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31일 화요일

`광주 미술의 젊은 시선’ _광주드림 공동기획

`광주 미술의 젊은 시선’ 공동 기획에 부쳐
젊은 그대들이여 잠깨어~오라 광주가 들썩이게
광주드림
기사 게재일 : 2009-03-25



“저 푸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처럼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_문득 어린 시절 뜻도 모르고 불렀던 김수철의 노래 中에서

최윤정 ● 매개공간 미나里 큐레이터

광주드림과의 이번 기획은 매개공간 미나里(이하 ‘매미’)가 설정하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및 그 역할에서 중차대하게 바라보고 있는 일이다. 매미에서 진행하고 있는 예술인 아카이브가 포트폴리오 뿐만 아니라, 보다 차별적이고 창의적으로 예술가에 대한 면밀한 접근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예술인에 대한 인터뷰(연구) 및 그로부터 생성된 각종 자료들로부터 기인할 바가 클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광주드림이 지역작가들에 대한 정기적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를 문화란에서 다뤄보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 자리에서 공동기획으로 내용을 만들어보자 의기투합하였던 것은, 이는 적어도 관성적인 ‘소개란’ 이라든지 같은 급으로 ‘스타만들기’에 무게 중심을 두기보다는, 대중으로 접근되는 ‘예술향유층 확대’와 ‘예술창작활동에 대한 독려’를 그 기본 골조로 하기 때문이었고, 또한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작가를 다뤄보고 더불어 인간적인 접근 역시도 시도할 수 있는 ‘인터뷰’라는 형식이 그에 적절하다는 판단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더 나아가 이는 그 컨셉에서 광주 미술계 새로운 세대나 경향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등 새로운 세대를 위한 광주 미술사 초안 기록에 있어서도 중요한 재료로 역할할 것이다.
매개공간 미나里는 예술가를 만나고 관련한 프로그램을 계발하며 또한 진행함으로써 예술에 접근하는 방식을 가시화 해내는 공간이다. 그러기 위해서 프로그래머는 대상(자)에 대한 재빠른 파악과 이해, 긴밀한 접촉, 적극적인 대시를 잘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대상(자)를 우선적으로 의식적으로라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또한 진행 전체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그녀는 순식간에 대상화되어버리고 그저 시간이 우선시되어 머리로만 진정성을 나불대는-물론 그나마 진정성을 외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보는 편이지만- 부적절한 상황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말은 비록 ‘아니’라 할지언정, 과연 그 가슴은 ‘답답하다’ 지저귀고 있고, 유수처럼 흐르는 말을 하고 있는 주체는 결국 그 말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새삼스레 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전체를 관망하고 틀을 규정지어야 하는 큐레이터로서 역할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진행을 맡는 구조를 되살렸을 때, 이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큐레이터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공동기획 전반을 살피면서 또한 더불어 진행할 토크쇼(공동기획에 해당하는 토크쇼 분량에 맞춤) 내용에 대한 논의를 함께 거친 후, ‘인터뷰어’(광주드림 문화부 기자 이광재)를 토크쇼 진행자로서 세울 예정이다. 이는 전체를 관망하면서, 진행자가 수시로 던지는 보다 직접적인 질문들,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핵심사항들, 우연히 발견될 수 있는 정말 의외의 것들을 기록하고 관찰함으로써 ‘~만 말’토크를 단순 이벤트성 기획이 아닌, 질적으로 계속해서 거듭나는 공간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주 짙게 개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기획의 방향과 실행이 그 목적을 상실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된다면, 주변 상황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나 환경이 자초한 음지 아닌 음지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자극을 받아 다른 예술가의 창작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 창작활동에 있어서도 보다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리라고 본다. 직접적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한동안 광주가 이 공동기획으로 인해 뜨겁게 수군거리기도 하고 들썩이기도 하였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또한 이 공동기획이 자신의 꿈과 함께 정말 자고 있을지 모를 ‘젊은 그대’들에게, 그대들의 젊음은 ‘사랑스럽고 태양같다’며 ‘잠깨어~오라’ 하는 뜨겁고 달콤한 대시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

2009년 3월 11일 수요일

START!! 대인예술시장 레지던스 프로그램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입주자가 모두 선정되었고,
3월 9일은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각 작업실 및 공동시설들을 둘러보고 프로젝트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


반응과 반작용, 수긍과 긍정 사이에서

입주자들의 면면을 관찰하면서 설레기도 하고 참으로 묘한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나의 모든 감각과 체험이 일년전 한 기억으로 연동되는 시점이었다.
내가 처음 광주에 왔을때,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갈망하고 있던 것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발견했을때 그날 난 전혀 잠을 이룰 수도, 자고 싶지도 않았다. 운명까지 운운하는 것은 다소 유치하기는 하지만, 땀 한줄기가 뒷목을 타고 내려와 귀중하지 않은 맥락의 과도한 고민이 자연스레 주변으로 발산되었던 그러한 차원의 경험. 그것은 이후 내 마음 그릇의 크기로 인하여 버티기 힘들었을 지도 모를 많은 일들을 끌어안으려 애를 쓴다거나 혹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벗겨내 버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항상 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번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내가 그러했듯,
일년 전 당시 공간을 소개하면서 나의 반응을 살피시던 선생님의 유독 긴장되어 보였던 표정이 떠오른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표정의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나는 그저 행복했으므로 긴장된 표정을 당연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저 행복했던 마음은 다소의 우려나 육체적으로 겪는 고초로 인한 정체모를 마음이 되었다가도, 일반적으로 부정적일 수 있는 그 정체모를 마음이 한편으론 오히려 막연히 행복했던 기분을 들뜨지 않게끔 강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의 긴장된 표정, 그것이 언제쯤 풀리셨을까? 풀리기는 한 것일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살짝 그 마음이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책임의 무게로부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나도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입주자들의 상반된 반응을 살피며

우선 예쁘게 잘 다듬어져 있는 것보다는 일부러 날 것을 보여주자 하였다.
날 것을 보고 입주자들이 어떤 고심을 하게 될 것인지, 숨기지 말고 보여주자 하였다.
그것이 나는 다소 우려가 되기도 하였지만, 우리 프로젝트는 애초 겉멋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러자고 수긍하였다.

그 예전 나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그들의 반응 속에서 나는 정말 긴장하고 있었고 솔직히 말하건데, 살짝 겁도 났다. 그러나 물론 아/주 살짝이다.
결국 날 것을 보고 수긍하지 못한 자는 정중히 작별인사를 했고, 애매한 반응을 보인 자는 그래도 한번 해보자 의기를 다졌고, 날 것이 좋아 신난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어느 반응 하나하나 평가적으로 다뤄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호하게 한 가지 아쉬운 마음이 한켠에 들었다.
지금이 무슨 개척시대도 아니지만, 이미 그 모든 것이 가능하고 할 수 있는 하드웨어가 갖춰진 세상에서, 그것이 정말 당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 역의 방법으로 그것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가치를 찾고자 애를 쓰고 있다. 일반의 시선에서 그것은 어떻게 보일까? 다만 이것은 각자가 선택한 방법론이자, 그저 생활의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지, 고귀한 노스텔지어의 꿈을 향한 돈키호테의 놀음 정도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자연스러운 또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난 개인적으로 억울한게 참 많은 모양이다. 난 허파에 바람들어간 적도 없고, 간이 부어있지도 않다. 허황된 꿈, 그런 꿈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이에 관해 나는 항시 부정적이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그 누구라도 그러하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다. 삼각형이라는 것은 나름의 어떠한 균형을 전제했을때 가능하다. 이에는 직각삼각형도 있고, 정삼각형도 있고... 그저 난 나에게 '좋은 것'에 약간의 비중을 더욱 두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푸념이 필요하다.


자기 희생과 극도의 자아도취 사이에서

무언가 차려진 상에 수저를 놓기보다, 없는 상부터 만들어가는 것은 당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갖는 애정도와 만족감이 자기 수저에만 그치지 않고, 수저가 올라오기까지 그 모든 전과정을 경험하고 만들어가는 것에서 파생되는 그 모든 감각과 사고를 수반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는 그만큼의 자기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에게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자기 희생을 감내하고 얻은 일은 그만큼 자신의 속을 단단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되는 말이라고 주장한지가 몇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문제는 '자기 희생' 그 정체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단순한 정의감, 사회적 책무, 남들의 평가... 어설픈 나이에 지금 현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나에게 가능한 자기희생이란 나의 '자존감'이 중심이 되어 그것이 '그러한 바'라고 판단하는 것들을 행했을때 의미를 갖는 것일 게다. 내가 말하는 '자존감'이란 내가 나로서 살고 싶은 마음, 자기 성찰적이고 반성적인 지점을 제공할 수 있는 여력, 내 존재에 해가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리는 것등을 포함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나다. 필요 이상으로 사회적일 필요도 없고, 필요이상으로 사회를 꺼려할 필요도 없다. 생각도 없는 사물에 대해 자기 잘못을 전가해버리는 몹쓸 짓들, 결국 그 모든 잘못과 고민과 해악은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항상 자기 자존감과 자아도취 사이를 헷갈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나다.

지하철 2호선에서 3호선을 갈아타는 사이 정면 벽에 쓰여있는 시구를 보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시인 조병화"


문득 일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들이다.
그 일년동안 난 참으로 많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참 재미있다. 어떤 사건이나 일을 계기로 과거를 떠올리고 전혀 다른 시간에서 이를 곰곰히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그러나 한편으로 그래서 더더욱 아쉽다. 왜 진작에 알지 못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