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4일 화요일

다시 걷기, 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김미련 개인전<랜덤그리드, 랜덤대구> 전시서문
 
다시 걷기, 태양을 등진 거리 위에서*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다
그저 걸어가자
설움과 희망이 뒤범벅된
알지 못하게 뻐근한 이 가슴을 안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박팔양 시*에서 발췌
 
주류담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형식들을 모색해왔던 작가 김미련은 이번 <랜덤그리드, 랜덤도시>에서 향촌동북성로를 리서치 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우선 제목에서 랜덤그리드는 확고한 규칙과 결정론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않은, 다만 확률적인 것이자 우연과 확장가능성의 계기를 품는 일종의 코딩 개념이다. 구조적인 합리성과 경제성, 효율성 등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을 과감히 변형시켜 새로운 구조를 생성하는 체계를 일컫는다. 이번 작업에서 랜덤그리드는 역사와 장소를 독해하고 근대적 시각과 주류적 담론이 지배해왔던 질서에 반질서적개념을 조합시켜 맥락화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랜덤대구또한 대구라는 확고한 도시성에 균열을 내는 미시적인힘을 발견하고 해석의 다양한 여지를 담보하기 위해 혼종적인 지점을 찾아내려는 의지적 표현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는 대구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일본인거류지역으로서, 유곽지대였던 자갈마당(야에가키초)과 과거 신사가 있었던 달성공원(달성토성)이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다. 향촌문화관 역시도 과거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선남은행(1912)으로 일제 수탈의 역사를 상징하는 자리에 위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상업은행의 전신으로 1976년 신축된 건축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향촌동 일대는 한국전쟁시기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머물렀던 곳으로 예술교류 및 창작에 중요한 근거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문화적인 기억이 머무른 장소이자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대구 근대화의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던 순종어가길1909년 순종이 남서순행의 일환으로 행차했던 거리를 중구청에서 조성한 것으로, 수창동에서 달성공원에 이르기까지 약 1km에 이른다. 그 끝에 고증과는 다른 복장을 한 11m의 순종 동상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우뚝 서 있다. 시민 사회에서는 일제 치욕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고 미화시킨 처사로서 순종어가길을 비판하며 동상철거를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실상 반일감정을 잠재우고자 당시 친일파였던 대구시장의 부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강압적으로 순종을 보냈던 치욕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길이다. 심지어 순종이 지나갔던 그 길은 북성로, 수창동, 달성공원(달성토성) 등 일본인 거류지에 속한 지역이었다. 역사적 사실은 물론 시민사회의 요구와 무관하게 추진된 순종어가길에 대해 작가의 시선이 머문 것은 마땅해보인다. 평소 사회적 이슈나 공동체에 있어서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 작가였기에, 이 작업을 통해 역사적 왜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작업들은 현재의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의 변화와 과거 역사적 맥락들을 예술가적 실천으로 잇는, 말하자면 현재와 과거의 시간성 그리고 역사에 대한 기억감정들을 직조하는 과정에서 구현되었다. 그의 작업들은 세 가지 국면에서, 다시 걷기’, ‘지우면서 그리기의 퍼포먼스/ 다시 듣기의 사운드작업/ 사물금고로서 장소의 흔적을 품은 사물들을 채집한 설치작업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다시는 재귀적인 시선으로 역사와 장소, 공동체의 삶에 접근하는 성찰적 사유를 담은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랜덤 도시_다시 걷기>는 하얀 작업복을 입은 퍼포머가 모니터를 얹은 보행기를 끌고 거리를 걷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퍼포머가 놓인 거리는 순종어가길이다. 그 장면에는 지금의 아스팔트와 거리가 함께 기록된다. 퍼포머는 산책자 같기도 하다. 산책자는 주변의 풍경을 관조하는 관찰자이자 자신의 사유에 집중하는 자이다. 선택적인 장소에서 걷는 몸은 그 길을 걸었던 순종의 마음과 순종의 행차를 바라보는 공동체의 마음을 품은 과거와 마주하는 동시에, 장소를 호흡하며 현재를 체현하는 몸이다. 누군가 걸었던 그 거리를, 그리고 현재에도 삶들이 이어지고 있는 그 거리를 다시 걷는다는 것은 장소를 객관화하면서 경험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장소에 깃들어있을 기억들과 감정들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논구될 수 있는 여러 서술방법 중, 보행기 모니터는 퍼포머에 대한 서사를 덧붙이는 또 다른 몸이다. 산책자이자 관찰자의 태도, 왜곡된 역사와 진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욕구하는 몸이기도 하다. <랜덤도시_지우면서 그리기>는 대구 읍성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인근에 위치한 성진사라는 빈 공간을 다룬 것이다. 7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오래토록 비워져 있어 먼지가 가득할 바닥일진데, 작가는 먼지가 진득하게 붙은 바닥 위로 원을 그렸다. 원을 그리는 행위는 동시에 바닥을 닦아내는 행위와 동일하다. 이 원은 지도 위에서 순종이 지나갔던 장소들을 이은 형태이다. 작가는 지우면서 그리기라는 최소한의 행위적 개입으로 공간을 드러낸다. 사람의 숨이 닿았었을 빈 공간에 베인 미시적인 역사들, 개인 삶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았을, 잊혀진 역사적 진실을 강조하는 듯한 작업이었다. 특히 이 작업에 관한 한 산책자였던 퍼포머를 기록한 <랜덤도시_다시 걷기>에서 보였던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랜덤도시_지우면서 그리기>를 통해 도시와 환경, 어가길을 총체적인 상징기호로 합치한, 전지적인 시점으로 이동한 듯 보인다. 시점이 변하면서 연동되는 두 개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랜덤하게교차하고 직조되는 양상으로 서사를 확장하면서 주제를 부각시킨다.
작가는 또한 대구 근현대사 속에서 고유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장소이자 70대가 주 고객층인 향촌동의 한 캬바레를 찾았다. <향촌카바레>에서 작가는 R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가 찾은 이 독특한 장소에서 현재를 관찰하였다. 그것은 현실적 삶의 무게를 떨치려는 듯 카바레 안 사람들이 취하는 몸짓이다. 향촌동을 살아왔던 몸, 그 몸의 표현으로서 특정한 몸짓은 랜덤대구의 미시적 역사의 일부가 된다.
 
그의 사운드설치작업인 <랜덤도시_다시 듣기>는 순종어가길의 동상 제목이 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와 해방시기 만들어진 노래 귀국선을 교차시킨 것으로 즉각적으로 감각되는 비물질적 진동을 통해 역사적 모순에 다가서는 작업이다. 정처 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샤워기 모양의 스피커가 몹시도 불안하다. 치욕의 역사를 미화한 듯한 시대착오적인 제목을 가진 순종 동상은 마치 현재의 시간성을, 그리고 향촌동 오리엔트레코사에서 해방 이후 녹음된 귀국선은 과거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귀국선은 일제 강점기 해외로 징용되었던 노동자들이 귀향하는 모습을 담은 곡이다. 애절한 가사에는 해방과 독립에 대한 기쁨이 함께 담겨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의 작곡가는 친일행적을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개의 시간성, 이 두 가요의 교차는 사실과 왜곡에 대한 작업적 해석이자 혼란스러운 정서적 감응을 표출하는 듯 하다.
작가는 장소 곳곳에서 사물들과 형상들을 발굴하였다. 그것은 사물을 채집한 작업 <사물금고> 연작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형상은 사물의 형태에 관련한 것으로, 그 형상의 본을 뜬 것이다. 말하자면 순종의 동상이 놓인 좌대며 주변의 공공조형물의 형태도 일부분이자 사물에 관한 기억으로 채집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채집한 사물들을 3D입체설치와 영상작업으로 구현하였다. 각 사물들은 유기체 내지는 유령처럼, 먼지나 공기가 되어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모습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인간에 의해 쓰인, 고안된 사물들이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은 살아있는 생명체보다도 죽은 사물, 잊혀진 사물, 미처 인식에도 닿지 않았던 사물에 향한다. 그것은 역사를 추론하며 증명하는 열쇠이자 삶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미시적인 역사의 담지자들이다. 작가는 또한 작은 빛을 뿜어내는 투명한 공 안에 작은 메달이며 총과 칼의 형태를 지닌 작은 피규어들을 집어넣었다. 아주 여리게 반짝이지만, 장소를 입증하면서 수탈과 아픔의 역사를 떠올리는 기념비적 작업이다.
 
일정한 사건들의 연쇄적 연결이 아니라,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입증할 수 있는지, 작가의 작업들은 마치 하나의 변증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가로서 실연하는 과 관찰하는 기록과 기억을 발굴하는 채집이라는 실천적 행위가 역사와 장소에 내재한 모순에 다가선다, 그 행위는 과거와 현재를 직조한 망 속에서 비판적 관점을 생성하는 동시에 통찰을 견인하고 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제에서 출발한 전시, <랜덤 그리드, 랜덤 대구>에 쓰여진 서사들, 그 너머의 서사들은 무엇을 향하게 될까.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김도희 작가 작품론>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1. 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
 
최근 작가는 활화산 형상의 배꼽을 캐스팅하는 <뱃봉우리> 작업을 진행하였다. 배꼽을 캐스팅하는 짧은 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차가운 석고가 몸에 붙이는 낯선 경험으로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것이고, 어색한 침묵 내지는 호방한 이야기들로 수다를 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소 기록도 작업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왔던 작가에게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이후 어떻게 또 다른 서사로 이어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배꼽은 세상의 중심이자 인체의 중심, 생명이 시작된 자리다. 탯줄을 끊는 순간 지난한 인생의 고역에 서야 하는 생명체로서 그렇게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어머니의 몸을 존재근거로 삼고 그로부터 태어남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시간의 제약을 넘어 이 증거는 원형적 표상으로서 각인되어왔다. 이러한 배꼽을 캐스팅한다는 것, 지문의 형태가 다르듯 배꼽의 형태 또한 다양하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가 세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오름들이다. 기능적으로 잊혀진 흔적기관 배꼽을 통해서 나의 몸을 관통하는 원형적 상상을 펼쳐놓는 일은 작가의 연 잇는 작업들을 해석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2012년 진행했던 <만월의 환영>에서 산모의 호흡과 태동에 따라 계속 꿈틀거리는 임신중인 배를 마치 언덕처럼 촬영한 영상을 선보였다. 동시에 바닥에는 둥글게 파놓은 구멍에 모유가 가득 담겨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땅과 온 감각을 일깨우는 듯한 보름달이자 우물이다. ‘우물은 신화적 상징을 담은 성소로서 다뤄져왔다. 생명이 잉태하는 공간이거나, 건국이나 제의적 장소, 회복과 재생, 신화적 세계로 연결하는 통로 등 탄생과 존재의 긍정성, 삶의 신박함을 담지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가장 원초적 영양분인 모유가 담겨있다. 마치 여성신 창생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이 모유는 전시기간동안 증발되고 발효되어 공간에 진동하는 생명의 를 뿜어내었다. 썩는 것은 변형되는 것, 세포질과 원형질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현상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생명의 는 어린아이의 오줌을 뿌려 만들어낸 얼룩그림 <야뇨증>(2014)에서 더욱 과감히 실현된다. 오줌 역시도 신체의 작용을 증거하는 생명의 찌꺼기들이다. 그 찌꺼기들이 내뿜는 강렬한 지린내는 직접적인 감각을 넘어 상상계를 자극하는 생명의식에 맞닿아 있다.
 
2. 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
 
작가의 서정을 키워왔던 핵심적인 장소, 부산의 영도 깡깡이 마을은 쇳소리 가득하고 현재까지도 밤낮없는 소음과 배를 수리하는 조선소들이 있다. 철비린내와 바다냄새가 뒤섞여 연한 핏비린내가 자욱히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다. 과거 깡깡이 마을 할매들이 선박의 녹을 제거하거나 붙여있는 각종 오물들을 갈아내듯이, 작가는 지난 2017년 개인전 <혀뿌리>에서 전시장의 벽면들을 갈아내었다. 갈아낸 벽면에는 중첩된 시간들이 노출되었고, 바닥에는 벽면의 가루들이 해변의 일렁이는 풍경을 자아내었다, <살갗 아래의 해변>(2017)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다시금 자기 몸으로 그 기억들을 새기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공간에 부유하고 표류했을 분진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생계를 이끌어야 했던 할매들의 모질고도 굴곡진 시간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시간과 기억을 후벼 판 듯한 벽면이 아름다우면서도 먹먹했던 이유다. <피속의 파도>(2017) 역시 그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썼던 파란색 유성페인트를 두르고, 생선 비릿내 가득한 상자들을 마치 산맥처럼 일정한 궤적으로 쌓아올린 작업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모습과 습성, 깡깡이마을을 에워싸고 작가 스스로에게 각인되어 있던 정서들을 육화시킨 것이다.
작가의 서정에 영향을 주었을 조부모의 삶, 어린 시절의 기억, 그때 그곳,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록과 장면들이 구체적이다. 어쩌면 해결이 안 되는 습성, 삶의 형태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강력하게 되물림되었을 심리적 영향들이 점점이 놓여있는 듯 하다. 또한 그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육기에 대해 작가의 의식에 소여된 명확함은 그의 영도시절을 빼고는 쉽사리 논구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작업들은 온전한 자기동일성 안에서만 자신의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없는, 작가가 견지해왔던 태도를 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순환적인 기억들을 숨고르기하면서 자기 정서의 뿌리를 발견하고, 현재의 접근법들에 맥락적으로 닿아있는 지점들을 엿볼 수 있는 작업들이다.
 
3. 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 ‘소설적인
 
저를 완결된 텍스트로 판단할수록 그들은 공간과 전시 자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덫을 쳐놓고 미끼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일지 이후의 편지’, 김도희 작가/콘크리트시계(2011)
 
그의 몸은 하나의 매질이 되어, 의식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겪게 되는 감각들을 포괄하는 처소이다. 실존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이자, 작가에게 몸은 변해가는징후로서 자신과 세계에 접속하는 인식코드가 된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 소리지르는 법을 배우고, 그마저도 모자라 형도의 채석장 바위에 누워 온몸을 열어젖히고 흡사 짐승소리 같은 곡소리를 보여주었던 행위에서 작가는 소리통이 된 자신을 느끼고, 그 소리들의 향방- 외부로 향하는 동시에 자기 내부의 찌꺼기들을 모두 발산시키는 듯한-에만 온 감각을 집중시켰다. 우주와 접신하듯이 발산되는 에너지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는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기운을 증명한다. 퍼포먼스는 행위자의 원초적인 정신성을 표현하면서, 주어진 형식이며 모든 것은 즉흥적이고도 우발적이다. 자신이 반응하는 이유들을 발견하게 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세계를 인지하는 접촉면을 확장하는 방법이고, 이 접촉면은 그가 예술가로서 세상을 다루는 진정성을 마련해왔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현하는 작업의 내러티브는, ‘과정적인것에서 확장하여, ‘소설적이다. 그것은 줄거리에 의해서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나 담론구조 내지는 확고한 내적 지향성과는 다른 과정적인요소와 우연성’, ‘즉흥성에 의한 변이가능을 지지하는 것이자 담론, 생성되어가는 지향성을 일컫는다. 처해진 상황(사건, 장소, 관계 등) 안에서 일상적/특정 장소가 무대가 되어 스스로를 놓아두는 것. 이때 주체는 안정된 작중인물이 아닌 감각하고 실재하고 있는 작가 자신이자, 그저 행위하고그 자리에 존재하도록처하게끔 내던져진 주체이다. 이 주체가 만들어낼 이야기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록들과 관심들을 포괄하면서도 결과를 열어두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편재해있다. <신치로이드60>(2003)에서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복용해야만 했던 약을 약 한 달 간 끊고 장지를 이불삼아 지냈다. 약을 복용하지 않은 대가, 증세로 신체적인 무기력이 몰려왔다. 또한 아픈 감각에 의해 더욱 도드라지고 예민해지는 감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오롯이 몸의 기록이 되어 장지의 주름들로 남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작가가 구하고자 한 것은 죽음, 자해, 부정 따위로 단순화시킨 개념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유와 소설적인 체험을 통해서, 실존하는 양상을 자기 몸의 반응을 통해 인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_잠행_바닥>(2015)은 쇠락해가는 성매매집결지 미아리 텍사스촌, 불탄 집인 하월곡88을 무대로 한다. 작가는 썩어문드러진 장소를 걸레질하며 청소하였다. 보자면 작가가 주로 포착하는 관심사에서 , 층위, 습윤, 침착등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몸에 새겨진 흔적이자, 세계에 다가서는 순차적인 단서들을 제공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장소에서 채집하는 벽지나 불에 탄 물건들이, 콘크리트를 비집고 올라온 생명력 강한 나무의 엉겨붙은 뿌리들이 모든 것이 멈춰버린 죽음의 장소와도 같은 하월곡88을 쓰다듬고 있는 작가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벽면을 닦아내는 수행, 어쩌면 그 무용해보이는 행위들 저편에 작가는 장소가 간직하고 있을 법한 웅크린 기억들을 끄집어내었고, 그 주변의 소리와 대화들을 기록하면서 덤덤히 풀어내었다. 그는 일기를 썼고, 채집을 하였고, 말을 걸었고, 계속 걸레질을 하였다. 그 와중에 과거 자신의 대화들을 기억해내었다.
18일을 계획하고 14일째 스스로 나왔던 날, 바깥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을 디디는 걸음조차도 생소했다던 <콘크리트 시계>(2011)에서 작가는 자신이 세팅해둔 장소에서 14일 동안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도 알 수 없을 불확정한 상태 안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자기 당위로서 발생한 작업들이 놓여진 공간에 거주하면서, 작가는 머무는 동안 몸상태 변화 등을 신체적 기록으로 남겼고, 그 안에서 마주쳤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방문기록들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14일이 지나자 그에게 장소는 원래의 집에서 지낼 때의 감각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과잉 정보를 처리해내지 못하고 두 손 놓고 있는 멍청한 상태관계를 단절시켜 죽음을 가속화하려는자기 몸의 작용을 인지하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한바탕 몸속에서 소동이 벌어지듯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고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존적 윤곽을 찾기 위해 작가는 상황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반응들-자기언어들, 파편들-을 찾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마무리하며
작가의 주요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작품적 경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글의 제목을 <표류와 횡단 그리고 공명으로의 전개>로 했지만, 글의 순서는 거꾸로 간다. <1 .="" span="">공명, 생명의식의 만다라>공명의 측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 작가의 현 상황을 담는다. 존재의 육기가 죽음과 부패가 아닌 본질적으로 생명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가늠하고, 설화적으로 연결된 원형적 상징들을 통해 확장된 주제와 방법론을 다뤄보았다. <2 .="" span="">기질을 횡단하는 순환적인 기억>은 영향관계와 서정의 시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기질경향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 것이었다. <3 .="" span="">표류하며 실연하는 몸_소설적인 체험>은 작가의 퍼포먼스적인 특성이 강한 지점들을 다룬 것으로 자신을 한계점까지 밀고가거나 유폐하는 등 강렬하게 각인되는 작업들을 독해한 것이다. 이를 해석하는 특징적 용어로서 소설적인을 대입시켜 내러티브-열린으로서 그의 수행적 행위들을 맥락화하고자 하였다.

2018년 8월 28일 화요일

행간, 정서, 표면의 조도 : 정용국의 ‘첫 번째 사람’

행간, 정서, 표면의 조도 : 정용국의 첫 번째 사람
(상업화랑_을지로143/ 기간 8.23-9.21)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첫 번째 사람의 각 단계들

어두운 공간, 벽으로부터 스미어 나오듯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글자들은 서서히 선명해지고 최절정에 이른 한 순간에, 하얀 빛이 온 공간을 채우면서 허망하게 모든 글자는 사라져버린다. 그가 한센인의 삶을 연구하며 작업화 한, ‘첫 번째 사람의 첫 작업이었다. ‘첫 번째 사람1인칭 ‘The first person’을 직역한 것으로, 주체로 끌어올리고자 한 행간의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었다. 이 작업은 2014지리산프로젝트의 주요장소였던 산청 성심원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서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말살되어야 했던 한센인들의 삶에 주목한 결과였다. 그는 한센인의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그들의 구술자료에서 유독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의 인칭 표현을 지나치지 않았고, 애달프고도 강력한 그들 스스로의 존재증명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의 인칭이 유독 강조된 문장들을 발췌하여 편집하기에 이르렀다. 그 문장들은 높이 7미터에 너비 8미터의 벽면에 세로글씨로 빼곡히 채워졌으며, 이는 그들이 살아왔던 삶을 공감해가는 과정을 그 스스로 직접 몸을 들여 수행적으로 풀어낸, 그 자신의 윤리와 태도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주목한 구술의 행간을 벽면에 기록하면서 작품에 더해진 빛의 연출은 시대적 억압과 편견을 시각화하는 것이자 작가의 총체적인 해석을 호흡으로 리듬으로 직관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된다.

첫 번째 사람의 두 번째 작업은 2016스코어전’(대구미술관)에서 소개되었다. 70년대 여성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일방직 인천공장. 사측의 이익을 대변하는 남성중심 조직으로 구성된 어용노조에 저항하여 한국 최초로 여성이 중심이 된 노조를 설립한 사실을 배경으로, 당시 노조활동에 참여했던 한 여성노동자의 구술을 다룬 작업이었다. 이것은 노조탄압이라는 권력의 폭정과 더불어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노동자를 인지하게 된 사건이자, ‘현장에 즉한 여성운동에 대해 관심을 촉발시킨, 한국 현대사 산업화 과정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장면이다. 정부와 회사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비인권적인 탄압으로 일관하였고, 여성노조원을 빨갱이와 동일시하는 언론의 여론몰이가 자행되는 와중에도 저항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화·산업화의 신기루 속에서 동등한 노동조건을 갖지 못했던 그저 평범한여성들이다. 작가는 그들의 저항을 특별한 사람들의 특이한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 땅을 살아낸 누이이자 이웃이고 동료이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산업화의 신화가 자행했던 탄압들을, 한 여성노동자의 구술을 통해 벽면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 또한 사회적 구조가 평범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또한 그들을 빨갱이로 몰았던 시대의 폭력적 시선을 빛으로 연출하여 두 번째 작업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구술작업에 대한 그의 실험과 연구는 더욱 본격화되어 갔다. 그는 2016자갈마당기억변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눈 먼 사랑이라는 작업을 발표하였다. 이 작업은 성매매경험당사자의 구술이 지닌 행간을 읽어냄으로써 그들이 처한 환경적 요인들(갇혀있거나 통제당하는), 스스로 자기 몸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유추해가는 과정이었다. 구술은 역사적인 사료로서 기록작업의 일환으로 채록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매매경험당사자 여성들의 구술은 특정사건이나 시간, 공간 등 구체적인 용어로 특정되지 않는 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그들의 삶, 상황적인 조건들이었다. 그것은 집결지 100년의 시간을 상징하는 듯한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의 구술작업 속에서 작가는 그나마 구체적으로 보였던 단어들조차 지워나갔고, 그렇게 편집된 문장들을 가지고 소리내어 낭독하도록 하였다. 나 역시도 직접 소리내어 읽어보라는 작가의 제안에 모호하게 구성된 문장들을 읽다가, 이상한 감정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인 단어를 모두 삭제한, 대명사나 조사, 말을 흐리는 어간 등으로 이뤄진 문장이었으되, 들은 적도 아직 읽어본 적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눈앞에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 구술작업을 진행하였던 한 연구자는 그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다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까지 가늠하며,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였다. 구체적인 지칭으로서 명사, 감정의 수식으로서의 형용사, 그리고 행위로서의 동사 등 문장을 이루는 핵심요소들이 빠져있는 그가 재구조화한 문장들이 그토록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들, 행간을 잇는 요소들로만 이어진 듯한 그 문장들이 그토록 기대하지도 못했던 정서를 촉발시키는 그 원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소리내어 읽는 행위 가운데 삶의 비애감이 느껴졌고, 웅얼거리는 소리는 리듬이 되어 이 비애감의 진폭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감정이 깃든 언어습관, 어투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18첫 번째 사람

작가는 탄핵정국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극기 집회를 이루는 극우세력의 첨병이 된 노인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모든 장면들과 교차하면서 삶을 끌어왔을 평범한 노인들이다. 그렇기에 성장과 안보를 지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서는 더욱 맥락적일 수 있다. 작가가 구술작업으로 주목했던 것은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노인은 특별할 것 없는, 가난하고도 평범하게 살아온 70대 남성노인이며, 특정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보다는 노인세대에 대한 통시적 시선으로 접근한 구술생애사 책이다.
정용국 작가는 세 번째 첫 번째 사람작업을 위해 직접 저자 최현숙을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구술작업에 대한 상황적 맥락과 실제 남성노인의 육성을 담은 녹취자료들을 구하였다. 마찬가지로 곱씹으면서 그들의 삶을 반복하여 읽고 듣는 방식으로 이번 개인전의 주제들을 맥락화해 갔다. 그 중 그가 다룬 남성노인은 평생 건설현장에서 목수로 일했던 노인이다. “결혼도 못했고, 돈도 없고, 평생 노가다나 했고, 그런 건 창피한 거잖아요. 누구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안보지요...” 이 노인은 남성적임의 가치관 속에서 특유의 왜소한 체구로 인해 자격지심을 간직하고 살아온 삶을 증언한다. 남자답고 싶어 군대에 자원했고, 베트남 전쟁에까지 몸소 참전한다. 그의 삶은 전쟁, 유신독재 등 한국 사회의 모든 굴곡점과 궤를 나란히 하며 펼쳐진다. 작가는 노인의 구술을 총 15,480자로 편집하였고, 이를 벽면에 새겼다. 실수로 양잿물을 마신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였던 불행했던 유년시절부터 몸이 왜소하여 여자도 없고 남성적이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작동해온 그의 삶들이 벽면을 따라 이어진다. 그의 삶 중에서 그가 가장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던 목수로서의 삶은 가장 마지막 동선에 배치된다. 노인의 생애사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장면들의 서사들을 잇고 있다. 나즈막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육성이 공간에 더해지고, 한국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하듯 입구에서부터 미러지에 새겨진 태극기 문양이 실체 없는 빛을 반사하며 잔물결을 만들어낸다. 이번 작업은 특히나 빛의 움직임이 연출하는 장면들을 더욱 극적으로 구성하였다. 암흑 속에서 빛점들이 유영한다. 문득문득 흔적처럼 유령처럼 비춰지는 글씨들, 이윽고 벽면에 새겨진 글씨들이 선명하게 보일 무렵, 붉은 빛이 은연중 공간을 잠식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내 서서히 밝아지는 하얀 빛을 통해 공간은 마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양, 그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으로 전이되어 있다. 빛의 움직임들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육성과 더불어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직접적인 감각으로 살에 스며드는 듯한, 한편의 분위기로 형상화된 서사로 구축된다

형광물감으로 새겨진 글씨를 비추는 푸른조명은 스며들고 배어나오는 글자의 움직임을 만들고, ‘붉은조명은 작가에게 사회적 편견 내지 경고, 한국현대사 속에서 행해진 무차별적인 억압기제들 그리고 저항의 시선 등을 담은 다층적인 해석구도를 포함하는 빛이다. 또한 하얀 조명은 일종의 소격효과로서 몰입을 차단하고 다시금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일상으로 되돌리는, 일종의 공감하지 못한 사유이자 존재하지 않음(무화)을 상징한다. 하지만 결국 하얀 빛은 매섭게 차단하여 빛의 서사적 흐름을 끊되, 그로인해 더욱 여운을 강조하는 역설의 빛이 되고만다.




작가는 자신의 구술작업을 느낌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실제 그가 접한 구술작업의 대상들은 한국 근현대사 안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자, 주류 사회의 담론과 편견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느낌의 윤리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주목하였고, 그들의 삶을 연구와 수행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다층적으로 이해해가는 실천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느낌의 윤리라는 표현은 예술가가 역사에 대한 성찰 및 타인의 삶을 주제로 한 내용을 창작의 방법론으로 다루는 온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인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평소 그가 화가로서 지속적으로 해왔던 회화적 실험은 대체로 명증적이었다. 재료자체에 골몰한 것이 작업의 주제가 되거나, 형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깊게 침잠하거나, 반복적인 요소들이 구성하는 덩어리 자체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가는 것으로서, 회화 존재의 알레고리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각 요소에 접근해가는 예민함, 집중하여 요소들을 잇고 구성하나 드러나지 않은 메타포 등을 시각화하고자 표현의 방법론을 찾아온 탐색과정은 그의 회화를 특징화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2014년 이래로 구술을 특정화한 그의 작업들에서 단어와 문장을 분석하고 그 특유의 시선을 집중과 시선을 통해 맥락화하여 행간을 구성하는 과정들이 그의 회화작업과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로부터 그에게 다가온 주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느낌의 윤리란 예술가로서 그간 매체에 접근해온 그의 탐구적 태도 근간에 놓여있던, 늘 있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작가 정용국을 향한 접속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