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4일 토요일


'복음과 상황' 문화섹션 기고글


초국적 ‘블록버스터’展 _한국의 미술계 현안 속에서 바라보다

최윤정(미학_미술비평_문화기획집단 ‘오다’ 시각예술분과 책임연구원)
대가의 향취는 여하간 좋다.
많은 이들이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그 관심을 부여하는 동기가 되어주는 첫 경험은 서양 대가들의 회화작품을 마주하는 경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한정된 평면 속에서 어우러지는 미묘한 색채들의 연회, 화면의 구성은 감상자들로 하여금 산악의 능선을 향유하듯 숙연한 감정까지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가들의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삶은 세인의 로맨티시즘을 자극하기도 한다.
최근 외국의 유수 미술관을 방문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러한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많은 대가들의 작품이 일정한 기획으로 구성되어 국내 미술관 곳곳에 전시되는 사례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먹고 사는 데에만 급급했던 시기를 넘어 문화와 여가를 향유하는 것이 삶의 한 지표가 된 사회적 분위기를 일정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그것이 현대인들의 건조한 일상을 촉촉이 적실 수만 있다면 혹은 이로써 예술에 대해 보다 많은 이들이 연정을 품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비록 동시대는 아닐지언정, 과거를 담은 그 화려한 색채들 속에서 느껴볼 수 있을 숭고함과 애틋함이란 결코 전시장 안에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언해보면서...
근대적 감성, 현대 속에서 ‘블록버스터’로 살아남다
최근 한국 미술계의 주요 화두는 바로 ‘블록버스터 전시’이다. 블록버스터라 하면 자연히 막대한 자본과 스타를 내세운 미국 헐리우드 영화를 떠올리게 되는 법인데, 미술 전시에 '블록버스터'가 수식어로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빛의 화가 모네전’, 덕수궁 미술관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전’, 그리고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전’ 등은 2000년대 들면서부터 국내에서 진행되어 온 대형전시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들로서 이들이 부담해야 할 작품의 보험료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이다. 이러한 비용들을 모두 감수하고 들여와야 한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 전시는 분명 위험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미술사 속에서 명망 있는 예술가의 작품들을 들여온다는 점을 홍보에 충분히 활용하여 나름 만족스런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와 같은 전시는 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만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이며, 그렇기에 지속적으로 호응이 늘어나는 추세는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요소에서 우리는 보다 대중성을 향해가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갖는 유의미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갈수록 급증하는 이 같은 전시들에 대한 관심이 지금 현재 동시대적 문맥 속에서 펼쳐지는 국내 작품과 전시에 대한 관심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오히려 이로 인해 국내 미술계 발전에 있어 저해가 된다는 우려도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우리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국내 미술계에 끼친 혹은 끼칠 공과에 대해 살피지 아니할 수 없다.

‘장’의 문제_ 미술관이 지니는 공공성의 의미와 큐레이터의 역할
작품의 규모와 대가들의 작품에 적합한 실내 환경을 고려했을 때, 이 같은 전시는 시설이 잘 갖추어진 미술관을 요구한다. 이는 주로 국공립 미술관이나 이에 못잖은 몇몇 사립미술관 등이다. 이 장소들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면, 본래 미술관은 공공의 예술향유와 문화적 교양을 교육하는 산실로서 자리한다. 즉 그 기본 토대에는 늘 ‘공공성’이라는 테제가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임무에 있어서 미술관은 작가를 등용하는 산실로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고 이를 보존 혹은 전시를 함으로써 이에 대한 미술사적 의의를 구축해내야 한다. 우리가 큐레이터를 미술관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같은 미술관의 임무를 주체적으로 수행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보자. 실제 ‘블록버스터’전시는 적당히 포장되고 위엄이 있어 보이는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 이뤄지지만, 그 속에서 미술관 큐레이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보통 관련 기획사 측에서 이미 하나의 전시형태로 갖춰진 외국의 대형전시를 수입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술관이 담당해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장소 대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블록버스터’ 전시는 이를 수입한 자만 있을 뿐, 정확히 말해서 이를 발군의 큐레이터쉽으로 기획한 자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국내에서 모범적 사례가 될 만한 전시를 기획하고 이를 해외에 소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약한다는 것은 점점 더 요원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많은 지적들에서 살필 수 있듯이 ‘블록버스터’ 전시가 과연 질적으로 높은가에 대해 명확히 발언할 필요를 느낀다. 몇 년 전 서양미술 몇 백년의 역사를 훑는다는 한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큐비즘을 소개하는 구간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를 시각적으로 여실히 비춰줄 만한 모범이 전무했던, 그야말로 해프닝이 아닐 수 없었다. 큐비즘의 대가인 피카소가 와 있는데, 어찌하여 큐비즘을 상기시키는 작품은 달랑 한 가지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그가 무명시절 그린 몇 점의 습작 스케치가 전부였을 뿐이었다. 미술사적 맥락이 전시의 가장 중요한 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 텍스트와 작품은 따로 노는 사태를 빚은 것이다. 그 속에 과연 큐레이터쉽이란 것이 있었는가 말이다.
계속해서 미술관이 이러한 ‘블록버스터’ 대관업무에 치중하게 된다면, 국내 작가들이 전시할 공간은 그만큼 줄 수밖에 없고,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당연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과 상업화랑의 역할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에 종사하는 전문직종의 명칭이 모두 ‘큐레이터’로 뭉뚱그려 언급되는 것은 늘 이상하다. 전문성을 담아내는 그 명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이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미술관이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확고히 해내지 못한 탓도 크리라고 본다. 그 나름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여기에는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 유치에만 급급해 보이는 미술관에 대한 일종의 애석한 심정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최근 국내 국공립미술관들은 재정적으로 독립할 것을 재촉당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점차 법인화로 그 형태가 전환되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그 같은 방향으로 변모해가는 것은 물론 장점도 분명 있겠지만, ‘돈이 되는 전시’에 편승하지 않았던 미술관들조차도 ‘블록버스터’ 위주로 프로그램을 재편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미술관의 현실을 꼬집고 비판하는 장소로서 ‘대안공간’의 필요성이 더욱 배가되거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피어린 노력들로 인해 새로운 대안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본다. 뭐든 어려운 현실에서 이를 악물던 때를 무/책/임/하/게 곱씹어 보자면 말이다.■ cHOiyoONC