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경남예술창작센터 10기 입주작가 한진 작업 비평

반응, 울림

최윤정 ●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삶이 반응하는 지점들, 정온한 기억을 깨우치는 중추로서의 수동적인 감각들. 어느덧 아물거리는 기억들, 생의 반응들로서 순간적이고 격정적인 경험들이 묻혀있는 몸으로부터 기억이 감각이 움트는 바로 그 지점들, 일상적인 패턴들 속에서 시공간을 헤집어 호흡하는 몸의 집중을, 정신의 향방을 이끄는 그 무엇을 발견하는 일. 

마치 어두운 밤 가느다란 한 줄기의 빛이나 세상 전부의 소리와도 같은 작은 부석거림이 온 신체의 반응을 이끌어내듯이, 작가의 작업은 인지를 향한 혹은 인지의 상황에 대한 심리적인 소란을 불러일으키고도 고요하게 또는 파장처럼 지속적으로 울리는 허밍처럼 ‘들린다’. 기억의 질감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작업은, 재료의 용법에서도 이 감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지르고 지우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즉흥적인 느낌을 표현하거나(연필을 가루로 만들어 문지르거나 떠오르는 단상들을 지우개로 지우면서 형상을 찾아가는 작업), 그의 유화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물성이 주는, 풀어져 균질화된 신경다발과도 같은 표면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그에게는 애도해야 하는 많은 기억들이 잔상으로 온몸에 흩뿌려져 있다. 그것은 그리움이거나, 과거의 시간을 머금은 흔적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것은 한갓 관념으로 각각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세포에 저장된 기억들이다. 다만 일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자연히 끄집어내려는 시도에서 작가의 작업은, 신체의 특정감각을 건드리는 지점들을 발굴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그 지점들이 연결되는 선상에 작가 자신의 실존이 위치하는 상황들을, 습윤된 기억을 끌어내면서 자신의 감각체험들의 움직임에 호흡하는 것으로 마주하고 있다.   


작가가 자신의 기억이나 감각을 깨우는 시작은 ‘소리’와 ‘흔적’이다. 그는 기억을 소환하는 혹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소리(음, 목소리, 노이즈)’에 주목한다. 소리의 감각은 그 소리가 위치했을 법한 혹은 그 소리를 경험했을 법한 장소의 이미지와 결합되기도 한다,  장소는 수많은 문맥들을 가지고 있다. 그가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 당시의 햇살과 온도, 그리고 당시의 기분. 모든 장소는 그렇기에 보기에 재현되는 대상이기 보다 상징적인 환경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가 이곳에 입주하면서 주목했던 경남권의 한 도시, 가까운 이가 과거에 살았건, 그의 과거 삶이 층간으로 자리할 그 장소를 좀 더 가까이에서 마주하고자 하였다. 그곳에서 감각한 모든 것들은 아마도 시간을 두고 자신의 정서를 담은 답가로 읊어질 것이다. 작가에게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벽’은 시간의 겹들이 만들어낸 오래된 이끼와 때, 뭉쳐진 먼지 등의 것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 내지는 어느 기억이었을지도 모르는 잊혀졌던 무엇을 일깨우는 정서적 장소가 되기도 한다. 낡은 벽의 표면을 다시금 문지르고 지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떠오르는 형상은 마치 잔상처럼 몸의 행위에 접속되고 이는 자기 신체의 반응들을, 그것이 감정이건 물리적 반응의 종류이건, 인지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이 과정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이면들을 가시화하는 것, 시각예술이 할 수 있는 본연의 철학적 국면이다. 인지하지 못했던 지점들이 예술가들의 수많은 해석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는데, 각자의 해석들 속에서 작가는 세상에 처한 자기에 대한 성찰적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순전히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 구현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구축하는 표면들에 집중하고 있는 실천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도정으로 이끄는 것이 아닐는지. 이러한 객관화 과정에서 그는 ‘인지하지 못했던 지점’을 발견하고 탐구하는 것에 몰입하는데, 이는 공간적 설치 과정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준 바 있다.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이 좁은 통로, 그 통로를 마주하면서 갈등하는 관객. 일종의 몸짓을 요구하는 연극적인 요소들이 공간적 설치에서 적용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움직임이라는 신체의 활동을 통해 무엇을 감각하게 할 것인지, 왠지 감각적으로 부조리한 상황들을 설정함으로써 불편한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행위를 이끄는 것. 그 불편한 요소들에 또한 사람들을 대면하게 하는 것. 지난 그의 전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간에 설치하는 의도로 설정했던 바이기도 하다.   


인터뷰 중에 나는 그가 선호하는 음악을 물었다. 나 또한 작가의 일상적 감각에 접근해보고 싶은, 말하자면 접근을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타인의 감각에 접속하는, 반응할 나의 특정감각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탓이다. 그가 몇몇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방식 문득 작품을 보며 그가 생각하는 소리, 그가 또한 바라보는 것이 제목의 의미이기보다는 후음과도 같은 소리의 뉘앙스로 이뤄지다는 것. 그의 작업이 함의하는 소리를 상상하고 표면이 주는 시각성을 동시에 추적해나가는 것의 의미, 문득 이성의 뇌리에 멈춘 경직된 비평적 시선을 공감각적으로 풀어헤칠 수 있는 계기로, 그렇게 접근 중이다. ● 

경남예술창작센터 10기 입주작가 오지연 작업 비평


행위와 해체, 경계를 포괄하는 호흡 

최윤정 ● 독립큐레이터, 미술비평

작가의 작업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한 작업의 완성태는 그 과정에서의 완성태이고 그 이후 이어지는 과정을 향한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내 종국에는 파손 내지는 자기파괴의 상황으로 풀어헤쳐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주로 부드럽고 유연한 소재에 관심이 있어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장갑에 주목하게 되었고, 목장갑을 자르고 이어 붙여 다시금 조합해가면서 ‘감정세포’를 만들어왔다. 여기서 ‘감정세포’는 일종의 정서적 원형으로 상징되고, 물리적 원형의 유기체적 최소 단위의 형태를 상상하게 한다. 새로운 생을 탄생시키기 위한 죽음, 세포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이에 덧입혀지는데, 이는 앞서 말한 ‘자기파괴’로서의 작품 해체행위를 의미하며, 다음의 생/창작을 위해 자발적인 죽음을 택하는 상황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작가의 전 작업들이 과정들을 통해 순환적이고 유기적으로 얽혀있음을 반증하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감정은 완성되지 않기에 나의 작품은 변모한다. 
 나의 감정은 변화하기에 나의 작품은 완성되지 않는다“ 






‘감정세포’는 그의 몸의 일부, 혹은 그의 행위에 동참하는 또 하나의 몸이자 개체이다. 그것이  중심에 놓이면서 작가는 자신이 관계맺는 환경과 또한 그 환경 안에 젖어들고 소멸하는 작업 을 통해서 죽음과 생성의 과정이 결국은 다르지 않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보기에 생채기를 내는 듯한 작업은 무엇인가를 상기시키는 것과도 같은데, 여기서 ‘생채기’란 놓여져 있는 환경 자체일 수도 있고, 예리한 칼날의 쑤심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고난과 고통을 수반한다 할지라도, 어쩌면 상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추출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생채기에 대해 ‘평가적인’ 의미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마치 죽음과 생성이라는 것이 반대이건 혹은 같건 간에 의미적으로 대립되어 있기보다, 서로 맞붙어 서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한정적으로 부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어느 것에도 닿아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메시지가 유효한 것이다.  

특히 그가 이번에 주목한 환경은 바로 창작센터 안에 있는 무덤가처럼 생긴 작은 인공 언덕이다. 그는 이 장소를 중심으로 지난 몇 개월간 과정적인 작업들을 수행해왔다. 

감정세포들이 이 작은 언덕의 능선을 타고 바닥 곳곳에 이어져 있으며, 이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서 언덕에 오르면 좁다란 길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한다. 걷다보면 길에 놓여져 있는 감정세포들이 밟히기도 한다. 살을 밟는 듯한, 생명에 생채기를 내는 듯한 불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 작가는 한 달 간 하얀 면드레스를 언덕 아래 땅 속에 묻어놓았다. 한 달 동안 이 드레스는 흙의 생명과 호흡하고 삭기도 하는 자연의 해체 과정을 거쳤다. 흙물이 잔뜩 베이고 군데군데 찢기기도 한 형상이었다. 작가는 이를 다만 불편한 과정이 아니라, 자연이 되고 풍경이 되는 작업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그간 자신에 의해 파기되고 해체되었던 작품들이 관계를 맺는, 즉 자연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작업을 해체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이번 퍼포먼스 영상은 바로 땅 속에 묻어 자연의 해체를 유도했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언덕 주변을 걷고 배회하고 그 위에 눕는 등의 행위들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하나의 정령처럼 언덕 주변에 사건을 만들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무용해 보이기까지 하는 제스추어, 이러한 몸의 표현은 작품과 작가 자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그리고 자신의 세계와 외부 세계가 정확히 분리될 수도 없음을, 경계를 경계로 여기지 않는 그가 추구하는 창작의 전제이자 태도였던 것이다. 바로 ‘어느 것에도 닿아있지 않은 것이 없었음’은 자신의 몸과 함께 변화하는 유기체들을 전제함으로써 보여주었고, 그의 작업은 그렇기에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시간과 그 소요된 과정만큼의 진한 몰입을 전제로 한다. 몰입된 감정들이 힘겹게 느껴졌다. 환경 및 스스로의 몰입에 처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이를 표현하며 행위하고, 또한 해체하기까지 심지어 끊기거나 그치거나 완성될 수 없는 감정의 시간들을 이토록 감당하는 예술가의 모습이란. ●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송주형 개인전 [ 노라 ] 평문, 아트포럼리 디포그배 전시지원

 플롯, 공동 삶에 균열을 내는 노림수 
 
 
 
최윤정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마치 한편의 기승전결 구도를 지닌 드라마와도 같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하지만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틀에 대해 다루는 자세. 작가는 공동 삶이라 여기는 것들이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의 작동기제를 가지고 움직이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이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역사를 전공한 이력에서 비춰볼 수 있듯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인문학적이고 분석적인 사유의 틀 속에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탐구하는 대상이 된다. 그 자신 역시도 이에 밀착해서 때로는 제삼자처럼 무관하게 거리를 띄우기도 하면서, 객관적으로 발견하고 수집한 재료들을 가지고 이번 개인전을 준비해왔다.
사회적 환경과 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예술과 그 방법론은 그저 르포의 시선단계에 멈추길 거부한다. 가시성과 담론성의 형태는, 그가 생각하는 문제적 지점들을 표출하는 데 있어서,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감응으로 출발하여 그것이 냉철함으로 첨예화되는 사유의 단계들에 관여하고 있다. 어떤 재앙을 반영하는 형태이든지 예술의 외관이란 장면을 드러내거나 변형시키는 것에 복무하고 그것이 또한 거울이 되어 잔상으로 맺혀지고 스며들며 침투하는 과정 속에서 경험을 제공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인데, 특히나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예술로서의 가시성을 다양하게 실험해보는 것이었다. 또한 그 안에 담론성의 구조를 보다 유기적으로 설계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작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설계한 각 작품들이 함의하는 일종의 상황적인 지시_서사를 통해 전시를 이루는 모든 작품들은 유기적으로 얽혀진다. 이러한 방식은 내가 그의 작업을 바라보고 특징짓는 중요한 해석지점들이다.
 
음악, 공연 등 그가 예술프로젝트로 참여했던 분야들은 영상, 멜로디, 리듬, 연출 등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여기서 그가 작품으로서 구현하는 방식을 보자면, 흐름상의 스토리와 관람객이 호흡하는 환경 등이 명확하다. 이 측면에서 나는 인터뷰를 나누는 와중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특성과 기질 그리고 주요 관심사 등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찾고자 하는 절실한 지점 중 하나는, 전시와 시각예술의 구현방식이라는 형식적 측면과 시각예술 안에서 담론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담론의 역할과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분명 그것은 그의 장점이지만, 그 스스로 단점이라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서사성에 좀더 주목하는 것이다. 때로는 무대설치처럼 때로는 상영의 형식으로서 일정한 플롯들을 녹여내는 방식, 물론 이번 전시에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개개의 작품에 대한 주목과는 별개로, 그 흐름을 쫓을 필요가 있다.
 
, 말씀 드리지요. 당신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 역시 당신을 모르고 지내왔지요. 여태까지는... 제말 저의 말을 중단시키지 마세요. 끝까지 들어보세요(...)”
.....
그런 일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소.”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주인공인 노라의 상황들, 위의 극 속의 대화는 공동 삶들 속에서 당연히 여겨왔던 역할에 대해 주인공인 노라가 각성하는 장면을 암시하고 있다. 왠지 불편한 상황들이나 거부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때야말로 자기 현재와 상황적 존재로서의 스스로를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경계에서 고민할 수 있도록 장치하는 유일무이한 계기일 지도 모른다. 각성은 불편함거부를 작동원리로 삼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판단을 보류한 공동 삶안에 주조되어 있는 은폐되고 잘못된 구조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시를 이루는 각각의 작품들은 그의 노림수에 의해 다시금 잘 직조되어 있다.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가 내뱉듯 던져놓은 상황들에 대한 각성의 기제들이 관람자의 태도에 -과연 관람자는 주제에 편하게접근할 수 있는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로서 일정한 흐름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적이라고 읽히는 이유이다.
 
 
전시에 소개되는 한편 한편의 애니메이션은 공동 삶의 상황들에 대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 모든 장면들은 도구화되고 인간성이 상실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인간이 직면한 상황들에 대한 객관적인 상황이자 차가운 작업이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개인의 철학보다 자식을 위해 해줘야 하는, 외부의 시선이 스스로에게 욕망화 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역할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유모차에 실리는 물건들에 파묻혀 정작 자신과 아이는 없을 지도 모른다. 또한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폐타이어 같이 전성기에서 밀려난 탄력성을 잃었다고 여겨지는, 노인들의 일상이 한 켠에 펼쳐진다. 노인의 일상은 관성적으로 TV를 보는 것 외에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다는 아주 우울한 장면이다. 버려져도 상관없을 고장난 부품처럼 그들이 이룩한 과거는 그들 삶에 영광과 주체로서의 자긍심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주류사회의 안녕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 삶에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공동 삶은 국가와 민족과 세대의 가치를 오히려 각 존재들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그저 수용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일상의 굴레일 뿐이다. 작가는 공동 삶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익숙하지만 왠지 불편하기 그지없는 구체적인 일상의 장면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펼쳐지는 외관의 상징으로 인형의 집과 수조를 고안한다. 이것은 일종의 각성의 기제에 대한 몰입된, 상징적 모티브가 된다. 역할극을 설정으로 하는, 아주 작은 플라스틱 인형집이다. 문득 방임적 자유와 관념적 이상의 추구는 초인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는 듯이 공동 삶은 이를 가두어 두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결국은 부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나약하고 작은 구조물 속에서 균열의 지점들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유리 수조, 이 투명성은 마치 모두 들여다보이지만 암묵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공동 삶이 주조해낸 전략과도 같다. 투명한 수조를 통해 그 안에 갇힌 생명은 그 수조 바깥으로 나오면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일상에서 안고 산다. 인형의 집과 수조,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지레 포기하는 비관과 균열이라는 파괴 그리고 동시에 창조의 가능성을 갖는 낙관이라는 혼용된 감정 속에서 우리의 신체는 이 혼란이 주는 감정에서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자극을 이 작업들을 통해서 반응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이렇게 사회적 구조 공동 삶의 현실에 대한 상황들을 묘사했다. 그 상황을 진단하는 생각의 단계들은 그의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채워지지 않고 늘어만 가는 기대는 욕심으로(...) 기대 충족에서 오는 행복을 넘어 허상을(...) 충돌하는 욕망은 타인의 가장 기본적인 기대마저 착취하기에 이른다
공동 삶에 대한 구조적 비판은 이에 당면한 개개인의 윤리구조, 욕망구조의 편협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 편협함은 다시 개인의 고통은 타인에게 또, 나아가(...) 변질된 욕심이 왜곡시킨 사회구조는 점점 고착화(...)”되는 공동 삶의 작동구조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타인의 욕심이 나의 삶을 과중시키고 또한 구조적 판단에 따른 나의 삶은 또 다른 타인의 삶을 과중시킨다. 이 비극의 순환고리는 일종의 인과적 굴레로 다시금 인형의 집과 수조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장면들 속에서 어떻게 내재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욕망들, 그 구조가 직조되어 어쩌면 공동 삶은 극복할 수 없는 덫이자, 주류사회의 고도의 기획이 실현되는 장이다.
 
이 비극적인 구조들의 장이 이번 전시가 갖는 서사의 첫 번째 장면들이다. 두 번째 장면은 캔버스 작업에서 돌출된다. 각 캔버스는 구조적 한계성의 구체적인 허상들을 직접적으로 텍스트화하고 있다. 전형적인 글씨체와 입체로 표현된 작업은 작은 덩어리들이 덕지덕지 붙어 만들어진 실체없는 허상들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욕망구조의 편협함으로부터 발생한 자기합리화의 내용들, 문구 하나하나 속에서 곳곳에서 지속되어 왔던 편견과 차별, 구조를 용인하는 당위성, 다름에 대한 주류사회의 태도가 그 안에 직접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어찌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의 출발점은 이 작업을 통해서 농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식별과 평가의 규칙과 기준들로 특화되어, 또한 정신의 한 자락에 공고히 위치해 있던 내적 규범성이 고발당하고 풀어헤쳐지는 순간이다. 특히나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지경으로 겹쳐진 풍경과도 같은 이 캔버스들은 각각이 알려진 것, 실행되지 않는 것, 실행될 수 없는 것, 의도되지 않은 것, 의도된 것 등의 모든 속성들을 펼쳐놓은 공동 삶의 덫인 인형의 집이 함의하고 있는 그 폭력성을 선언한 작업인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플롯은 공동 삶의 상황에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배제되어 버린 수많은 기대와 다양성, 주체와 인간적임에 대한 술어들을 에둘러 모으는 방식이다. 술어는 기술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무대장치처럼 작가는 온 감성으로 이에 대해 추모하고 애도하는 작업을 연계함으로써 이번 작업들을 마무리 한다. 단단한 직조들이 모두 하나의 실오라기로 풀어헤친 듯한 한지 설치작업에는 깜박이는 빛이 마치 버려진 것들에 대해 애도하고 공동 삶에 묻혀진 희생들을 어루만지는 일종의 깨우침의 장치이자 살아있음을 존재로 증명하는 상징으로 자리한다.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견뎌내는 힘들에 대한 지지로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포착하여 외화하고, 자기 안에서 빼낸 진리들을 객관화하여 다시금 파악하는, 모든 경쟁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유. 그것의 가능태는 어떻게 일구어낼 수 있을까. 문득 작가와의 인터뷰 후에 곱씹고 또한 곱씹었던 고민들이다. 알고는 있지만 개념을 만들지 않았던 무수한 장면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명명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 자격.
송주형의 작업은 표현적이지 않다. 그의 작업은 상황을 탐구하고 분석하고 맥락을 연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적합하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이에 더 몰입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우리가 공동 삶이라는 실체 속에 종속되어 존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면, 그 밖을 예측하고 내다보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인형의 집에서 한갓 역할놀이를 부여받아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인형이 현실세계의 우리의 한계적 면모라면 특히나. 그렇기에 그 안에서 첨예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논리와 발굴한 것들에 대한 의견이 정당할 수 있음을 쫓아야 한다. 모두의 욕망 구조가 순환적일 뿐 아니라, 어느 시대고 공동 삶에 대한 구조는 존재해왔음을. 그것을 차갑게 비교하고 분석하는, 바로 역사 속의 장면들이 동시대적으로 중첩되는 장면이기에, 따라서 나는 그의 작업이 지금의 현실세태의 테두리라는 측면에 갇히지 않길 바란다. 그의 작업은 그가 발견한(발굴한) 조각-서사들을 나열한다. 그 위치와 상황에 배열함으로써 조각-서사들의 덩어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의 서사를 마치 퍼즐 맞추듯 꿰어가는 작업. 분명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실재하는 것을 드러내거나 혹은 상징으로서 약호화 하는 것 사이에서 경계를 지정하고 있는 작업은 아니다. 바로 그 불분명한 경계가 주는 혼란의 틈 사이로, 그의 플롯이 또 다른 서사들로 미끄러져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과 내일의 기대를 남기며, 언젠가 작가가 다음과 같이 부름에 첫 구절을 떼길 바란다.“//...”

김한나 [쇼룸;매일의조각] 평문


매일의 조각 ; 뾰족한 섬을 구축하는, 사유의 단초들
 
 
 
최윤정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지난 개인전 [,, ]이 일상적 삶 속에서 뾰족하고 날카롭고 불안한 관계적 속성을 지시한 서사들을 조각의 형태로 옮기는 작업이었다면, 이번 개인전 [쇼룸;매일의 조각]은 그 서사들을 풀어헤치고 작가의 구체적인 일상과의 접점에 보다 주목하여, 자신의 은연한 습관에서 비롯된 패턴 속에서 창작의 의미를 짚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작은 조각으로 표상된 이 하나하나의 정서적 형상들이 다시금 쪼개지고 응축되고 나열되는 과정을 통해서 시간적 흐름과 창작 행위가 서로 결합되는 지점들을 일상과의 접점의 구체적인 의미로 부가하는 작업인 것이다. 일종의 드로잉같달까. 이 드로잉과도 같은 조각들은 그의 습성 안에서 매일의 시간을 통해 수행적으로 주조된 덩어리들이다.
 
그의 습성이 흥미롭다. 그것은 지난 개인전 인터뷰에서는 미처 포착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였는데, 하루의 시간이 빼곡이 시간별로 분할되어 스스로 해내야 하는 계획들로 채워진 그의 스케줄러를 발견했고, 그것이 내게는 이번 그의 작업들을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하였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쓰임이란 상대적이고 습성화된 패턴 안에서 각자의 개별화된 특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매일의 (작은)조각이라는 표현을 매일의 생산과 창작에 대한 실천 행위를 담은 것으로, 어찌보면 넓은 덩어리로 뭉뚱그려 나는 그렇게 이해해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매일의 표현은 단위로서 시간이자, 이에 결합한 행위와 과정이 세밀하게 쪼개져 관리되는 작가의 습성을 설명하는 의미로서 보는 것이 적절함을 최근 다시금 깨달은 바다. 덕분에 시간이란 개념이 생각의 흐름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또한 그 흐름을 파편화하기도 하는 관념인 것이자, 습성의 단위가 아닐까 하는 확신도 가져보게 되었다. 이 확신대로라면 작가의 매일의 조각은 그의 습성적 패턴으로서 시간과 행위의 결합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에 다름 아니다. 거리를 산책하기 전후, 밥을 먹기 전후, 잠을 자기 전후, 생계를 위한 일을 하기 전후, 잡다한 생각들을 나열하기 전후, 그 시간의 틈 사이로 그는 자신이 문득 꽂힌 정서적 형상들에 의거, 그렇게 매일의 조각들을 조물조물 만들어왔다.
 
  결국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자신의 정서와 뉘앙스를 외화시키는 구도와 형상에 있었다.”_[, 의것] 평문의 일부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매일의 (작은)조각들을 통해 구성된다. 이 조각들은 작가의 사유와 세계를 구성하는 인식의 각 지점들을 포착하는 모나드와도 같다. 개개가 모나드로서 작은 조각들이면서 모듈화되어 만들어낸 볼륨들이 또한 인상적인 국면을 형성한다. 각각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행위의 이유를 뉘앙스로 담으며 작가가 몰입하고 있는 구도와 형상을 주조하는 방법론을 더욱 확장한 시도들이다. 핵심은 작은 조각들이고, 그것들이 모듈화되어 하나의 볼륨으로 구성되고 합쳐질 때 이 개개의 볼륨들은 시간과 행위의 결합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을 상징하는 구축적 사유의 베이스가 된다. 그리고 이들이 놓인 공간은 작가의 습성으로 축적된 요소들 즉 작가의 스케쥴러가 2차원 평면에서 3차원의 입체로 만들어지는, 나아가 시간의 개념이 깃든 4차원 물리적 세계의 시공간을 동적으로 시각화하는, 전체가 작가의 사유와 그의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미학적 볼륨으로서 쇼룸으로 완성된다. 그야말로 나의 세계는 이렇게 구축되고, 내 안으로 접근해보라는 당찬 선언에 마주한 듯한 기분이다.
다시금 지난 개인전 [, 의 것]이 일상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형상을 발굴하고 그에 대한 정서적 서사들을 펼쳐보이는 시도였다면, 이번 [쇼룸;매일의조각]은 시간적 단위 틈새마다 놓여진, 예술가의 습성으로 화한 창작적 실천들의 원류를 결집하는 시도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모듈화된 작업들은 개개의 볼륨이면서도 연결되는 구조로 공간 전체에 서사를 가미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업 면면을 살피자면, 우선 일종의 관조적 감상의 틀을 가장 노골적으로 지정하는 상징이기도 한, 캔버스를 가지고 작가는 구조물을 계획하였다. 그 안에 매일의 (작은) 조각들이 또한 놓여지고 쌓여지는 구성을 사유의 구조틀 안에서 실험한 작업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볼륨은 작가의 태도, 그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관계적 상황이나, 세상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생각들이 낳은 뾰족한 섬의 형상들이다. (*뾰족한 섬 : 이는 작가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인지를 담은 것으로서 그를 지칭할 때 처음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 뾰족한 것들이 불안하면서도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지되기도 한다. 창작의 태도적 접근 및 내용적 고민을 시각화한 작업으로 읽힌다. 또 다른 작업은 시간의 틈 내지는 무언가 실행하기 전후를 상기하는 듯한 (시공간의) 분할 내지는 바로 그 시점을 전개하는 듯한 파란 구획물들이다. 공간에 서사를 입히고 개입을 하기 위한 설치적 측면에서 고안된 요소로 해석된다. 그리고 누르면 튕겨갈 것만 같은 행위의 일부를 표현하는 듯한, 점점이 의미롭지 않을 것 같은-인식되지 않을 것 같은 날을 상징하는 듯한- 작은 조각들로 구성되어 도리어 일상의 긴장과 함께 리드미컬한 흐름들을 표현한 작업은 도리어 역설적이다.


이에 덧붙여 빼곡이 쪼개어져 기록된 자신의 스케줄러 구성에 대한 습성만큼이나, 작가에게는 생각의 흐름들을 기록해놓은 일상의 단상 및 작업노트 등 텍스트 기록의 양이 상당하다. 인터뷰 당시 이번 전시에서 소개할지 여부를 작가는 또한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이 텍스트들 역시도 어절단위로 지워지고 잇고 덧붙이는 방식을 통해서 마치 작은 조각처럼 작가의 발화적 특징 및 생각의 단면들을 구축하는 단위로 충분히 역할할 수 있다. 어쩌면 보다 내밀한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차갑게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바로 그 지점에 텍스트 작업은 때로는 유용하다.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창작작업이 자기 일상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중요한 가치로 두었다. 생존에 기반한 현실적인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장이기도 하고 예술가로서의 성장에 대한 기민한 전략들을 포함한 관계적인 환경으로서의 일상을 이름한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예술가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단위들에 대해 더욱 과감한 형태의 방법술로 고안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는 환경에 대해 표출되는 자기 정서의 원형을 발견하고 사물을 마주하는 태도로서 대상 자체의 형태적 속성에 감응함과 동시에 고유한 표현으로서 이에 자신이 반응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듯 보인다. 왠지 이 과정들이 일종의 자기영토를 구축하는 도정에 서있기도 하지만, 자기영토의 속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관심있고 나의 흥미를 끄는 즐거운 것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누구나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 끝에 그가 속삭이듯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당시는 당연하게 들려서 한 귀로 흘린 말이기도 하였지만, 이 작업들을 관통하는 핵심에서 이 말이야말로 그의 사유와 창작의 줄기를 구성하는 모나드가 아니었을는지. 날카로운 물건이 살갗에 스치듯 차갑게 문득 내게 닿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