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5일 월요일

기고_지역과 예술활동

기고_지역과 예술활동

#1. 평택 대추리에서 이뤄진 현장예술 활동


최윤정 ● 미학, 미술프로젝트

현재 나는 지난 몇 년 간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로 발표되었던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벌어진 현장 예술에 대한 기록들을 점검하고 이를 자료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평택은 안성에서 그리 멀지 않다. 안성에서 출발하여 평택 대추리까지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 그러나 이 익숙한 사실은 실상 나에게는 대단히 낯선 느낌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평상시 나는 그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시골 동네에서 어느 순간 투쟁의 격전지이자, 대한민국의 섬이 되어버린 동네... 그저 평화롭게만 조용히만 살아오던 순박한 농부들이 외부적 압력에 의해 그야말로 투사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 현장이 내 고향 근처, 것도 바로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이슈에 대해 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세상이 이 동네에 주목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적으로 한반도의 상황을 비유하는 미군기지 확장과 인권탄압, 그곳은 현대사에 기록되어야 할 투쟁과 반목의 현장으로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 동네가 주목받는 중요한 요소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술인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으며, 예술의 사회적 참여와 치유적 역할에 대한 담론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산실이 되어 왔다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특히 평화를 위한 이 모든 싸움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 활동이었다. 이는 가수 정태춘에 의해 힘입은 바가 컸다. 그곳은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자, 그의 서정을 키워 온 공간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하여,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과 류연복 외 미술작가들이 모여 지속적으로 ‘들이 운다’ 문화제를 개최하고, 작품 활동을 진행하면서 이 ‘섬’은 외부로 알려질 수 있는 든든한 길을 얻게 되었다. 당시 언론보도는 마치 80년대 무고한 시민이 ‘간첩’으로 둔갑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론 및 진보 단체 언론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옳은, 정당한 보도를 내지 않았다. 활발한 현장예술 활동을 통해서 외부로의 끈을 잡고자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곳에서 이루어진 예술활동은 주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무려 3년 여 간의 대추초등학교 촛불시위 자리에는 늘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또한 곧 폐허가 될지도 모르는 동네는 언제서부턴가 벽시와 벽화들로 채워져 화려하고 아름다운, 희망의 염원을 담은 색채들을 두르게 되었다. 또한 각종 설치 미술 작품들은 마을 곳곳에서 주민들에게 무언의 희망을 보내주었다. 여기서 미술은 80년대 도구화된 사례들처럼 주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다가간 것이 아니었으며,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에게 그 힘든 순간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야말로 그들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투쟁의 현장, 그 와중에 ‘평화예술동산’도 조성되었다. 그곳에 설치된 작품들 몇몇은 지역 문화재로 지정받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공권력의 예술 활동에 대한 몰이해와 몰상식한 파괴행위들로 인해 무참히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외부에 대추리 도두리의 참상을 더욱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현장예술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문화예술계는 한 목소리로 이를 규탄하고 각종 토론회를 통해서 현장예술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논의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지역의 예술활동에 대한 중요성과 그에 대한 이해를 일반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굳이 안성이나 평택에 살지 않더라도 수많은 예술인들은 현대 사회의 모순적 장면을 밝혀줄 그 ‘문맥’을 쫓아 대추리로 속속 모여들었으며, 개인의 작업으로 공동의 작업으로 대추리는 어느 순간 예술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자기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대추리 주민의 대부분은 카톨릭 신자였고 그들의 아픈 삶에서 문정현 신부(평화유랑단 ‘평화바람’ 단장)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늘 그들의 곁을 지켜왔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추리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던 작가들은 안성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은 안성의 여느 시골풍경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들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삶들이 외부로 노출되기 전까지 그들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이에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두에 밝힌 나의 ‘묘한 심리적 거리감의 근거’는 바로 이에 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