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일 일요일

장소를 마주한, 예술가의 기록

* 본고는 문화공간 양 '2017 거로보관소'에 수록된 글입니다. 

장소를 마주한, 예술가의 기록 


최윤정 ● 독립큐레이터

시작하는 말

본고는 대구 중구 도원동에 위치한 성매매집결지 ‘자갈마당’을 기록하는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2016>의 사례를 기반으로 하여, 예술가들의 창작과 기록에 대한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주관단체인 대구여성인권센터는 성매매당사자 여성들의 구술작업을 시작하면서 자갈마당을 둘러싼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를 목록화·편집하여 <자갈마당 100년의 역사> 아카이브를 구축하였다. 예술가들은 전시 <자갈마당 시각예술아카이브_발화, 문장의 외부에 선 행위자들>을 통해 장소성에 대한 각자의 연구를 하나의 과정물로서 작업화하였다. 현재(2017.11월 기준)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장소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활동가의 측면에서 또한 예술가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도정에 놓여있으며, 서로의 입장에서 기록들을 어떤 방식으로 남겨야 하는지 또한 그것이 향후 장소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닿아야 하는 영향관계에 대해서도 심화시키는 방안을 주 과제로 삼고 있다. 즉 한 번의 이벤트적 요소로 끝내기보다는 과정적으로 축적되는, 순차적인 단계가 필요하다는 공통의 의견이 있었고, 그것이 이 프로젝트가 지닌 진정성의 국면을 형성해간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간 이견이 없었다. 

프로젝트 안에서 예술가들의 활동에 대한 진행 과정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2016년 봄까지 작가구성을 마친 후(내가 결합한 시점은 2015년 겨울이었다), 2016년 여름 연구과정(워크숍, 답사 등 스터디 및 개별연구)을 거쳐 작업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작업계획은 결과물 자체이기 보다는 자갈마당에 대한 관점을 생성해가는 과정으로 설계되었으며, 11월에는 이를 토대로 한 전시로 작업들을 소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 프로젝트의 맥락과 예술인 협업이 지닌 의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가 진행되었다. 2017년은 2016년의 활동과 함께 2017년까지 이어진 후속작업들을 총망라한 출판물을 제작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출판물은 참여작가 중 사진작업을 하는 3인의 작가들의 시선에서 기록한 ‘자갈마당 사진집’과 참여예술인들의 활동을 맥락화한 ‘인터뷰집’으로 구성된다. 현재 자갈마당 인근에 현장상담소(대구여성인권센터 주관)가 개설되었고, 그 안에 자갈마당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전시관과 장소성(자갈마당, 역사, 인권, 여성)을 특화로 한 대안공간 ‘기억공간1906’이 조성되어있다. 이곳이 현재 근거지가 되어 2016년에 소개한 작품들은 물론 2017년에도 후속으로 창작된 작업들이 연속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현재 지난 9월을 시작으로 총 2차에 걸친 전시가 개최되었으며, 올해 마지막으로 열리는 3차 전시는 사진집에 대한 전시로서, 출판물 발간 일정에 맞추어 개최될 예정이다.       


기록 그리고 기획의 당위

2016년 처음 내가 마주한, 자갈마당이 위치한 도원동 일대는 고층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금은 이미 다 지어져, 세대별 입주 중인 것으로 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성매매 집결지는 ‘유곽’이라는 이름으로 1876년 개항이후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작하여 조선 전체로 확산된 공통의 역사를 갖는다. 따라서 전국의 성매매집결지들의 상황을 보자면, 그 태생은 물론이거니와 변화나 발전(?)과정에서도 서로 비슷한 추이를 보이고 있다. 최근 전국적으로 성매매집결지 폐쇄에 대한 지자체들의 논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피자면,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는 당위를 꾸며주는 하나의 수식일 뿐이고, 결국은 자본과 재개발이다. 그로인해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비인도적인 행태들이나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는 성찰되지 않고 있으며, 애초부터 없었던 곳인 양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 관련단체들이 우려하는 문제적 지점이다. 그간 약 20년 가까이 대구여성인권센터는 성매매집결지인 ‘자갈마당’에 대한 문제에 집중해왔고, 정책 제안 발언은 물론 기록물 자료수집 등 연구작업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성매매집결지의 폐쇄는 마땅한 일이나, 당사자 여성들의 생존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타 집결지로의 유입), 또한 인권유린의 현장으로서 역사에 대한 성찰도 없이 ‘재개발’의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장소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우려에 있었다.

이에 몇 년 전부터 지역연구가들과 자갈마당이 사라지기 전에 그곳을 기록해야 한다는 논의들을 진행해왔고,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2016>은 그 과정에서 방법론으로서 구상된 것이었다. 자갈마당이 사라지기 전에 그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는 간절함은 또한 많은 이들의 공감대를 확대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졌다. 장면을 포착하는 시선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경직되지 않고 다양한 사유의 지점들을 열어두는, 강요하는 캠페인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스며들고 공진하는 활동으로서, 그렇게 이 프로젝트에 예술이 결합되었다. 처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을 받았을 때, 몇 차례 거절을 하였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거운 주제도 주제이거니와 시민단체와의 협업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의에 가려 예술가들의 창작이 도구로 전락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탈성매매당사자 여성들의 토크콘서트 관람을 계기로 프로젝트 합류의 명분을 찾은 후, 그때부터 나는 각자의 자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율함과 동시에 예술가들 역시도 이를 통해 본인의 창작작업이 확장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발판을 조성하는 일을 주 과제 중 하나로 삼게 되었다. 동시대 사회적 의제란 시민단체의 활동이나 예술가들의 창작모티브에 있어서 공통적일 수 있다. 또한 그간은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것이 문제였으므로, 협업의 시스템을 실험하여 모범적인 선례를 구축하는 것도 기획자로서 기여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비교적 짧은 전시기간임에도 많은 호응이 있었다. 다수의 관람객들은 물론 이해당사자들(공무원, 정책관계자, 전국활동가 등)이 오갔으며, 주제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화제성을 띄면서 그간 사회란에만 수록되어 온 ‘자갈마당’ 관련 기사들은 일간지 문화란이나 칼럼등에 소개가 되었고 또한 예술잡지에도 소개되었다. 올해 연초에는 지자체에서 ‘자갈마당 폐쇄조례’가 통과되면서 성매매당사자 여성들에 대한 생계 및 자활을 돕기 위한 지원대책도 함께 마련되었다. 대구여성인권센터가 이를 실행할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장소가 전시장도 함께 조성된 ‘현장상담소’이다.

이 프로젝트가 내부적으로 호응을 얻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술가와 활동가의 역할에 대해, 각서로의 자율성을 인정했다는 점에 있다. 예술가가 활동가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활동가는 예술가처럼 해서는 안 된다. 한편 현장에 닿게 되는 접촉면도 예술가/활동가는 가능하지만 예술활동가/예술가는 가능하지 않은 경우들이 많았다. 각자가 ‘따로 또 같이’ 손이 닿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협력하며 협업한 지점이 이 프로젝트 시스템 상의 의의를 만들어주었다. 한편 일부에서 예술가가 현장에서 성매매당사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그들을 주체로 하는 작업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그 지적은 물론 타당하다. 그러나 당사자들 접근 문제는 ‘낙인’이라는 폭력적 시선이 내재화된 그들의 두려움을 건드려야 하는 일이었고, 당사자들을 주체로 한다고 여기는 다수의 작업들은 보기에 ‘대상화’라는 윤리적 문제를 수반하거나 착한 공공미술, 캠페인같은 작업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큐레이터로서 나의 생각이었다. 나와 예술가들의 태도적 윤리성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은 하지말자’였다. 그리하여 협업의 형태에서 현장에서의 접근과 판단은 활동가들의 조언을 따르면서, 장면과 사유의 지점들을 발굴하고 찾아내는 몫은 우리에게 있음을 서로 주지하였다. 이것이 이 프로젝트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율성’이자 나의 태도적 기획윤리였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예술가들이 이 주제를 자기 작업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는 계기에 주목하여 작업을 조율하였다. 사회적 의제에 작가들이 접근하는/실천하는 방법론에 대해 활동가적 당위에 얽매이기보다는, 철학의 시각적 대응물로서 미술에, 이미지생산자로서 예술가적 사유에 보다 집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장소를 마주한 예술, 창작에서의 기록의 의미
(이수영, 정용국, 이범용을 중심으로)

자갈마당이 형성되었던 일제 강점기 시기, 이곳의 이름은 ‘야에가키초(팔중원정)였다. 이는 일본 [수진전]에 실린 신화 속에 나오는 지명으로, 천조대신(일본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에게 12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초고대왕이 신궁에 쳐들어가서 여왕 히미코를 굴복시키고 천조대신의 왕비 8명을 후비로 삼아 그들을 가둔 곳이 이즈모의 ’야에가키‘라는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해방 이후 이곳은 ’도원동‘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도원동은 과거 복사꽃이 만발했던 동네 혹은 성매매 여성을 ‘도화’라 일컬어 즉 ‘몸 파는 여인들’이 모여사는 동네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그러나 속칭 ‘자갈마당’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과거 대구천이 흐르는 저습지여서 그곳을 메우느라 자갈을 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유곽을 벗어나기 위해 밤에 몰래 도망치려해도 자갈 밟는 소리로 이내 들켜버렸다고 한다. 그것은 또한 포주들이 깔아놓은 자갈로 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자갈은 ‘빚’을 또한 상징하는 내용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도무지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야에가키초’.  
“그 아비되는 자가 이십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처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물론 피차에 한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처녀는 일본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이십원 몸값을 십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빚이 육십원이나 남았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 송장이 되니까, 주인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주고 작년 가을에서야 놓아준 것이었다” _현진건 ‘고향’(1926)  

<자갈마당_기억변신프로젝트2016>에는 총 13인팀의 예술가들(김태권, 박진영, 전리해, 윤동희, 임은경, 이범용, 정용국, 정유진, 빈중심, 황인모, 오석근, 이수영, 사월의눈)이 참여하였다. 그 중 이수영, 정용국, 이범용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의 창작행위로서 ‘기록’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작가 이수영의 경우 ‘스토리텔링 창작, 픽션의 수집물과 행위의 기록들’

자갈마당을 시각예술의 방법으로 ‘기록하는’ 방식에 있어서, 작가 이수영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활동가들과 예술가들이 자갈마당 및 그 인근 답사는 물론 각종 역사자료 및 현장사건에 대한 내용들을 함께 공부하는 워크숍 과정에서, 자갈마당이 고향이었던 한 일본인 오카다 다카유키의 이야기도 있었다.  

“오카다상은 식민자 3세이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1919년 즈음 대구에 정착했고 영화관을 운영하다가 후에 과수원을 하게 된다. 할머니는 현재의 팔중원정(야에가키초_자갈마당의 옛이름)에서 게이샤 유곽 ‘대강메’를 운영했다. 사창가의 게이샤집에서 태어난 그가 100년 가까이 변함없이 성매매가 이뤄지는 이곳을 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_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오카다는 1934년에 야에가키초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 살았던 집은 게이샤 유곽이었고, 그의 가족은 2층을 살림집으로 삼았다. 해방기 때 그의 가족은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일본으로 쫓겨난다. 그는 식민지 조선 ‘자갈마당’이 고향이었던 일본인, 70대의 노인이 되어 지난 2007년 고향인 대구, 자갈마당을 찾았다. 

작가 이수영은 이 일화에서 자갈마당의 100년 역사에 대한 작업의 단초를 찾았다. 보다 미시사적 접근으로 자갈마당을 에워싼 이야기는 성매매 뿐 아니라, 이곳이 고향이었던 포주집안의 한 일본인의 유년시절 기억으로부터 소환되는 것이다. 작가는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는 자갈마당을 떠도는 게이샤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었다. 스스로 게이샤 복장을 하고 정확히 밤 12시에 자갈마당 주변을 배회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이 작업은 퍼포먼스 영상에 등장하는 게이샤 귀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연을, 자갈마당의 역사를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업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한 남성 배우를 섭외하여 자신이 직접 작성한 시나리오에 맞춰 그가 ‘오카다 다카유키’를 연기하게끔 하였다. 이는 실제 전시 오픈 당일, 이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오카다 다카유키가 일본에서 대구에 찾아와 전시를 관람한다는 설정이었다. 당시 관람객들은 그가 연극배우인지 모르고, 그가 전하는 자갈마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갈마당에서의 추억이며 에피소드를 묻는 질문에 그는 어떤 여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여인이 귀신이 되어 동네를 떠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말을 끝으로 퍼포먼스는 종료된다. 작가는 이를 작업의 물꼬를 트는 하나의 과정으로 삼고, 이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하여 게이샤 귀신의 정체를 밝히는 설정으로 자갈마당의 이야기들을 풀어가는 ‘포럼’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갈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서 내용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유곽지대가 고향이었던 일본인들에 대한 자료수집을 위해 그리고 오카다 다카유키를 직접 인터뷰하겠다는 각오로 참가지원을 통해 일본의 도쿄원더사이트(아티스트레지던시)에 국제레지던시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3개월동안 작업을 펼칠 수 있었다. ‘오카다 다카유키’를 찾아나선 그의 여정을 내내  가로지르는 것은, 어쩌면 자갈마당에 대한 문맥에서 또한 잊혀진, 식민지 조선이 고향이었던 일본인을 통해 역사적 비애와 순환적인 구조를 들추고 인류학적인 지평에서 입체적으로 자갈마당을 조명하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물론 그는 ‘오카다 다카유키’를 만나지는 못했다. 아흔이 가까운 그의 생사는 물론이거니와, 흔적을 찾기에 3개월의 시간은 다소 짧았던 듯 하다. 그러나 작가는 그를 찾아나가는 추적과정들을 기록하고 발견된 자료들을 수집하는 등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연구기간을 가졌다. 한국에 돌아와 그는 집중된 고민들을 토대로 자갈마당을 떠도는 게이샤 귀신의 정체를 밝히는 픽션 형식의 포럼을 2017년 10월 말 수유공간너머에서 퍼포먼스로 펼쳐내었다.   









-작가 정용국의 경우 ‘기억감정의 구조들, 편집되어 재-기록된 구술’ 

작가 정용국은 대구여성인권센터의 ‘성매매경험당사자 여성들의 구술작업’에 주목하였다. 실제 구술내용은 당사자의 허락 없이는 외부에 공개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작가의 작업 및 연구의도를 공감한 후, 대구여성인권센터의 조율을 통해 한정된 5인의 구술자료가 그에게 제공되었다. 그가 이 구술작업들을 연구하면서 주목한 지점은 당사자 여성들의 말하기 방식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어떤 모호함’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외부와 단절된 채로, 자기 신체의 노동환경을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반영하는 듯 했다. 보통 구술 자료들을 읽다보면 구체적인 정황이나 근거들에 대한 진술들을 찾을 수 있기에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를 기대했던 5인의 구술 작업 속에서는 그가 원했던 구체적인 내용들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이게 뭘까 하는 궁금증만 오랜 시간 증폭되었고, 그로부터 그는 드러난 내용 이면에 말하기 방식과 단어의 표현 그리고 말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 심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시공간에 갇혀져 있고, 행위나 움직임까지 통제를 받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낙인 등 외부의 시선은 또한 스스로를 가두게 하는 심리적 감옥에 다름 아니다. 문득 그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하였을 때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구는 사랑하는 대상을 만지고 감각하고 교감하고 싶다는 마음일진데, 당사자 여성들에게 그 원초적 감각이 소거되었을지도 모를, 그렇기에 읽으면 읽을수록 말하기 방식 및 단어들에서 그들 삶의 이면을 회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다가왔다고 전했다. 단순히 기록으로서의 서사를 이해하는 측면이 아닌 그것이 곧바로 정서로 감각으로 직접 전해져오는 경험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 구술작업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말의 ‘간극’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모호한 말하기 방식을 더 극단화하여 이내 구술에서 구체적인 단어들을 지우고 지우는 작업들을 반복하였다. 그러자 보기에 전혀 알 수도 없는 대명사와 조사, 관계사 등만 나열된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만들어졌다. 이 편집되어 재기록된 글은 도무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글을 소리내어 읽는 순간, 소리로 전달되는 그 하나하나 모호한 단어들에서 이야기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실제 그 구술작업을 진행했던 한 활동가는 아무런 정보 없이 작가로부터 받은 편집된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다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반 정도 읽어내리는 도중에 알아차렸다. 그 간극 속을 메우는 단상들이 머릿속에 차올라 곧바로 감정적 동요를 일으켰다. 나 역시 소리내어 읽어보았었다. 읽는 도중  장면들이 떠올라, 목뒤가 쭈삣 서는 듯한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5인의 구술작업은 감정을 배제한 제삼자가 덤덤히 읽어내리는 소리를 통해서 5개의 사운드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올해 그는 5개의 구술작업 중 한 탈성매매당사자 여성의 협조를 받아, 그가 재편집한 그녀의 이야기를 그녀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 구술자료 연구를 통한 그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2014년에 경남 산청 한센인마을인 성심원에서 ‘첫 번째 사람’이라는 작업을 진행한 바가 있었다. 구술자료들을 읽고 분석하는 연구과정에서 그는 사회적으로 잊혀지기를 강요해왔던 그들의 역사를 발견했다. 도리어 그들이 ‘나는’, ‘내가’ 등 자신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유독 많았음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무엇이었을까를 계속 고민하였다. 이내 1인칭의 문장들(특히 들어주기를, 무엇인가 강조하는)을 뽑아 구술자료를 재기록하였다. 이 기록들은 너비 12미터에 높이 8미터의 벽면에 세로 쓰기 방식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또한 형광페인트로 한 글자 한 글자 수행하듯이 흰 벽돌 벽면에 새겨진 글자는 공간에 설치된 블랙라이트의 조도가 서서히 밝아짐에 따라 점차 선명해지는, 선명도가 가장 높은 순간에 갑자기 형광등이 켜지면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은폐되고 차별받았던 시대의 폭력성을 긁어내듯이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업이었다.  






- 작가 이범용의 경우, 장소에 습윤되어 성찰을 이끄는 자기진술들

작가 이범용은 장소를 구성하고 있는 문화와 사람들- 공동체적 공통감, 민속, 풍습, 그 안에서의 개별 삶의 양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장소의 객관적인 역사란 그가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표지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말인 즉 그는 자신에게 낯선 장면들에 대해서는 온 몸을 습윤시켜 그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위를 찾아가는 과정을 작업 이전에 필수적으로 행해왔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작업계획을 상의해야 하는 시기에, 그는 그 장소에 자신이 머물러 봐야겠다는 짧은 선언을 남겼다. 그가 선택한 곳은 자갈마당 인근 북성로 주변의 작은 쪽방 여관이었다. 이곳은 60대 이상 연령대가 높은 성매매당사자 여성들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자갈마당의 100년의 역사 속에서 부속물처럼 생긴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여관업과 성매매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고 싶었다. 대화라도 나눌 수 있다면 직접 구술작업을 행해도 좋겠다는 것과 그 내용을 토대로 사생작업을 행해보고 싶다는, 도무지 어떤 과정물이, 결과물이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보호차원에서 몇 차례 말려보기도 했지만, 작가는 그렇게 허름한 쪽방에 약 보름간 기거하기 시작하였다. 매개나 대화의 채널을 만들기 위해 그는 스스로 군고구마 장수를 자처하여 매일 인근 큰 거리에 나가 일정한 시간동안 고구마를 팔고, 팔고남은 고구마는 여관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나중에는 그가 어디에서 고구마를 파는지 그 내용을 알고, 친절한 청년을 만나 수다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별의 별 에피소드가 많았다. 물론 여기까지는 무리없이 계획대로 잘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어느덧 상황은 급작스럽게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그가 애초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자신이 지닌 편견과 마주한 것이다.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자 했던 의도는 자기 내부를 바라보게 되는 성찰로 이어졌다. 쪽방의 빨간 등을 형광등으로 바꾸면 그냥 사람이 사는 오랜 시골 방같은 모습일 뿐이다. 다들 일상을 이야기하고 비오는 날에는 함께 전도 부쳐먹고, 밤늦게 들어오는 고구마 장수의 방 앞에 홍시를 놓아주는 동네 어른들이다. 그는 이 사실들, 그때의 감정들과 자신의 상황들을 글로 이미지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고구마장수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실은 예측하고 있었다. 신학생 아니면 예술가, 결이 너무 다른 사람인지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크게 놀라거나 화내는 반응도 없었고 무덤덤했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이 기거하던 쪽방에 새 이불과 등을 설치해주고, 자신이 사용했던 낡은 이불과 형광등(빨간등과 흰등이 함께 있는)을 교환하였다. 그가 수집한 자료들은 그가 자기의 편견과 싸운 현장에서의 인식지점들이 변화하도록 하는 매개로서 상징적이었다. 장소를 마주하며 도리어 자신과 대면한 사건, 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장소에 대한 자기 편견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이불 등 행위의 수집물들을 ‘자기고백’의 증거들로 남긴 설치작업으로 이어졌다. 실제 이 작업은 관람객의 공감 및 반응이 대단히 높았다.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편견적 시선들은 어찌보면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있는 무엇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가는 말

현재도 업소들이 운영되고 있는 자갈마당과 직접적인 피부접촉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은 ‘감각’의 수용을 전제로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참으로 고난스러운 지점이었지만, 대구여성인권센터의 코디네이션을 통한 접근 등 일종의 ‘거리두기’를 통해 상황에 대해 차갑게 접근하는 방향은 도리어 특정집단 혹은 사회에 대한 예민한 독해지점을 발견하는데 유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예술가들을 개별의 주된 시선이 향하는 지점들-생태, 사회, 구조 등-을 발견할 수 있는 ‘연구자’이자 ‘기록자’로서 본 과정들을 각자가 창작의 의제에 연결하며 이어나갔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들이 스스로 발견한 일종의 ‘문장들’에 대한 접근과정이었다. 

자갈마당에 대한 담론에 육체적인 형체를 부여하는 예술가들의 발화, 시각예술의 방법론을 통한 아카이브는 그렇기에 순전한 자료전의 형식과는 다른 문맥을 갖는다. 고민의 과정들이 담겨질 작품들은 비유하자면 완결된 문장이기보다 비문장이고, 서사 속에서 드문드문 나열된 단어들 혹은 음운일지도 모른다. 
“... 단어, 구문, 관용구의 단편들이 스쳐갔으며 아무런 문장도 구성되지 않았다....매우 문화적인 동시에 야만적인 그 같은 언어는 무엇보다도 어휘적이고 산발적이었다. 그런 언어가 뚜렷한 흐름과 명확한 불연속성을 통해 나의 내부에 구축되었다. 이 비문장은 문장에 도달할 수 없는 문장 이전에 존재했을 어떤 것이 결코 아니었다....문장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_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하나의 고민들이 응집된 각 덩어리로서 ‘비문장’인 작품들은 그렇기에 특수한 국면에서 형성된 창작물이자 그 자체 특징적이고 체화된 기록물이기도 하다. 문장의 목적적 시선에서 비롯된 선적인 경직성을 해방시킨 (문장의 외부에 선) 예술가들의 활동, 하나하나가 자갈마당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시각예술아카이브로서의 단계적인 지층을 만들어가는 작업인 것으로 나는 그렇게 여기고 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