할 상으로 대등하기 보다는 실행과정에서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에 비해 상대적 약자의 권리는 명시화되어야 하고 이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것은 문제 발생시 양자를 보호하고 합////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다.
그렇다면 큐레이터의 경우를 볼까. 자기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독립큐레이터의 경우도 고충은 있다.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기관이며 단체로부터 제약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 제약은 기관의 특성에서 인정될 수 있는 범위가 있는가 하면, 부당한 경우 제대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구조적으로 큐레이터의 노동을 선의의 예술활동으로서만 바라보는 관점에 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언제든 발생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면 독립큐레이터는 스스로의 역량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즉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 역시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문제 발생시 합리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 절실함을 깨달은 터이다.
시각예술인 표준계약서상에서 큐레이터에 대한 처우 및 내용을 담은 항목들을 찾아보았다. 없다. 참담하다. 그 참담함의 실체를 파보기 위해서 표준계약서 연구에 대한 몇 가지 논문들을 찾아보다가 큐레이터의 직업군이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시각예술종사자에서 직업군이 창작예술인비창작예술인으로 나뉘어진다. 표준계약서는 우선적으로 창작예술인을 기준으로 하여 설계되었다. 큐레이터는 비창작예술인에 속한다. ‘비창작예술인이 어떻게 한 단어로 조합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어찌됐든 그렇다면 나는 공////로 비창작예술인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다.
큐레이터의 생산물, 전시도 엄연히 큐레이터의 연구 창작물이다. 작품이 최소한도의 공적인 근거와 보호를 꾀할 수 있는 저작권을 갖듯이, 큐레이터의 생산물 역시도 개인의 윤리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보호될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시는 동시대미술 혹은 미술사의 다양한 시선으로 주제와 컨셉 자체를 독점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제도적으로 비창작이 아닌 창작물로서 인정될 수 있는 대안적 요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비창작예술인으로 개념규정된 큐레이터를 직종으로 삼은 당사자 모두가 감당해내야 할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2. 힘이 있는 혹은 없는
 
표준계약서가 주제는 아니지만, 큐레이터의 활동을 바라보는 정책을 포함한 각계의 시선에 대해 논하려다 보니 자꾸 말이 길어진다. 내용상에서 사례비로 구분되어 있는 항목에 다행히 기획비가 있다.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이 기획비란 큐레이터피의 명목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작가의 기획적 요소가 필요한 경우의 항목으로 읽혀진다. 기본적으로 표준계약서의 문맥이 기획자와 예술인 간의 위계적 구조, 착취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를 조율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으로 고안된 것임을 물론 알고 있지만, 아티스트에 대한 처우와 큐레이터에 대한 처우가 다르게 논해져야 할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별개인 것이 아니라, 함께 공론화될 지점은 있다. 아다시피 모든 큐레이터가 힘이 있지 않다. 그리고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큐레이터 사회 안에서도 위계는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한 문제는 그 위계 아래에 놓인 큐레이터들의 처우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워낙에 학연과 지연 등으로 네트워킹되는 좁은 사회이기 때문에 소문과 평가는 빠르게 전파된다. 일종의 쑥덕공론이 지배할 수 있는 사회다. 힘있는 큐레이터는 쑥덕공론과 상관없이 활동을 이어가지만, 아직 힘을 키우지 못한 큐레이터는 이를 혼자서 감당해내야 한다. 아니면 일종의 라인업을 형성해야 한다. 몇 해 전 속한 기관의 기관장의 폭정에 대해 문제를 삼을 때, 무수한 연락을 받았다. 걱정하는 이야기들도 있고, 겁주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겁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어느 미술관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며, 네가 그런다고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너의 활동에 제약만 생길 뿐이다물론 이에 겁먹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당당히 활동하는 원동력은 된다. 이후 쑥덕공론의 영향을 받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하고 별탈 없이 그리 살아가고 있다. 이때는 다행히 큐레이터협회가 큐레이터의 처우 및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함께 문제제기를 했었기에 개인의 입장으로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아주 행운스러운상황이 마련되었지만, 행운은 흔치 않은 상황에 쓸 수 있는 단어라는 점 그것이 문제다. 문제시되는 지점을 스스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혹은 큐레이터는 일의 특성상 작가들에 비해 어려움을 토로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도 사실이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큐레이터피에 대해 공론화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각자는 비용을 어떻게 산정하고 어떤 기준으로 받고 있는지 인터뷰 조사를 시도했는데, 답변은 있었으되 지면을 통한 언급은 대부분 거절한 경우였다. 다만 큐레이터피에 대한 인식이 단순한 인건비의 개념으로서만 다가갈 것이 아님을 인지할 필요는 있다는 의견들은 공통적이었다. 한편 큐레이터피 자체는 큐레이터로서 각자의 위치(몸값)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공개되었을 때 표준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굳이 이 직종이 아니더라도 프리랜서의 삶을 택한 사람들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3. ‘큐레이터피를 명명하라 / 개념설계의 현실
 
그나마 공사립기관 등에서 게스트의 신분으로 한시적인 기획을 맡는 경우, 기관 자체 내부기준에 의거하여 해당 독립큐레이터의 경력과 연륜, 외부 평가 등을 고려한 큐레이터피가 책정된다. 이 내부기준은 기관별로 각기 다른데, 보통 예산의 10% 범위 내를 기준으로 하되, 게스트큐레이터와의 협상에 의거하여 조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확보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지출되는 지는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큐레이터피논의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스스로 예산을 확보하여(기금, 펀딩 등) 활동하는 독립큐레이터의 경우에 있다. 우선 가장 정당한 과정을 통해 공적인 영역 안에서 비용을 확보할 수 있는 경우는 각종 문화재단 등의 지원사업기금인데, 보통 큐레이터피/기획비는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기획비이기 보다, 사업관리자 인건비로 여겨진다. 또한 이 인건비는 전체 사업예산의 20%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운영비와 함께 설계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보조인력은 필요하다. 결국 인건비는 그 안에서도 다시 재분배되며,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이는 큐레이터피로서 인정되는 사항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나마 책정되어 있으면 다행이지 않느냐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예산항목의 규정 및 개념설계에서부터 이 일에 대한 인정기반을 전제로 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 장면1 : 지역의 한 문화재단에서 전시프로젝트를 위한 사업비를 지원받은 적이 있었다. 여기서 보통 우리가 보기에 큐레이터피는 매월 지급되는 인건비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데, 여기서 방점은 단순노무비 인건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출퇴근 여부가 그들에게는 중요했다. 그 사업에 참여한 타 단체들과의 SNS소통망을 만들어 매일매일의 활동을 보고하라는 웃지못할 일이 있었으며, 보고할게 없으면 날씨사진이라도 찍어서 올리라는 연락을 받았다. 또한 사업 중 두 차례 정도 주말을 이용해서 잠행을 나오는데, 말은 어떤 활동이 펼쳐지고 있는지 격려차 방문이라 하지만, 일종의 감시체계에 가까웠다. 나로서는 지원사업에 대한 기관의 이러한 태도가 납득이 되지 않았고, 이후 결과물로 보자며 무리한 간섭에는 응하지 않았다. 애초 사업계획안대로 모든 일을 변경 없이 수행하였으며 잘 마무리하였기에 이후 가타부타 말나올 여지는 없었다.
 
#장면2 : 미술관 재직시절 아마도 2012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맡았던 업무 중의 하나는 아티스트피와 게스트큐레이터피 기준을 연구하고 지급방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당시 몇몇 국공립미술관들의 사례들을 찾고, 해외 사례들을 연구하였는데, 우선 해외사례는 국내에 적용하기에 아직은 행정의 인식 상에서 선례로 인정받기 힘든 것이었고, 국내 사례는 미술계는 비록 아티스트피’, ‘큐레이터피라고 언급하더라도 행정적 처리 안에서 합리적으로 그것을 명명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고료, 세미나사례비, 회의비 등으로 쪼개어 나누어 지급하는 것이 당시의 최선이었는데, 이의 문제적 핵심은 큐레이터피에 대한 인정구조가 정책적으로 전혀 뒷받침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 설치작업에 한하여 용역계약(비용은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개념상에서 하도급의 취급을 당하는 구조)의 항목으로 협의된 재료비와 아티스트피와 활동비 등을 지급할 수는 있었으되, ‘용역계약이라는 부분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문턱을 느꼈다. 큐레이터피와 아티스트피를 바라보는 이 두 경우는 행정이 예술을 어떻게 인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 아티스트피와 큐레이터피 사례들에 대해 집중하면서 문화예술계를 바라보는 관점들,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술계가 전부인 양 지내고 있지만, 거대 구조 안에서 미술계는 생각보다 상당히 작은 위치를 점할 뿐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도 않는 그 구조 안에서 무엇인가를 바꾸려면 이건 거의 혁명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 무렵즈음이었다. 결국 아티스트피, 큐레이터피로 정당하게 명명하기 위해서는 미술관 내규는 물론 지자체의 문화정책에 대한 조례까지 움직여야 한다는 게 당시의 중간결론이었고, 결국 이 일은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몇가지 지출방법을 찾고는, 추후 제대로 된 명목으로 지급하기 위해서 어떤 개선방식들이 필요한지 방법()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생각해보니 당시 국공립미술관에서 공통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었던 사례들이 있었고, 알음알음 정보를 공유하는 정도로 관계자들 사이 의견을 나누었지만, 그 근본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방법을 함께 논하는 공론장은 없었다. (*표준계약서 관련 아티스트피에 대한 공론장에서 일부 국공립미술관의 진척된 사항과 이를 행하는 방법이 발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문득 그 지출방식도 분명한 명명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기관에서 행하는 계약의 특수한 상황들은 공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합리적인 구조와 공공성의 가치를 기해야 할 예술관련 국공립기관 조차도 기본은 현실에서의 합당한 인정이 아니라, ‘예술노동을 숭고한 예술창작의 범위 안에서만 대상화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닐런지. 이 지점은 또한 예술노동을 하릴없는 백수로 바라보는 관점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이럴거라면 차라리 이슬만 먹고 화장실도 안가는 요정이 되고 싶다.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현실을 언급하는 것이 왜 없어보이는 일이 되어버렸나.
 
4. 생계형이어서는 안되느냐 하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일병이 너무 많아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의미를 알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누군가는 상병이 되고 또한 누군가는 병장이든 장교가 되어 일병과 이등병의 균일한 역할을 챙겨야 하는데, 일병이 너무 많은 탓에 모두가 일병의 역할을 하니, 누군가 견인하고 또한 누군가 마련한 텃밭에 씨를 뿌릴 수 있는 환경이 급감하는 것이다. 그것만큼 일의 질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전히 관련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깜짝 놀라는 것이 내가 10년전 받았던 급여(100만원으로 출발했다)만큼도 못받는 후배들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또 내 나이 또래집단 사이에서 굳이 우리가 같이 일병이 되지 말고, 후배에게 판을 깔아주는 시스템을 정책적으로 고민하는 게 보다 윤리적이지 않겠나, 경쟁에 뛰어들기에는 일병이 너무 많아이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한다. 무려 10년전 2007년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시각예술인 실태조사 및 분석을 위한 비창작예술인 관련 조사에 의하면 평균연령 45, 기혼자, 가족부양 기준으로 월평균 220만원 정도의 수입을 갖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도 가족을 건사하기에 그리고 그 연배가 대기업 과장 부장 나이라고 생각하면 비교하기도 힘든 금액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활동하면서 주변을 보면 그 상황이 얼마나 나아졌을까 싶다. 큐레이터로서 의미심장한 담론을 품은 콘텐츠도 생활의 안정이 기반이 되야 가능한 게 아닐까. 큐레이터피도 큐레이터의 기본소득과 연관하여 현실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최근 한 지역의 중요한 전시를 맡은 감독이 받는 사례비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상상이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어떻게 큐레이터팀을 두고서 그 비용으로 운영을 하는지 어쩌면 함께 하는 큐레이터들은 제대로 비용을 받기는 하는 것일까 혹은 그 전시에 참여한 경력만으로 그야말로 퉁친것일까’, 혹은 별도의 비용이 책정되어있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었다. 미술계 굵직한 분이며, 어른 위치에 있다. 하지만 당신의 기획이, 활동이 개인으로서만 읽히기보다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 오해였으면 좋겠지만 사실이라면 보다 정당한 비용을 받지 못한 당신의 처사는 후배들의 활동을 더 좁힐 뿐이다. 누구보다도 행정을 이기거나 협상의 위치에서 유리할 수 있는 힘은 있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내 눈에는 일병을 넘어서지 못하신 것으로.
 
처음 시작할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이후에는 이 직종 자체가 계속해서 연구를 하면서 담론을 만들어가는 개인의 삶에서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만족하며 지냈다. 나아가서는 나의 특성과 프로젝트를 연결하는 특화지점을 찾아내면서 나만의 무엇을 발견해가는 직종에 대한 만족감이 컸다. 점차 내가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분과 그에 따르는 책임은 일을 선택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어갔다. 그러나 이 명분은 최대한 나다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종종 의미와 선의를 강조하는 사업 등에서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당위가 되어 발목을 잡히기도 했던 터라, 최근에는 이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많다. 또 일부 이 업계의 윤리적인 폐해들이 큐레이터 직종을 생계형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 아닐까 생각을 해왔다. 큐레이터라는 직종이 만족도는 단연 높지만, 그만큼의 현실적 보상이 따르지는 않는다. 말은 수정되야 한다. 직업적 만족도가 높다는 말은 현실적 보상도 함께 갔을 때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큐레이터는 직종으로 여길 수 없다. 차라리 취향, 정체성, 소명 등의 모호한 가치개념으로 환원해야 할 이름인 것이다. 현재도 나는 현실의 생계가 곤궁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다른 일거리들을 보충하고 있다. 다들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든 독립큐레이터가 자기 연구지점에서 만족스런 부업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하나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예산확보에서부터 전 단계를 만들어 가는 일은 하나의 일만 해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 현재 나 역시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출발함에 있어, 3개의 프로젝트가 각기 연동되어 있다. 그로부터 프로젝트에 즉한 활동비를 마련하고, 모자란 생활비는 부업을 통해 채워간다. 독립큐레이터로서 활동은 그래서 백수 과로가 딱 맞다. 그리고 이 활동을 건강하게 존속하기 위해서는_이제는 다른 곳을 볼 여지도 없다. 나는 10년차 큐레이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좋다_ 이 일이 나의 생계의 100%를 채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마도 내가 생계형이라는 단어를 빈번히 사용하는 맥락은 생계형일 수없는 이 현실을 깨달은 탓이기도 하다. 물론 이 현실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바꾸고자 애쓸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일병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
   

2016년 2월 18일 목요일

<기고문> 예술과 사회II. 타자로서의 정체성, 중심부를 향하는 소통의 예술


예술과 사회II. 타자로서의 정체성, 중심부를 향하는 소통의 예술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학미술비평
 
 
#1 ‘길동이는 왜 집을 나갔나’ : 각성된 자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적서차별에 대한 시대적 사회규범에 처절히 저항하였던 홍길동, 그의 사회적 정체성은 서자였다.
소속된 사회에서 습///는 자기동일성이란 그 사회가 지향하는 쥬류가치로부터 형성된다. 사회는 존속을 위해 특정의 가치를 지향하고, 특정가치에 위배되는 삶이란 곧바로 이질적인 것, 바이러스와도 같은 부정적 전염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홍길동이 지닌 사회적 정체성은 조선사회를 지탱해온 낡은 신분제질서로부터 기인한 것이었고, 이로부터 불편부당함을 느낀 홍길동은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순응을 거부하고 사회의 이탈자가 되어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 세상으로 나아간다
 
#2. ‘우리 사회의 스테레오타입’ : 주류의 전략
여전히 2,3세대가 모여사는 가족이 중심에 있으며, 남녀간의 사랑이 큰 축을 갖고, 그 애정의 축에서 여성에 비해 신분적 우위에 있는 남성은 항상 가녀린 여성의 성공과 행복을 조력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자로 설정된다. 무식하고 막돼먹은 캐릭터는 지역방언을 아주 찰지게도 구사한다. 가족중심/이성애/남성중심/수도권표준어에 치중한 우리들이 즐겨보는 TV드라마들의 일반적인 공식이다. 여기에서는 비혼자나 1인 가족 내지는 동성애자의 사랑이나, 자기 삶의 주도권을 지닌 여성(보통 기센 여자, 악녀로만 묘사, 여자는 남자로 인하여 완성되는 존재여야 하므로)의 모습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3. ‘룰이 깨지면 죽는다’ : 혐오
흑백의 세계, 미국의 50~60년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드라마>플레전트빌<, 완벽한 가정이 있고, 완벽한 도덕이 있고, 삶의 규율과 인간의 생체주기마저도 완전무결한 곳. 플레전트빌은 주인공이 즐겨보는 옛 TV드라마이며, 현재의 불행을 잊게 해주는 완벽한 세상이다. 신비한 경험으로 드라마 속에 들어간 주인공 남녀에게서 플레전트빌의 삶은 기존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정해진 틀 속에서 안주된 삶, 다른 생각이나 가치를 품어본 적도 없는 삶이었다. 그들의 등장은 자연히 흑백의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가치와 욕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이 점차 컬러로 변해가면서, 흑백중심의 사회는 이를 마치 저주와도 같은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흑백 주류사회 존속을 위해 이윽고 유색인 차별전략을 구사한다.
 
위 세 가지 씬은 확고한 주류가치에 대한 의문과 서로-가치를 인정하며 사회적 소통을 절감하게끔 하는 발견된 사례들이다. 여기서 소통의 시발점으로 우리는 주류사회의 타자()’-홍길동, 비혼자1인가족/동성애/여성/지방방언, 컬러로 변한 플레전트빌 주민들처럼-를 살펴야 한다. 여기서 타자는 그저 동정여론이나 패배주의, 열등감 따위에 매여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주류사회가 표방하는 가치가 지닌 모순과 문제점에 근접할 수 있고, 자기 내부에서 겪는 사회적 문맥화로 모순의 핵심에 파고드는 송곳-정체성을 쥘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는 일원적 강요나 체계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자 이를 구축하는 도정이기도 하며, 경직된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역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 주류사회의 가치에 의거한 타자()은 절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적 요청 내지는 처해있는 상황에 의해 뒤바뀔 수 있다. 사회적이고 관계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으로서 그렇기에 한 사회를 제대로 읽고 비판적인 시각을 마련하는 키워드일 수 있다. 이와 같이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예술은 동시대를 움직이는 중요한 방향성들을 또한 견인해왔다.
 
 
 
 
<복수와 치유, 중심을 파고드는 예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s Torres 1957-1996)는 쿠바출신 이민자이며 동성애자이다. 미국사회에서 이민자이자 동성애자는 철저한 비주류의 영역에 있었고, 그는 자신의 사회적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로 동시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를 두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들의 예술가라고도 부른다. 그의 작품의 주요 동기인은 에이즈로 먼저 타계한 애인 로스(Ross)에 대한 그리움인데, 그가 있었던 자리,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죽음에 의해 갈라진 안타까움이 그의 작품에서 고요한 먹먹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에이즈와 동성애는 사회적 혐오를 유발하는 악성 기제였다. 그들은 동성애자였고, 펠릭스 역시 에이즈로 로스의 뒤를 잇지만, 그가 로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었고, 그의 개인적 경험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감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접속코드가 된다.
당시는 에이즈환자와 손만 닿아도 옮는다고 여기던 때였다. 그러나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심각한 와중에도, 그의 연인 로스가 죽을 때까지 그 곁에서 정성껏 간병한 사람이 있었다. 펠릭스는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 하여 간병인의 손을 촬영한 작품(Untitled_For Jeff 1992)을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공의 장소(지하철 및 야외 광고판)에 설치하였다. 에이즈에 대한 혐오적 시선이 공적인 장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으로 전이되도록 의도한 작업이다.

그리고 관객들의 참여에 의해 완성되는 그의 주요 작품들은 그의 정체성과 고민들에서 비롯된 의도를 오롯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사회적이며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79kg의 로스의 몸무게만큼 쌓아놓은 사탕더미,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덧대어 바닥에 펼쳐놓은 147kg의 사탕들. 사탕은 그들의 육체를 의미한다. 그의 대표작인 이 작업은 종국에는 준비된 사탕을 가져가는 것으로서 관람객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펠릭스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무제untitled’로 하였고, 그 부제를 달았는데, 사탕시리즈(Untitled1991-1992)의 부제는 복수revenge’ 내지는 플라시보placebo’였다. 이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그의 연인 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동성애에 대한 혐오나 에이즈에 대한 혐오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사탕을 집은 사람들의 행위, 그것을 먹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연인의 죽음을 함께 애도한다는 차원을 넘어 혐오를 삼키는 것이자, 전염의 행위를 상징한다. 달콤한 사탕은 일종의 사랑의 맛이자, 탐닉의 코드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사랑에 동참하는 관람객들의 행위.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겠는가. 그의 작업이미지는 때로는 대단히 먹먹한 풍경을 담는다. 포스터 작업이 그것인데, 이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연인을 잃은 그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총기사망자에 대한 애도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포스터들도 사람들이 직접 가져가는 행위를 통해 완성이 된다.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던지 간에 이미 그의 먹먹함은 사람들에게 전이되어 그들 삶 자락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첨예한 인식의 한 복판에서 이를 정치적이고 선동적 구호로 표명하기 보다는 예술의 미적인 언어를 통해, 사람들 마음으로의 전염을 통해 사회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파급력을 직시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름프로젝트_에이즈 추모퀼트> 에이즈 추모퀼트는 각각 3x6피트의 크기로 손바느질한 퀼트 조각들이며, 에이즈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행사였다. 1987년 미 워싱턴의 녹지공원에 1,920장의 추모퀼트가 펼쳐졌고, 녹지공원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되었다. 당시 80년대 공화당 정부시절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동성애자들에게 내려진 일종의 신의 형벌로서 혐오를 야기하는 방식으로 회자되었다. 동성애자는 철저히 주류사회에서 배척되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애도할 필요도 없이 숨기고 부끄럽고 저주받은 죽음으로 취급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와중에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에 의해서 기획된 <이름프로젝트>는 그저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누군가가 진정으로 사랑한 이의 죽음으로 에이즈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시하는 일주일 동안 약 50만명의 추모객들이 모이는 등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이 프로젝트는 동성애자 인권 및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목적한 사회운동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듬 해 20여개 도시를 순회하였고, 8,288장의 퀼트가 백악관 앞에 펼쳐졌다. 유족 및 유명인들이 마이크를 쥐고 희생자들을 호명하는, ‘이름부르기는 추모 행사의 중요한 일부로 역할하였다. 1992년 미국전역과 세계 27개국에서 에이즈추모 퀼트를 보내왔고,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에 맞추어 이름프로젝트를 공식 초대한다. 이는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동성애자 인권 및 에이즈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빌 클린턴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 한 단면이었다. 이름프로젝트는 4만여장의 퀼트와 100만명이 넘는 추모객들을 마지막으로 1996년 막을 내린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신의 형벌이 아닌 인간의 죽음으로써, 에이즈희생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응한 감동의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