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사회II. 타자로서의 정체성, 중심부를 향하는 소통의 예술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학‧미술비평
#1 ‘길동이는 왜 집을 나갔나’ : 각성된 자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적서차별에 대한 시대적 사회규범에 처절히 저항하였던 홍길동, 그의 사회적 정체성은 ‘서자’였다.
소속된 사회에서 습/득/되/는 자기동일성이란 그 사회가 지향하는 쥬류가치로부터 형성된다. 사회는 존속을 위해 ‘특정’의 가치를 지향하고, 특정가치에 위배되는 삶이란 곧바로 이질적인 것, 바이러스와도 같은 부정적 전염으로 치부하기 마련이다. 홍길동이 지닌 사회적 정체성은 조선사회를 지탱해온 낡은 ‘신분제’ 질서로부터 기인한 것이었고, 이로부터 불편부당함을 느낀 홍길동은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순응을 거부하고 사회의 이탈자가 되어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 세상으로 나아간다.
#2. ‘우리 사회의 스테레오타입’ : 주류의 전략
여전히 2,3세대가 모여사는 가족이 중심에 있으며, 남녀간의 사랑이 큰 축을 갖고, 그 애정의 축에서 여성에 비해 신분적 우위에 있는 남성은 항상 가녀린 여성의 성공과 행복을 조력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자로 설정된다. 무식하고 막돼먹은 캐릭터는 지역방언을 아주 찰지게도 구사한다. 가족중심/이성애/남성중심/수도권‧표준어에 치중한 우리들이 즐겨보는 TV드라마들의 일반적인 공식이다. 여기에서는 비혼자나 1인 가족 내지는 동성애자의 사랑이나, 자기 삶의 주도권을 지닌 여성(보통 기센 여자, 악녀로만 묘사, 여자는 남자로 인하여 완성되는 존재여야 하므로)의 모습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3. ‘룰이 깨지면 죽는다’ : 혐오
흑백의 세계, 미국의 50~60년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드라마>플레전트빌<, 완벽한 가정이 있고, 완벽한 도덕이 있고, 삶의 규율과 인간의 생체주기마저도 완전무결한 곳. 플레전트빌은 주인공이 즐겨보는 옛 TV드라마이며, 현재의 불행을 잊게 해주는 완벽한 세상이다. 신비한 경험으로 드라마 속에 들어간 주인공 남녀에게서 플레전트빌의 삶은 기존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정해진 틀 속에서 안주된 삶, 다른 생각이나 가치를 품어본 적도 없는 삶이었다. 그들의 등장은 자연히 흑백의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가치와 욕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이 점차 컬러로 변해가면서, 흑백중심의 사회는 이를 마치 저주와도 같은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흑백 주류사회 존속을 위해 이윽고 ‘유색인 차별’ 전략을 구사한다.
위 세 가지 씬은 확고한 주류가치에 대한 의문과 ‘서로-가치’를 인정하며 사회적 소통을 절감하게끔 하는 발견된 사례들이다. 여기서 소통의 시발점으로 우리는 주류사회의 ‘타자(성)’-홍길동, 비혼자‧1인가족/동성애/여성/지방‧방언, 컬러로 변한 플레전트빌 주민들처럼-를 살펴야 한다. 여기서 타자는 그저 동정여론이나 패배주의, 열등감 따위에 매여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주류사회가 표방하는 가치가 지닌 모순과 문제점에 근접할 수 있고, 자기 내부에서 겪는 사회적 문맥화로 모순의 핵심에 파고드는 ‘송곳-정체성’을 쥘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는 일원적 강요나 체계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자 이를 구축하는 도정이기도 하며, 경직된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역할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 주류사회의 가치에 의거한 타자(성)은 절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적 요청 내지는 처해있는 상황에 의해 뒤바뀔 수 있다. 사회적이고 관계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으로서 그렇기에 한 사회를 제대로 읽고 비판적인 시각을 마련하는 키워드일 수 있다. 이와 같이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예술은 동시대를 움직이는 중요한 방향성들을 또한 견인해왔다.
<복수와 치유, 중심을 파고드는 예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s Torres 1957-1996)는 쿠바출신 이민자이며 동성애자이다. 미국사회에서 이민자이자 동성애자는 철저한 비주류의 영역에 있었고, 그는 자신의 사회적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로 동시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를 두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들의 예술가’라고도 부른다. 그의 작품의 주요 동기인은 에이즈로 먼저 타계한 애인 로스(Ross)에 대한 그리움인데, 그가 있었던 자리,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죽음에 의해 갈라진 안타까움이 그의 작품에서 고요한 먹먹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에이즈와 동성애는 사회적 혐오를 유발하는 악성 기제였다. 그들은 동성애자였고, 펠릭스 역시 에이즈로 로스의 뒤를 잇지만, 그가 로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었고, 그의 개인적 경험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감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접속코드가 된다.
당시는 에이즈환자와 손만 닿아도 옮는다고 여기던 때였다. 그러나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심각한 와중에도, 그의 연인 로스가 죽을 때까지 그 곁에서 정성껏 간병한 사람이 있었다. 펠릭스는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 하여 간병인의 손을 촬영한 작품(Untitled_For Jeff 1992)을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공의 장소(지하철 및 야외 광고판)에 설치하였다. 에이즈에 대한 혐오적 시선이 공적인 장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으로 전이되도록 의도한 작업이다.
그리고 관객들의 참여에 의해 완성되는 그의 주요 작품들은 그의 정체성과 고민들에서 비롯된 의도를 오롯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사회적이며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79kg의 로스의 몸무게만큼 쌓아놓은 사탕더미,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덧대어 바닥에 펼쳐놓은 147kg의 사탕들. 사탕은 그들의 육체를 의미한다. 그의 대표작인 이 작업은 종국에는 준비된 사탕을 가져가는 것으로서 관람객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펠릭스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무제untitled’로 하였고, 그 부제를 달았는데, 사탕시리즈(Untitled1991-1992)의 부제는 ‘복수revenge’ 내지는 ‘플라시보placebo’였다. 이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그의 연인 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동성애에 대한 혐오나 에이즈에 대한 혐오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사탕을 집은 사람들의 행위, 그것을 먹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연인의 죽음을 함께 애도한다는 차원을 넘어 혐오를 삼키는 것이자, 전염의 행위를 상징한다. 달콤한 사탕은 일종의 사랑의 맛이자, 탐닉의 코드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사랑에 동참하는 관람객들의 행위.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겠는가. 그의 작업이미지는 때로는 대단히 먹먹한 풍경을 담는다. 포스터 작업이 그것인데, 이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연인을 잃은 그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총기사망자에 대한 애도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포스터들도 사람들이 직접 가져가는 행위를 통해 완성이 된다.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던지 간에 이미 그의 먹먹함은 사람들에게 전이되어 그들 삶 자락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첨예한 인식의 한 복판에서 이를 정치적이고 선동적 구호로 표명하기 보다는 예술의 미적인 언어를 통해, 사람들 마음으로의 전염을 통해 사회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파급력을 직시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펠릭스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무제untitled’로 하였고, 그 부제를 달았는데, 사탕시리즈(Untitled1991-1992)의 부제는 ‘복수revenge’ 내지는 ‘플라시보placebo’였다. 이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그의 연인 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동성애에 대한 혐오나 에이즈에 대한 혐오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사탕을 집은 사람들의 행위, 그것을 먹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연인의 죽음을 함께 애도한다는 차원을 넘어 혐오를 삼키는 것이자, 전염의 행위를 상징한다. 달콤한 사탕은 일종의 사랑의 맛이자, 탐닉의 코드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사랑에 동참하는 관람객들의 행위.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겠는가. 그의 작업이미지는 때로는 대단히 먹먹한 풍경을 담는다. 포스터 작업이 그것인데, 이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연인을 잃은 그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총기사망자에 대한 애도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포스터들도 사람들이 직접 가져가는 행위를 통해 완성이 된다.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던지 간에 이미 그의 먹먹함은 사람들에게 전이되어 그들 삶 자락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첨예한 인식의 한 복판에서 이를 정치적이고 선동적 구호로 표명하기 보다는 예술의 미적인 언어를 통해, 사람들 마음으로의 전염을 통해 사회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파급력을 직시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름프로젝트_에이즈 추모퀼트> 에이즈 추모퀼트는 각각 3x6피트의 크기로 손바느질한 퀼트 조각들이며, 에이즈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행사였다. 1987년 미 워싱턴의 녹지공원에 1,920장의 추모퀼트가 펼쳐졌고, 녹지공원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되었다. 당시 80년대 공화당 정부시절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동성애자들에게 내려진 일종의 ‘신의 형벌’로서 혐오를 야기하는 방식으로 회자되었다. 동성애자는 철저히 주류사회에서 배척되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애도할 필요도 없이 숨기고 부끄럽고 저주받은 죽음으로 취급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와중에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에 의해서 기획된 <이름프로젝트>는 그저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누군가가 진정으로 ‘사랑한 이의 죽음’으로 에이즈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시하는 일주일 동안 약 50만명의 추모객들이 모이는 등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이 프로젝트는 동성애자 인권 및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목적한 사회운동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듬 해 20여개 도시를 순회하였고, 8,288장의 퀼트가 백악관 앞에 펼쳐졌다. 유족 및 유명인들이 마이크를 쥐고 희생자들을 호명하는, ‘이름부르기’는 추모 행사의 중요한 일부로 역할하였다. 1992년 미국전역과 세계 27개국에서 에이즈추모 퀼트를 보내왔고,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에 맞추어 이름프로젝트를 공식 초대한다. 이는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동성애자 인권 및 에이즈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빌 클린턴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 한 단면이었다. 이름프로젝트는 4만여장의 퀼트와 100만명이 넘는 추모객들을 마지막으로 1996년 막을 내린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신의 형벌이 아닌 인간의 죽음으로써, 에이즈희생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응한 감동의 예술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