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이은정 작가 비평

글|최윤정_미술비평/미학



'화면 속 시각적인 것이 엷은 붓질로 인해 묘한 잔영을 일으킨다. 잔상 혹은 잔영, 눈에 보이는 명확함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이고 기억감정을 구체화하는 형상, 작가 이은정의 작업은 그리하여 흡사 환영과도 같다. 그러나 망막에 결코 맺히지 않았었을 법한, 곧바로 형식 자체에서 물리적 감각체험을 끌어내는 이 이미지는, 도리어 내적으로 명확해지며 역으로 시각을 자극한다.'

I.

그녀가 일필의 가는 선에 주목하고 이로써 머리칼, 피부의 표면 등을 근 10여 년간 연구하고 표현해왔던 전작에서부터 보자면 지금의 ‘흐릿한 초상’ 연작은 의도적으로 숨겼으되, 그 이면의 주제를 정직하게 공개하고 있다. 한편 이전 작업은 작품에 드러나는 얼굴의 '결'과 머리칼 한올 한올을 세밀한 붓질로 표현하며, '이형사신'의 정신성을 기반으로 한 고도의 관찰력과 집중을 요한 작업이었다.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소재와 주제에 대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반복하고 훈련하고 실천해온 작가 이은정은 이와 관련한 상당한 작업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예의 작업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가늠케 하는 사람이다.


최근작에서 나는 작가의 말대로 그녀가 여성이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있고, 그러다 보니 여성과 모계에 관심이 가고, 그 한 결과로 작품의 내용이 ‘모계’, ‘지폐 속 여인들’, ‘종부이야기’로 이어진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기서 '뉘앙스'라 표현한 것은 작가가 확실히 그것을 고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비록 일순간이라 해도 내 시선에서 작가 이은정은 이와 왠지 절실히 밀착되어 있다거나 대단히 유관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고안한 작품형식과 여기에 보다 어울리는 내용적 관심사를 효과적으로 잘 조합했다.


II.

그녀의 작품을 바라볼 때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일정 '거리'를 두어야 이미지가 제대로 보인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자세히 보고자 가까이 다가가면 연한 펄코팅에 반사하는 빛만 보일 뿐이고, 대형화폭에 새겨진 이미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감상자의 발이 점점 작품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작품자체가 시선의 일정한 거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시선의 일정한 거리는 또한 작가가 주제로서 다루는 대상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와도 닮아있다. 그녀의 ‘종부이야기’는 심층 자료연구를 토대로 한다. 일차적으로 전국의 종부들을 열심히 발품 팔아 찾아다니며 인터뷰 자료를 수집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 혹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동일시하거나 오마주를 띤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 관찰자로서 그들의 보이지 않던, 주목 받지 못했던 행위를 재조명하기 위해서 접근하는 식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작업에 아카이브적 특성이 가미되어 있음을 중요하게 보고있다. 이는 작가가 고유하게 설정한 '흐릿한 초상'의 일환으로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이 형식적 동일성 내지는 유사성을 띠고 있다 해도, 주제적인 차별성에서 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제를 이끌기 위한 면밀한 연구와 조사는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검토와 반성를 수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초상화에 대해 말해보자. 보통 초상화는 그 대상자의 사회적 위치와 분위기, 당대의 주요한 교훈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자체 문맥적인 요소를 획득했기에 역사적으로 혹은 예술적으로 의미있는 반향을 가진다고 본다. 그러나 초상화는 일차적으로 어떠한 의미이든지 개인에 대해서 마주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는 개인의 특성과 분위기를 단호히 표현하며 오히려 그/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종부이야기'에서는 절대 개인이 강조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서 작가 이은정의 작품을 마주할 감상자가 앞서 말한 '시선적인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의미적으로 '심리적인 거리두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고자 한다. 초상화의 인물(개인)과 서로 응시하는 요소라기 보다는, 오히려 연작 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는 전체 흐릿한 초상들이 한 공간 안에서 공명을 일으키고 이 분위기에 감상자가 압도되는 형국이 야기되는 것이다. 흐릿하기에 대상의 구체적인 형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 그로인해 '거리두기'의 행위가 겹쳐지고, 이로써 물리적인 '감각체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잊혀져가는 것과 가려져 있던 것이 또한 표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감춰지는 탓에 의도했던 혹은 아니건 오히려 작가 이은정의 작품 자체에서 발하는 소명은 더욱 명확해진다. 형식은 그 자체가 내용이 되었다.


III.

이은정의 작업은 보통 상처와 자존, 자신의 일상과 내면,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서에 대한 자기 고백 등으로 풀리는 태반의 여성작가들의 일반적인 양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대단히 계획적이며, 과학적이며, 연구적이며, 대상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전 작업 중 내가 특히 주목하는 바는 ‘겹친여백’ 시리즈이다. 동양의 정신적 여백 사상을 주름으로 무늬로 표현하여 물리적인 공간감을 실재화하였으며, 겹친여백 자체는 기존의 정신성의 확산 내지는 파장이라는 전통적 여백 느낌에서 입체, 공간감, 시각적인 착시 등의 요소를 끌어오고 있다. 마치 관찰자, 연구자의 태도를 함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 것이다. 내용상에서 비슷한 문맥을 보이는 ‘모계’시리즈의 경우는 그녀가 시어머니를 토해 모계를 정리하여 초상작업을 한 것이었다. 그때의 연작과 '종부이야기' 연작은 자칫 내용적 맥락이 유사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전혀 다르다. '흐릿한 초상' 시리즈는 그녀가 10년간 해온 작업과 형식적인 결별을 맺는 지점이다. 물론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아카이빙 및 연구조사는 일견 방법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흐릿한 초상-종부이야기' 시리즈는 '모계'연작보다 심리적 거리감이 한층 강화된다. '모계'연작에 표현된 인물이 개개인의 계보가 드러나며 관계적 선형을 구성하는 시점이라면, '종부이야기'는 그녀가 택한 혹은 개발한 작품형식을 보다 긍정적으로 완성해줄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다.


IV. 인터뷰

내가 느낀 작가 이은정은 따뜻하지만 고집스럽고 또한 세심하지만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까 혹은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가 분명 작가로서는 신경이 쓰일 테지만, 내 느낌으로 그녀는 근본적으로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와의 만남 그리고 첫 인상, 죽 이어진 그 내면의 인상에 대해서 이같이 말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최근 그녀의 작업 ‘흐릿한 초상’의 과정에 대한 단초를 일부 여기서 발견했다고 보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한다는 것을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가능하지도 않겠는가. 작가 이은정을 마주하고 문득 든 생각이다.■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작가 이창수 비평

확대된 영역 실험 : 투시적 접근을 통한 회화적 한계 벗어나기



최윤정|미학·미술비평

현재 그의 작업은 레이어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3차원적 형식을 구현하면서 근본적으로 회화 장르에 대해 그가 추구하거나 고민해왔던 지점을 첨예화한다. 이전 작업에서 작가로서 그가 내용적・형식적 모티브로 '시간성'에 대한 관심에 보다 천착했었다고 본다면, 현재는 이에 대한 무게중심이 회화의 근본 형식에 대한 주된 고민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과 유사한 방식에서 레이어 효과를 작업적 모티브로 활용하는 기존 작업들은, 주로 공기원근법적인 요소와 맞닿아 이로써 그 깊이감이나 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동시에 형식적으로 회화와 입체의 경계를 탈피하고자 애쓰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편이다. 그러나 이창수의 작업은 원근법적인 요소로서 레이어의 겹침 효과를 이용하기 보다는 파편적인 평면들의 연속, 위치적으로 계산된 이미지들의 순서, 레이어와 레이어 간 간격에서 비롯되어 다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평면 이미지, 그리고 그것이 회화임을 강조하는 둣한 색면 표현 등에서 레이어를 활용한 기존 작업들과는 분명 주목하는 지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회화'임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테두리를 빗겨가지 않는 전략에서 평면 형식에 대해 그가 견지하고 있는 근본적인 고민을 거론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재적으로 주변 배경을 제거하고 생물을 포함한 단일한 일부가 작품에 표현된다. 이 경우 관조로서의 방식이 아닌, 관찰로서 소재에 대해 접근하는 경우로 간주할 수 있는데, 실제 각 레이어는 사물의 전체가 아닌 부분들을 순차적으로 묘사한다. 순차적인 묘사는 이미지를 쪼개는 방식, 각 구성위치, 쪼개어 놓은 부분들이 전체로 통일되어 보여지는 효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에 입각한 흔적이다.

한편 레이어로 구분된 각 이미지들의 부분 컷은 각각이 두께감있는 색면 표현으로 이루어지기에, 정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평면 회화로서 고스란히 그 특성은 유지된다. 그러나 분명 레이어 겹침에서 효과를 취하는 작업임이 중요할 때는 이를 기존 회화를 감상하는 시점과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시점을 빗겨보면, 간접적으로 빛이 부딪히고 반사되며 시지각적으로 인지되는 이미지가 각각이 굴절률을 표하는 유리를 통하기에, 이는 일견 '착시'로서 평면들의 연속이 입체적 조형성을 획득하거나, 그리하여 관찰하는 각도마다 '다른' 전체-이미지로 통합되기도 하고 이내 사라지기도 하는 등 시각적 효과를 거두어낸다. 이는 이미 기존 회화의 형식적 요소를 벗어난 지점이다. 또한 '투시'로서 합성되는 전체이미지는 어떤 각도에서든 동일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기에,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이 이미지의 굴절과 왜곡을 염두에 둔 결과로서 보여지기 때문에, '투시'는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투명한 유리라 하더라도 약간의 푸르스름한 색비침으로 인해서 우연적으로 공기원근법적인 효과가 보이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의 계획은 이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와는 무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매너리즘 시기 방법적으로 고안된 왜곡상을 말하던 '아나모포시스(anarmorphosis)'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적인 눈속임을 위한 과학-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 이창수가 자기 회화의 지형을 3차원적으로 확대하여 투명한 유리를 화면 및 레이어로 활용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투시를 가능하게 하였던 부분, 왜곡을 전제로 하는 '투시' 자체에 비율과 형식을 맞추어 이미지를 세단하였다는 것은 관점을 위한 철저한 실험이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매너리즘 시기는 예술적 재현을 위한 모든 과학적인 지식과 비례에 대한 온 지식이 만개했던 때였기 때문에, 당대 예술가들에게 그 시기는 더이상 지식적으로 확장하고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애매했던 때이기도 했다. 유사하게도 현재 무한 반복되고 있는 회화적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 자체만으로 신선하다 할 수 없는 한계적 요소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한계를 설치적인 접근으로 해소하고자 한다거나, 타 형식으로 전향을 꾀하는 데 반해, 작가 이창수는 우선 태도적으로 그것이 회화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회화이길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회화의 형식과 인식에 대한 한계를 실험적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아나모포시스'는 당대 지녔던 형식을 완전히 새로움으로 극복하고자 한 시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미지를 왜곡하는 형식을 적극 도입하여 작가의 주관 내지는 터부시되는 것들을 더욱 적극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을 위한 하나의 형식 실험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 이창수의 작업에서도 일부 유사한 의미를 추출해보자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면이 그 소재를 쪼개어 객관적으로 묘사한 정물 형식을 갖추고 있고, 또 다른 면은 소재의 이면적 내용이나, 작가의 주관적인 상상의 영역으로 전혀 다른 풍경을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나무의 또렷한 형상이 이면에는 속이 허하게 비어있는 형국이라던지, 마치 유리 수조 안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 보이는 장면 이면에는 물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물고기의 비애가 저 하늘 위 스카이 다이빙을 꿈꾸고 있는 듯한 풍경과 자연히 이어지며 그로부터 해학적 감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차가운 폭포수에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남성이 그려진 장면의 이면에는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그의 욕정을 말하듯 용광로 속 나체 여인이 마주하고 있다.


이면의 내용들은 도덕적인 주관의 관념이건, 순수한 상상의 영역이건 실재적인 묘사 이면에서-묘사로서의 사실성, 합리적인 계산 등으로 점철되는 앞면과는 달리- 작품이 지닌 과중한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단순한 형식실험에 그칠 수 있었던 위험에서 내용적으로 긴장완화를 시키며 이후 감상의 단계를 고려할 수 있게끔 열어둔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서 떠올리는 것은 바로 '유머'이다. 정신적인 집중과 긴장의 상태가 어느 순간 어떤 표현방식으로 인해 우연히 풀리는 상황들이 존재하며, 이 상황들로 인해 집중의 에너지는 경제적으로 남는 잉여의 에너지로 전이된다. 이 상태에서 발산되는 감정들(잉여의 에너지)은 '쾌'를 가져온다는 것. 그렇다면 '유머' 내지 '유머러스한 태도'는 예술작품, 혹은 예술의 태도에 대한 제문제 등에 심리적인 과정에서 전제해야 할 하나의 가치로서 자리할 이유가 충분하다. 작가 이창수의 작품은 이를 좀더 수월하게 구분지어 준다. 두터운 질감의 이미지 표현과 단순 묘사로서 정물로서만 보일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입체적 접근으로서 과학적인 태도가 지닐 수 있는 무거운 위험이, 일종의 '유머'로 인해 긴장을 완화하며, 삶을 조근히 사고하는 감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전 작업1)에서 그가 주관적으로 설정한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과 이번 작업에서 회화의 형식에 대한 확장으로서 실험을 꾀하고 내용적으로 사물 묘사의 이면을 작은 서사로 던지는 방식은 일정 유사점이 있다. 이 방식들은 분명 작업 '형식'에 대한 일정 실험을 전제로 하는데, 그에게 주제는 형식 실험과 대단히 밀착해있어 보인다. '시간성'과 '뚜렷한 감각적 체험', '입체성'과 '양면회화' 등, 순서는 그가 고민하는 형식과 밀착한 소스를 발견하고, 발견된 소스와 연관한 내용을 전개하는 식이다. 글쎄, 이번 작업의 경우는 그 목적은 보다 뚜렷해보인다. 작가는 현재의 작업이 아직 실험기로서 일련의 완성태를 갖추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그는 시각적인 관찰과 직접적인 체험에 대해서 늘 중요시해왔으며, 그 일환으로 감상자에게 그것이 지닌 양태를 수용하길 강요하기 보다는 작품 자체를 스스로 관찰하고자 애쓰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게끔 하였다. 실은 이 부분은 아마도 이후 그의 작품과 작업관을 살피는 데 있어서 긍정적 고정관념 내지는 하나의 편견으로 자리하여, 계속해서 그를 예의 주시할 만한 기준이 되리라고 본다. ■



1) "감각을 통해 기억된 시간(...) 나는 시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는 중이다" '7가지 시간 찾는 방법'에서 그는 파동과 나이테, 주관과 속도, 그림자와 잔상, 박제 등의 상황을 구분하였다. 이는 구체적으로 그가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물에 대한 감정-기억 내지는 감각-기억 등 분절적으로 저장된 의식을 자극하여, 그가 설정한 시간성에 대한 관념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파이고 스며들고 흩뿌리는 표현행위가 거둔 오감적 효과에 순차적으로 대응하면서, 주제로서 자연 노출된다.





Experiment for an expanded sphere : To escape the limit of painting, through an approach of 'seeing through'



Choi YoonJung | Aesthetics·Artcritic



His recent work is represented by using layers and a three-dimensional effect. Making his topic acute, artist Lee ChangSu researches into a painting itself. In previous work, he was all attention to the concept of 'timeness' as a motif of its form and substance. But now the core of importance moves to the original form of painting itself. Generally other artists's similar works are represented by aerial perspective to express contemplating substances and feeling the depth of a canvas. they also make their efforts to escape the limits between planes(of painting) and formative arts. But Lee ChangSu's work is emphasized by some technique-succession of fragmental planes, calculated order of images, plane images found by a gap between layer and layer, and color expression on glass-canvas. This doesn't mean to stop being painting, but keeping characteristic boundaries of painting, just search an original form of painting itself.

In materials including living things, His work is mainly described as a single part/thing. In this case, this is not for contemplation. Because each layer is described by fragmental part in order. The whole effects occur from dividing images or combining images. we can regard the whole effects as traces made by a result of his own detailed calculation.

On the other hand, each part of fragmental images is accomplished by thick color expression. So in the front side of his work, we can find that it has its own character as a painting. Especially the remarkable point is to pile layers, so if we observe his work, we must seek the other method to access his work. Because the image appears in reflection of light through glass. If observer changes his/her visual point, an optical illusion occurs. So the succession of planes obtains a kind of formative arts, combines into 'different' whole-image or disappears. This is now the spot that overcomes the form of existing paintings. And the whole-image, combined by 'Seeing through', doesn't offer the same images. Because I think his work is a result of refraction and distortion of image, so 'seeing through' is the most important keyword in my critic.


Glass exposes some bluish-color, no matter how transparent it is. Accidentally, it sometimes occurs aerial perspective effects. But in his plan, it doesn't bring this situation into relief, just seems to have no connect. While watching his work, It reminds me of 'anarmorphosis' that means devised distortion of images during mannerism. Just as 'anarmorphosis', that is a sort of scientific play for fantastic hoodwink, expanding his painting to a three dimensional form and uses transparent glass as a canvas, artist Lee ChangSu makes various views from different angles. 'Seeing through' supposes distortion of images. Fitting into proportion and form, he cuts images. This is a thorough experiment for a view-point.


In Art history, mannerism was the bloom of almost science and knowledge about a proportion for artistic representation. Artists of those days would maintain an uncertain attitude to research the related knowledge. In the same way, nowadays in a flood of painting-images that seem to the very tautology. I can't feel fresh in many cases. Recognizing the limits, for solving this problem, so many artists seem to try an installation-approach or to turn from their own formal method to another. However artist Lee ChangSu emphasizes it must be a painting in his attitude. This means that he never abandon the meaning of painting, rather expands the capability of form and acknowledge. 'Anarmophosis' was not the try of overturning artistic forms of those days. This is an experiment of a form for substances that express artist's subject and taboo. In the same manner we can find similar meaning in artist Lee ChangSu's work. Dividing image, the one side that we think the front side looks like a still life painting. And the other side presents quite different scenery to us, the scenery is made by artist's own subjectivity. For example, the form of bamboo is vivid in the front side, but its inside is just empty in the other side. A swimming fish in a water tank describes in front, but in the back skydiver flies in the sky as if a fish dreams. From this, a sense of humor occurs. There is a man who builds up his moral character, in the other side a woman exists in a blast furnace as if it shows his irresistible desire.


Behind the actual descriptions, The substances of the other side are organized by subjective ideas or pure imaginations - different from the front side that expresses rational calculation and reality. So its function is to reduce a heavy burden that his work owns. Shown only simple experiment of a form, the danger is indebted to substances of the other side for relieving the tension and making us to look at the next sensible observation. From here, 'humor' occurs in our mind. A condition of mental concentration and tension, by a certain moments or expression, is transfered from that to a condition of relax. So the concentrated energy becomes the economic surplus, in this situation a certain emotion radiates. The very 'pleasure', this is 'humor'. In that case 'humor' and 'humorous attitude' always have existed in artistic values impressed on artworks and artistic attitudes. Possessing 'humor', his work leads us to an emotional moment about self-reflection including one's lives to us.


His previous work1) 'the method of recording time' is established subjectively and his recent work is about an experiment for expanding forms of his painting and describing the other side as a small narrative. Both his previous/recent works have some similarities partly. These methods and his primary subject are associated with an experiment of forms. 'Timeness' and 'sensitive experiences', 'a three dimensional form' and 'two-faces painting' and so on. The procedure is to find sources for forms that he have thought, and then develops contents relating to the found sources.

Well, the purpose of this recent work is very clear. Artist Lee ChangSu doesn't think that this work is perfect. He just says that this is on an experimental stage. He always regards the visual observations and direct experiences as the most important viewpoint. For this reason he don't force people to listen to him, he make people watch his works with attention. This is about the attitude of people(called 'observer'), he thinks they must also have an effort to watch his artworks, If they don't do that, cannot obtain anything. Actually, this will be a criterion that I research Lee ChangSu's woks and attitude as an artist and sense of values. This is like an affirmative stereotyped idea or prejudice for him.■

"

1) The time, remembered by one's sense(...) I'm expressing 'time' as various methods" In 'the 7 ways that we find time', artist Lee ChangSu had classified the situation into waves, the annual rings, a subjective gaze & speed, shadows, afterimages. This means his own descriptions for some select objects stimulates one's fragmentary memories as complex emotions and senses about the objects. So observer can approaches his idea for timeness. In his work, 'time' represents the shape of digging, soaking, sprinkling. And corresponding to each sensory effects held by his expressive act in order, time exposes itself properly.

< translated by choi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