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9일 금요일

기고문) 예술과 과학. BIO-ART와 생명경계


예술과 과학. BIO-ART와 생명경계
 
최윤정(큐레이터, 미학/미술비평)
 
필자가 예술과 과학이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로 4~5년 전부터 시작된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공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과학자들-물리학자, 뇌과학자, 생물학자, 의학자, 공학자 등과 함께 시작한 스터디는 주로 바이오아트에 대한 것이었다. 생명을 지닌 유기체가 작품의 재료가 되거나 혹은 그 자체 주제로서 다뤄진 작품들을 살피면서, 바이오아트를 바라보는 관점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혹여나 오해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지금의 바이오아트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요한 전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첫째, 기본적으로 바이오아트는 ‘Low-테크안에서 이루어진다.
약간의 기술만 있다면 누구든 다룰 수 있는 아주 기초적이고 위험하지 않은 정도의 유전자조작 단계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예술가들에게는 생명윤리에 대한 언쟁이 있었음과 달리, 공부모임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그 정도의 실천은 누구나 의도한다면, 할 수 있는 아주 낮은 단계이고, 생명윤리에 대해 혹은 생태계 교란에 대해 크게 염려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의 의견을 내놓았다.
둘째, 작품의 재료로 이용되는 측면 보다는 그 자체가 주제로서, 더불어 이면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이것은 바이오아트가 단순히 과학의 사용을 통한 생명체 연구를 넘어, 왜 그것이 ‘Art’여야 하는지, 왜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문맥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 결과와 결과에 대한 예측담론들이 곧바로 동시대 담론과 연결된다.
셋째, 생명경계에 대한 인식
우등함과 열등함에 대한 시선, 생명창조와 예술행위, 유기체적 교감-우연성, 그리고 생명 권리에 대한 고찰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 ‘유전자 조작 생물체에게도 생명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1962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에드아르도 카츠는 바이오아트의 선구자로 분류된다. 유전자 조작기술을 통한 생명체의 탄생, 이식과 배합을 통해 조작된 생명을 다루는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00‘GFP Bunny프로젝트로 그는 그가 창조한 형광토끼를 대중에 처음 소개했다. 흰 토끼의 배아에 해파리의 유전자_녹색형광단백질GFP을 주입하여 빛을 내는 토끼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까지는 인간의 조작행위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내 생명윤리에 대한 비판이 가해질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업은 작가 개인이 아니라, 프랑스농업연구소의 장소를 사용함은 물론, 공동연구로 협업한 작업이기도 하다. 전시에서 형광토끼를 소개하며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카츠는 이후 자신의 가정으로 토끼를 데려가고자 하였다. 반려동물로서 평생을 함께 하고 책임져야 할 생명체로 여겼기 때문인데, 프랑스농업연구소는 이 토끼의 반출을 막기로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유전자 조작 생명체 특히나 이보다도 더욱 혹심한 괴물들을 만들어내었을지 모를 연구소들의 기본 방침은, 유전자 조작 생명체에 대한 제작과 동시에 폐기처분에 있다. 한편 더욱 크게는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형광토끼로서, 지적재산권에 대한 갈등도 이에 한 몫을 하였다. 여기까지 어쩌면 에두아르도 카츠는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그의 예술창작에 대한 근거와 의문들을 끌어내기 시작했고 실천적인 구상들을 꾀하기 시작했다. ‘유전자조작 생명체는 생명체로서의 권리가 없는 것인가?’ 그는 이 형광토끼의 이름을 ‘Alba’라고 짓고 그의 사랑스런 반려동물로 삼았다. 그리고 유전자조작 생명체의 상징이면서도 생명체로서의 권리침해에 직면해 있는 현상들을 담아 ‘Free Alba’ 캠페인을 진행한다. 깃발은 물론 티셔츠 등으로도 제작되고, 그리고 이 운동은 추후 실험실에서 희생되는 동물들에 대해 고민해볼 여지를 남겨준 사건과도 같았다. 괴물일지도 모르는 연구실 생명체에 대한 관점을 쓸모/용도/폐기의 상황이 아닌 생명체인 것으로,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이끈 것이다. 그 생명의 제작자였고, 자신이 길들인 동물에 대한 책임감, 유전자변형생물의 생명에 대한 책무로서 그는 인간의 윤리관을 강조하면서 생명 본연의 의미를 일깨우고자 애쓴 것이다.
 
에듀니아- 생명의 위계, 경계에 대한 물음. 일부분은 꽃이고 일부분은 인간인 새로운 생명체, 이종 간의 결합
 
카츠는 자신의 혈액에서 면역유전자를 추출하여 페튜니아 꽃에 이식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다. 두 생명이 연속하고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기존의 페튜니아보다 유난히 붉은, 마치 그의 피부색과도 같은 붉은 잎맥이다. 이는 비록 서로 다른 종이지만 생명이 공유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생명이라는 개념이 인격체적 동물 뿐 아니라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생명, 유기체들 모두를 포괄하는 무차별적 의미임을 깨닫게 하는 작업이다. 이 꽃은 카츠와 DNA를 공유한 페튜니아로서 그에게는 세상에 하나뿐인 에듀니아로 명명된다.
 
 그의 작업들은 유전자이식 생명체에 대한 미래 윤리관과 연결되는데, 생명의 위계 및 경계를 구분짓는 대신 생명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에 인간의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생명이며 에너지이고, 내재적인 힘으로서 생명의 빛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다. 재밌지 않은가? 인간의 과학으로 하나의 순수생명체를 조작하여 새로운 종을 직접 생산하고서, 도리어 인간의 우위를 관철하는 바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치달은 생명의 위계를 비판하고, 생명의 가치를 환기시키며 이종 간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는 것. 바로 이 지점이 바이오아트가 왜 예술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술은 늘 이면의 것들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혹은 침투와 스미는 방식으로 또한 때로는 대단히 역설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기 때문에, 생명을 조롱할 뻔했던 과학기술의 사용은 도리어 생명의 진중함으로 우리의 사유를 이끄는 도구가 되었다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작업으로서 아트 오리젠테 오브제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실천과 공유, 교감의 과정에 대해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수단은 인간과 동물 이종 간 결합에 있다. 아트 오리젠테 오브제의 내 안에 말이 살게 하소서(may the horse live in me)’는 수차례의 퍼포먼스를 통해서 소개되었는데, 어찌보면 에드아르도 카츠보다 더욱 극단적으로 나아간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몸과 동물의 몸을 섞는 행위이다. 작가는 혈장주사를 통해 인간의 혈액과 호환이 가능한 말의 혈액을 만들고자, 자신의 혈액과 말의 혈액을 혼합시킨다. 혼합된 혈액은 그 속에서 항체들을 실험하면서 동시에 호환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져 다시금 서로의 몸에 주입된다. 상징적인 작업이지만, 동물의 피가 인간의 몸에 직접적으로 주입이 된다는 부분에서 다소 충격적이다.
작가는 이 과정에 도달하기 전에 열흘이 넘도록 자신의 혈액과 섞이게 될 대상인, 말과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 그 속에서 유대를 쌓고 편안한 관계를 구축한다. 또한 말의 다리와 동일한 구조물을 제작하여 자신의 몸에 장착한다. 그리고선 말과 함께 걷고 보폭을 맞추면서 말의 혈액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종(異種)에 대한 존중이자 배움이다. 생명가치에 대한 존중을 표상하는 작업인 것이다. ‘함께 걷는 행위도 이와 마찬가지로 개별자로서 의 특질을 존중하는, 또한 혈액이 섞임으로 인한 특질의 수용/전이에 대한 적극적인 제스처로 읽혀진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세하다고 여기는, 종에 대한 엄격한 경계에 대해 또한 무용함을 일깨워준다.
이 외에도 바이오아트의 영역은 세균/박테리아의 움직임과 분화 등을 활용한 회화라던지, 이종간의 대장균을 혼합하면서 그 변화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발견될 만한 시각적인 자극들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극도의 기술적 발전을 이룩한 미래사회에 대해 생명소외, 도구화 등의 관점에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치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유전자조작에 의한 식물을 먹으며 살고 있고, 생명복제 등 유전자 조작에 의한 생명체가 뉴스에도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만큼, 인간의 과학이 개입하여 생성된 인공적 창조물들에 대해 우리의 영토를 나누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노예화할 것인지 판단 시점이 곧 도래할 지도 모르겠다. 이에 바이오아트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대단히 강력한 존재론을 표방한다. ‘자연적 생명체나, 인공적 생명체나 모두 생명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재산권이나 위계를 만들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함의하고 있다는 것. 또한 언제든 이후로도 인간의 손길이 개입된 생명체들이 이 땅을 공유하며 권리를 가지고 살아야할 지도 모른다는 것. 바이오아트가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그에 대한 윤리관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