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행간, 정서, 표면의 조도 : 정용국의 ‘첫 번째 사람’

행간, 정서, 표면의 조도 : 정용국의 첫 번째 사람
(상업화랑_을지로143/ 기간 8.23-9.21)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첫 번째 사람의 각 단계들

어두운 공간, 벽으로부터 스미어 나오듯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글자들은 서서히 선명해지고 최절정에 이른 한 순간에, 하얀 빛이 온 공간을 채우면서 허망하게 모든 글자는 사라져버린다. 그가 한센인의 삶을 연구하며 작업화 한, ‘첫 번째 사람의 첫 작업이었다. ‘첫 번째 사람1인칭 ‘The first person’을 직역한 것으로, 주체로 끌어올리고자 한 행간의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었다. 이 작업은 2014지리산프로젝트의 주요장소였던 산청 성심원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서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말살되어야 했던 한센인들의 삶에 주목한 결과였다. 그는 한센인의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그들의 구술자료에서 유독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의 인칭 표현을 지나치지 않았고, 애달프고도 강력한 그들 스스로의 존재증명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의 인칭이 유독 강조된 문장들을 발췌하여 편집하기에 이르렀다. 그 문장들은 높이 7미터에 너비 8미터의 벽면에 세로글씨로 빼곡히 채워졌으며, 이는 그들이 살아왔던 삶을 공감해가는 과정을 그 스스로 직접 몸을 들여 수행적으로 풀어낸, 그 자신의 윤리와 태도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주목한 구술의 행간을 벽면에 기록하면서 작품에 더해진 빛의 연출은 시대적 억압과 편견을 시각화하는 것이자 작가의 총체적인 해석을 호흡으로 리듬으로 직관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된다.

첫 번째 사람의 두 번째 작업은 2016스코어전’(대구미술관)에서 소개되었다. 70년대 여성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일방직 인천공장. 사측의 이익을 대변하는 남성중심 조직으로 구성된 어용노조에 저항하여 한국 최초로 여성이 중심이 된 노조를 설립한 사실을 배경으로, 당시 노조활동에 참여했던 한 여성노동자의 구술을 다룬 작업이었다. 이것은 노조탄압이라는 권력의 폭정과 더불어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노동자를 인지하게 된 사건이자, ‘현장에 즉한 여성운동에 대해 관심을 촉발시킨, 한국 현대사 산업화 과정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장면이다. 정부와 회사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비인권적인 탄압으로 일관하였고, 여성노조원을 빨갱이와 동일시하는 언론의 여론몰이가 자행되는 와중에도 저항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화·산업화의 신기루 속에서 동등한 노동조건을 갖지 못했던 그저 평범한여성들이다. 작가는 그들의 저항을 특별한 사람들의 특이한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 땅을 살아낸 누이이자 이웃이고 동료이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산업화의 신화가 자행했던 탄압들을, 한 여성노동자의 구술을 통해 벽면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또한 사회적 구조가 평범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또한 그들을 빨갱이로 몰았던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빛으로 연출하여 두 번째 작업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구술작업에 대한 그의 실험과 연구는 더욱 본격화되어 갔다. 그는 2016자갈마당기억변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눈 먼 사랑이라는 작업을 발표하였다. 이 작업은 성매매경험당사자의 구술이 지닌 행간을 읽어냄으로써 그들이 처한 환경적 요인들(갇혀있거나 통제당하는), 스스로 자기 몸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유추해가는 과정이었다. 구술은 역사적인 사료로서 기록작업의 일환으로 채록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매매경험당사자 여성들의 구술은 특정사건이나 시간, 공간 등 구체적인 용어로 특정되지 않는 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그들의 삶, 상황적인 조건들이었다. 그것은 집결지 100년의 시간을 상징하는 듯한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의 구술작업 속에서 작가는 그나마 구체적으로 보였던 단어들조차 지워나갔고, 그렇게 편집된 문장들을 가지고 소리내어 낭독하도록 하였다. 나 역시도 직접 소리내어 읽어보라는 작가의 제안에 모호하게 구성된 문장들을 읽다가, 이상한 감정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인 단어를 모두 삭제한, 대명사나 조사, 말을 흐리는 어간 등으로 이뤄진 문장이었으되, 들은 적도 아직 읽어본 적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눈앞에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 구술작업을 진행하였던 한 연구자는 그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다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까지 가늠하며,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였다. 구체적인 지칭으로서 명사, 감정의 수식으로서의 형용사, 그리고 행위로서의 동사 등 문장을 이루는 핵심요소들이 빠져있는 그가 재구조화한 문장들이 그토록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들, 행간을 잇는 요소들로만 이어진 듯한 그 문장들이 그토록 기대하지도 못했던 정서를 촉발시키는 그 원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소리내어 읽는 행위 가운데 삶의 비애감이 느껴졌고, 웅얼거리는 소리는 리듬이 되어 이 비애감의 진폭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감정이 깃든 언어습관, 어투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18첫 번째 사람

작가는 탄핵정국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극기 집회를 이루는 극우세력의 첨병이 된 노인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모든 장면들과 교차하면서 삶을 끌어왔을 평범한 노인들이다. 그렇기에 성장과 안보를 지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는 더욱 맥락적일 수 있다. 작가가 구술작업으로 주목했던 것은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노인은 특별할 것 없는, 가난하고도 평범하게 살아온 70대 남성노인이며, 특정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보다는 노인세대에 대한 통시적 시선으로 접근한 구술생애사 책이다.
정용국 작가는 세 번째 첫 번째 사람작업을 위해 직접 저자 최현숙을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구술작업에 대한 상황적 맥락과 실제 남성노인의 육성을 담은 녹취자료들을 구하였다. 마찬가지로 곱씹으면서 그들의 삶을 반복하여 읽고 듣는 방식으로 이번 개인전의 주제들을 맥락화해 갔다. 그 중 그가 다룬 남성노인은 평생 건설현장에서 목수로 일했던 노인이다. “결혼도 못했고, 돈도 없고, 평생 노가다나 했고, 그런 건 창피한 거잖아요. 누구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안보지요...” 이 노인은 남성적임의 가치관 속에서 특유의 왜소한 체구로 인해 자격지심을 간직하고 살아온 삶을 증언한다. 남자답고 싶어 군대에 자원했고, 베트남 전쟁에까지 몸소 참전한다. 그의 삶은 전쟁, 유신독재 등 한국 사회의 모든 굴곡점과 궤를 나란히 하며 펼쳐진다. 작가는 노인의 구술을 총 15,480자로 편집하였고, 이를 벽면에 새겼다. 실수로 양잿물을 마신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였던 불행했던 유년시절부터 몸이 왜소하여 여자도 없고 남성적이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작동해온 그의 삶들이 벽면을 따라 이어진다. 그의 삶 중에서 그가 가장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던 목수로서의 삶은 가장 마지막 동선에 배치된다. 노인의 생애사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장면들의 서사들을 잇고 있다. 나즈막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육성이 공간에 더해지고, 한국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하듯 입구에서부터 미러지에 새겨진 태극기 문양이 실체 없는 빛을 반사하며 잔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번 작업은 특히나 빛의 움직임이 연출하는 장면들을 더욱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암흑 속에서 빛점들이 유영한다. 문득문득 흔적처럼 유령처럼 비춰지는 글씨들, 이윽고 벽면에 새겨진 글씨들이 선명하게 보일 무렵, 붉은 빛이 은연중 공간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내 서서히 밝아지는 하얀 빛을 통해 공간은 마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양, 그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으로 전이되어 있다. 빛의 움직임들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육성과 더불어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직접적인 감각으로 살에 스며드는 듯한, 한편의 분위기로 형상화된 서사로 구축된다

형광물감으로 새겨진 글씨를 비추는 푸른조명은 스며들고 배어나오는 글자의 움직임을 만들고, ‘붉은조명은 작가에게 사회적 편견 내지 경고, 한국현대사 속에서 행해진 무차별적인 억압기제들 그리고 저항의 시선 등을 담은 다층적인 해석구도를 포함하는 빛이다. 또한 하얀 조명은 일종의 소격효과로서 몰입을 차단하고 다시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일상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공감하지 못한 사유이자 존재하지 않음(무화)을 상징한다. 하지만 결국 하얀 빛은 매섭게 차단하여 빛의 서사적 흐름을 끊되, 그로인해 더욱 여운을 강조하는 역설의 빛이 되고만다.




작가는 자신의 구술작업을 느낌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실제 그가 접한 구술작업의 대상들은 한국 근현대사 안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자, 주류 사회의 담론과 편견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느낌의 윤리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주목하였고, 그들의 삶을 연구와 수행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다층적으로 이해해가는 실천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느낌의 윤리라는 표현은 예술가가 역사에 대한 성찰 및 타인의 삶을 주제로 한 내용을 창작의 방법론으로 다루는 온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인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평소 그가 화가로서 지속적으로 해왔던 회화적 실험은 대체로 명증적이었다. 재료자체에 골몰한 것이 작업의 주제가 되거나, 형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깊게 침잠하거나, 반복적인 요소들이 구성하는 덩어리 자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가는 것으로서, 회화 존재의 알레고리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각 요소에 접근해가는 예민함, 집중하여 요소들을 잇고 구성하나 드러나지 않은 메타포 등을 시각화하고자 표현의 방법론을 찾아온 탐색과정은 그의 회화를 특징화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2014년 이래로 구술을 특정화한 그의 작업들에서 단어와 문장을 분석하고 그 특유의 시선을 집중과 시선을 통해 맥락화하여 행간을 구성하는 과정들이 그의 회화작업과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로부터 그에게 다가온 주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느낌의 윤리란 예술가로서 그간 매체에 접근해온 그의 탐구적 태도 근간에 놓여있던, 늘 있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작가 정용국을 향한 접속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