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8일 일요일

Review. 노동식, 홍상식 2인전 ‘22세기’展

Review. 노동식, 홍상식 2인전 ‘22세기’展
오픈스페이스배 전시전경





욕망의 Doomsday



글 ● 최윤정(미학/미술비평)



한 사람에게 그것은 ‘핵폭발’의 형상이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 그것은 온 세상이 미친 듯 메카시즘을 부르짖는 이때, 그 반작용으로서 등장했던 이벤트로 나열된다. 22세기에 대한 두 작가의 관점은 대단히 뚜렷하면서도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작품의 재료가 지닌 특성 내지는 구상적 조형성이 이를 지지해주고 있고, 버섯구름이라는 명확한 구상과 ‘LEFT’라는 문자간 결합에서 우리는 두 예술가가 투척하는 바를 정확히 목도할 수 있다. 노동식 작가가 솜으로 만든 거대한 핵폭발의 구름은 ‘파괴와 자멸’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이 작품을 응시하고 있는, 빨대로 만들어낸 단 하나의 ‘눈’이 이에 대한 역사적 관찰자로서의 서사를 읊어낸다. 간간히 붉은 색 조명이 핵폭발의 징후를 내보이는 가운데, ‘하나의 눈’ 양 사이드를 채우고 있는 것은 올해를 비상하리만큼 달구었던 ‘청춘 콘서트’ 주인공들의 초상이다. ‘22세기’展은 두 작가의 관점을 통해서 담아낸 다음 세기에 관한 계시록이다.





#. 첫 계시록



일차적인 유사죽음을 유도했던 제국주의나 이념을 통한 인간성의 참담함을 담아냈던 냉전주의 등, 과거 확연했던 대립구도는 다시금 민주주의와 경제적 효율성에서 추출한 ‘악’을 경제적,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양’의 것으로 이용하는 시대로 전이되고 있을 뿐이다. 무너져도 다시금 창궐하거나, 그러다 또 무너져도 다시금 꿈틀거리는 욕망. 이쯤 되면 이것은 본성이고 인간의 가장 진면목은 아닐 런지. 더군다나 인간은 그 욕망을 논리화하고 합리화하고 사유하기까지 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보호와 모종의 장막을 위한 공동이념을 허구로 만들어낸다. 국가와 민족의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때로는 물리적으로 상대의 폭력을 전제하며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무기로 나타난다. 비로소 이 땅에 머무르게 되는 ‘충돌과 파괴’, 노동식 작가는 이를 ‘핵폭발’의 형상으로 제시하였다. 역시도 그가 바라보는 22세기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이념이 조장한 실존의 관성물인 ‘핵’이다. 작가는 우리의 몸을 일차적으로 보호해주는 옷감과 이불의 재료가 되는 솜으로 핵폭발의 구조물을 만들어내었다. 우선 그의 전 작업에서도 익숙하게 사용해왔던 재료이자, 가벼움의 속성으로 공중에 떠오르는 형상을 가장 잘 구현하는데 이는 적합하다. 이번 작업에서는 또한 가장 온순하고 익숙한 재료가 22세기 디스토피아를 표현하는 파괴적 형상의 재료로 쓰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맥이 부가될 수 있으며, 솜 내부에 설치된 조명의 분위기가 재료의 속성과 합쳐져 이 조형물은 마치 긴급하고 심각한 사안을 풍자하는, 현대의 조악스런 팝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각 욕망 간 충돌로서 ‘핵폭발’은 22세기의 형상일 뿐이기 보다, 과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비견한 역사와 지금 현재 일본 원전파괴와 관련한 생존의 위협, 오랜 시간 망각 속에 흐르다가 다시금 꿈틀거릴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접합체였다. “..그대의 의상을 좀 더 적게 입고 그대의 살갗이 보다 많은 태양과 바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생의 숨결이 햇빛에 있으며 생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다는” 단순한 진리로 살아갈 수 없겠는가에 대한 소박한 비애감이 진하게 묻어나는 작업이다.





#. 두 번째 계시록



좌우 계파에 관한 용어는 오랜 역사적 관점을 수반하여 구분할 수 있다. 극과 극이라는 대척점에서 사회에 대해 변치 않는 지극한 관점이 혁명적 계파 및 보수우익의 태도를 성립시켜 왔다. 기본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논리적 합의와는 거리가 먼, 이 경우 양자 모두 일종의 경고처럼 ‘대안의 대안에 대한 대안에 대한 대안에 대한...’ 얕은 깨달음과 우매함을 전사하며, 권력속성이 지닌 여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색안경이라 표현하였고, 스스로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그것이 진보적 시각이든 보수적 견해이든 결국은 각자의 주관에 따른 사회적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스펙터클의 대립물들 밑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비참함의 통일성이다. 모든 선택의 가면들 아래에는 각기 형태는 다르지만 동일한 소외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이같은 다양한 형태의 모든 소외는 억압당하고 있는 현실적 모순들 위에 세워져 있다. 스펙터클은 집중된 형태 또는 산재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들 중 어느 형태를 취하느냐는 스펙타클 자신이 부정하거나 지지하는 비참함의 개별무대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두 형태 어느 쪽에서나, 스펙터클은 비참함의 평온한 한 복판에서 황폐함과 두려움에 둘러쌓여 있는 행복한 통합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스펙터클이자 ‘스펙터클적’이며 그것은 지금 우리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속성이다.

빨대로 이뤄진 입체 전면에서 후면의 색빛이 반영됨은 좌우익의 구분 논리 자체에 대한 허구를 보여주려는 바다. 전면의 인물과 후면의 권력 속성을 상징하는 색상이 흘려 비친다. 이는 작가의 개별사고가 이미 현재 보수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견지하되, 그 이면에 있어서만큼 집단적 권력의 속성에 대한 경계태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극명하게 문자로 표기된 LEFT는 보이는 시선에 따라 오히려 보일 듯 말 듯, 뭔가를 주장하는 듯 아닌 듯, 흐릿한 구조로서도 작가가 무엇에 대해 ‘대안의 대안에 대한 대안..’ 그 끊임없는 연쇄고리의 측면을 잠시라도 멈춰보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혹은 왠지 작업적 속성으로 인해 모호하게 떠오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의미는 여전히 모든 것은 경계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중립적이고도 한편 비애적인 시선을 고수하고 있다. 동시에 그의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22세기에 대한 음울한 디스토피아의 로맨틱한 서사에 근거한 판타지로부터, 탈출하게끔 하는 접속코드였다.







#. Epilogue



현대 군중의 상징이라 생각되는 네티즌들의 끄적거림을 관찰해보았다. 역시 군중은 비슷하다. 우주여행과 인간의 모습을 닮은 휴머노이드에 대한 기대가 만만치 않다. 물론 누구에게나 동일한 지점이 있다. 그래, 군중은 동일하다. 더불어 2101년에서 2200년까지 머잖은 미래이지만, 내 육신이 세상에 남아있을 리는 만무하기에, 그러나 내가 꾹 참았다가 10년 뒤라도 나의 자손을 갖게 되면, 나의 자손은 그 세상에 남아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내 피를 이어받아 맹위를 떨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으려나. 다르지 않구나. 한편 인간이 개인으로 있으면 위험에 대처하는 자세가 좀 더 예민해진다고 한다. 다만 군중에 속한 인간은 모든 위험에, 또한 모든 범죄에 무감각해지고 우매하게 행동한다. 특히나 현대의 조직사회를 보면 똑똑한 개인도 우매한 인간 군중의 흐름을 쫒는다. 때로는 그것이 위기에 출중한 개별 인간의 심리극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결국은 생존을 지향하기 위해서 상대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또한 나의 생존을 위해 연민의 감정마저도 끊어내도록 한다.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으랴, 그래서 나는 아직 22세기에 대한 아무 입장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를 미래를 예견하는 눈은 아티스틱한 상상에서 가장 첨예하고 가장 불편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학문은 차가운 지성인 양 표면의 비애감에 젖어들지만, 예술은 감정선 바닥까지 올곧이 드러낸 비애를 그냥 표출하지 않던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