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0일 월요일

결코 명멸하지 않을 ‘강’의 메시지( <강과 사람> 전시서문, 2019)

결코 명멸하지 않을 의 메시지
 
최윤정 미술비평 · 서울시 문화비축기지 전시기획담당주무관
 
애초 강은 표면은 잔잔하되, 그 속은 유유한 흐름이기보다 격하고 매섭다. 물질을 품고 시간을 품고 변화를 이끌고 생명을 순환시키는 운동성을 갖기에, 강은 그 생태로 인해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매개가 되거나, 켜켜이 이어온 삶에 대한 비유, 혹은 인간 역사의 징후를 이끄는 상징이 되어왔다. 자연의 경계선으로서 각각의 강줄기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지역 땅의 생김새에 따라 굽이굽이 제 속도를 만든다. 물리적 경계를 만들면서도 이내 이어져 그 경계를 흐린다. 죽음과 삶, 태동하고 소멸하는 역사, 이어지는 생명의 소리 그렇게 우리는 의 시간을, ‘의 모습을 느끼고 공유해왔다.
강의 흐름은 사라지지 않을 기억에 잇고 닿는 것, 언제고 품었던 기억의 정황을 끄집어내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환기하도록 하는 사유의 흐름과도 같다. <강과 사람>17인의 작가들이 마주한 의 이치와 그 본성에서 추출한 사람의 모습을 다룬다.
 
세상 낮은 곳으로 흐르는
흐름의 초입에 김성래의 강을 건너는 소녀가 있다. 잊혀져가는 익명의 무수한 희생자들을 배에 태우고, 익살스럽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한 생명들이, 강을 건너는 영혼들을 호위한다. 영생의 땅으로 향하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행렬, 일종의 씻김굿이자 반야용선이 떠오른다. 소녀로 상징되는 이 세계에서 고통받는 자들과 약자를 위한 연대의 몸짓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공감의 정서를 간직한 생명체들과 함께 놓여 있다. 마치 이 전시의 향방을 예측하듯, 전시된 다른 모든 작품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축을 보여주는 듯하다. 남한강의 주변의 산세와 강의 흐름을 그린 조용상은 그 배경 곁에 지금의 시간,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는,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물결을 병치시켜 놓았다. 마치 잔잔한 물결 아래 거센 소용돌이처럼 움직임을 만들고자 하는 단 하나의 염원이 뿜어낸 풍경이다.
 
어느 것 하나 사연이 없을 리 만무한 세계의 구성체가 갖는 속성은 못을 박아 만든 이돈순의 풍경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듯 평온하기까지 한 풍경은 그러나 쇳조각을 긁는 듯한 감각과 강렬한 매스로 인하여 곳곳에 도처하는 비극적인 역사, 사건, 원한의 시원을 상기시킨다. 산업사회의 부산물인 캔조각을 꼴라주하여 죽음의 해골을 형상화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노동자의 모습(비정규직 노동자)을 표현한 나종희의 작품은 공산품 재료 특징과 더불어 일회용, 재활용의 가치로 하락된 인간의 모습을 비관한다. 박은태는 배경을 빼앗긴 소외되고 외로운 인간의 모습과, 겹쳐진 기억과도 같은 이미지로 낡고 버려진 기계를 등치시킨다.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은 인간 소외와 사회적 조건에 대한 성찰, 노동과 삶의 의미를 되묻도록 추인하는 작업이었다. 박영균의 작업은 저항이 이뤄지는 현장의 구체적인 사건과 문제의식들이 그에게 접속되는 지점, 예술가의 창작산실이자 가장 개인적인 장소인 작업실로 견인되는 과정들을 잇는다. 상존하나 대립의 색채로 인지되는 빨강과 파랑이 뒤섞여 보라 빛을 만들어낸다. 생각과 마음의 갈등이 혼재되나 도리어 변증법적으로 변화를 이끄는 시작이자 염원을 만들어내는 빛이다. 기괴함과 유머러스함이 조합되어 마치 블랙코미디를 연상하게 하는 이흥덕의 작품은 그 특유의 만화적인 도상으로 현재의 세태를 보여준다. ‘불타는 집연작은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 사회적 구조를 풍자한다. 또한 여인들은 차별과 폭력을 상징하는 악어와 늑대의 우위에 선 행렬을 보여주고 있다.
 
원형을 쫓아, 생명을 순환하고
이주영의 작품에서 엉겅퀴는 강의 물살을 증거하듯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인간의 시간을 넘어 삶의 움직임과 변화들이 자리했을 땅에 굳건히 자리한 나무는 사슴의 뿔처럼, 혹은 무무巫舞의 형상으로 하늘을 향해 굳건한 줄기를 뻗어 올린다. 예술의 자격, 그 본질을 묻는 듯한 김보중의 작업은 결국 자연을 대상화하거나 흉내내지 않고, 원시자아이자 자연의 일부인 생명으로서 세계를 감각하는 에너지, 사색자, 행위자로서 인간을 보여준다. 나무와 짐승, 인간 모두 원시적인 색채로 부분도상 표현으로 공유하는 한타(한상훈)의 작업은 자연의 일부이자 모두가 같은 생명체로서 이 세계에서 위계없이 동등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생명의 원형적 에너지가 충만한 작업이다. ‘의 봄과 여름, 가을의 풍경을 보여준 류연복의 풍경은 의 시간을 관조하며, 인간의 짧은 생로병사와 역사가 펼쳐지는 이 땅, 자연이 지닌 유구함을 강조하였다. 역사와 삶을 품어내는 장소, 현장으로서의 자연은 도리어 인간의 시간과 대비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를 성찰하는 너른 품을 형상화한다. 김태헌은 남한강 유역을 유람하며 포착된 장면들과 상념들을 화첩에 담아낸다. 한편의 유람기, 그 속에는 유적지도 있고, 군대도 있고, 나무도 있고, 모텔도 있다. 이와 같은 이미지들과 함께 작가가 그곳에 머물며 느낀 생각, 기억들이 6미터 길이의 화첩에 빼곡히 담겼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장소마다, 그 속에서 떠올린 생각들이 마치 숨소리처럼 들리는 듯 하다. 아이들과 함께 완성한 서종훈여강4대강 사업으로 그 아름답던 모래톱을 잃은 강이다. 부감법의 형식으로 하늘에서 강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곳곳에 집과 물고기들을 그려놓았다. 강이 회복하기를 바라는 연꽃 한 떨기가 화사하지만 이내 처연하다.
 
여울을 거슬러, 잊혀지지 않을
여울은 지형으로 인해 유수가 빨라지는 강의 부분을 말하는데, 울퉁불퉁한 돌덩이로 이뤄져 있어 물이 소리내어 운다고 한다.(아다시피 연어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거친 여울을 통과해야만 한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 많은 남화태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철막 장벽은 높아만가고/정겨운 고향집 막연하다/아리랑 아리랑(...)’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사할린을 주요 전수물자 공급지로 삼아 조선의 청년들을 혹한의 땅에 가두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해방 후 그들은 잊혀지다시피 하였고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해균은 사할린을 다녀와 경기일보에 칼럼을 수록했고, 그 인상적인 장면들을 회화로 남겼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리워도 갈 수 없었고, 약소 민족으로서 감내해야만 했단 고통이 현재의 시간을 관통하여 전달된다. 이오연은 가족과 고향을 그리는 그들 기억 한 켠을 연작으로 담았고, 사할린 탄광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을 노동자의 모습을 다루었다.
이 작업들을 보면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결코 지난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여전히 문화적 습성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고, 또한 그저 과거의 아픈 역사로만 취급할 수 없는 이유는 생존자와 그 자손들이 분명 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분단의 상황 속에서 국가는 결국 그들을 방치하고 외면해왔다. 마찬가지로 비전향 장기수의 문제도 같은 연장선에서 고려할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꾸준히 작품으로 다뤄왔던 송창은 경향신문 사진기자의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초상>을 참조, 비전향 장기수들을 화폭에 담았다. 사상 선택의 강요를 부당하다 여기고 전향을 거부하며 수십년 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비전향 장기수들은 평생 빨갱이라는 편견으로 사회적 핍박과 차별의 고통을 받아왔다. 작가의 안부를 묻다연작은 고 서옥렬, 이광근, 허찬영, 류기진, 고 김동섭, 고 김동수의 기억과 증언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작업이다. 그들의 표정과 주름은 꺾여버린 젊은 날의 시간에 대한 회한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분노와 회한, 서러움과 그리움이 응축되어 육화된 붓의 표현이 선연하다.
 
역사의 강
비전향 장기수에서 이어진 마음의 동요라는 것이 김호민의 작품에서 극대화된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영령들을 기리는 위패와도 같았다. (*3.1운동이후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군사를 양성하고 청산리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되 소련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북로군정서. 그리고 연해주 인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한창걸과 그의 군대.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시기 스탈린에 의해 한창걸은 수많은 인사들과 함께 숙청되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 온 의병대들. 분단 이후 사상문제로 제대로 평가조차 받지 못했으나 그 울림은 그들이 머물렀던 시간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함, 의지, 호연지기에 대한 울림이 크다.
 
세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생명과 의지의 원형을 순환시키며, 여울을 거슬러 결코 잊혀지지 않을 기억을 추출하는 강은 사람의 생사고해의 역사를 대변한다. 이 전시는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식민지 역사에서부터 분단의 현실까지 인과적으로 치닫는 모든 비극의 순간들을 다루고 있다. 더불어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벌어지는 반목과 갈등에 대해 움트는 저항과 의지의 씨앗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마치 이는 하나의 거대한 씻김굿과도 같은 전시였다. 단순한 애도와 공감을 넘어 흐르는 강으로부터 현재하는 우리의 삶을 제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강과 사람, 전체에 속박된 하나의 개별자로서 처할 수밖에 없는 굴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자로서의 의지를 되묻는, 그러한 가슴의 울림이 작지 않아 버겁다.
 
 
 
   주최 (사)경기민예총  주관 (사)경기민족미술인협회 
 
 

이민하의 작품론 ;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인천아트플랫폼. 2019)

 
 이민하의 작품론 ; 지극한, 세계를 마주하는
 
최윤정 미술비평 / 현 문화비축기지 전시기획담당주무관
 
그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나는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한계와 모순, 내재해있을 폭력(가해/피해)과 방관자적 태도에 대해 짚어보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는 이 비평에 임하는 나의 고된 과제였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가늠하기 위해, 나에게 맞닿아 있는 사건 그리고 관계된 역사의 현상에 대해서 나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의문을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객관화하고자 애썼다. 그것은 지난한 노력이었으며, 결국 그의 작업이 내게 준 과제는 인간의/스스로의 고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내 안으로 좁혀오는 이 물음은 결국 어떤 상황 속에서 발생한 타인의 감정들을 너는’ ‘기억하고공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기분이었다. 이는 그의 작업이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다.


 
그나마 명료해지는것은 나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감각을 혹은 기억감정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문득 수년전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명칭으로 사용했던 ‘Palimpsest’(복기지, 양피지 위에 쓰여진 글을 긁어내고 재활용한 고문서)를 떠올렸다. 지우되, 남은 옅은 흔적 위에 중첩하여 기술한 내용은 차별과 폭력의 역사,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내게는 이민하의 전 작업의 맥락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준 용어다. 다시금 그것은 벌어진(은폐되고, 방관된 형식으로) 상황(역사, 사건)에 마주한 인간의 심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해석이자 형식이었고, 그의 실천을 이끌었다.
개인전 (2013)에서 작가는 여러 나라의 기도문이 새겨진 가죽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망토를 만들어 직접 입었다. <기도문을 입다>(2009)는 마치 작가의 연속될 작업에 대한 하나의 예고편으로 읽혀진다. 그 씨실과 날실이 풀어져 학살과 분쟁이 벌어지는 세계의 지도 <그을린 세계>(2018-2019)가 되기도 하고, 차별의 역사 속에서 고통 받는 누군가의 증언 <아남네시스>(2017) <제물>(2017)이 되기도 한다. 기도의 행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외침은 연민의 감정과 절박함에 대한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작가에게 종교적 관심 이상으로 기도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기제가 된다. 사적인 이익을 희망하거나 혹은 신념과 신앙 사이에서 경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드러나거나, 기도란 인간의 나약함과 강건함, 속된 욕망과 고결함,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인간의 중층적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행위다.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하고 고개를 숙이는 기도의 몸짓형상은 성스러우면서도 짐짓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혹은 그저 비통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습성의 일부이자, 몸짓형상이 표출되는, 외부적 자극인, 어떠한 상황들과 관계하므로 인간적 본성에 천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마땅히 그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아남네시스>(2017)에서 작가는 가죽을 덮어쓰고 있다. 그 가죽에 참가자인 이주여성들은 한국사회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에 대해 인두로 새긴다. 가죽 위에 인두로 지진글은 사라지지 않을 생채기를 내면서 동시에 그 상황을 이겨낼 내면적 힘을 구축하는 주문처럼 새겨진다. 그렇기에 가련하되 강건하다. 문제없이 흘러가는 듯한 주류사회에서 구체적인 개인들이 안고 있는 고통의 국면이 은폐를 벗어나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기록되고,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내려가는 글은 비록 약자라도 상황을 직시하는 자로서 이미 강자의 폐부를 훑는 공격자가 되었음을 지지한다. 기록이 새겨지는 가죽을 덮고 작가는 눈을 감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다. 가죽 한 장의 두께 사이로 작가는 고스란히 그들 내부의 분노와 슬픔, 고통에 공감하는 몸을 표현한다. 번제의 의식을 빌어 그들의 감정과 생생한 증언을 경청하고 연대하는 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번제의 제물이 아니라 증언을 증거하는 몸이다.
주류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그가 여성 판소리꾼(권송희)의 제안으로 함께 협업한 <트리니티: 홍보가 다시쓰기>(2019)는 흥보가의 가사 일부를 현대적 언어로 바꾸어보고 그 향방이 지금 여기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주류사회의 시선과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다. 여성에 대한 발언과 행태, 비웃음과 조롱을 여전히 마주하지만, 그 곡을 다시금 판소리꾼이 정면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노래한다. 직시하고 분노하고 겁을 주는 표정으로 그 울림은 강력하다. (물이고 가는 여자 귀 잡고 입맞추고 다 큰애기 겁탈하고 수절과부 모함잡고 길가에 허방놓고”_흥보가 / “길가는 여성한테 강제로 키스하고 여고생 강간하고 이혼녀에게 추근대고 구덩이를 파서...”_현대어 번역)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박스>(2018)에서 작가는 한국의 산업화 시기 여공들의 숙소였던 가리봉벌집(쪽방촌)을 무대로 현장에서 작업했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장판지에 인두로 공간을 기록하고 연꽃을 새긴 설치작업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실제 비어져 있는 가리봉벌집 쪽방 한 벽면에 지난 삶의 시간을 보여주듯 겹겹이 붙여진 벽지를 도려내면서 만다라 형상 <연꽃>(2017)을 새겼다. 연꽃은 고통 속에서 피워낸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그곳의 삶을 증언했다. 과거 여공들이 살았던 그 장소에, 현재는 노인들과 외국인 근로자들의 가난한 삶이 자리한다. 한국 주류사회의 내재화된 차별과 억압의 기제로 양산된 불안한 삶의 현실에 대해 작가는 관찰하면서 구조적으로 그 현상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가장 가까이에, 때로는 객관화된 거리를 설정하여 모두가 바라보도록 조절하는/강제하는 시점을 택일하면서.
 
살이 탄다. 인두질로 타오르는 가죽의 냄새가 선연하다. 인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갈등은 인간의 역사가 펼쳐진 이래 해결할 수 없는(혹은 해결하지 않을) 분쟁과 학살의 국면을 만들어왔다. 작가는 우연히 시리아 등지에서 분쟁지역의 사람을 만난 계기로 스스로 증폭된 관심을 확장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과 학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계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리서치를 구체화해왔다. 2018년 시작된 <그을린 세계>(2018)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범위로 다루었고, 불도장을 통해 각 사건의 좌표마다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쾅쾅 찍으며 내리 새겼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시점은 저 멀리 관찰자이거나, 전지적 단계에서 세계를 관망하는 사이를 이끈다. <그을린 세계>(2019)는 그 규모를 확대한다. 좌표는 미대륙은 물론 호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문제까지 확장된 형태로 종교분쟁, 인종차별, 침략의 역사, 영토분쟁 등 인간 본성을 의심케 하는 극단적 갈등상황을 다루고 있다. 좌표가 설정된 플로터가 멈추는 자리마다 인두도장을 대신한 레이저마커가 잔 불꽃과 함께 진한 연기를 내며 짧은 문구의 기도문을 새긴다. 이 장면은 확대된 화면으로 생중계되는데, 마치 포화의 장면으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항공 촬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만들어내었다. 글로 나열되어 기술된 분쟁과 전쟁에 대한 기록은 이민하의 작업에서 공감각적이고 입체적 실체로 시각화된다. 플로터에 새겨진 좌표는 작가의 시선이 출발하는 곳이자 집중하는 지점이고, 그곳에 상징적으로 새겨진 기도문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절박함과 국가가 국가의 명분으로 자행하는 잔인한 폭력성을 잊지 않고자 하는 시선을 견지한다. 가죽으로 겹쳐진 세계지도 위를 가르며 새겨지는 기도문에 폭력의 역사와 상황들이 상기되는,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그 곁에 <상흔>(2019)이 자리한다. 이 작업은 바로 내가 직시할 수 있는 근접한 거리에서 절박함과 비통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인간의 껍데기를 형상화한다.(어쩌면 기도라고 표현했어도 좋았을 작업이다) 이 작업은 비애의 몸짓을 연구하면서 젖은 가죽으로 특정 신체의 마네킹을 활용해 캐스팅한 작업이다. 가죽의 껍데기가 마치 얼굴 없는 유령처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되 속은 비어져있다. 그 공란에 기도를 읊조리는 소리, 고통을 한탄하는 듯한 웅얼거림이 머무는 듯 하다. 형상의 주름들 속에서 그 소리는 삭혀져 분위기로 뿜어진다. 주변의 사람이 혹은 나의 모습이 가깝게 연상되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작가는 그렇게 펼쳐놓았다.
 
살이 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두로 필사하는 작가의 작업과정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주목해본다. 차별, 갈등, 분쟁과 학살 등 인간의 가장 모자란 지점에서 나타나는 파멸의 행위들, 이를 증언하고 고통에 마주하는 강건한 힘, 동시에 나약한 순간 행해지는 인간의 기도. 일종의 제의적 작용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작가의 지향점을 모아내는 상징이자 장치가 된다. 상처를 각인하고 기억하기 위해 재기술해가며 고통을 발언하는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며 고통의 정서를 순화하고 공감과 연대에 대한 감각을 전염시키는, 가장 원시적이며 초연한 힘을 쥐고 있다. 죽은 가죽에 새살이 돋을 리 없지만 그렇기에 가죽에 새겨진 기록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나약한 인간본성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형성한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진흙탕을 구른다고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고결함을 지향점으로 삼아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문득 그의 탐구가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시간 우리의 진한 대화 속에서 건진 놓을 수 없는 단초였다.
 
 
 
 

성매매집결지 100년 연대기에 대한 어떤 기록(예술경영 423호_2019.5.9.)

“그 아비 되는 자가 이십 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처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물론 피차에 한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처녀는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이십 원 몸값을 십 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빚이 육십 원이나 남았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 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서야 놓아준 것이었다.” _현진건 『고향』(1926)

가장 공들이는 과정은 주제 연구

스스로 당위를 설정하고 기획에 대한 주제를 연구하고 그것을 전시로 구현하기까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주제를 연구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자료들이며 논의들이 소중한 탓에 기획에서 전시 형식을 늘 고심하는 편이다. 지난 13년간의 활동을 통해 지역성과 장소성, 구체적인 현실의 삶과 역사적 추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내용들을 주된 작업으로 꾸준히 실현해볼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성매매집결지 100년 역사에 관해 연속된 작업으로 [<자갈마당시각예술아카이브_발화, 문장의 외부에 선 행위자들(2016)>(대구여성인권센터 주관, 대구)과 <나의, 국가, Arbeit Macht Frei(2018)>(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관, 서울)]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특히 올해는 자갈마당이 폐쇄 조치되고 곧 철거를 앞둠에 따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다시금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답사의 기록들은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들의 인터뷰, 역사 자료 등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할 계획인데, 이는 기획자에게 남겨진 책무이자 과제라고 하겠다.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 워크숍(좌)과 토크쇼(우) 현장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 워크숍(좌)과 토크쇼(우) 현장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 워크숍(좌)과 토크쇼(우) 현장
대구에서의 작업은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라는 기록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대구여성인권센터는 자갈마당 역사와 관련한 자료 수집은 물론 성매매 경험 당사자 여성들에 대한 현장 지원과 구술 기록을 틈틈이 진행해 왔다. 참여 예술가들은 단체의 기록물과 현장 워크숍을 통해서 장소성에 대한 각자의 시선을 구현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장소를 기록하는 방식’을 활동가의 측면과 예술가의 시각에서 창출하는 도정이었다. 또한,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인 단계를 밟으며 내용을 축적해 가는 ‘과정형’ 프로젝트로 제안되었다. 진행 과정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2016년 봄까지 작가 구성을 마친 후(내가 결합한 시점은 2015년 겨울이었다), 2016년 여름 연구 과정(워크숍, 답사, 세미나, 개별 연구)을 거쳐 작업 계획을 발표했다. 작업 계획은 결과물 자체이기보다는 자갈마당에 대한 관점을 생성해 가는 과정으로 설계되었고, 여러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쳐 그해 11월 전시로 구현되었다. 전시 기간에는 토크쇼가 진행되기도 했는데, 지자체 관계 부서 공무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여 프로젝트의 맥락과 예술인 협업이 지닌 의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됐다. 자갈마당 폐쇄 조례안이 통과되어 2017년에는 자갈마당 인근에 현장상담소가 개설되어 당사자 여성들의 탈성매매와 주거지원을 돕기 시작했다. 현장상담소에는 자갈마당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관과 장소성(자갈마당, 역사, 인권, 여성)을 특화로 한 대안공간 ‘기억공간1906’을 조성하여, 참여 작가들의 후속 작업을 연속적으로 소개하였다.
1962년 여배우 간소한 옷차림 가두행진 ⓒ 국가기록원 1962년 여배우 간소한 옷차림 가두행진 ⓒ 국가기록원1963년 워커힐 호텔 관광 성매매 ⓒ 국가기록원 1963년 워커힐 호텔 관광 성매매 ⓒ 국가기록원
서울에서의 작업은 성매매 추방 주간의 한 사업으로 구상되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을 구심점 삼아 전국의 성매매 집결지를 중심으로 한 활동가 단체들이 결합해 각 지역의 상황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근현대사 자료들은 물론 장소를 특정화하는 사물들을 채집하고 목록화하기 시작했다. 각지의 사건과 사고는 물론이거니와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국가의 정책적 개입들을 담은 자료들을 통해 전시 기획의 핵심이었던 성매매집결지 100년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전시 연구를 위해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다가 1969년 윤락 여성 1천 명 수용 시설이었던, 서울시립 행복원 기공식 사진을 발견했다.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들을 보며, 나는 문득 아우슈비츠를 떠올렸다. 성매매 금지와 관리라는 모순된 정책 속에 성매매 집결지의 역사가 한눈에 읽혔다. 국가의 신기루 같은 약속, 허무한 죽음들, 나아지지 않는 상황들. 전시 제목은 그래서 <나의, 국가, Arbeit Macht Frei>가 되었다. 이 전시에는 성매매 집결지를 기록해 온 예술가들의 창작물, 단체들의 활동 기록, 각종 유물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한국의 성매매 집결지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지에서 ‘유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조선 전체로 확산된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전국 성매매 집결지들의 상황을 보면, 그 태생은 물론이거니와 변화나 발전(?) 과정에서도 서로 비슷한 추이를 보인다. 성매매 집결지 폐쇄에 대한 지자체들의 논의에서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는 당위를 꾸며주는 하나의 수식일 뿐, 결국은 자본 및 재개발 추진과 연동한다. 그로 인해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비인도적인 행태들과 인권에 대한 성찰은커녕, 성매매 집결지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던 곳처럼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 단체들이 우려하는 지점이었다.

발굴, 조율, 그리고 아카이브

전시 기획은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과 사회 구조적인 접근을 주요 방향으로 삼았다. 성매매 집결지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있다. 그러나 ‘필요악’이라거나,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통해 개별 주체의 ‘선택’이란 관점에서 논구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뿐더러, 성매매 집결지의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의, 국가, Arbeit Macht Frei(2018)> 전시 장면 <나의, 국가, Arbeit Macht Frei(2018)> 전시 장면
<나의, 국가, Arbeit Macht Frei(2018)> 전시 장면
협업 과정에서는 현장에서의 접근과 판단은 활동가들의 조언을 따르면서, 장면과 사유의 지점들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몫은 예술가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전시 기획뿐 아니라 각자의 자율성을 조율하는 역할도 기획자로서 긴요했던 부분이다. 덧붙여 나는 예술가들이 이 주제를 통해 스스로 작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길 바랐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모델을 창출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전시 구현은 ‘아카이브전’의 맥락을 띠었다. 나는 단순한 자료전을 아카이브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카이브는 ‘자료화, 목록화’, ‘맥락적 덩어리’로서의 개념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만들어 낸 전시들에 ‘아카이브’라는 용어를 꾸준히 사용해 왔다. 물론, 모든 전시에 적용한 것은 아니다. 전시 주제가 역사나 실재하는 장소성 등 대상이 명확한 경우, 워크숍 등 진행 과정에 독립적인 연구 과제가 담겨 있을 때, 전시물의 자격에 있어 자료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동등한 중요도로 다뤄질 때, 또한 전체가 주제를 향해서 하나의 맥락적인 구조물로 짜일 때 ‘아카이브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일회적이지 않고 단계적인 지층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수반하기에 리서치 과정과 연구, 기획의 당위를 설정해 가는 데 있어 유효한 전시 형식으로 내 기획의 한 특징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2019년 4월 26일 금요일

홍순명 개인전 ⟪DMZ풍경⟫ 리뷰

홍순명 개인전 ⟪DMZ풍경⟫ 리뷰 

환상, 이윽고 의미가 된 풍경 : DMZ

  

최윤정 미술비평, 독립큐레이터

   휴전이라는 끝나지 않은 전쟁을 상징하는 DMZ, 군사적 긴장과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이자, 세계 유일의 분단현실과 그로인한 현대사의 비극이 끊임없이 소환되는 장소이다. 하지만 비애의 역사를 품고 있으되, 그곳의 풍광은 그토록 숭고하고 아름답다 한다. 장소 자체가 평화를 희구하는 상징 내지는 슬로건이 되면서도 또한 지뢰밭은 공존하고, 인위적으로 비워지고 민간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한 탓에 천혜의 자연과 생태계는 자생적으로 복원되었다. 보자면 참으로 희한하고도 모순적인 곳이다. 거리상 접근성이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수월히 닿지 않는 것은 이미 분단현실로 인해 생겨난 각종 트라우마가 각자의 무의식 속에 새겨진 탓은 아닐는지. ‘있지만 정말 있을 것 같지 않은환상, 혹은 옛 설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장소로서 DMZ는 그렇게 다가온다.  
 

전시전경 노블레스컬렉션
 
오랜 기간 사건의 중심을 포착한 보도사진으로부터 주변의 장면을 발췌하여 이면-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온 홍순명 작가는 사이드스케이프 연작 중 하나로 개인전 DMZ풍경(2018.12.27.-2019.1.24. 노블레스컬렉션)을 발표했다. 전시는 2018년 신작들을 중심으로 하여, 2011년 작품 일부도 함께 소개되었다. 그중 36개의 부분들(50x60.5)로 이뤄져 가로 7미터가 넘는 은 붉은 대기 속의 호수 전경을 다룬 것이다. 시공간이 모호하고 아스러진다. 여명 혹은 해질 무렵의 노을인지 알 수 없다. 36개의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호수의 전경은 이내 곧 이야기를 발산하는 듯 동시에 전체가 부분으로 흩뿌려질 듯 기이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붉은 대기 속의 호수는 실재하는 장소로 보도사진을 재현한다.
 

전시전경 노블레스컬렉션
 이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에는 언덕의 능선 길, 경계를 가로지르는 장벽, 수직으로 피어오르는 연기, 공동경비구역에 놓인 특이한 조경의 나무, 숲 위에 떠 있는 듯 보이는 작은 군 경계 초소 등 DMZ 풍경의 주변부를 다룬 작품들이 자리한다. 이 작품들은 부분을 확대한 장면으로 풍경화의 전경-원경-후경 등 구성 논법은 무화되고 다채로운 시선의 방향과 구성을 도모하면서 이면의 이야기를 상상하게끔 부추긴다. 그로인해 그의 DMZ풍경은 마치 실재하는 허구를 보는 듯하다. DMZ는 그 자체로 충분히 사건이나 구체적인 서사를 머금고 있는 장소이지만, 발췌된-부분으로서 확대된 풍경은 심적 거리설정을 유도하여 해석에 대한 우회로를 만든다. 그것은 직접적인 서사 국면 너머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전시전경 노블레스컬렉션
 
 
실행을 추동하는 계기, 완결된 작품이 나오기까지 작가가 견지했을 태도와 생각의 흐름이 궁금했다. 2011년 이래로 수년이 지나 DMZ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는 분명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간 국내의 사건과 사고현장에 관한 내용은 물론,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광산, 르완다 학살, 시리아 난민의 현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담아왔다. 마침 시리아 사건과 장소를 다루었던 작품 '바다풍경-시리아난민'과 '17 각<17 17="" span="">형을 그리는 방법_스칼라 시카미니아스' 시리즈는 당시 의도치 않게 제주도의 예멘 난민 수용에 관한 첨예한 지점들이 생길 즈음 발표되었다. 전시 기자간담회 때 이와 관련해 쏟아지는 무수한 질의들, 당시 기억에 대해서 작가는 전시에 함께 참여했던 히와 케이(Hiwa K) 등 이미 난민의 문제를 온몸으로 겪어냈을 쿠르드족 출신 작가를 곁에 두고 그 질의들에 답변하는 일이 무척 난감하고 버겁고 힘겨웠던 경험이라 소회한다. 이 경험과 상황을 반추하면서, 작가는 가장 가까이에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지점이자 ‘아무 사건도 없었던 듯’, ‘무엇인가 품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DMZ를 재차 인지하였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험과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이자, 자신의 파주 작업실과 맞닿아 있는 환경으로 지난 수십 년간 풍경 자체가 의미가 된 장소다. 거리상 무척 가깝지만 그에게는 체감에 있어 가장 낯설고 이상한 ‘주변의’ 풍경이었기에, 그렇게 DMZ 2011년에 이어 2018년을 관통하는 사이드스케이프 연작으로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