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장병언 첫 개인전 평문 2014.6


소요逍遙하는 까닭

'장공, 생각을 움직이니 눈앞에 다가오는 형상을 마주할 수 있었더냐' 
최공, 2014년 6월 축사

글 ● 최윤정(지리산프로젝트 큐레이터/미술비평)


그의 자아는 옹고집이다. 아마도 이번 개인전에서 부각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행보 속에서, 그만의 특징으로 점유할 수 있는 바, 고전적 정신에 대한 동경이자 그것을 형상화하고자 준법을 연마하고 수행하는 과정을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똑같게 모사하는 바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현대미술논의에서 말하는 차용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는 중국 산수화 대가들의 주요 작품을 '스스로 모사한다고 말한다.(작가는 이렇게만 말한다.)' 여기까지 보자면, 장병언 작가의 작업과정을 상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때로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오해하고 옛것을 따라했다는 형식에만 그쳐 고루하게 보는 등 판단적 우를 범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겠다. 

그의 작업이 가지는 참신함을 발견하려면, 우선 그가 말하는 '모사'의 의미에 접근하는 단초가 필요하고 그것은 그의 작업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모사' 자체로서의 진정성 그리고 또한 그것이 의미상 변경되고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바다. 옛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힘들게라도 무수한 과정을 겪으며 원본을 쫒아 곁에 두고 혹은 장시간 작업하는 모사의 방법을 쓸 수 있겠지만, 지금에서 찾고자 하는 원본이란 박물관에 미술관에 고이 모셔져 있기에 곁에 두고 작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허나 차라리 단순한 형식 모사에서 작가의 정신과 태도에까지 확장되고 무엇인가를 덧붙여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이 때문에 역으로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모사하고자 하는 작품의 최상도의 이미지를 수소문하여 가장 뛰어난 화질로 뽑은 종이를 들고 그것을 원본삼아(?) '모사'한다. 그의 고전은 따라서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에 도리어 그 준법을 더욱 부각하고자 혹은 스스로의 성향에 맞추어 작가 특유의 고집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정신에 의거, '모사'를 꾀할 수 있었던 바다. 대가들의 준법을 모두 익히겠다는 각오로부터 꾸준하게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 '모사'를 이야기 하면서. 작가는 여기에 고전을 마주하는 무게감과 긴장감을 순간적으로 녹여버리는 유머러스한 자신의 도상을 덧붙였다. 그것은 고전에 대한 작가의 태도적 오마주이자, 그 세계에서 노니는 자신의 모습이다. 작가는 평소 산을 좋아하여 마음이 동하면 열 일 제치고 떠날 수 있도록 문 곁에 항시 등산용 모든 장비가 탑재된 가방을 준비해둔다 한다. 그냥 떠난다. 그의 성향은 온전히 독자적인 행동방식에 기반한다. 따라서 그의 옹고집은 절대적 힘에 의해 자신을 다른 것으로 화하게끔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순전한 자아로서의 작가로 정립하도록 하는, 수월한 재료와 반짝 아이디어로 충분히 무장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자꾸만 인간적인 태도적인 궁금증을 유발하는 또 다른 참신함을 낳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본질적 성향이란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고, 보다 다양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자 하는, 이를 다양한 언어로 해석하거나 혹은 그 언어에 대답하고자 하는 모든 충동을 수반한다. 또한 모든 예술의 뿌리는 다양성 뒤에 숨겨진 거대한 통일성,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과 피조물들 배후에 있는 창조자 혹은 에너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세계의 시원에 관한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면,  그에게 이러한 관심은 고전 산수화가들의 준법과 철학을 온몸으로 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범관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점을 찍어, 산수를 유람하면서 직접 바라본 바들을 자신의 순전한 세계의 반영으로 표현하고자, 우점준을 사용했듯이 그리고 이당이 날카로운 것으로 찍어낸 듯한 기법으로 소부벽준을 활용하여 그만의 철학을 담은 산수를 표현했듯이, 또한 곽희가 자연을 소요하면서 자연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자기만의 시선을 리드미컬하게 연결한 삼원법으로 산수의 기를 보여주었듯이, 작가 장병언에게 고전 스승들이 전한 준법은 단순한 기법이라기 보다는 본인이 도달하고 싶은 작가로서의 이상향, 삶과 예술의 경지를 실험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학습도구였다. 또한 이 고전스승들은 속세의 경험을 단순히 은둔자이기 보다, 준법을 통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규율, 즉 실천적 규범으로서 이를 제시하였다. 그들의 산수화가, 보통 산수화에 대해 무지한 현대인이 오해하는, 속세를 벗어나 은둔자의 삶을 지향한 혹은 현실정치와 무관한 자율성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의 산수화에는 속세의 거친 삶의 모습과 수행으로서 절대정신에 도달하고자 하는 삶 그리고 그 너머의 자연(신)의 본질과 원리에 도달하려는 세계가 담겨져 있다. 여기에는 합일의 경지에서 각자의 철학적 태도와 예술가로서의 특성적 면모도 함께 녹아있는 것이다. 다시금 산수화에 깃든 도교적인 이상향이란 별도의 것이 아니라, 그 구도와 준법에서 이미 현실을 동시에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와 평행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바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곽희의 조춘도, 이당의 만학송풍도, 범관의 계산행려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을 모사한 <遊조춘도>, <遊만학송풍도>, <遊계산행려도>, <遊몽유도원도> 등을 선보인다. 이 작품제목들도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유머러스하면서도 중요한 지점이 된다. 말하자면 고전 스승의 그림들을 지속적으로 모사하면서 스스로의 준법들을 습하고 스승들이 자연과 세계를 소요하며 거두어낸 화폭에 스스로를 던져 본인이 그들의 작품에서 '소요해왔음 혹은 여전히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것을 그리며 익히며 행복을 느끼고 그들의 정신과 세계에 대한 철학을 체득하면서 깨닫는 그만의 감응적 세계. 한편, 시간이며 물리적 공간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무법자와 같은 개인성과 창작적 태도에서 장병언이라는 작가는 또한 자신의 속세적인 삶에서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되 인간사회 자연의 규율에도 어긋나지 않는 아주 특이한 젊은 예술가이다. 저 고전 스승들이 다만 준법을 익히기 위한 도구적 스승들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며, 또한 저 준법들이 기술로서의 화법이기 보다, 삶의 철학과 규율을 녹아낸 정신적 기법이라는 측면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끝>

  
후기:
작가와 나의 인연은 3년전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30대 중반의 전업작가 또래 작가들이 그 사이 개성 넘치는 그들만의 참신함들을 소개하고 있을 때, 장병언 작가는 그야말로 고전 산수화의 세계와 흠뻑 일체가 되었고 대학교육이 신통치 않음을 감히 '스스로' 깨닫고, 곧이어 '스스로' 스승을 정하여 그를 찾아 '사사받는' 형식을 과감히 '신선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품고 살며, 그의 삶에는 어떤 층위들이 있는지 인간 자체가 궁금해지는, 신묘한 측면이 있는 작가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참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