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1일 수요일

민성民性, 2012.3.6~2012.7.29, Daegu Art Museum

한국적 표현주의
Korean Archetype, 민성民性

최윤정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Intro

대구미술관의 철학적 지향성과 비전을 선보이는 주제전의 일환으로 마련된 ‘민성民性’은, 2011년 개관주제전 ‘기가차다’, ‘삶과 풍토’1)와 마찬가지로, 한국현대미술이 갖는 차별적인 지점을 연구하고 그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미학적 의의를 제시한다. ‘기가차다’는 한국현대미술의 향방을 고유의 정신사적인 측면과 연관시켜 제시하였고, ‘삶과 풍토’는 우리의 물리적·환경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삶의 특수성으로서 한국현대미술의 경향성을 선보였다. 이에 ‘민성’은 민족의 시원(始原)적인 요소, 원형(原形)적 측면에서 발현되는 한국인의 서정과 의지를 우리 미술의 원초적 서사로서 담아낸다.

‘민성’은 ‘한국적 표현주의’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한국적 표현주의'라 불릴만한 연구를 제시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작품 소재와 주제_기법과 형태_시대성과의 연관 등 작품을 둘러싼 외화(外華)적 측면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한 측면은 예술가의 내적인 창작인(創作因)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성'의 단면을 표현론적 관점2)에 연결한 지점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4인의 작가-박생광(1904-1985), 서용선(1951), 김종학(1937), 황창배(1947-2001)의 경우, 그들의 세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화업이 한국미술에서 첨예한 대립각을 마주해야 했던 70, 80년대에 태동하거나 그 시기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을 묶을 수 있는 동시대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자기 발언으로서 택한 창작의 기법과 소재들이 시대적인 요청과 창작 모색과정에 있어 한민족의 잠재된 서정을 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유사한 측면을 논해볼 수 있다. 그 속에는 개별의 삶이 겪는 열락이나 역경, 불현듯한 깨달음, 지적인 성찰 등 의식/무의식이 생산해내는 '생의 문제'가 또한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요소들이 어떠한 과정과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되어 전달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본 전시의 목적이다.
한국적 표현주의를 일컫는 조어(造語)로서의 민성, ‘민民’은 인간 생의 형태와 원초적 의지를 포괄하는 삶의 형形을 뜻하고 ‘성性’은 면면이 이어져오면서도 현재화되어 표현되는 우리의 ‘성정’이나 ‘기질’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합친 ‘민성’은 일차적으로 '무의식이 작용하는 비합리적인 활동'으로서 내면에서 발현되는 ‘욕구․의지’에 우선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표현론 내지는 표현주의가 차지하는 수많은 가지들 중 하나의 영역에 통섭될 수 있는 요소가 되며, 또한 한국인/한국성이 공유하는 삶의 형形-문화적 원형과 역사에 대한 기억, 특유의 풍토에서 비롯되는 경험 등-으로 축적되어온, 우리 고유의 서정성을 함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정성이란 (예술)의지와 (예술)충동을 추인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 기층의식이 주조해낸 '공감정서'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민성’은 원형적 증거로서 신화나 설화와 같은 옛이야기, 영성(靈性)으로서 구체적인 삶에 직접적으로 배어있는 민속적 양식, 그리고 역사성과 기억감정을 민족적으로 공유하는 단면들을 다룬다. 그리고 세상과 대결하면서 결연히 생을 유지해온 민초적인 힘의 의지를 비유하는 개별 실존을 다룬다.
이에 따라 연구집으로서 본 도록에서는, 우리의 심층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구비문학, 특히 ‘설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민성’의 의미를 추적하고3), 개별의지이자 예술가의 내적인 창작 동인을 설명하는 표현주의적 관점의 미학4)을 함께 실었다. 마지막으로 ‘민성’의 기획에 대한 전 연구단계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꾀하기 위해 그 시작과 과정에서 소요된 이야기들을 인터뷰5)를 통해 담아내었다.

민성 작가 4인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신표현주의 경향인, ‘트랜스아방가르드’6)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역사나 철학, 문학과 신화 등으로부터 창작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한 것은, 다시금 회화 자체의 표현성을 회복하고자 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과 자부심을 기반으로 '자기다움'을 좇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물론이거니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모더니즘적 개념미술과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가 남긴 창작의 획일성은 도리어 자기 심층에서 울리는 소리를 더욱 그리워하고 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적 요인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성 작가 4인은 시대적으로 한국의 70년대 모더니즘적 개념미술, 80년대 민중미술Minjung(民衆)Art이라는 양대 산맥과 나란한 행보를 보였다고 말할 수 없다. 단언하건데, 자기 내부로부터 충분히 발효되지 않은 형식을 무반성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단순한 트렌드적 차용일 뿐이지, 본연의 창작욕구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는 탓이다. 다시금, 선택의 여지가 없는 획일적 경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때조차도, 그들은 당대 타락이라 규정지었던 구상적 회화를 버리지 않았고, 또한 사회혁명을 목표로 한 정치적 회화를 마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스로도 혼란한 시기, 그들은 도리어 '의지적 행보'를 선보인다. 자신이 해오던 바에서 시대를 읽고 자신에게 걸맞는 도상을 담아내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발화(發話)를 억제하면서도, 강렬하고 인상적인 색/구성을 통해 심층적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우리 안에 응축된 ‘민성’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박생광은 '민족성'과 ‘불교·무속’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서, 서용선은 '역사적 서사'와 '현대사회'에 대한 냉엄한 시선 그리고 비정한 자기 초상을 통해서, 김종학은 '전통적 민예미'와 '그의 감정'을 자연에 이입하면서, 마지막으로 황창배는 '전통성'과 ‘현대성’을 쥐고서 형통한, 실험을 통해서 이와 같은 면모를 선보여 왔다.

박생광(1904-1985)채색화를 일본풍의 그림과 동일하게 인식했던 시기가 있다. 당시 동양화단은 사의寫意의 명제로서 자연과 문인적 화풍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채색화보다도 수묵이나 수묵담채가 더 값어치 있게 인식되던 시기였다. 박생광이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왔기에 그의 채색화는 곧바로 일본풍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하였고, 또한 한편 그는 일본화단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작품의 수준도 인정받았던 바, 이 같은 오명을 부지불식간에 소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 박생광에게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소명인 것으로 여겨졌다. 몇 시기의 창작 모색 단계7)에서 살피자면, 진주시절을 거쳐 상경하였던 1960년대는, 그가 '한국적인 회화'를 주창하면서, 민족적인 소재로부터 영감을 찾고자 애썼던 시기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러 박생광은 '고희'의 나이를 넘겨 드디어 '일본적인 채색화'의 수식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가 한민족의 기층문화로서 맘속에 품었던 불교적 소재와 민속적인 내용들이 그만의 진채기법을 통해 생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법은 '그냥' 형식으로서만 읽을 수 없다. 그가 민족적인 주제로서 천착한 요소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칼집이자 권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박생광의 진채기법은 그 자체가 이미 그의 표현의지와 동일하며, 한국의 기층문화에서 면면이 이어져오는 전통회화-그것은 불화이기도 했고 무속화이기도 했다-로서 바로 그가 욕구한 '한국적인 회화'의 주춧돌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결코 채색거부의 그림만도 아니었다. 심한 경우는 난하게 여겨질 정도로 색채들을 강렬하게 구사하곤 했다. 민족미술의 머리 부분을 글자 그대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 무덤 속에 간직되어 있는 빼어난 채색화들은 한화(韓畵)의 원류로서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이의 전통은 고려시대 불교회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8) 그의 관심은 오랜 기간 불교에 있었다.9) 그는 또한 불교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실제로도 불화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의 영향을 통해서 그가 만들어낸 진채기법이란 화선지 위에 주홍빛 아교채색으로 굵직굵직한 윤곽을 만들어내고→그 위에 주홍빛의 윤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교먹물을 흩뿌리며→ 그 다음 윤곽선 사이사이를 채색으로 메워가는 방식이었다. 진채기법은 색을 켜켜이 쌓아올리는 과정이자, 민화적인 다채로움을 고루 갖추고 있기에, 그의 조형세계가 우리 토착문화, 기층문화에서 비롯하는 원형적 요소와 밀착해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샤먼 김금화10)와의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를 더욱 보강하는데, 민속적인 주제는 물론이고 자신의 무속시리즈에 대한 영감까지 그로부터 구체화하면서 한국의 샤먼에 대해 관심을 갖고, 특히 중요한 굿이라면 행해지는 어디든 찾아가 그 장면을 스케치로 남기기도 하였다. 평생에 소원하던 인도성지순례(82)는 그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듯한 영감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후 타계할 때까지 완숙기에 접어든 무속, 불교적 소재 외에도 한민족의 역사 속에 자리한 저항적 인물(전봉준)과 핍박의 상징(명성황후)으로 대표되는 '한'의 역사시리즈를 남기게 된다. “나의 작품을 유파적으로 분류하면 북종화에 속한다(사실적인 채색화). 그러나 文부(중국)의 북종화와는 달리 이번 인도여행에서 나의 작품세계는 더욱 더 力을 얻게 되었다. 인도의 신들, 예를 들면 피와 생명을 탐식하는 피의 여신! 그들의 칼라를 보고 더 힘을 얻었다. 한국의 불교! 무당의 그것처럼! 신의 영감을 또는 우리 고려불화의 그 증화적(繒畵的)인 생명력을 현대적인 나의 힘으로 작품화하는데 있다(1983)” 결국 그가 정립한 ‘그대로 화풍’은 민족적 감성이나 우리의 옛 것 그리고 기층문화에 대한 내적인 이끌림을 쥐고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미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적층되어 온, 온전한 그의 힘이었다.

서용선(1951)“세월이 흐르면 인간의 뇌리에서 역사의 아픔은 지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낳게 한 인간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행위는 진실 그 본연의 모습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것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로, 개인의 마음 속에 본능적인 감성의 느낌으로 자리 잡기 마련이다. 그동안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은 역사와 함께 의도적으로 은폐 혹은 왜곡되어왔다. 그 역사는 지금까지도 정치·사회·경제의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사건에 얽힌 피해자와 가해자, 나아가 그들의 자손들에게 여러 사회적·심리적 문제들을 파생시켜 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11) 아카데믹한 회화와의 결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서용선은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화는 70,80년대 시대상과 마주하여, 군부독재의 비합리적인 권력 쟁취와 그것이 우리 삶에 개입하는 모순성을 사유하면서 느낀, 작가의 도덕적인 회의감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서용선이 왜 ‘계유정난과 단종폐위에 대한 역사화’를 긴 시간동안 그려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데, 그에게 단종폐위와 관련한 세조의 이야기는, 권력쟁취에 대한 명분과 폭압에 대한 당대 사회적 분위기를 비유하였다. “역사는 근대 시기 이래로 세계가 탈주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문성의 권위를 부여받고 국민국가의 공인을 받으며 서술역사로서 변모하였고, 이러한 공식역사가 사회를 주도해왔다. 역사는 집합기억들을 병합시켜 공식기억을 주조하거나 아니면 대항기억을 억압 혹은 주변화시켜 결국에는 망각의 늪으로 밀어넣기도 하는 권력의 역사였다.”12)
작가의 역사적 심안을 통해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힘의 작용과 반작용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을 상기시키듯 원색적인 색감과 필치로 화면 가득히 묘사된다. 그의 역사화는 그렇기에 사회상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면서도, 그 역사에 얽혀있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80년대 현실참여적 회화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요소라든지, 사회주의 공산국가에서 선보이는 기록화와는 판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는 역사화 작업과 동시대 세태 풍경을 지속적인 연작으로 선보여 왔다. 그리고 한민족의 ‘한’이 서린 한국전쟁시리즈나 설화시리즈가 또한 동일한 문맥에서 소개되어 왔다. 그가 역사 속에서 발굴한 주제들은 지금 현재에도 세계의 도시들 한 복판에 처해진 인간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13) 또한 그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해가는 과정은 그가 세태풍경에서 묘사한 의지가 없어 보이는 현대인들의 단상, 익명성과 군중의 우매함에 대한 날카로운 자성을 투척해온 것이다.
그는 과거 역사적 서사가 지니는 시간적 층위들을 한 화면에 중첩시킨다. 그리하여 역사적 기억을 깨우면서, 동시에 우리 기저에 있던 집단적 비애감들을 자극시킨다. 내부환경과 자극적인 외부환경에서 살아남고자 악착같이 자신을 유지하려 하거나 혹은 가혹하게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들에 마주하는 것. 또한 그가 선사하는 인간/군상은 무의지적이며, 비극적이다. 사회에 대한 도덕적 회의감을 작품의 비애감으로 표출한 서용선은 자기초상에 있어 굴욕적으로 엎드린 형상이거나 혹은 비장하거나 몹시 화가 난 듯한 격한 표정을 분출하기도 한다.
주제에 대한 자료를 체득하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그는 직접 답사를 하여 작업노트를 남긴다. 장소와 자신의 온도를 맞추어가면서 ‘그곳’이 함의하고 있는 서사와 사연들에 골몰하는 바를 기록하였고, 그로부터 생성된 감정들을 또한 스케치로 정리하였다.14) 그 과정에서 그는 “‘사건’보다도 그 사건 속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간’의 ‘마음’에 매료되고 있었고(...) ‘사건’을 더듬어 가면서 그 ‘역사의 구조를 그리고, 그 점에서 노산군(단종)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그러나 실제 작품으로부터 내가 느끼는 것은 오히려 비극의 속에 놓여진 노산군(단종)의 ‘마음’인 것이다.”15) 시대정신은 물론이고, 인간에 관계한 다양한 층위들_현재화된 역사이자, 군중, 사람, 마음-을 쏟아 붓는 서용선에게는, 보편적인 도덕에 대한 성찰적 물음이 있고, 휴머니즘에 기반하여 역사적 비극을 공감화하면서 우리의 기억감정을 추출해내는 힘이 있다.

김종학(1937)
김종학의 화업은 젊은 시절 동료들과 더불어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한 악튀엘Actuel의 동인활동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서구적 모델을 습득하고자 열심히 따랐지만, 그 이상의 내용적인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단순히 형식만을 좇는 동어반복에서 결국 그는 탈주를 희망하였다. 우선적으로 서구적 형식과 경향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는 결국 창작과 창작에 대한 태도를 회의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심한 내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는 예술가로서의 생生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우연적으로 찾아온 개인적인 요소들로 인해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심적인 고통은, 도리어 심연에 놓여 있던 그의 솔직함과 순수한 창작에의 의지를 움트게 하는 촉매였을 수도 있다. 살아내고자 찾아간 설악산은 이러한 그의 의지와 서정이 표현적으로 펼쳐질 수 있었던 자연의 화판이었다.
구상회화로의 변이16)에 있어서 그에게 ‘민예民藝적인 것’에 대한 서사는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이 순수한 자연을 그리고 있고, 그것이 그의 심정을 감정이입하는 매개로 지칭된다 할지라도, 그의 작품이 갖는 표현적인 측면은 작가의 민예미에 대한 심취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없는 옛 장인이 선사하는 비례미와 조형적인 짜임새는 현대미술감각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김종학은 이때 목기수집가가 되었다. 목기만큼이나 그는 전통 수예품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서, 화가로서의 색채감각에 대한 영감을 민화적인 요소에서 발견하기도 하였다. “전통시대에 밝은 색채감을 실현한 대표적 현물이 바로 베갯모, 주머니, 수저집 같은 우리 민예자수품의 수화(繡畵)였다. 수화의 바탕색인 적색, 흑색, 보라색, 청색 등은 김종학 그림의 바탕색으로 나타난다. 이 바탕색을 근거로 소망 또는 기복의 전래 상징이던 꽃과 새가 모티브로 등장한다 (...) 색깔의 배색에서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원색의 진한 맛깔과 보색의 묘미를 능히 동원하고 구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김종학에게는 더없는 원군이 되었다. 청록빛 나무와 풀로 뒤덮힌 들판에 빨간 꽃이 등장하는 김종학의 그림에서 자주 만날 수 있듯이, 보색을 배색하면 선명한 인상을 준다. 눈 망막 색신경이 어떤 색의 자극을 받으면 보색관계의 상대 색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주는 기능 때문이다.”17) 그뿐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화면은 색의 현란함과 균질화된 조형과 그로인한 평면성에서 거두어지는 ‘기운생동’의 화기가 만연하다. 이같은 기운생동의 표현은 비단 민예풍의 기법적 측면을 넘어서, 작가의 ‘살이’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세속과 떨어져 1970년대 후반 설악산으로 들어간 작가는 그저 봄에는 봄을 여름에는 여름을 가을에는 가을을 겨울에는 겨울을 그리고자 하는 자연인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목가적인 자연회귀가 아닌, 그의 예술의지가 의욕하여 자기만의 화두를 쫓아 나선 고뇌의 도정이었다. “흰 눈이 내려서 그런지 그렇게 깜깜한 밤이 아니구나. 아빠는 지금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단다.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창조의 길을 가는 사람만이 갖는 특권이다. 물론 외롭고 고달프고 때로는 겁도 나지만, 오직 자기 홀로 서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아니 길이 없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재미는, 다른 사람들은 모를거야”18) 그의 작품에는 들풀의 생명력과 꼬물거리는 넝쿨들의 향연, 자연이 선사하는 이름모를 색채들이 꽃을 통해 발화한다. 일필휘지 혹은 휘젓고 짓이긴, 무작위적인 그의 붓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는 섬광처럼 스쳐가는 화재畵材를 뇌리에 입력하여 에스키스해 둔다. 그리고 불현 듯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에서 그의 분방한 정서가 화면에 나타난다. 그의 잠재적 조형의식과 그가 좋아하는 한국적 원시성이라 할 수 있는 민예적 감흥이 녹아내려 천진난만하고 동심적인 환상으로 나아가는 사이, 그만의 독특한 천진고박天眞古한 세계가 무르익는다”19)

황창배(1947-2001)한국화단의 '실험정신'으로 논구되는 황창배는 80년대 중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만들어 내는데20), 수묵과 담채를 이용한 ‘선염’과 뿌리기 행위를 통해서 그는 우연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화면에 잔영처럼 떠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우연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즉흥적으로 유추된 형상을 추출해낸다. 유추된 형상은 작가가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감성에 따라 나무가 되기도 하고, 여인(여신)이 되기도 하고 어머니의 자궁에서 쉬는 듯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기도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형태이던지, 또한 중력이 없는 듯 부유하고 있거나, 어딘가에 서린 채로 그 존재를 반짝이는 자연의 영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황창배는 일반이 가져봄직한 작품 주제나 형식에 대한 철두철미한 서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기대고 있었던 바는, 원초적인 표현의지와 추상적인 잔영으로 차오른 이미지들이 선사한 상상력이다. 우리의 눈과 의식이 무관심적으로 스치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의미들에 대해서 한번쯤 의구심을 품어 본다면, 우리 눈이 눈에 보이는 데로만 사물을 인지하기보다 상황과 심리, 관심에 따라 의지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다. 황창배의 '설화시리즈(일명 숨은그림찾기)', ‘색면추상 시리즈’는 이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모든 예술 실천 분야에서 한국성(Koreaness)을 구하"려는 그의 강건한 의식과 "이에 경시되고 있던 민화가 독창성과 혼으로 넘치고 있음을 깨닫는"21) 과정에서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으로 상징되는 설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그의 표현적인 감성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양화와 서양화 구분이 무색함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에 대한 불합리한 ‘한정’으로 여기는 것 이상으로, "양차대전 사이 36년 동안 일본의 한국통치 때 부과된 예술학교 학과과정의 잔재인 동양화와 서양화 간의 부조리한 분리를 거부하는"22) 의지적 시선을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읽을 수 있다. 주제에 대한 목표나 지향점이 없다는 것은 그렇기에 단순한 자유분방함이 아니다. ‘무미無美’가 미가 아닌 것이 아니라 미의 ‘보이지 않는 진리’를 천명하는 것처럼, 작품 내용에 즉한 설명 외에도 그가 창작에 임한 ‘무법無法’의 태도와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주제의식으로서 동시대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당대 평단에서는 그의 즉흥적이고 뛰어난 감각이 조선시대 민화가 지닌 ‘순수하고 기교 없는’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냈다고 평가하였다.23) 황창배는 형식에서만이 아니라, '주제가 있거나 혹은 없거나(untitled)', 설명적 의도 혹은 모던적 세련미와 관계한 기존 주제의식이 전제하고 있는 기준들을 전복시키고,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현대적 가치를 기준으로 제시하는 획기적인 발상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과정은 ‘설화시리즈’나 ‘색면추상’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전 작업을 통할하여 우리가 왜 그를 ‘파격과 일탈의 화가’라고 부르는지 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Outro

독한 삶이 던지는 필연적인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이 묻는 질문에 연속적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때그때의 의지와 판단은 현재를 놓고 과거의 기억으로 회귀하거나, 판단의 합리화를 위하여 미래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우리가 세계에 처해있는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 가지 시간을 의식 속에서 조합하면서, 이에 대해 회귀하거나 혹은 성찰하려는 되새김질뿐이다. 그것은 참으로 공평하다. 그 어느 것도 확답할 수 없으며, 그 어떤 판단도 확신할 수 없는 근본적인 비극성을 모두에게 전제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억과 구전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면서도 공감적인 형태의 감성인 비극성을 발견한다. 아마도 더욱 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고리를 지닌 사람들. 그들이 삶의 답을 구하고자 수행하는 여정 속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이에 관계하며 자신의 가치를 정립해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이는 흡사 민성작가 4인이 창작 전 단계에서 고뇌하였던 외화적인 요인들을 비유하는 듯도 하다. 그들 모두에게 일치하는 하나의 표식으로서, 망각을 발견으로 암담함을 개척으로 승화시키는 ‘의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의지란 다양한 양태로 生생/세계에 빛을 추동하게끔 하는 동력인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을 통틀어 자기 존립 근거를 조직하려는 원초적인 힘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술가에게 의지란 예술가의 존립근거를 조직하려는 원초적인 힘이고, 예술가의 존립근거란 생이 근원적으로 던지는 비극성에서 출발하여 예술 표현과 창작에 대한 동시대성을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도정에 놓여진다. 박생광과 서용선, 김종학과 황창배의 동시대성은 ‘한국적인’의 시대적 요청과 ‘표현’이라는 개별 의지로 거두어낸 ‘민성’ 속에서 그 의의를 다시금 재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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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가차다’(Qi is full 2011.5.26-)는 1·2전시실을 통해 ‘의를 그리다(Drawing Yi)’, ‘적을 보다(Seeing ji)’ 두 섹션으로 구성된 대구미술관의 첫 주제전으로서 인문학적 지향성과 정신사적 문맥이라는 사변적 측면에서 한국의 현대미술이 지닌 철학을 논하였고, ‘삶과 풍토’(Life, Nature, Human 2011.10.-2)는 1·2전시실을 통해 ‘삶’, ‘풍토’의 섹션으로 나뉘어, 토양과 삶의 형태를 비추는 물리적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창작론을 보여주었다.

2) "한국적 표현주의라 할 만한 이들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적 감각,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린 작업의식은 예술이 근원적으로 갖는 어떤 잠재성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이 이런 양식으로 나아가게 했는가라는 점이다. 미술에 관한 어떤 논리나 조류보다 내면의 심적인 동기가 문제이다." 김수현「한국 표현주의 화가의 창작미학」, 본 도록에 수록

3) 「민성은 어디에 있는가? 설화가 말하는 민 혹은 인간의 얼굴」, 조현설, 본 도록에 수록

4) 「한국 표현주의 화가의 창작미학」, 김수현, 본 도록에 수록

5) Interview, 피디어스 김용대님과의 대담, 본 도록에 수록

6)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Achille Bonito Oliva)에 의해 명명된 ‘트랜스아방가르드 Transavantgarde’의 대표적인 작가는 산드로키아(Sandro Chia), 엔초쿠키(Enzo Cucchi), 프란체스코 클레멘트(Francesco Clemente)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 등이다. 이들의 작업은 강렬한 색채와 신비한 분위기, 신화, 타 문화의 영향을 통한 상상적 이미지, 전통적인 도상 차용 등의 특징을 보이고, 20세기초 표현주의와 전통적 구상회화를 절충한 형식적 특징을 띤다.

7) 최병식은 박생광의 회화시기를 5단계로 나누어 보고 있다. 제 1기(1920-1945)는 학습시기, 일본유학 및 활동시기, 제 2기(1945-1974)는 모색시기, 모국으로의 귀국과 고향 진주에서의 활동, 67년 상경 후 한국적인 회화의 필요성을 주창하였고 이때 한국의 문양, 문창살, 단청 등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제 3기(1974-1977)는 2기의 작업을 심화해가면서 일본화풍을 정리하는 시기였고, ‘그대로풍’이 정립되고 그 만의 진채기법이 전개되는 제 4기(1977-1982)를 맞이한다. 이때 불교적 성향, 무속적 소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인도성지순례 및 프랑스 여행을 통해 창작적 정열을 다시금 가다듬게 된다, 이후 타계 전까지 약 3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그대로풍’은 절정기(제5기, 1982-1985)를 맞이하는데 무속, 불교시리즈는 물론 대형작업인 역사인물시리즈가 이때 소개된다.

8) ‘민족미술의 한 양상과 진로문제-박생광의 경우를 중심으로’의 3부, 미술비평가 윤범모, 1997
“고도의 세련된 미의식과 제작기술은 조선시대 내불외유(內佛外儒) 시대가 되면서 퇴색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귀족예술이 아닌 민중의 그림으로 몇몇 십왕도(十王図)나 감로탱화(甘露탱화)같은 곳에서 명맥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초상화나 속화(俗畵)같은 이른바 민화(民畵)같은 재미있는 장르 속에서 채색화의 찬란한 전통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9) ‘그대로 박생광 화백의 삶과 예술에 대한 회상’, 유홍준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박생광 화백은 결코 불교에 심취한 분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우리 고유의 전통과 역사에 심취해있었다. 그것은 그가 역사화를 즐겨 그리고 십장생, 조선여인, 무당, 장승 등을 많이 그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박생광에게 불교란 우리 역사의 일부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넓게는 동양의 사상으로서 불교였다.”

10) 중요무형문화재 제 82-나호 서해안 배연신굿 대동굿 무녀 분야 기능보유자

11) 14p 시선의 정치_서용선의 작품세계, 정영목, 학고재, 2011

12) p.176 철학, 문화콘텐츠를 말하다, 박상환, 도서출판 상,2011

13) 이인범, 일상적 ‘삶’으로 귀환하는 예술, 월간미술 2002년 6월 “1960,70년대 초를 방황했던 청년기, 작가수업, 1980년 서울의 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권력투쟁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기억과 삶 체험들은 서용선의 다양한 작업의 밑바닥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그의 세상 체험이 그렇듯 그가 그려내고자 했던 ‘삶’ 역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기 보다는 그것은 행복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고 저지하고 짓누르는 삶의 폭력성 또는 비극성이었다.”

14) “스케치를 다른 대작으로 옮길 때에 중요한 것은 있는 모습의 형상을 본뜬다기보다 직접 현장에서의 기록이 담긴 선을 다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죠. 스케치의 재현이라기보다 하나하나 감성의 요소를 중시 여긴다고 할까요”, 김윤정, ‘이미지가 시야에 사로잡히다’ 미술세계, 2003년 7월

15)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갈 때_서용선의 시도], 치바 시게오(미술평론가), 2008

16) “김종학의 회화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1960-78년에는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과 실험기이자, 그에 대대 회의를 갖는 시기이다. 1979-86년 사이는 변화의 모색기이다. 설악을 만나고 자연과 전통미에 회귀한 김종학 화풍의 형성기이다. 설악에 정착한 1987년부터 현재까지는 김종학 회화예술의 성숙기라 할 수 있겠다. 2006년부터는 상상화의 새 전개를 보이는 듯 하다” <봄에는 봄을 그리다>, 이태호

17) 김형국,「그림으로 환생한 민예품 사랑_김종학 화백의 경우」, 『김종학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2011

18) 김종학,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

19) 송영방,「김종학의 풍모와 그의 그림을 말한다」,『김종학, 김종학이 그린 설악의 사계』, 열화당, 2004

20) 황창배의 작품창작 추이는 다음 세단계로 나뉜다. 1980년대 '설화시리즈' 민화와 설화적 내용을 담았고,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색면추상시리즈' 색면의 강조를 통한 추상표현주의적 평면작업을 거쳐 1990년대 중반 이후 평면의 역동적인 표현과 그 형식의 자유로움이 그대로 묻어난, 그야말로 '무법無法의 완성' 시기이다.

21) 홍가이,「황창배 개인전 서문」, 1993, Boston FineArt Gallery
"이렇게 무엇이 독특하게 한국적인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는 영감의 기원을 중국에 두고서 공식적으로 인가된 정통 동양화의 전통을 따를 뿐인 동양화 유파와 결별을 고하였다(...) 모든 민화에 극명히 깃든 혼은 한국의 지배계급이 억압하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서민의 심장과 영혼의 어두운 구석에서 타오르던 바로 이 대담하고 독창적인 혼이었다."

22) 홍가이, 위와 같은 글

23) "서민들의 삶의 양태가 축약되어 있는 민화야말로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그림에 연결시켜 볼 수 있는 참다운 민족적 양식이라고 믿고 민화를 단순히 형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민화가 지향하는 순수하고 기교가 없는 천진난만함에서 오는 정서나 감동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노초나 선인의 이미지, 그리고 남녀의 열락의 풍경은 모두 민화에 그 맥락이 닿아있다. 특히 유동하는 수묵과 색채의 얽힘과 녹아흐름은 민화의 현대적 변주를 다양하게 하고 있다." 최광진「황창배:새로운 한국화에의 집념」, 1994, 삼성미술관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