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1일 일요일

REVIEW. 융복합공연<단원화무도(2017.5.19-20)>

콘텐츠심화를 위한 제언 


최윤정 ● 독립큐레이터, 미술비평

<단원 김홍도를 주제로 각 장르들이 ‘융복합적으로’ 창작된 ‘단원화무도’>.  이것이 공연을 보기 전 내 사전지식의 전부였다. 이 공연에 대해서 시각예술전문가로서의 견해를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서 대단히 목적적인 관람을 진행했기에, 순수관람의 시점에서 다소 놓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우선 글을 쓰기 전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I.

언제서부터인가 예술창작에서 ‘융복합프로젝트’가 미션화되고 있는 경향에 대해서 다소 반발감이 있다. 이 공연에 대한 정보에서도 ‘융복합공연’이 수식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는데, 물론 그것이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지원사업의 요건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융복합’이라는 의미규정이 과거 ‘다원예술’의 의미규정만큼이나 모호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많은 경우 ‘협업’과 ‘융복합’의 의미가 구분되어 해석되고 있지 못한, 현장에서의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편이다. 장르간 협업구조는 ‘융복합’의 의미를 실현하는 충분조건일 수 없다. 창작의 문제에서 ‘융(복)합’은 ‘형식적결합’이나 ‘협업’의 구조에서 논구되기보다는 창작의 문맥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서로 살리고 잇는 가운데 발생하는 ‘가치’의 측면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다시 <단원 김홍도를 주제로 각 장르들이 ‘융복합적으로’ 창작된 ‘단원화무도’>에서 ‘융복합’이라는 규정이 타당한지에 대해 문맥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공연을 수식하는 ‘융복합공연’이 형식면(텍스트, 음악, 춤, 영상 등을 활용한)에서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무대예술, 종합예술 등 각 장르의 예술들이 하나의 공연을 이루는 자체는 특히나 형식면에서 무대예술의 특성이지 굳이 ‘융복합’의 의미를 붙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시각예술인이지만, 이 공연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해야 하는 지금, 보다 도움이 되기 위해서 공연 속에서 미술의 접목이라는 부분보다도-물론 뒤에 ‘미디어’를 통해 언급하겠지만- 특히 작금의 모든 예술장르 창작의 미션으로 다뤄지는 ‘융복합’의 의미를 지자체 사업에 따른 단순한 수식으로 수동적으로 다루지 않고, 이 공연의 수식어에 어떻게 그 용어가 타당한지를 이 작품을 일궈내는 문맥적인 힘으로 창작의 과정에 결합시켜 가는 담론화 작업을 제안하는 바이다. 또한 이 내용은 ‘단원화무도’가 이번으로 마무리된 공연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정기공연 콘텐츠로서 지향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출발지점에서부터 창작의 원리이자 성찰로서 ‘융복합’의 의미를 제대로 정립해갔으면 하는 기대와 바람을 담은 것이다.   

II.

공연을 접하기 전에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에 직면하여 그의 생애사를 해석한 일종의 교육 공연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침 12세 관람가에 대한 단순한 상상이기도 하였고, 단원 김홍도라는 묵직한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의 생애사 범위 안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미리 짐작한 탓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서는 ‘단원 김홍도’ 자체가 주제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단원 김홍도는 창작의 원리 안에서 영감을 수용하는 매개이자 현실의 세태를 잇는 중간다리로 작동하고 있었다. 무용수 각각의 안무들은 김홍도의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즉각적으로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무용수 한명한명 각각이 특화되어있는 몸짓이 있다는 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마치 7가지 색상들이 만들어내는 무지개로서 군무의 축을 이루었고, 합쳐져서 무채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 ‘무지개’라는 형상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듯한, 어쩌면 이것은 안무에서의 ‘융복합’의 의미규정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닐는지.
과거 종합예술로서의 무대에 대한 동경을 품은 적이 있었다. 특히 무대미술과 조명은 직접적으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구체적인 일 중의 하나이기도 했었다. 이번 공연에서 무대를 세팅하는 물질적인 조형들은 모두 홀로그램 내지는 영상 등 비물질적인 미디어들로 대체되었다. 김홍도 그림 속의 장면들 한 복판에 있는 느낌을 구현하기도 하고, 무용수들의 몸짓과 연계하여 손끝발끝의 ‘에네르기파’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은 ‘기술사용’이 공연과 접목되었을 때 가상을 현실화하는 방법론으로서 물질로서의 춤과 비물질로서의 장면들의 결합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고, 당연 이로부터 관객들은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들을 하였을 것이다.
비물질의 장점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계지점이기도 한 부분인 무게와 질량이 느껴지지 않는, 즉 물질의 육중함만이 줄 수 있는 실재적인 느낌이 부재하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 부재는 이번 경우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동적인 춤의 장면들이 육중하게 실재적으로 다가오는데 방해가 되지 않은 탓이다. 

다만 김홍도의 그림이 무대를 확장하는 면이 아니라,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의 규격처럼 프레임 속에서 긴 시간 배경으로 자리하고, 춤에 대해 설명적으로 머무르는 점은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그의 그림이 부각되는 방식에 대한 그리고 프레임에 갇혀 배경으로만 역할하는 것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김홍도 그림에 대한 몰입이 힘들었던 것은 해상도의 기술적인 문제도 상존했다. 비물질 특히 미디어의 특징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혼돈시키는 것이고, 특히나 무대 안에서 미디어의 탁월한 역할은 실재하는 무대 자체를 상상적 공간으로 재빠르게 변형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면들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기에 감각이 확장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기에. 제시되는 김홍도의 그림이 무대 전체로- 몇가지 제시되었던 홀로그램처럼- 2차원의 설명적인 프레임을 극복하는 속에서 미적인 감동으로 춤과 결합되어 진동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미디어가 춤을 방해한 경우도 있었다. <송하맹호도>에서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춤사위에 대비하여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미디어는 물론 강렬했지만 오히려 춤사위의 에너지를 빼앗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집중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피로감을 느끼게 하였다. 정과 동에 대한 균형, 집중과 선택에 대한 미디어 사용의 절제미도 충분히 되짚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많은 이의 노력 속에서 일군 공연일 것이다. 이미 그 속에서 관계자들이 겪었을 창작의 과정들, ‘융복합’이 의미를 찾아나가는 실천에 대한 과정들을 나로서는 아직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쓴 졸고로 이 글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보완하며 성찰하며 거듭해나갈 <단원화무도>에 대한 관찰을 긴 시간 해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대되는 대목이다. ●끝     



<저자소개>

최윤정은 국문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대안공간 MEMISPACE 큐레이터(2008-2010), 대인예술시장프로젝트 레지던스 팀장(2009), 대구미술관 전시2팀장(2011-2014)을 역임하였다, 현재 독립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지리산프로젝트(2014-2015)_한센인마을, 자갈마당기억변신프로젝트(2016)_성매매집결지 등 장소성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여 꾸준히 기획과 비평활동을 실행해오고 있다. 또한 외부활동으로 대구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UST(과학기술대학원대학교) 홍보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