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3일 토요일

기고문) 예술과 철학, 사회사적문맥과 함께 본 17세기 네덜란드의 두 거장


 
예술과 철학. 사회사적 문맥과 함께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와 화가 베르미어(Johannes Vermeer)’
최윤정 큐레이터 미학/미술비평
 
1. ‘모든 것 속에 실체가 있고, 실체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인간이 유한한 이상 실체를 깨닫는 인식은 이성적인 분석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가의 철저한 주관에 의하므로. 이에 기반하여 사회사적 문맥을 담아 17세기 네덜란드의 두 거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한쪽은 철학자(스피노자1632-1677)로서, 또 다른 한쪽은 예술가(베르미어1632-1675)로서, 그들이 그들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 실천해왔던 가치는 물론, 그로부터 예술과 철학의 긴밀함을 추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17세기 철학에서의 합리주의와 미술에서의 장르화
유럽의 17세기는 전반적으로 르네상스를 통해 중세를 넘어서고 본격적인 근대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신과 내세에 대한 사유를 중심으로 삼았던 중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심속에 그 빛을 잃는다. 이는 17세기 유럽사회에서 일어난 종교, 정치, 경제의 흐름과도 상응하는데, 이 시기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합리주의의 철학적 테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면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사회변화는 과학과 밀접하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중간에 위치한 17세기는 과학적이고 필///인 법칙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우주는 무한대이며, 통일적으로 단 하나의 원리에 의해 조직된 상호작용적이며 연속적인 체계라 주장했고, 이는 일체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자연법칙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신학적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의미의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후 우주에 대한 탐구는 케플러,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을 통해 계승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적 세계관(천동설)을 전복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학적 향방과 더불어 사상에 있어서도 신 중심적 세계관은 과학적인 태도에 근거한 근대적 사유의 주체로서 자연의 빛인 인간의 이성을 연구하는 합리주의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에 있어서도 절대주의적 왕정체제에 대립되는 공화주의의 탄생을 예고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적절한 기수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 북부 7지방은 카톨릭 진영의 수호자였던 스페인의 펠리페2세로부터 독립(1609)을 달성하여 그들의 종교와 시민적 자주를 이루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 시기는 네덜란드의 전성기로 불리며 경제적인 번영은 물론, 이를 토대로 자유와 관용을 낳으며, 지성인들의 피난처로서 역할하기도 하고 동시에 예술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 성장한 시민계급은 문화와 예술향유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예술은 성스러운 종교화나 역사적 사건 혹은 영웅이 아닌, 스페인으로부터 자주적으로 획득한 소중한 삶-세속적인 현상들에 대한 관찰-을 담아낼 수 있었다. 당시 신교의 성상숭배금지령은 화가들로 하여금 더 이상 성스러운 주제에 주목하지 않고 그 관심을 일상에 향하게끔 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점도 주지할 일이다.
장르화(*풍속화,세속화)에 나타나는 인간의 삶은 비속하고 사악하고 천한 것과 더불어 기쁨과 진솔함이 펼쳐지는 일상의 자////운 현상으로 묘사된다. 스피노자 역시 인간의 정서적 삶이 전형적인 선과 악의 갈래로 규정지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이러한 맥락은 당시 사회가 눈에 보이는 실제 세계에 대한 관심을 전제로 하고, 이 관심은 자기 외적인-초월적인 것에 대한-도덕에 의해 강제되지 않음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서 장르화에 나타나는 도덕이란 인간이 속한 현실의 삶에 기초한다. 작품에 표현된 도덕은 작품 속 대상들의 상징성 즉 알레고리(allegory)를 통해 구현된다. 이러한 알레고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해골, 거울, 시계, 비누방울, 진주 등과 같은 장신구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고, 술과 굴, 개나 원숭이 등은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는 식으로, 또한 이와 더불어 작품해석의 방향을 정해주기 위해 화가의 장치는 그림 속의 그림이나 직접적인 단어삽입 등을 통해서도 현실적 도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베르미어, 델프트풍경




3. 베르미어와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유작에서 ‘1662101날짜가 적힌 하나의 문서가 발견된다. 이 문서의 내용은 어떤 유명한 시민이 델프트의 화가 베르미어가 가치있다고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베르미어는 이러한 장르화의 전통 속에서 고유의 표현을 찾았다. 하여 장르화의 도덕적 교훈을 훨씬 뛰어넘는 회화 그 자체의 근본가치를 상기시키는 미적인 탁월성에 도달하였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그의 표현은 화면의 일부가 아닌 화면 전체, 표현대상 하나하나에 생생한 질감을 꿈트게 한 의 표현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념적 요소, 즉 사물에 내재한 빛과 내재성의 철학을 주장한 스피노자를 연상시킬 수 있다.
 
잠시 스피노자 내재성의 철학을 간략히 살펴보자. 스피노자에게 모든 존재는 무한한 존재자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무한한 존재자란 인간 외의 세계에 있으면서 피안에 대한 구원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격적 신이 아닌 전체로서의 자연이자 필연적인 자연의 질서로서 무한자이고 세상의 실체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 있게 하는내재적인 원인(이유/)으로서 이러한 신은 인간과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않으며 내재적인 관계(역능/)를 통해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생을 긍정하는 힘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인간이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소중한 것이다. 이는 당시 시대가 요청한 합리적 인간관과도 상통한다.
스피노자와 베르미어는 1632년 각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그 시기는 네덜란드의 시민사회가 정립된 때였고, 관용적 분위기를 통해 자유로운 학문이 생동할 수 있었기에 유럽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밀집하기도 하였다. 암스테르담 유대인 거주지에 살던 스피노자는 레이든을 거쳐 1660년대부터 레인스뷔르흐에 살았고, 이휴 1663년 포르스뷔르흐로 옮겼으며, 그리고 나서 1670년대부터 16772월 죽기 전까지 헤이그에 살았다. 여기서 포르스뷔르흐는 베르미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던 델프트에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마지막 정착지 헤이그는 또한 델프트와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지리적 근접성은 스피노자와 베르미어가 서로에 대한 명성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는데, 실제 베르미어는 델프트에서 주로 활동하기는 하나 헤이그에서 예술감정인으로서도 활동했고, 1661년 이래 화가 장인길드의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즈음 스피노자는 유대교에서 파문당하고 저편 세계에 대한 표상을 거부한 사상가로서 당시 네덜란드 종교 팜플렛에 악명높은 이단자 계열로 표기될 만큼 그 이름이 자자했다.
그 와중에 스피노자가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 화가들과도 어울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심지어 한 측에서는 스피노자와 렘브란트는 이미 서로 알고 있었고 심지어 직업 만났다는 내용이다. 이 말인 즉 당대 환경에서 스피노자와 베르미어 역시도 접촉을 했거나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더욱 뒷받침한다.
 
다만 양자의 연관에 있어 종교에 대한 문제는 한 가지 걸림돌로 작용하는데, 스피노자는 신학을 다룸에 있어 자연의 빛즉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사유가 우선한다고 보았고, 그리하여 초월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를 비판하였지만, 베르미어는 이러한 신앙을 가진 당대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베르미어가 카톨릭적 이념에 봉사했다가 보다 그의 현실적인 문제로 종교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의 처가는 베르미어를 재정적 압박에서 해방시켜주는 역할을 하였고, 결혼 전 재산상속을 이유로 하여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일 뿐, 그의 작품세계에 종교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피노자와 베르미어 간에 형성되는 내적 연관성의 단초는 그리하여 첫째, 그들 각각의 작업이 종교와 무관하다는 것, 이는 일상의 장면을 통해 종교적인 구원의 의미를 담았던 렘브란트에 비하여 스피노자가 베르미어의 문맥에 더 가깝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둘째, 그들이 활동했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북부에서 보이는 특유의 문화적 환경이다. 이곳은 전반적으로 종교적이고 궁정적인 문화를 표방했던 다른 유럽사회와 구별적인 특징을 갖는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시민계급의 대두는 이에 대한 외적인 근거가 되었고, 과학적 세계관과 장르화의 경향은 양자의 내면에 머물면서 그들 고유의 작업이 성취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의 작업이 바로 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빛이 사물에 스며드는 그 모든 특성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내재성의 주요 테마이자 그 자체이며, 베르미어 회화의 고유의 표현과 그것이 함의하는 철학적인 성격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4. 내재성의 빛 표현,
행위의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포착하는 인간의 사유를 가시화하는 바
장르화가 선사하는 일상의 유머러스한 요소는 베르미어 회화에 이르러 천의 색깔을 고조시키는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통해 신성한 감응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집중점 창조와 더불어 관조의 효과로서 정적인 분위기를 배가한 요소에 기인하는데, 실내의 일상적 장면은 그리하여 여러 인물이 아닌 하나의 인물이 주로 위치한다. 이 인물들은 모두 공간적으로 창문이 닿아있는 왼편 구석에 있는데, 이러한 격리 효과를 통하여 베르미어는 관람자가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집중되는 상황은 그 인물이 행하고 있는 행위로 의도하였다.
빛이 형성하는 분위기는 베르미어가 의도한 주제들에 핵심적이다. 부드럽고 정적인, 그 어떤 시간적 흐름도 배제하는 빛.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인물들의 행위의 순간은 무시간적인 빛 속에서 영원히 지속되듯이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들이 당대 장르화가들과 구별점을 보이면서 베르미어 회화의 고유한 지점을 형성한다.
 
* <우유를 따르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45.45x40.6cm, 1658-1661,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소장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은 우유를 붓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우유를 붓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이 와중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혹은 누가 등장하는지, 우유를 따르는 사연 등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 다만 그 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행위 자체를 보고 있을 뿐이며, 조심스럽게 흐르는 우유의 지속적인 흐름과 함께 우유를 따르는 일상의 한 행위 자체가 영원할 것 같은 인상을 강화시킨다. 여기에는 시간적 흐름조차 감지할 수 없다. 일상의 평범한 행위가 신성한 감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주변 사물들에 표현된 빛점들이 이를 더 강화시켜주고 있다. 소박한 일상 속에서 여인의 우유를 따르고 있는 팔은 굵으면서도 힘차고, 노동하고 있는 여인의 팔은 환하게 빛난다. 전통적인 알레고리에서 우유/액체등을 붓는 행위는 절제를 상징한다. 많이 부으면 넘치고 적게 부으면 모자라는.
 
 
<지리학자> 캔버스에 유채, 53x46.6cm, 1668-1669, 슈테델미술연구소 소장
 
 
이 작품은 정적인 분위기에서보다는 빛의 표현에서 더욱 면밀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그는 내면적 관조상태에 있던 여인과는 달리 창 밖 세계로 고개를 든다. 이 젊은 자연과학자는 사유의 행위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구성요소들 중 책상위에 놓인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종이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달리 환하다. 흰 종이는 자연과학자의 세계에 대한 사유, 즉 진리탐구의 장을 마련한다. 더불어 원근법적으로 과도하게 크게 그려진 콤파스를 쥔 손은 학적이고 능동적인 사유를 의미하며 이 작품의 주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차가운 빛의 표현을 통해 강화되고 명석하고 판명한지성의 질서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빛나는 흰색은 현존하는 사유하는 자와 대화하는 힘의 영역으로서 취급된다. 이러한 흰 영역은 새출발을 상징화할 수 있다[...]희고 맑은 고문서는 인간에게 어떤 순화를 일으키게 하고[...]학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의미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것이 빛이고, 어두운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한낱 빛의 효과일 뿐이며, 그 빛을 반사하거나 흡수하는 여러 신체들 위를 비추는 빛의 한계 내지 경계이다[...] 명암 그 자체는 그림자의 밝음과 어둠의 효과이다
 
빛은 색을 창조하고 색은 밝음과 어둠으로 지시된다. 빛의 어두운 효과는 색을 탁하게 하는데, 이는 외부적인 자극이 신체에 남기는 흔적으로서 인간 등 유한한 존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한계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빛의 표현이란 초월적인 인간의 역사적인 행위나 성서의 중요한 장면을 밝히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베르미어의 빛은 작은 사물에서 조차 반짝이며, 작품의 인물 역시도 내면화된 관조로서 행위에 몰입하고 있다. 유한한 세계조차도 내재성의 질서 하에 의미 있게 결합된 빛의 세계, 빛의 순수형상으로서, ‘신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생에 대한 본질적 의지 등 스피노자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바.
 
철학에 대한 시각적 대응물로서의 예술이란 시대적 요청, 사회사적 문맥 독해와 함께 해야 하는 연구과제로서 풍성한 단초들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 스피노자와 베르미어를 통해 17세기 네덜란드 사회가 추구하는 세계관의 한 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혹은 역으로 예술과 철학의 관계를 고민하며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대적 특징을 주요 지점으로 삼아 스피노자와 베르미어의 작업 속에 새로운 관계적 서사를 가미하여 연구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 나에게는 진정 흥미로운 것이다.
 

2015년 4월 9일 목요일

기고문) 예술과 사회I. 삶의 현장, 그리고 예술


예술과 사회I. 삶의 현장, 그리고 예술
 
최윤정 큐레이터 ● 미학/미술비평
 
라는 사람이 그곳에 머물렀는지, 그에 대한 궤적이란 비단 활동적 결과 및 껍데기 안에서만 이야기될 수 없는 바. 안으로 향해있고, 자각을 통해 외화되는 것, 그것이 소명을 구체화하고, 막연한 두려움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용기와 진정성의 근간을 잡아주는 것은 아닐는지. 어쩌면 그것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다.
 
언제든지 특수한 장소와 상황에 놓일 수 있음을 감안하여, 기획을 둘러싼 주변지형 문화와 사람들의 특색 등을 파악하는 일은 큐레이터가 우선적으로 프로그램 기획 이상으로 고려해야 할 지점으로 내게는 이에 대한 확고함이 있다. 실상 기획이건 창작의 진정성은 구체적인 관찰과 시선을 관점화해야만 자연스럽게 외적행위로 배어나오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연히 기획 내지는 창작의 태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다는 것이 난점이다. 발견되기 힘들다. 주변의 서사가 진정으로 잘 베어든 현장/공공예술프로젝트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창작과 협의의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시대와 상황 그리고 장소에 대한 문맥적 사유 없이 그 진정성은 보증할 수 없다. 모든 문맥적 사유의 핵심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의 문제의식이 함께 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인간의 자존감과 직결되기도 하고, 삶의 역능회복/치유 문제에 관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예술창작은 우리 모두가 세상의 일부인 한, 단순한 잉여 활동이 아니라, 명백한 생명활동인 것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I am shooting back!” 슈팅백프로젝트(1989-)
 

워싱턴정부출입기자이자 종군사진기자로 알려진 짐 허바드(Jim Hubbard)는 워싱턴 인근 홈리스피플들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이 무렵 노숙자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인 캐피톨시티인(Capitol City Inn)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때 우연히 작은 갤러리처럼 꾸며놓은 공간을 보게 된다. 아이들이 찍은 사진과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특히 그 곳에서 디온이라는 10살짜리 어린이가 직접 일회용 사진기로 촬영한 사진들을 보게 된다.
실상 캐피톨시티인은 워싱턴 DC의 일상과는 무관해 보이는 범죄와 가난이 만연한 일종의 게토화된 지역으로 분리된 노숙자시설이며, 이곳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범죄에 노출되어 있음은 물론, 총격으로 인하여 희생되기까지 하는 위험을 안고 지내야 했다. 우연히 사진촬영을 위하여 방문한 이곳에서 그 작은 공간은 짐 허바드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비극과 폭력은 수용소 아이들의 삶에서 하나의 일상이 되어 있다. 내가 이 아이들과 만났을 때 나는 이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삶의 과정이 박탈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진기자로서 타이-캄보디아의 국경근방, 혹은 북아일랜드와 레바논의 전쟁터에서 본 기아와 질병으로 허덕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 그는 이와 같은 고통 속에서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그의 방법은 아이들에게 사진기를 쥐어 주고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자 사진가들을 모집하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캐피톨시티인이 있는 한 블록내에서만 촬영할 것, 그곳의 리얼리티를 기록할 것이라는 최소의 규칙을 제안하였다. ‘사진찍기의 창작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자기 삶의 모습을 피사체로서 객관화할 수 있는, 즉 자기 삶의 현실을 보다 냉철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큰 반향에 힘입어 이 프로젝트는 ‘Shooting back education and media center’로 조성되었으며 사진작가들의 자원봉사와 함께 6개의 타 수용소의 아이들에게도 확대되었다. 199053명의 홈리스 아이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모은 전시회가 전국순회로 개최되었으며, 첫 시작을 함께 하였던 몇몇 아이들은 추후 작가로서 비디오제작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하였다. 그 중 한 소년의 고백이다. “만일 내게 이 일(슈팅백프로젝트)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길모퉁이에서 마약을 팔고 있거나 약간의 돈을 위해 누군가를 (총으로) 쏘았을 것이다
 
 
이 단어들은 파벨라의 가장 훌륭한 초상이다
-Amor(사랑), Beleza(아름다움), Firemeza(용기), Docura(다정함), Orgulho(자긍심)-
 

보아 미스뚜라(Boa Mistura)좋은 혼합/섞임의 의미를 지닌 스페인 그래피티팀으로서 예술, 건축, 그래픽 디자이너 등 5인의 인적구성으로 이루어진 팀이다. 2012년 그들은 브라질 정부에서도 관리하지 못하는 버려진 마을, 갱단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파벨라(favela, 빈민지역)의 마을 브란질란지아에서 지내면서 마을꼭대기에서 마을 아래까지 이어내리는 회색빛의 칙칙하고 좁고 긴 골목에 주목하였다. 골목길은 마을사람들의 접점 역할을 하기도 하는 공동의 장소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펼친 작품들은 주민들에게 골목의 빛(Luz Nas Vielas)’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 작업은 세상의 가장 긍정적이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단어, 기본적인 단어이지만 고단하고 지난한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가치를 조우할 수 있도록 하는 의도를 지녔다. 골목의 특정위치에서 단어를 마주할 수 있는 아나모픽기법(착시의 일종)을 활용한 작업으로, 마을 어린이들은 작가들과 함께 대상지인 5곳의 골목길을 함께 정돈하고 페인팅을 하면서 작품창작의 참여자로서 활동하였고, 이러한 활동은 자연히 작품과 장소에 대한 애착으로 연결된다. 장소에 대한 자긍심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다.
사랑, 아름다움, 용기, 다정함, 자긍심이러한 단어를 좁은 골목길에서 우연히 마주하면서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객관화하는 과정이 비록 짧은 순간이라도 펼쳐질 수 있는 아주 집중도 높은 골목길이다. 칙칙한 골목은 그리하여 치유의 골목이 된다. 상상해보라, 피폐하고 가녀린 삶 속에서 터덜터덜. 나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일상 속에서 느닷없이 어쩌면 혼미하게 마주치는 아주 간단한 단어. 가슴 속이 저미는 순간의 감동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자각하고 되찾는 여정으로서 골목길은 이제 음습하고 두려운 곳이 아니라 그들에게 빛의 길이 되어준 것이다.
 
들이 운다평택 대추리 현장예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이미 한번 마을을 한번 빼앗겼던 평택 대추리 주민들은, 이후 2007년 다시 한번 미군기지 확장으로 마을을 빼앗겨야만 했다. 마을 철거 중에 또한 발생한 공권력에 의한 탄압들에 저항하던 주민들 곁으로 2003년부터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마을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예술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담론의 불씨를 일깨웠던 예술가들은 마을에 남은 사람들을 위한 치유적 성격의 작품들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김지혜 작가는 대추리마을 심리적 기억지도주민 공공일기’, ‘대추리 유소년 축구단 노래 복원작업을 통해 주민들의 참여가 직결되는 프로세스를 연동하여 치유의 의미를 담아내었고, ‘황새울 사진관을 운영하며 대추리 마을 어르신들의 가족사진 및 초상을 치유적으로담아왔던 노순택(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은 활동기간 중 대추리를 배경으로 하여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얄읏한 공 시리즈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추리 주민 모두가 사랑하였던 평화를 희구하는, 최평곤 작가의 파랑새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대나무 조형으로 대추리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통한다. 이 외에도 사회참여적 성격을 지닌 많은 예술가와 작품들이 대추리를 무대로 소개되었고, 특히나 시각예술 뿐만 아니라 예술의 다양한 영역에 있는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저항의 형태는 비닐하우스 콘서트(일명 비콘)’ 들이운다 문화제와 같이 문화예술축제의 장으로 연결시켜 당시 이나 마찬가지였던 대추리의 실상이 외부로 자연히 알려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당시 주요언론은 늘 그렇듯이 모두 침묵하였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각예술인들이 조성해놓았던 벽화들이 무참히 철거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이는 곧이어 미술계에서도 핫이슈가 되어 야외 예술작품의 보존, 공권력에 의한 야만적인 행태를 규탄하는 담론생산으로도 연결되었다. 2007년에는 2003년에서 2006년간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대추리에서 활동하였던 기록들을 담아낸 영상물과 출판물로 이루어진 아카이브가 발표되었다
 

 
예술 그 자체는 현실세계에서 생각보다 거대한 권력을 갖지 않는다. 권력의 속성상 뭉치고 떼 짓는 요소가 예술창작에는 왠지 적합하지 않다. 해서 현실 정치 내지는 직접적인 발언으로서 반향은 크지 않더라도, 그것은 삶속으로 젖어드는 지극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직관적인 깨달음 등 인식의 근원에 개입할 수 있는 감성을 촉발한다. 도리어 표피가 아닌 인간 깊숙한 내부로부터의 미세한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그렇다면 현실의 진정한 레지스탕스적 면모란 예술에 즉해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소개>
저자는 홍익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였다. 대구미술관 프레오픈 전시 아트인대구’, 그리고 대추리현장예술아카이브프로젝트코디네이터로 시작하여, 광주의 첫 대안공간 매개공간미나리 큐레이터이자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아시아문화특화지구사업 대인예술시장프로젝트’(첫해 조직팀,2009) 레지던스 팀장을 맡았다. 대구미술관에서 전시팀장으로 3년간 근무 후  현재 지리산프로젝트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