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5일 수요일

금천예술공장 8기 입주작가 Vincent Tanguy(france) 비평


굴종의 굴레_스펙타클을 향한 냉소주의 : Vincent Tanguy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실재하는 개인과 실재하지 않는 것들 사회_국가_민족_신호_규범_질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은 다만 유리한 생존을 위한 약속_상징체계에 지나지 않지만, 개인의 행동과 의식(인식)을 제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맹목적인 수용만이 집단의 이 될 것이며, 이로부터 추동된 이데올로기권력이란 위계강화와 체제유지에 절대적으로 복무한다. 주변부와의 차별분리는 그 핵심 실천과제이며, 사회적 소외란 단순한 부산물로 취급될 뿐이다. 집단에 의거, 개인은 그렇기에 소거가 가능하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다만 기호일 뿐으로, 그 자체는 허구이자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힘의 장을 쥐고있다. 상징적인 허구의 망을 들추어내는 것. 이것은 Vincent Tanguy의 작업을 해석하는 제 1지점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사회적시스템, 질서 등)에 대해 우리가 알든 모르든-굴종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그는 그저 냉소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서만 구조적 디스토피아의 상황들에 몰입하고 있을 뿐이다. Back to the future or Looking forward to the past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이 발견된다. 축구티셔츠에 찍혀있는 ‘Pinault’는 축구구단주의 이름이고, 그는 현재 프랑스의 유명 작품콜렉터로도 활동 중이다. 여기서 Pinault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작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사회적 시스템을 상징하는 은유가 되면서, 자본주의 스포츠 시스템이자 예술계 시스템 안의 권력을 드러낸다. 이 작업은 문맥적으로 그가 2014년 이래 선보여왔던 퍼포먼스Untitled(2017)와도 연결된다.


이 작업은 실재하지 않으나 우리를 굴종으로 이끄는 사회적 시스템을 사이버 가상세계의 게임 속 상황에 등치시킨 것이다. 퍼포머는 에러에 걸린 듯 방향을 선택하지도 못하고 구석 자리를 배회하며 벗어나지 못하는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게임 속 인물을 모방한다. 시스템 안에 고립된, 조작가능하고 무력한 개인의 모습이다. 현대의 과학이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의 생존투쟁에 혁신적 기여를 했다고는 해도, 도리어 기술사용에 의한 사회적 소외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실재하는 개인의 가치를 철저히 수동적인 객체들로 아주 효////로 격하시켰다.
한편 General synesthesia(2017)는 그가 서울 곳곳을 유람하며 발견한, 과도하게 많다 싶을 정도의 각종 표지나 신호체계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잘 따르고 있는 장면에서, 한국사회 사회적 시스템을 관찰하며 새롭게 구상한 작업이다. 신호 및 기호화된 색상은 이미 언어화된 채로 우리의 뇌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네이버 영문 읽기 기능을 통해서 자신의 서울감상기를 차갑게 읊조리고, 각 단어들의 뉘앙스(부정의 종류들, 긍정의 종류들, 중립적 언어들 등)에 따라 그가 한국에서 발견한 기호화된 색상들이 화면에서 번뜩인다. 인지시각적 자극이 시스템의 훈련을 통해 내재된,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의식 안에 형성되어 있는 집단적 전형성을 건드리는 작업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작업을 보면서 왠지 이후 그의 작업이 그저 냉소적인 관찰자의 시선에서만 머물지 않을 것 같다는 예측을 조심스레 해보게 되는데, 어찌보면 사회적 시스템 속 개인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이미 파레토 법칙(2013)에서도 보았듯이 오히려 언제나 우위에서 고정된 20의 범주보다 어쩌면 80의 모호한 범주에 의미를 입히고자 하였던 그의 작업은,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모호한 80으로 취급받는 계급이야말로 실천적 투쟁을 위한 역량과 전복의 가능성까지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집단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본격적으로 그는 이번 General synesthesia를 통해서 인간의 뇌의식까지 지배하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서 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작업을 읽는 두번째 연결고리는 시대착오이다. A Ruin under construction(2017)은 한강에서 발견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수직으로 뻗은 다리축대와 잔잔히 흐르는 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축대는 마치 고대의 건축물, 스펙타클한 기념비적 구조물인 것처럼 보인다. 공사 현장임에도 영원의 시간 속에 떠있는, 세속적 시간에 있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장면이다. 현대의 폐허에서 고대의 도상을 발견하는 혹은 고대를 희구하는 시대착오적상상. 인터뷰 내내 우리는 시대착오적(anachronic)’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떤 행위나 사물을 그저 낡은 것으로 취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사전적인 의미에 더해 지금의 장소와 시간 안에 놓여짐으로써 어울리지 않는, 그로부터 인지부조화의 불균형상태를 도리어 강화할 수 있는 촉매로서 이 단어의 사용이 보다 적절하겠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작업에서 보자면 케밥 Doener는 전통적인 소규모 사회의 미덕이자, 공동운명체 집단을 묶어주는 토템 Totems Doener(2013)으로 연결된다. 이 작업을 관통하는 내용도 시대착오적으로 수합된 바다. 작품을 통해 토템이 된 케밥은 한 사회에 머물러 있는 기호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음식으로 마주할 수 있다. 작품의 의미에 다가설수록 세계화의 명분까지 취하며 토템이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을 벗어나, 도리어 개인에 기초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실현한다는 상상까지도 이끄는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물론 세계화의 명분이란 것도 자본주의의 스펙타클한 사회 안에 또한 갇힌 언어일 테지만, 굴종의 낙타가 성난 사자가 될 수 있도록 포착된 지점에 서있는 아나크로니즘은 도리어 굴종의 굴레를 이탈할 수 있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다시금 시대착오인지부조화의 장면은 현실적 조건에서 현존하고 있는 억압의 실제 조건들을 얼룩지게 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한 사회의 전형성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일, 기이한 형상이며 시대착오적 도상이나 장면의 발굴을 통해서 도리어 사회적 시스템의 근간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사유를 매개하는 지점에, 냉소적인 관찰자로서 작가가 포착한 이미지들이 자리한다. 문득 든 생각이다.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내 삶 또한 재배치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조건을 안고 살아야 하지만, 이러한 일상에서의 시대착오적계기가 틈새로서 마련될 수 있다면, 이 스펙타클 사회의 아이러니라도 인지하면서 성찰하는 개인으로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